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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시는 날

어제는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별안간에 햇빛이 방안 깊숙이 환하게 찾아오고, 그렇게 대기는 할 수 있는 온갖 변덕을 다 부리며 이 강산에서 사라진 호랑이 장가가는 날을 상기시켰다. 오후 들어 비는 진눈깨비로 굵어지더니 기어코 눈으로 변해 나풀나풀 팔랑거리며 대지에 젖어 들었다. 지리산 악양 사는 박남준 시인의 전화가 왔다. 시낭송회가 있어 천안 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 하룻밤 묵고 가겠다는 것이다. 덕분에 천안으로 이사와 100일 만에 밤 외출을 했다. 천안 불당동에 있는 인문서점 ‘가문비나무 아래’를 찾아드니 시를 사랑하고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박 시인과 인디언 수니라는 포크 가수의 콘서트를 경청하고 있었다. 천안은 나에게 아무런 연고도 없다. 따라서 천안 시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고..

들장미

며칠 전 겨울을 재촉하는 비바람에 뜰 안의 나무들이 이파리를 온통 떨구고는 벌거벗은 모습으로 입립하여 길고 긴 묵언수행에 들어갔다. 욕망처럼 차오르던 무성한 것들이 죄 떨어지고 버려지는 때인지라 그 성긴 틈새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띈다. 주말에 손자가 내려와 뛰놀던 마당의 뒷정리를 하다가 우연 찮게 장미와 눈이 마주쳤다. 좀 뜨악한 게, 이미 서리도 몇 번인가 내렸고 영하로 곤두박치던 날도 엊그제인데 장미는 여전히 붉었고 이파리조차도 녹색을 유지한 채였다. 색조를 잃어버린 마당 한구석, 양지바른 곳에 보란 듯이 핀 장미가 하, 신기해 다가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이유가 꽃을 피우기 위해 공들인 시간 때문이라 말했지만, 난 우리 집 장미에 대해 손톱만큼도 공들..

늑대의 시간

오늘도 늑대의 시간이 오기 전에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아실 분은 다 아시겠지만, 늑대의 시간이란 석양의 잔영이 숯불처럼 사위어지는 시간, 어둠이 먹물 번지듯 스며드는 어스름 저물녘을 말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미각만큼이나 감성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 시간을 늑대의 시간이라 부른다네요. 가을의 끝자락인 요즘은 노을에 요요하게 물든 숲이 정말 한순간에 색채를 잃어버리고는 이내 컴컴한 어둠의 장막으로 변해버린답니다. 어쩌다 나도 모르게 너무 멀리 와버린 산책길에서 돌연 맞닥뜨린 어둠은 사실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답니다. 저 악마 구리 같은 어둠의 심연에서 불쑥 멧돼지라도 뛰쳐나올까 봐 쭈뼛 한기조차 든답니다. 나잇값을 못 한다고 혀를 찰 수도 있겠지만 ..

정신적 미니멀리즘

낮이 무척이나 짧아졌다. 오후 서너 시면 벌써 짙은 산 그림자가 마을을 덮는다. 애잔한 날들이여! 힘이 빠진 가을볕은 암 병동의 말기 환자처럼 기력을 다해가는구나. 이때쯤이면 서재의 창가에 팔짱을 끼고 서서 연분홍 노을이 아슴히 잠겨가는 서쪽 하늘의 묘묘한 정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크로마뇽인이나 네안데르탈인도 동굴에서 넋을 잃고 바라봤을 시원적 고독이 강림하는 시간이다. 하루의 일과가 돼버린 들녘의 알싸한 가을바람을 맞으러 행장을 갖추고 막 나서려는데 후배 교수한테 전화가 왔다. 숨이 찬 목소리로 “형님 지금 뭐하세요?” “응, 막 산책 나서는 참인데, 웬일로 숨을 헐떡이누?” “아, 지금 논문이 막혀 건지산 꼭대기 올라왔는데, 형님 생각이 나서요. 어찌 지내시나요?” “나야 뭐 매..

허허로운 들녘

쓰고 있는 오페라가 위촉단체의 사정으로 공연계획이 무려 한 해가 늦춰졌다. 당겨진 활시위가 맥없이 풀어져 버린 듯 동동거리던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이 여유를 곡의 밀도를 높이고 탈고를 향해 진력해야 하건만 웬걸, 기다렸다는 듯이 나태란 놈이 발목을 잡는다. 갑자기 읽고 싶은 책도 많아지고(실제로 15권을 주문했다) 두물머리를 조망하는 수종사 원경이 그렇게 좋더라는 페친의 글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런다고 없는 길을 헤쳐가며 넘어야 할 첩첩산중을 생각하면 활개 치고 놀 수도 없다. 그 절실하던 날들이 하룻밤 된서리에 폭삭 주저앉은 한삼 넝쿨처럼 흐물거린다. 다시 한번 생각하거니와 작품을 남기려면 절박해야 한다. 결핍은 창조의 바퀴를 굴리는 동력이다. 남쪽 면이 온통 유리창으로 개방된 내 2층 작업실은 지대..

