단순함의 미학
진한 술, 살진 고기, 맵고 단 것은 참 맛이 아니다. 참 맛은 단지 담백할 뿐이다.
신기하고 특이해 보이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깨달은 사람은 다만 평범해 보인다. <채근담>
시간이 오래면 오랜 것일수록, 더욱이 원시적이면 원시적일수록 선과 형태가 간략하면서도 미의 본질이 그토록 잘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고대와 현대, 원시와 첨단. 과연 인류의 문화에 시대적 우월을 논할 수 있겠는가?
Jane Harison이 고대예술과 제의(Ancient Art and Ritual)에서 누누이 강조한 것도 이 단순한 아름다움이다.
치장이 많고 변화가 다채로우면 예술적으로 더욱 성공할 것 같지만 ,그런 예술은 수천만 가지의 치장과 변화의 하나일 뿐이며 , 단순성을 제고하면 오히려 수많은 치장과 변화를 내포할 수 있다는 역설적 논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단순한 아름다움의 전형을 어디서 찾을수 있을까?
바로 고대 그리스이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edle Einfalt und stille Große>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1717-1768) 은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미술사가 이다.(음악미학 157쪽 참고)
1755년 자신의 논문 〈그리스의 회화와 조각에 대한 의견 Gedanken über die Nachahmung der griechischen Werke in der Malerei und Bildhauerkunst〉에서 “우리가 위대하게 되거나 적어도 독특한 그 무엇이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인을 흉내 내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다시 고대 그리스의 예술이상으로 돌아가자고 주창하였다.
그의 저작은 널리 읽혀져 당대 지식인의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미의 이상, 또는 예술의 이상이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성취되었다고 보는 경향은 빙켈만 이전에도 늘 존재했었다.
예술에서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은 오래된 생각이 아니다.
과거 사람들은 묵은 것, 오래된 것의 가치를 존중했다.
그 생각을 깬 것이 모던이다. 모던의 강령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새로움이다.
현대 예술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현대예술은 아름다움의 이상을 깬다. 현대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새로움이다.
그의 또 다른 명저 〈고대 예술사 Geschichte der Kunst des Altertums〉(1764)는 처음으로 고대 예술을 성장·성숙·쇠퇴의 유기체적 발전과정으로 정의한 개설서였다.
빙켈만의 이 단계별 시기구분은 이후 그리스 예술사에 대한 통상 용어로 자리 잡게 된다.
그의 시대구분에 따른 고대 그리스의 예술은 다음 표와 같이 정리된다.
양 식 |
대표적 조각가 |
특 징 |
1.고양식 |
페이디아스 이전 (아르케익) |
엄격함, 딱딱함 |
2.숭고양식 |
페이디아스와 동시대인 뮈론, 폴리클레이토스 |
숭고함, 딱딱함 |
3.미의 양식 |
프락시텔레스, 뤼스포스, 아펠레스 |
우미 |
4.모방양식 |
그 뒤 예술의 멸망까지 (로마) |
보잘 것 없음 |
빙켈만의 저작은 고전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으며 그 결과 예술에서 신고전주의운동이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
빙켈만의 그리스 미학에 대한 정의는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edle Einfalt und stille Große>이다.
그런데 빙켈만이 그리스 고대의 연구에 몰두했던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그의 성적취향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고대 그리스예술에서 추구했던 미의 이상은 건강한 남성이 갖는 신체의 아름다움이다.
이는 단순히 미적 욕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복국가였던 그리스에서 전쟁은 나라의 명운이 달린 중대사였다.
전투에서 승리를 담보할 수 있는 강인한 전사의 육성이 국가의 목표일 수밖에 없었다.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조탁한 신상(神像)과 인상(人像)은 이러한 시대적 열망을 수용한 강건한 남성미를 드러낸 나상(裸像)들이다.
이것이 빙켈만의 동성애적 취향을 자극해 고대 그리스의 연구에 몰두하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빙켈만은 남자의 신체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오직 여자의 신체의 아름다움만을 보는 사람은 균형 잡힌 미감을 가질 수 없다고 하였다.
빙켈만에 의해 촉발된 고대 그리스의 관심은 괴테를 비롯한 독일과 프랑스의 고전주의에 영향을 끼쳤고, 문학뿐 만아니라 독일 교육체계 전체에도 영향을 끼친다.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은 이제 시대적 표어가 되었고 교육의 이상이기도 하였다.
