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제자의 슬픈 부탁

작곡가 지성호 2020. 4. 22. 17:46

4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군인이 휴가를 기다리듯 3주차부터 집이 그리웠다.

내 병실은 2인실인지라 커튼으로 반이 나눠진 구조인데 커튼 너머 반대쪽은 창문이 있긴 있으나 건너편 건물에 막혀 온종일 빛이 들어오지 않는 병실이어서 퍽이나 답답했다.





때문에 내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온갖 수액 줄들이 탈거 된 후 주문한 갑옷 같은 복대가 오자 이것을 허리에 바짝 조이고 병원서 내준 보조기(사람들은 이 보조기를 돌돌이라 불렀다)에 의지하여 틈만 나면 45병동 복도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맴돌고 또 맴돌았다. 오죽하면 마주치는 간호사분들이 운동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라고 했을까.

언제나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긴 복도의 한쪽 면은 병원 바깥을 내다 볼 수 있는 큰 창문이 있었다.

이곳에 도달하면 한쪽 발을 뒤로 빼고 두 팔을 모아 돌돌이에 얹고 몸을 실어 새벽이든 늦은 밤이든 창밖을 내다보았다.

낮이면 옛날 선교사 사택 쪽 경사면의 개나리가 갈수록 샛노래지는 사이로 목련이며 진달래며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한낮이면 훈풍이 불어 격렬하게 밀려오는 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봄의 진군 속도보다도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을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붉은 신호등이 켜지면 질서 있게 멈추는 차량들,

그 사이를 저마다 마스크를 쓰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신호가 바뀌면 우르르 몰려가는 차량의 물결.

건물 벽 하나를 경계로 건강 나라와 환자 나라가 멕시코 트럼프 장벽보다 더 강고하게 분리된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이 벽 앞에서 활기찬 건강 나라의 거리 풍경을 내려다보며,

나도 저 사람들의 세계에 과연 복귀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곤 했었다.

이 모습을 아내에게 들켜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도 했지만 나의 바깥세상 훔쳐보기는 병원 생활 내내 중단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데크가 깔린 옥상정원으로 진출하여 다섯 바퀴, 열 바퀴 맴돌이를 하다가 꼭 멈추는 곳이 한창 개수공사를 하는 공사현장이었다. 허리를 굽혀 삽질을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이라든지 벽을 부숴 털어내는 근육이 탄탄한 사람들의 건강한 노동을 보며 내가 다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하였다.




의사선생님이 보여준 수술 후의 내 X-레이 사진을 보면 인조 뼈로 모양을 만든 3번 척추 위아래로 자형 큰 철심이 2개가 박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철심 2개 사이를 잡아주는 보다 큰 철심이 박혀 있었다.

철심중간부분에서부터는 나사선이 있어 무슨 사람의 척추라기보다는 철물점에서 절단 난 철물을 연결한 모습 같아 오래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이 철심은 내가 죽을 때 까지 내 몸에 박혀있기 때문에 평생 허리를 구부리는데 장애가 있을 것이란다.



4주가 꽉차갈 즈음, 나는 담당 의사선생님의 회진 때마다 퇴원을 졸랐다.

그즈음에는 하루 한 차례 쫓기듯 20분 동안의 물리치료 외에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내 세웠다.

의사 선생님은 퇴원하면 내가 혹시 허리에 무리가 가는 일을 하지 않을까 염려해서 퇴원을 만류하다가

4주를 꽉 채운 날 두 가지를 말씀하시면서 퇴원을 허락했다.

한 가지는 척추에 박힌 철심 때문에 앞으로 6개월 동안 허리를 비틀거나 구부리면 재수술 할 수밖에 없다는 겁박과또 하나는 수술 결과를 보면 분명 사고당시 척수가 눌린 부분이 있고 일부에 손상이 확인 된 것으로 봐서, 하반신 마비나 적어도 왼쪽 발을 절거나 쓸 수 없는 상태였는데 기적처럼 두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을 평생 감사하면서 살라는 말씀이었다.

의사선생님 말씀처럼 퇴원 절차를 마치고 한보따리의 약과 함께 자력으로 두 발로 걸어서 병원 문을 나설 수 있음에 나는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운전을 할 수 없는 나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와주신 정 교수님 차에 올라 집으로 향하는 길.

