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이 무척이나 짧아졌다. 오후 서너 시면 벌써 짙은 산 그림자가 마을을 덮는다.
애잔한 날들이여! 힘이 빠진 가을볕은 암 병동의 말기 환자처럼 기력을 다해가는구나.
이때쯤이면 서재의 창가에 팔짱을 끼고 서서 연분홍 노을이 아슴히 잠겨가는 서쪽 하늘의 묘묘한 정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크로마뇽인이나 네안데르탈인도 동굴에서 넋을 잃고 바라봤을 시원적 고독이 강림하는 시간이다.
하루의 일과가 돼버린 들녘의 알싸한 가을바람을 맞으러 행장을 갖추고 막 나서려는데 후배 교수한테 전화가 왔다.
숨이 찬 목소리로 “형님 지금 뭐하세요?”
“응, 막 산책 나서는 참인데, 웬일로 숨을 헐떡이누?”
“아, 지금 논문이 막혀 건지산 꼭대기 올라왔는데, 형님 생각이 나서요. 어찌 지내시나요?” “나야 뭐 매일 똑 같지”
“그럼 심심하시겠네!”
“그럴려구 온 건데, 뭘”
“어휴, 사람이 사람하고 같이 사셔야지 이제 좀 있으면 엄청 후회할 것 같아요”
“자네가 그런 소릴 다하네, 나 지금이 가장 좋다네”
문득 페북의 죽림 고수께서 내 녹슨 뇌에 각인시켜준 금쪽같은 명언이 떠올랐다.
“나 평소 소원하던 정신적 미니멀리즘을 만끽하고 있다네”
“하~!!”
말이 막히는지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내가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뭔일 이래유? 전주를 떠나 그 먼 디로 왜 갔대유?”
그때마다 써먹을 작정이다.
정신적 미니멀리즘!
음미할수록 내 형편을 단적으로 집약시켜주는 참 고마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목천 흐르는 물빛이 맑고 또 맑아 속이 다 들여다 뵌다. 가을은 모든 게 다 투명해지는 계절인가보다.
산책길에 마주친 오리.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놈이나 저기 돌 위에 웅크린 채 동료를 망연히 바라보는 오리의 그림자가 마냥 춥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