인간자체도 그렇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문화를 예술의 정점으로 본 헤겔철학도 빙켈만의 예술사상을 철학적으로 정립해 완성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진보사관을 가진 마르크스마저도 예술의 완성은 고대 그리스 예술이었다고 한다. 빙켈만의 영향은 이토록 대단했다.
아르케익 시대 (기원전 7세기~6세기)
아르케익 이란 '태고(太古)'란 뜻이다.
미케네 시대가 끝나고 아르케이즘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그리스에는 신전도 궁전도 존재하지 않았고 여하한 종류의 기념비적 예술도 없었다.
그러다가 상업의 번성과 부유해진 도시, 성공적인 식민 활동의 산물인 아르케이즘과 더불어 새로운 기념비적 건축과 조형예술의 시대가 열린다.
그 모습·표현·기교는 당시 문명의 선진국이었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다음은 이집트의 벽화에 보여지는 파라오의 모습이다.
멘카우라 왕과 왕비
이집트인들에게 예술은 독창성이나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종교적 숭고함을 표현하는 수단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만든이들은 예술가가 아니라 기술자로 취급되었다.
위의 그림에서 파라오는 매우 정형화된 패턴에 따라 만들어졌다. 전체 키를 23.5로 보면 무릎까지가 7이고 허리까지가 13이며 어깨까지는 19이다. 실제 파라오의 모습을 충실하게 표현하려는 의도는 없고 모든 파라오는 이 비율에 따라 만들어졌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리스 예술의 초기형태는 당시 이집트의 경직된 조각과 같이 딱딱한 기하학적 양식에서 출발했다. 이 시기의 청년상을 보면(사진1) 오히려 이집트 조각상보다 더 딱딱해 보이는데, 이것은 신체 부분들 사이의 기하학적 도형이나 대칭을 중시했기 때문에 인물의 자연성이 억압되어 경직돼 보이나 아르케익 스마일이라 불리는 입가의 미소만이 생기가 있어 보인다. 빙켈만은 이시기를 '고대 양식'이라 부르며, 그 특징을 '엄격함'과 '딱딱함'으로 규정했다.
(사진1)
숭고 양식
하지만 그리스 예술은 곧 다른 길을 걷는다.
아테네가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 을 물리친 사건은 올림픽 경기의 하이라이트인 마라톤 경기의 시발이 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 전쟁은 그만큼 획기적이었고 문명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이후로도 페르시아의 끈질긴 침공을 막아 낸 아테네와 스파르타 같은 도시국가들은 오리엔트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나 정치, 경제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게 된다.
후세 사람들은 이 시기를 그리스의 고전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는 단연 페이디아스(Pheidias, BC.490~37)였다.
그는 파르테논 신전의 조형물을 제작하는 데 참여했던 여러 조각가들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다.
문헌에 따르면, 그는 파르테논 신상 안치실에 놓여 있던 금과 상아로 장식된 거대한 아테나상,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의 거대한 제우스상, 그리고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졌던 거대한 아테나 청동상을 만들어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건 하나도 없다.
페이디아스의 시대를 빙켈만은 '숭고 양식'이라 불렀다. 이 시대 조각가들의 주요 관심은 '위대함'에 있었다고 한다.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페이디아스의 신상들은 모두 10미터가 넘는 거상(巨像)들이었다.
(사진2)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상 (상상도)
(세계미술대사전55쪽 /한국미술년감사)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폴리클레이토스(Polykleitos,BC.460?-23?)의 <창을 든 사람>(사진3)이다.
사진3)
이 사람의 신체에는 긴장과 이완이 교차하고 있다. 앞으로 내딛은 발이 전체의 몸무게를 지탱하고, 뒷발은 가볍게 굽어 있다.
그러니까 내딛는 한쪽 발에 몸 전체의 체중이 실리는 이런 비대칭은 살짝 돌린 고개에 의해 다시 균형을 회복한다.
아르케익 시대의 조각이 좌우의 기계적 대칭으로 한 정적인 정면자세(몸무게가 두 다리에 똑같이 실리는 자세)를 특징으로 한다면, 여기선 그것이 긴장과 이완의 교묘한 역학적 균형으로 대체되어 있다.
