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늑대의 시간이 오기 전에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아실 분은 다 아시겠지만, 늑대의 시간이란 석양의 잔영이 숯불처럼 사위어지는 시간, 어둠이 먹물 번지듯 스며드는 어스름 저물녘을 말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미각만큼이나 감성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 시간을 늑대의 시간이라 부른다네요.
가을의 끝자락인 요즘은 노을에 요요하게 물든 숲이 정말 한순간에 색채를 잃어버리고는 이내 컴컴한 어둠의 장막으로 변해버린답니다. 어쩌다 나도 모르게 너무 멀리 와버린 산책길에서 돌연 맞닥뜨린 어둠은 사실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답니다. 저 악마 구리 같은 어둠의 심연에서 불쑥 멧돼지라도 뛰쳐나올까 봐 쭈뼛 한기조차 든답니다. 나잇값을 못 한다고 혀를 찰 수도 있겠지만 사실인 걸 어떡합니까? 그런 면에서 저는 아직도 철모르는 소년의 심장을 가졌나 봅니다. (하하!)
쓰고 있는 곡의 일정이 늦춰진 이후로는 새로운 동네의 낯선 이름들을 궁금타 못해 어제는 비룡앞들로 오늘은 느려리길로 쏘다니다 보니 ‘늑대의 시간’과 마주치는 날들이 종종 있답니다. 아내의 염려하는 잔소리도 있고 해서 이제는 좀 더 일찍, 오후 4시가 넘었다 싶으면 집을 나서는 게 하루의 일과처럼 됐습니다.
추수가 끝난 허허로운 들녘에 볏짚을 태우는 연기가 하얗게 깔리면 잊어버린 고향 집 부뚜막 냄새가 떠오릅니다. 참으로 냄새의 기억은 이리도 선명합니다.
오늘은 석양빛이 유난히도 곱습니다. 소멸하기 직전의 태양은 하늘 언저리를 조카 딸년의 뺨처럼 수줍게 물들이더니 결국은 대지의 경계로 침몰하고 맙니다. 건너편 마을의 유리창 하나가 이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여 눈이 부시네요. 그러고 보니 유년의 공간에서 저 멀리 빛나는 빛의 실체를 찾아 먼 길을 걸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랬던 소년은 이제 허리 굽고 잔귀 먹은 추레한 늙은이로 긴 그림자를 끌며 이 들녘을 산책이랍시고 허적허적 유령처럼 배회합니다.
유리창 얘기가 나왔으니, 어느 날 멀쩡하던 유리창이 드르렁거리며 울 때가 있습니다. 유령의 장난이 아니라 공명현상 때문입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진동 주파수와 유리창이 가지는 고유진동수가 우연히 일치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건넛마을의 하고많은 유리창 중에서 오로지 한 집의 유리창만 노을빛에 공명하여 붉게 타오르건만 나는 이제 그곳을 향하지 않습니다. 산타할아버지는 굴뚝을 통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황혼은 타고르의 노래처럼 지상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당신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아득하고 먼 곳에서 종소리가 들려 오듯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입니다.
소행성 B 612호에 사는 어린 왕자도 하루 중 가장 쓸쓸한 이 시간을 좋아했습니다. 서산으로 꼴깍 넘어가는 해넘이를 다시 보기 위해 의자를 몇 발짝 끌어당기곤 했다니까요. 어린 왕자의 슬픔의 근원을 알 수 없지만 어떤 날 슬픔이 지극하면 무려 마흔네 번씩이나 의자를 옮겨 앉았다고 합니다. 마흔네 번의 해넘이를 바라봤다는 말이지요. 생각건대, 어린 왕자의 슬픔은 삶에서 부대끼는 슬픔이 아니라 비장한 첼로의 선율처럼 쓸쓸한 일몰의 정경이 가르쳐준 본원적 슬픔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멀리 목천 건너 위례성길, 퇴근을 서두르는 자동차들의 붉은 꼬리등이 갑자기 선명해지네요. 이제 곧 늑대의 시간이 닥친다는 신호입니다. 부지런히 걸어 집에 가야겠습니다.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사라진 창가에서 낙엽 뒹구는 소리가 휑한 가슴에 크게 반향한다면, 그리하여 고즈넉하고 씁쓸한 슬픔이 몰려온다면, 분명 고질적인 계절병이 도진 것이기에 처방전으로 보들레르의 <가을의 노래(Chant d'Automne)> 시 한 편을 권하고자 합니다.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의 음악과 함께 음미하신다면 금상첨화겠죠. 슬픔은 슬픔으로만 치유가 가능한 것이기에.
잘 가라, 이제 곧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
너무 짧은 우리 여름의 찬란한 빛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