벚꽃 가로수가 구름처럼 피어올라 화사하게 절정을 이룬 도로는 차들로 정체가 되기도 하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왕래로 병원 안에서 상상했던 코로라 상황과는 딴판이어서 좀 의아하기도 했다.

익숙한 길이지만 새롭게만 보이는 거리풍경을 바라보면서 돌아갈 내 집이 있다는 것에 행복한 엔드로핀이 벚꽃무리처럼 피어올랐다.

우리 집 마당에 들어서자 주인이 없는데도 잘도 핀 꽃들의 환영을 받았다.

목련과 앵두꽃, 살구꽃이며 진달래는 이미 이울고, 능수도화며 죽단화, 수선화, 꽃잔디와 박태기나무는 한창이었다.

잔디밭에는 벌써 잡풀이 듬성듬성 보였지만 이제는 내가 손을 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 퇴원 후의 상황은 눕거나 서거나 해야지 앉으면 아직 무릎이 많이 당기고 피로가 금방 오는 관계로 컴퓨터 앞을 될수록 피하고 싶었지만 다음과 같은 글을 페이스 북에 남긴 제자의 마음이 자꾸만 떠올라 나 혼자 스스로 한 약속을 하루라도 빨리 지키려 마음이 좀 다급해 졌다. 뿐만 아니라 선거가 끝나면 다른 원고에 매달려야하기 때문이다.

 

"늦은 새벽이지만 선생님 큰 수술소식에 아버지생각이 계속 나서 피드 글을 계속 읽게 되네요. 아버지 쓰러지시고 수술 들어가시기 전 응급실에서부터 중환자실에서의 하루 두어 번 면회를 제외한 홀로 계셨을 시간들, 수술 들어가시기 직전부터 수술 시작하시기까지의 생각들 단, 4일간의 시간을 단 한글자로도 알 수 없어 그게 너무 슬퍼요~선생님 누워계시며 느낀 많은 감정들 생각들 정리하시면 글로 남기신다니, 꼭 읽어보고 싶어요~!" (38일 페이스북 댓글)

 

이 댓글을 남긴 제자는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세대 간 많은 차이가 있어 난 그 친구의 속내뿐만 아니라 어디에 사는지부모님이 무얼 하시는지 조차 잘 모르고 제자가 대학1학년 때부터 시작된 인연이 교회 관현악단에 까지 이어져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다.

다만 그 제자가 한예종에서 전문예술사 과정을 최근에 마쳐, 보기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구나 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 연말, 그 친구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계신 관계로 송구영신 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죄송하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14, 조카 결혼식이 있어 서울에 올라왔는데 제자의 부친께서 향년 57세의 일기로 별세하셨고 가족들끼리만 입관 식을 한다는 부고를 받았다.

어안이 벙벙한 채 천안의 순천향 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갔더니 생전 울지 않을 것 같던 제자는 흐느끼느라 말도 잘 잇지 못하였다.

잠깐 마주친 제자의 어머니는 너무나 젊으셨고 여동생은 어리디 어린 대학생이었다.

상주로 여자만 달랑 셋인 셈이었다.

분향소조차 마련하지 못한 터라 사람들이 왕래하는 썰렁한 통로에서 급하게 달려오신 목사님과 같이 올라 온 일행이 기도만 같이 드리고 내려오는 내내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그 뒤로 제자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너무나도 태연하게 관현악단에 복귀하여 속으로만

참 당찬 놈이네, 참으로 단단한 놈이구나!”하는 감탄이 있었다.

그런 제자가 페북에 올린 글을 병실의 침대에 누워 읽다보니 제자의 애틋한 사부(思父)의 정이 눈물겨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그 제자의 마음이 내내 밟혀 제자가 알고자 하는 사고의 전말과 병원에서의 일을 기억나는 대로 자세히 기록하고자 마음먹었다.

글쎄, 이것이 제자에게 무슨 위로가 될는지 알 수 없지만.....