이렇게 비대칭이면서도 몸 전체는 균형을 이루는 자세를 ‘contrapposto’라 한다. 뼈와 근육의 해부학적 구조를 연구하여 인체를 더욱 신빙성 있게 묘사한 결과이다.
이 시대의 조각가들은 동시에 인체 비례를 완성하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특히 폴리클레이토스는 이상적인 인체 비례(Canon)를 완성함으로써 '비례의 입법자'라 불리게 된다.
그러나 비례의 기계적 정합성에 맞춘 그의 조각은 여전히 딱딱하게 보인다. 그래서 이 시기를 빙켈만은 '숭고함'과 '딱딱함'으로 특징지었다.
황금분할
그리스의 사람들은 인체와 신전건축에 이 비례를 널리 사용하였다.
그 후 이 비례 법은 비밀스럽게 전달되어 중세에 이르러서는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꽃을 피웠다.
이것의 분할 비는 대략 가로와 세로의 비가 0.618에 가깝게 되는 비율로 우리는 이것을 황금분할이라 부른다.
황금분할 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중세 때의 보르냐의 바티오라는 수도승이다.
그는 이 황금분할 비를 신이 내린 조화와 균형의 비례라고 생각하여 신성비례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선분을 가장 아름답게 나누는 비, 즉 황금비는 물체에 신비한 힘을 부여함으로써 훌륭한 건축과 회화와 조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비율이다.
케호프 왕의 피라미드, 솔로몬 신전, 파르테논 신전 등은 부분적으로 이 황금비에 따라 지어졌다.
그 비율을 지키지 않고 지어진 건축물은 결국 붕괴되고 만다고 한다.
황금비의 정확한 수식은 즉,1.618033988이다.
황금 비례 그리기
1.정사각형의 “가나다라”를 그린다.
2.“나다”의 중간점 “마”와 꼭지점 “라”를 이어준다.
3.“마”를 중심으로 “마라”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호를 그리고, 이 원호와 만나는 지점을 “사라”로 한다.
이렇게 완성된 비가 1:1.6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실생활에서 쓰고 있는 명함, 우편엽서, 교과서, 현금카드, 소형 계산기 등은 조형적으로 균형미와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직사각형이다.
이 직사각형의 가로, 세로 두 면을 자로 재어 그 비율을 구해보면 대략 황금비인 1:1.618에 가까워지는데, 대부분 우리 주위의 사물들도 이 비율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정신물리학의 창시자인 구스타프 배하너는 황금분할 비에 매료된 사람으로 그는 각각 변의 길이가 다른 장방형의 물건을 늘어놓고 사람들이 어떤 것을 고르는지를 실험하였는데 그때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0.6에 가까운 직사각형의 물건을 잡았다고 한다.
해바라기의 화반도 황금분할을 이루고 있다. 화반을 형성하고 있는 통꽃들은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의 2중돌기를 보여주고 있다. 시계방향의 나선형에는 통꽃이 21개 있고 반시계 방향에는 통꽃이 34개 있는데 21과 34는 황금분할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모양은 국화꽃, 데이지꽃, 소나무와 전나무의 열매, 선인장 가시, 파인애플 등 많은 식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철쭉, 라일락, 사과나무 등은 나선형은 아니지만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황금분할을 나타내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종류의 동물이나 곤충에서도 황금분할비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황금나선형의 전형적인 표본으로 간주되어 많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앵무조개를 비롯한 게나 새우 같은 갑각류, 송어, 상어, 홍어, 가오리의 형태에서도 이 같은 비율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작곡가들도 이 황금비율을 곡에 반영하고 있다. 대표적 작곡가가 바르톡이다. 바르톡의 음악에 있어서 황금 분할은 고전주의의 2+2, 4+4, 8+8,...이라는 대칭적인 악절구조와 똑같은 중요성을 가진 형식원리이다.
Fibonacci의 수열
황금 분할에서 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Fibonacci의 수열로 표시 해 보면
1 - 1 - 2 - 3 - 5 - 8 - 13 - 21 - 34 - 55 - 89 - ....
이 수열도 언제나 제 1항과 제 2항의 합이 제 3항이 됨으로
1+1=2, 1+2=3, 2+3=5, 3+5=8, 5+8=13, 8+13=21, 13+21=34...가 된다.
