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정신병동에 갇히다

작곡가 지성호 2020. 12. 14. 07:34

교회 갈려는 준비로 한참 분주한 시간에 94세 드신 아버님께서 아침을 드시면서 어눌한 말투로 하시는 말씀이 내 가슴에서 “쿵”하는 소리로 반향 한다.

전기면도기로 수염을 깎다가 면도기를 떨어트렸단다.

올 것이 왔구나!

3년 전이던가, 가벼운 뇌경색으로 병원에 한 일주일 입원 하셨는데 검사결과 뇌신경이 교차하는 정수리 부분 대동맥에 꽈리가 생겼단다.

노령으로 뇌수술을 않기로 결정하고 집에서 약으로 잘 관리하라는 주의와 함께 퇴원 하셨다. 그것이 또 도진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평일이면 바로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지만 하필이면 일요일, 병원에 가봤자 응급실에서 검사만 받으셔야 한다.

아내가 아버지께 여쭤보니 속이 거북하여 혈전을 용해하는 약을 오랫동안 안 드셨단다.

그 중요한 약을 안 드시다니, 기가 막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내 직책에 대한 책임상 어쩔 수 없이 일단 교회에 갔다 와서 병원에 가기로 맘먹고 집에 달려와 보니 아내가 당황한 기색으로 아버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전화로 겨우 연결되어 알아보니 택시를 타고 응급실에서 주사를 맞고 곧 집에 도착하신단다.

아내에게 말도 없이 혼자 갔다 오신 것이다. 아버지 젊어서도 한 번 나가시면 연락이 없어 식구들의 애들 태우곤 하셨는데 나이 드시면서 부쩍 이 증세가 심해지신다.

말도 없이 거친 모악산에 운동하러 가시고 말도 없이 외출하신다.

전화기조차 놓고 가시면 돌아오실 때까지 아내와 나는 걱정으로 속이 문드러진다. 아무리 말씀 드려도 별무 소용이다.

다행히 오른 손 마비증세도 완화되어 힘도 생기고 걷는 것도 별 문제가 없어 내일 일찍 병원에 모시고 가기로 했다.

왜 혼자서 그런 위험한 일을 하셨냐니까, 치매로 요양병원에 13년간 계신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내가 가야 할 것 같아 기를 쓰고 응급실에 갔다 오셨다는 것이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아내와 나는 억장이 무너진다.

 

월요일(12월 7일)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8시 30분에 도착했다.

서둘러 도착한 보람도 없이 신경과 외래는 오후 4시에나 진찰이 가능하단다.

뇌경색은 시간을 다투는 병인지라 할 수 없이 응급실로 갈 수 밖에...

온갖 검사 결과 예상한대로 뇌경색이란다.

부위는 지난번과 다른 곳이지만 다행히 심하게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입원대상 환자는 코로나 검사를 필히 마쳐야 해서 결과가 나올 때 까지 열 시간은 넘게 응급실에서 기다린 것 같다. 검사가 밀려 그렇게 되었단다.

그동안 허리 아픈 환자인 나는 약도 가지고 오지 않아,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점심 굶고 저녁까지 굶으며 통증을 견뎌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입원실이 다인실은 말할 것도 없고 2인실, 1인실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절박해진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어떡해야 하나요?”

입원실이 날 때까지 며칠이고 응급실에 계셔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내가 지쳐 쓰러질 지경인데 응급실에서 무작정 대기해야 한다는 말에 눈앞이 다 캄캄했다.

할 수 없이 정신과 과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지난 번 척추가 부러져 입원했을 때 너무 많은 도움을 받은 터라 다시 부탁을 드린다는 게 염치없는 일이지만 지금 상황이 그럴 개재가 아니었다.

과장님은 정신과 폐쇄병동에 2인실이 있긴 있는데 거기라도 가겠냐고 하셨다.

정신과 병동이면 어떻고 폐쇄병동이면 어떠랴. 그저 감지덕지하여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병실로 들어갔다.