적멸을 유영하며...

이만하면 폭설이라 할만하다. 밤새 세상의 풍경이 완연하게 바뀌었다. 백설 애애한 순백의 세상으로. 어제 겨울 햇빛치고는 너무도 좋아, 추운 날 나들이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아내와 이웃의 점심초대에 운동 삼아 걸어서 갔다 온 터였다. 눈의 복병이 엄습할 어떤 기미조차 없었다. 세상에나, 이렇게도 소리 없이 세상을 바꿔놓다니! 두터운 어둠이 물러 갈 무렵, 허리가 아픈 나를 만류하며 아내가 겨우 사람이 다닐만한 길을 터놓았다. 사람도 차량의 왕래도 없는 도로는 절박한 사람이 새벽같이 움직였는지 타이어 자국이 두 줄로 나란히 골을 파 놓았다. 이 조차 삭도(削刀)같이 예리하게 얼굴을 때리는 눈에 점점 파묻혀가고 있었다. 눈은 세상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막아 놓을 태세이다. 눈이 내려 쌓인 날은 이상하게 세상이 ..

우리집 사계 2021.01.07

한 해를 보내며......

올해도 이제 막바지다. 오후 5시면 벌써 모악산 자락에서 어둠이 몰려와 동네를 삼키기 시작한다.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섬뜩한 냉기는 집집마다 서릿발 같은 위리안치를 쳐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시킨다. 배고픈 길냥이만 도둑처럼 돌담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언제나 이 시간이면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으로 차례차례 문단속한다. 하루의 빗장을 거는 것이다. 12월 메모난을 살펴보니 해야 할 일이 두 건만 남았다. 하나는 내년을 온통 이 일에 매달려야 할 작곡에 관한 계약 건이고 하나는 송구영신의 연례적 일정이다. 이렇게 2020년도 서서히 빗장을 걸 시간이 되었다. 올 한 해의 나를 돌이켜 보건데 무엇보다 가장 큰 사건은 소나무를 전지하다가 가지가 부러져 5미터 아래로 추락한 사건이다. 다행히 정신 줄을 ..

나의 이야기 2020.12.29

책을 버리다

한 때, 만권당(萬卷堂)을 꿈꾸면서 한 권 한 권 사 모은 책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고 살았습니다. 바라 볼 때마다 부자가 곡간에 가득 쟁여진 쌀가마를 바라보는 심사가 이러려니 하면서 말입니다. 3십년, 4십년 넘은 묵은 책들을 열흘 전쯤 1톤짜리 용달차가 두 번에 걸쳐 실어갔습니다. 누렇게 책갈피는 갈변되었고 세로로 두 단 씩 작은 활자로 빼곡히 채운 글씨를 더는 읽을 수 없는 노안이 되었음을 진작 알았지만 버리지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책에 따라서는 사연도 더깨더깨 쌓여있는 손때 묻은 책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은 너무 욕심나는 책이었지만 우리 세 식구가 한 달을 좋이 먹고도 남을 쌀값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가격인지로 들었다 놓았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그만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당시 비싼 하..

나의 이야기 2020.12.21

정신병동에 갇히다

교회 갈려는 준비로 한참 분주한 시간에 94세 드신 아버님께서 아침을 드시면서 어눌한 말투로 하시는 말씀이 내 가슴에서 “쿵”하는 소리로 반향 한다. 전기면도기로 수염을 깎다가 면도기를 떨어트렸단다. 올 것이 왔구나! 3년 전이던가, 가벼운 뇌경색으로 병원에 한 일주일 입원 하셨는데 검사결과 뇌신경이 교차하는 정수리 부분 대동맥에 꽈리가 생겼단다. 노령으로 뇌수술을 않기로 결정하고 집에서 약으로 잘 관리하라는 주의와 함께 퇴원 하셨다. 그것이 또 도진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평일이면 바로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지만 하필이면 일요일, 병원에 가봤자 응급실에서 검사만 받으셔야 한다. 아내가 아버지께 여쭤보니 속이 거북하여 혈전을 용해하는 약을 오랫동안 안 드셨단다. 그 중요한 약을 안 드시다니, 기가 막..

나의 이야기 2020.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