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별안간에 햇빛이 방안 깊숙이 환하게 찾아오고, 그렇게 대기는 할 수 있는 온갖 변덕을 다 부리며 이 강산에서 사라진 호랑이 장가가는 날을 상기시켰다. 오후 들어 비는 진눈깨비로 굵어지더니 기어코 눈으로 변해 나풀나풀 팔랑거리며 대지에 젖어 들었다.
지리산 악양 사는 박남준 시인의 전화가 왔다. 시낭송회가 있어 천안 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 하룻밤 묵고 가겠다는 것이다.
덕분에 천안으로 이사와 100일 만에 밤 외출을 했다. 천안 불당동에 있는 인문서점 ‘가문비나무 아래’를 찾아드니 시를 사랑하고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박 시인과 인디언 수니라는 포크 가수의 콘서트를 경청하고 있었다.
천안은 나에게 아무런 연고도 없다. 따라서 천안 시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무슨 일이 있다 한들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철저히 정신의 무국적자로 한갓 무지랭이 장삼이사의 자유를 누리고자 외부와 절연된 삶을 살아왔다.
그랬던 내가 천민자본주의를 넘어 정글 자본주의를 사는 이 땅에 전설의 아마존 부족처럼 시와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존을 목격하고는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 박 시인의 전화를 받으면서 엄습했던 불길한 예감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서점에서 차로 30분 거리인 우리 집까지 택시로 오라 할 수 없어 나간 것이 애시당초 잘못이었다. 콘서트가 끝나고 박 시인은 그의 시집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독자들의 사인행사를 마치고는 이어진 뒤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안중에도 없는 이방인은 홀로 서점의 이 책 저 책을 둘러보다 그것도 지치면 뻘쭘하게 의자에 앉아 이 모임이 얼른 파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박 시인의 행동 양식을 잘 아는 나는 이 뒤풀이가 결국은 자정을 넘길 거라는 생각에 그 자리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다음에는 말할 필요조차 없이 박 시인의 입을 통해 내 실체가 다 까발려진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어쩌겠나, 이것도 운명이라 생각하고 다 받아들여야지….
아, 그런데 말이지 그 자리에 참석한 면면이 다 예술을 사랑하고, 그중에 어떤 분은 음악에 대해 아주 해박하고 전문적인 지식으로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분들은 진정으로 시인을 사랑하고 시인의 일거수일투족에 깊은 외경과 관심을 보였다. 이렇게 하여 나는 이분들과 천안의 연결고리에 얽히고 만 것이다.
내 예상대로 새벽 1시 반을 넘기고서야 먹다 남은 통닭의 잔해와 술병들로 어수선한 뒤풀이는 겨우, 겨우, 겨우 종료되었고 박 시인은 서울 친구와 2차를 가겠다며 나와 포옹을 한 후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헤어졌다.
영하로 떨어진 눈 내리는 도로를 조심스레 돌아오니 이미 새벽 두 시 반이 너머 있었다. 아내가 박 시인이 올 줄 알고 졸음에 압살당한 눈으로 거실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에라이 박남준, 나쁜 노옴~!
그리고 오늘, 겨우 몇 시간을 잤지만 내 일상의 시계를 흐트러뜨릴 수 없어 제 시각에 아침을 먹는데 마당에 나무들이 하얀 눈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이구나!
아내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하나는 내가 사는 북면과 인접한 광덕면 종교시설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200명이 넘게 나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두환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밥을 건성으로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관통한 전두환 시대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유신 총통제가 최측근의 총탄으로 종식되는가 싶더니 그렇게 열망하던 민주화 시대는 양 김의 분열로 그 전망이 암울하던 때였다. 염려하던 군부가 전두환을 두령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더니 기어코 광주학살을 자행하던 5월 18일 다음 날, 나는 결혼식을 마치고 하필이면 광주의 꼭 인사드려야 할 분을 찾아뵌 후 제주도로 간다는 것이 사지를 찾아 들어간 형국이 되었다.