또 한 가지, 멀리 멕시코 꼴리마에서 방치상태인 코로나 공포를 겪으며 철저한 고독 속에

기약 없이 자가 격리중인 림수진 교수의 댓글에 자극을 받았음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는,, 아마도,, 조만간,, 빠른 시간 안에,, 지금의 이 시간을 담담하게 혹은 <이미 지나가버린, 아주 어려웠던 일> 처럼,, 그렇게 돌아보실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그 옆에서 저는 교수님의 <용감무쌍한> 무용담을 듣겠습니다. 침을 꼴깍 꼴깍 삼키면서 말이지유,,"

 

이글을 쓰기가 망설여지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참으로 이유가 많기도 하구나)

나는 작곡가로서 내게 닥친 고통이 있을 때마다 이 고통이 나로 하여금 고통의 막장에서만 길어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통찰로 내 작품이 더욱 깊어지고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영혼의 양식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왔다. 말하자면 고통의 유용성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겪어내지 못할 고통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불후 성을 추적해보면 나의 이러한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된다.

러시아의 중산층에서 태어난 그는 육군 중위로 전역한 후 문학 활동을 하면서 공상적 사회주의 동아리에 참여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언도받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영하 50도의 추운 겨울날 형장에 끌려와 사형수 두 명과 함께 기둥에 묶이게 된다.

총에 탄환을 장전하는 소리와 지휘관의 거총!”소리를 들으며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 두 눈을 감는다.

이젠 꼼짝없이 죽는구나하고 죽음을 받아드리는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한 병사가 흰 손수건을 흔들면서 헐레벌떡 달려와 황제의 특별 감형명령을 전한다.

황제권력이 죽음을 담보로 한 한편의 연극이었던 것이다.

목숨을 구한 대가는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시베리아의 옴스크 유형지에서 4년간의 중노동과 다시 5년간의 군복무를 마쳐야한다는 것이었다.

4년간의 강제수용소생활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냉혹한 감시망 속에 발에는 무거운 족쇄를 채우고, 낙인, 매질, 원망과 분노, 먼지와 벼룩으로 들끓는 숙소견디기 힘든 배고픔, 동상으로 썩어 들어가는 손과 발, 처절한 고독과 같은 극한 상황을 견뎌낸 체험을 기록한 책이 죽음의 집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간은 불사신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다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 생각한다.”




 

35()

난 그 1주일 전에 곧 출간하는 책의 1차 교정지를 서울로부터 택배로 받아 이를 수정하느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일에 몰두했다이 날 오후 430분에 치과 예약이 되어있었고 그 때쯤 교정지도 전달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부족한 잠을 자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정작 누우니 말똥말똥 잠이 오지 않아 그동안 손대지 못한 정원 일이나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마당에 나왔다.

다른 집들은 다들 스카이 차라고, 높은 곳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는 장비를 불러 정원사가 안전이 확보된 네모진 공간에 올라타고 엔진 톱과 전지기구로 가지치기를 하지만 우리 집은 몇 그루되지 않는 소나무 인지라 내가 다 사다리를 놓고 톱으로 가지치기를 했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가장 큰 소나무는 너무 높아 한 번도 손을 대지 못한 관계로 나무 윗부분이 봉두난발, 제멋대로 밀식되어 가지와 가지가 얽혀 있었고 그 사이로 죽은 가지며 검게 쌓인 솔잎을 바라볼 때마다 언제나 눈에 걸렸다.




오늘은 벼르고 별렀던 이 일을 해치워야지.’하는 맘으로 접이식 사다리를 마당에 놓고 1801자로 펼치고 겹친 부분은 최대한 빼내니 너무 길어져 휘청거리는 사다리를 혼자 힘으로 소나무에 걸치는데도 많은 애를 써야만 했다.

겨우 겨우 원하는 높이까지 사다리를 소나무에 걸치고 나름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출렁이는 사다리를 조심스럽게 올라가 사다리 상단을 소나무에 밧줄로 단단하게 묶었다.

그러나 소나무는 원통이고 사다리 가로 발판은 직선인지라 이게 한쪽으로 힘이 쏠리면 움직일 수도 있는 상태이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더구나 아래쪽 바닥이 완전한 수평 상태가 아니라 반반한 돌로 고여 놓아 겨우 수평상태를 만들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소나무 본체와 내 몸통 사이에 밧줄을 이용하여 안전장치를 더 했어야만 했다.