이러한 피보나치수열은 자연계의 성장 법칙 이기도한데 나뭇가지가 1년 만에 새로운 가지를 뻗게 되면 2년 후에는 새로운 가지가 2배(1+1=2)로 되고 해마다 나뭇가지는 다음과 같은 비율로 불어나게 된다.
2 - 3 - 5 - 8 - 13 - 21 - 34 - 55 - 89 ....
바르톡의 작품에서 피보나치 수열이 어떻게 적용됐는지 그의 작품 [Music for Strings, Percussion and Celesta]의 1악장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의 곡 Music for Strings, Percussion and Celesta의 1악장의 경우에 4개의 성부가 시작 되는 1, 5, 8, 13 마디는 서로 피보나치(Fibonacci) 수열에 의한 황금 지수가 되고 그 합인 21과 경과구 13과의 합인 황금 지수 34에서 약음기를 제거 하고 황금 지수인 55마디에 클라이막스를 두었는데 pp로시작한 악곡을 이곳에서 fff로 고조되고 점차 가라앉는 형태로 되어 34마디 뒤에 ppp로 악곡은 종지 된다.
미의 양식(praxiteles)
폴리클레이토스의 조각이 황금비를 엄격하게 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차갑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정확하게 재단된 수치적 비례 때문이다. 사물이 아름다우려면 엄격한 비례 속에 약간의 빗나감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프락시텔레스(praxiteles, BC.390?-30?)는 엄격한 비례에 이런 우연적 요소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미(優美)의 아버지' 가 된다.
숭고 양식에선 정신의 숭고함이 물질을 억누르고 있지만, 여기서는 정신과 물질이 행복한 조화를 이루어, 비로소 인물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양식을 빙켈만은 '아름다운 양식'이라고 부르며 '우미'로 특징지었다.
정확한 비례를 마련해 준 앞의 양식들은 사실 준비 단계에 불과하고, 여기서 비로소 그리스 예술은 정점에 도달한다. 그의 대표작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는 후세에'완전무결한 완성'의 대명사로 불렸다.
이 조각은 처음으로 여신을 전라로 나타내어 제작당시에도 물의를 일으켰던 작품이다. 후에 로마인 플리니우스는 프락시텔레스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프락시텔레스는 2개의 아프로디테 상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옷을 입은 채로, 다른 하나는 완전한 누드로 제작하여 동시에 같은 가격에 내놓았다. 우선권을 가진 코스(Kos)인들은 '격식 있고 정숙하기 때문에' 옷을 입은 아프로디테를 선택하였고, 크니도스(Knidos)인들은 옷을 벗은 아프로디테를 차지하였다.
(사진5 아프로디테1)
(사진6 아프로디테2)
그러나 의외로 옷을 벗은 아프로디테가 유명하게 되자 코스의 니코메데스 왕은 크니도스인들의 엄청난 부채를 삭감해 줄 것을 약속하면서 이 조각을 다시 사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크니도스인들은 단호히 거절했고, 이 일로 인해 이 조각은 크니도스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를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크니도스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조각을 안치하였던 신전은 이 조각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열린 구조의 원형으로 세워졌다.
기원 후 2세기에 씌어진 또 다른 여행기에 의하면, 신전 안에 신상을 모신 것이 아니라, 프락시텔레스의 뛰어난 조각상을 모시기 위하여 신전이 지어지고 정원이 꾸며 졌다는 사실이다.
이제 여신의 종교적 존재는 사라지고 유명한 작가의 걸작이 감상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리나 이 감상은 매우 관음적 이었다한다.
로마의 수사학자 루치아노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아프로디테의 조각상에는 남성들의 '정액'으로 얼룩진 흔적들이 있었으며, 그것 또한 볼거리였다고 한다.
프락시텔레스의 아프로디테는 여성의 은밀한 부분을 가리는 포즈로 만들어져 아프로디테가 남자 관람자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음을 표현한다. 이 조각상은 여성의 몸을 '남성적 응시'의 대상으로 삼은 오랜 서양미술사 관행의 첫 단추였다.
부끄러운 듯 가리면서 오히려 남성의 시선을 끄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자세는 끊임없이 변조되면서 서양미술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7.8.9 아프로디테의 리얼한 모습들)
헤르메스 (Hermes)
사진10)
프락시텔레스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헤르메스 상은 1877년 올림피아의 헤라신전 내부에서 발견되어 현재 올림피아 고고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헤르메스 조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후기 그리스 조각은 더 이상 그리스 초기의 딱딱한 자세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등신대가 훨씬 넘는 높이 215cm의 순백 대리석으로 조각된 누드의 헤르메스는 옷을 벗어 걸친 나무 등걸에 아기를 안은 왼팔을 기대고 쉬고 있는데, 쳐들고 있는 오른팔은 원래 포도송이를 들고 아기 디오니소스를 달래는 모습으로 여겨지며 절단된 상태에서 발굴되었다.