그 와중에 목포까지 흘러 들어간 우리 부부는 똑같은 형편에 빠진 신혼부부와 함께 여행비용을 탈탈 털어 젊은 택시기사가 거절하기 힘든 40만원(지금의 화폐가치로 400만 원은 좋이 될 것이다)을 제시하고 가까스로 택시 한 대를 대절 할 수 있었다. 그 후 상황은 영화<택시 운전사>와 다를 바 없다. 무장한 민간인과 계엄군 사이의 숱한 바리케이드를 때로는 우회하고 때로는 쫓기면서 천신만고 끝에 빠져나왔고 그것이 평생 마음의 짐이자 트라우마로 작용하여왔다. 이때 경험한 사실 중 하나는 6.25를 경험한 어른세대의 본능적인 위기 대처 방식이었다. 이들은 국가체재의 힘과 힘이 부닥치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민초들이 어떻게 대응하여 살아남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어른들은 단지 현장을 목격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부부를 어디 먼 곳으로 피해 있으라고 강권하였다.
그 때문에 어선을 모는 후배 아버님의 도움으로 고군산열도 끝 섬인 말도의 등대지기 관사로 숨어들었다. 말도 등대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그야말로 벽오지였다. (등명기는 자가발전기)
썰물이 지면 아내와 호미를 들고 갯가에 나가 조개를 캐 아궁이의 잔불로 구워 먹거나 동네 낚싯배를 타고 우럭이나 노래미, 붕장어를 잡아 반찬으로 삼았다.
저 멀리 어청도 쪽으로 해가 떨어지면 하릴없는 아내와 나는 몰려오는 어둠에 완전히 갇힐 때까지 오래도록 바다를 바라보며 지냈다.
(이때 남아있는 유일한 빛바랜 사진이다)

한 달을 넘게 그렇게 지내다 광풍이 잦아 들쯤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중에 보니 목격담을 말했다는 사실만으로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잡혀 들어가 고초를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무수히 죄 없는 희생을 딛고 들어선 정통성 없는 정부는 합법을 가장한 체육관 선거를 자행하였다. 내가 이 체재에 반발하는 유일한 수단은 어떤 선거든 기권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러자면 투표 마감 시간 즈음에 어디서 어떤 정보를 받았는지 용케도 통장이 세 들어 사는 집 대문을 사정없이 두들기며 투표를 강요하기도 했었다. 그런가 하면 고등학교 교사 시절에는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맹랑한 구호 아래 직장마다 무슨 무슨 위원회가 조직되어 권력의 감시가 말단까지 장악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티브이는 땡전 뉴스를 시전했고 신문은 크로스 퍼즐 퀴즈 풀 듯 행간을 읽어 사건을 짐작해야 했다. 물론 예술문화는 친정부의 나팔수로 전락했고.
나는 칠십을 바라 보는 나이로 나와 같은 세대가 수구화한 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왜 똑같은 시대를 살아왔으면서도 그토록 관점이 갈리는지.
한가지 꼭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5공 청문회 장면이다. 듣도보도 못한 촌티 다래다래한 젊은 초선의원이 어드메 부산 쪽 진한 억양으로 사정없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질타하던 모습이다. 12인치 흑백 티브이를 뛰쳐나와 펄펄 날뛰는 짐승처럼 전율 스러웠으며 소름이 돋던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그는 노무현이었다.
이제 내년 3월이면 대통령 선거다. 이만하면 외적 민주화는 달성했다. 그러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검언경 카르텔은 기득권 사수에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밖에서는 한국의 눈부신 성장을 부러워하지만, 내부에서는 숱한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권위주의 시대로의 퇴행은 어떡하든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만한 자유를 누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 흘리고 고통을 당했는가를 잊어선 안 된다. 혹시나 해서 요즘 잠자리가 뒤숭숭할 때가 많다.
다음 정권은 제발 분단의 모순을 극복하고 남북의 평화공존체재를 확고히 해 전쟁의 공포 없는 시대를 젊은이들에게 물려줘야 한다. 또한, 갈수록 양극화의 간격을 벌리는 정글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해야 한다. 한마디로 중단없는 개혁, 개혁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위정자들이여, 바라노니 위탁받은 계급장과 명예를 모두 떼어 버리고 이 일을 위해 부디 진력하기 바란다.
전두환의 사망이 주는 역사적 무게가 가슴으로 전해져 무언가 끄적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치밀어 올라…….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