문제는 외래로 약만 처방받을 줄 알고 갔던 것인데 아버지나 나나 입원준비가 하나도 없이 병실에 들어온 것이다.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 구내 편의점에서 렌지로 데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아버지 저녁을 드리고 간호사에게 잠간 집에 가서 필요한 물품을 가져와야겠다고 말하니 규정을 들이대며 허락을 안 한다.

정신과 병동인지라 문 앞에는 통제원이 버티고 있고 일정한 시간이 되면 병동을 폐쇄해 버린단다.

꼼짝없이 갇힌 것이다.

나는 매일 꼭 먹어야 할 약도 있고 이번 주일까지 19일 열리는 송년음악회 오케스트라 편곡을 완료해야한다.

그 뿐이랴, 교회 관현악단 편곡은 또 어떻고...

다시 한 번 부탁하니 모악산 시골집까지 갔다 온다는 것은 시간상 말도 안 되고 병원 구내에서 필요한 걸 다 구입해서 지내라는 것이었다.

사실 아버지나 나나 정신병으로 입원 한 것도 아니고 병실이 없어 여기로 온 것인데 이 간호사는 왜 정신과 규정만 들이 대는 걸까?

이런 일 가지고 못난 내가 과장님께 전화를 드리기도 뭐하고 당직 간호사가 바뀌는 시간을 기다려 봤다.

천만다행으로 교대한 간호사는 내 사정을 듣더니 전화번호를 주면서 들어 올 때 전화를 하면 문을 열어 주겠단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간호사의 얼굴이 갑자기 천사로 보였다.

(물론 나는 천사를 한 번도 본적은 없다)

집에 미리 전화를 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두라 이르고 페달을 깊게 밟았다.

우선 허겁지겁 차려놓은 밥을 밀어 넣고 아내가 준 보따리와 복용할 약과 노트북을 챙겼다.

돌아온 시간이 이미 열시를 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약에 취해 잠만 주무셨고 나는 노트북의 그 작은 모니터에 마우스로 음표를 하나하나 찍어가며 편곡을 진행했다.

2관 편성의 관현악곡이라면 악보 전체를 다 들여다 볼 수 있는 40인치 이상의 대형모니터로 작업을 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마우스의 스크롤을 위 아래로 돌리면서 정말 힘든 작업을 해야만 했다.

침대만 있는 병상에 책상조차 없어 무릎에 노트북을 얹고 장시간 이 일을 하자니 허리도 끊어질 듯 아프고 눈의 피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버지 수발을 드는 이외의 시간은 이 일에 매달렸다.

병원 밥은 지난 번 입원 동안에 신물 나 냄새도 맡기 싫어 구내편의점에서 김밥이며 컵라면이며 빵으로 때우면서도 점심때는 4500원짜리 카페모카를 꼭 한잔 사서 마셨다.

지나칠 때마다 풍기는 모카향의 유혹을 도저히 뿌리칠 수도 없었지만, 뜨겁고 달달한 커피 한 모금을 목 넘기면 갑자기 풍찬노숙의 걸인이 어엿한  신사동의 신사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뇌의 대동맥 꽈리는 크기가 매우 작아졌다는 반가운 소식가 함께 아버지는 주말에 퇴원 하셨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결사적으로 이 일에 매달렸다.

가까스로 토요일 밤 늦게 화급한 교회관현악 편곡은 마칠 수 있었고, 오페라단 송년음악회는 단장님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여 며칠을 연장했다.

지금 계산으로는 빠르면 월요일, 늦어도 화요일 까지는 악보를 넘길 수 있겠다.

노트북의 답답함을 벗어나 대형 모니터로 건반과 함께 작업하니 작업속도도 빨라지지만 잠도 못자고 이러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든다.

아, 고달픈 내 노년이여! 내 이러려고 은퇴를 기다렸단 말가!

 

위 사진은 노트북과 내 작업실의 모니터 크기를 비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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