짧은 고수머리에 갸름한 얼굴,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내려다보는 눈길, 수려한 용모에다 8등신의 아름다운 몸매는 S자형의 커브를 완만하게 그리고 있어 더욱 우아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왼편다리는 힘을 빼어 뒤꿈치를 약간 들고 있는 편안한 자세로 되어 있다. 온몸이 건강하고 튼튼한 근육으로 덮여 있으면서도 전신에 흐르는 관능미와 섬세한 부드러움은 우아한 육체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흔히 말하듯 그리스 조각의 기술적 완벽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raxiteles의 Hermes
벨베데레의 아폴로
벨레데레의 아폴로는 아테네의 조각가 레오카레스(Leochares)가 B.C 330-320년경에 제작한 청동제 아폴로 입상을 원작으로 하여 로마시대에 모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223.5cm의 대리석 입상으로 1484-1492년 안티오에서 발굴되어 16세기 초에 교황 율리우스 II세에 의해 바티칸의 벨베데레(Belvedere: 전망대 또는 노대라고 부르는 방을 말한다)에 옮겨진 이래 벨베데레의 아폴론으로 부르게 되었고 수많은 찬양자의 문헌을 낳게 한 걸작이다.
빙켈만과 괴테도 이 작품을 고전미의 완벽한 표본으로 생각했다.
걸음을 멈추는 듯, 들어 올린 왼팔의 방향으로 멀리 시선을 던지며 서있는 아폴로는 부드럽고 곡선적인 몸매와 매끄러운 얼굴의 모습에서 남성적인 느낌보다는 오히려 여성적인 느낌이 강조되어 있다.
잘려진 손목부분에는 이음쇠를 끼었던 흔적이 보인다. 오른편 어깨에 걸친 띠는 경쾌하고 기민한 느낌을 준다. 오른팔을 늘어뜨린 팔꿈치부근에서 끊기었으나, 오른쪽에 허벅지 높이로 세워진 뱀이 감긴 나무 줄기위에 월계수 잎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월계수가지를 들었던 것으로 추측되어 진다.
<벨베데레의 아폴론>을 소련의 건축가 졸토프스키가 측정한 수치를 보면 0.618:0.382의 비례를 갖고 있어 이 조각상 역시 황급 비율에 의해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림에서 배꼽을 중심으로 몸을 둘로 나누면, 상체와 하체의 길이가 정확히 이 비례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술의 종말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에서 발췌 보완 인용한 것임)
빙켈만은 고대 예술의 역사를 유기체의 삶으로 간주했다. 예술은 탄생하고 성장하여 이제 완숙기에 도달했다. 그 다음엔?
물론 죽어야 한다. 그는 이 사멸의 단계를 로마 예술에서 보았다.
여기에 빙켈만은 '모방자의 양식'이란 경멸스러운 이름을 붙이고, '보잘것없음'으로 특징지었다.
사실 로마 시대의 조각들을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주는 게 있다.
그건 대개 그리스 조각에서 동작이나 자세 또는 모티브를 따 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로마인들은 수많은 그리스조각의 모작을 만들어 냈는데,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조각들은 대부분 진품이 아니라 로마인들의 모작이다.
빙켈만은 예술이 그리스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후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완전한 모범을 모방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그리스를 모방하라고 열심히 권하고 다녔는데, 그의 이런 생각은 오랫동안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가령 헤겔이 예술의 시대가 고대 그리스에서 끝나고 그 뒤 예술은 사별한다고 말했을 땐, 역시 빙켈만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하다. 어찌 인간의 손으로 이보다 더 아름다운형태를 만들어 낸단 말인가.
'음악적 사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타고라스의 음악론 (0) | 2014.04.02 |
---|---|
오르페우스 (0) | 2014.03.25 |
음악의 어원에 대하여 (0) | 2014.03.17 |
음악미학2 (0) | 2014.01.07 |
음악미학1 (0) | 2014.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