소나무 최상단의 죽은 가지치기는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톱으로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은 고지 톱을 사용해야만 했는데 이게 삼단으로 펼칠 수 있는 것이라서 상당한 무게가 나간다.

이것을 한손은 사다리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만 톱질을 하면 너무 팔이 아프고 톱이 잘 먹히지도 않았다.

지치기도 해서 저것 하나만 마지막으로 잘라야지 하는 맘으로 가지를 자르는데

나무가 톱날을 꽉 물어 움직이지 않자 나도 모르게 일에 열중한 나머지 사다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두 손으로 힘을 모아 힘껏 고지 톱을 당기는 순간 나무가 부러지면서 내 몸이 중심을 잃고 붕 뜨는 것이었다.

지상으로부터 5미터는 족히 될 높이였다.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를 예감하면서 막심한 후회가 몰려왔지만 어찌하랴, 일은 이미 벌어진 것을!

떨어져 철쭉 밭에 묻혔을 때 온몸이 고압전기에 감전된 듯 엄청 큰 충격이 느껴졌다.

떨어지는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몸이 180도 돌아 떨어진 소나무를 향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형국이었다.

급격한 통증에 숨도 쉴 수 없었지만 정신은 말짱하였다.

그 와중에 바로 눈앞에 1m정도의 뾰족하게 삼각진 정원석과 넓은 정원석이 눈에 보였다.

저기에 떨어졌으면 아마도 내 몸은 산산조각으로 부셔졌을 것이다.



머리부터 아래로 다친 곳이 없나 하나하나 점검을 해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허리 아래로는 조금치도 움직일 수 없었고 두 발이 오그라드는 것이었다.

, 하체가 마비된 거로구나!” 심한 절망감이 밀려왔다.

나는 이날 아내에게 큰 죄를 지었다.

무슨 위험한 일을 벌이느냐고 극구 말리던 아내에게 이 모든 광경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만 것이다.

정신이 없는 아내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고 있었지만 인내의 한계를 넘는 통증에도 나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119 불러!” 외치니 그제야 핸드폰이 없는 아내가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 경황 중에도 내 핸드폰 번호를 119에 제대로 알렸던지 앞섶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119였다. 여자 분이 전화를 끊지 말고 그 자리에서 절대 움직이지 말라 하면서 계속해서 내 상태를 물었다.

내가 어디냐고 물으니 평화동을 지나가고 있으며 15분 후에 도착예정이란다.

, 이때의 절망감이란! 당장 죽을 것 같은데 15분을 참고 견디라니.

다행히 통증은 격렬하다가도 간헐적으로 한 숨 쉴 만큼만 견딜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

다가온 아내가 내 왼쪽 허리를 주무르자 발끝까지 뭔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발을 움직여보니 양발이 다 움직였다.

발가락도 꼼지락 거려졌다.

나는 이 순간을 아내의 손이 일으킨 기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허리만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잘하면 하지마비는 벗어날 수 있겠구나!

나는 아내의 손을 잡으며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하체를 못 쓰면 내 여생은 온전히 아내에게 의지해 살아야 할 것이고 그 사실은 아내에게나 나에게나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나중에 아내는 내 말을 다르게 들었단다. 그렇게도 말렸는데 기어이 일을 저지른 것을 미안해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의아한 것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그 찰라 같은 시간에 정말 여러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순간의 붕 뜨는 느낌이 꼭 군대에서 겪은 사고와 똑같아 그때의 기억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이어 나에게 어찌 이런 일이!’와 같은 원망과 후회가 사무치게 밀려왔고 당장 바로 눈 아래 뵈는 뾰쪽한 바위를 어떡하든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동시적으로 들었다.

부끄러운 기억이기에 이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난 군대에서 큰 사고를 낸 적이 있었다.

아마 1976년 여름정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때, 중동부전선 펀치볼이 가까운 철책부근에서 대대ATT 훈련 중 야간에 OP를 점령하기 위해 우리 중대는 행군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맨 발로 내를 건너다 유리조각에 발바닥을 찢겨 그 당시 군대의 만능약인 아까징끼로 소독만 한 형편이었다.

발이 이런 상태인데 하필이면 훈련 중 이동 루트가 내를 서너 번 건너는 코스여서 군화는 물론이려니와 젖은 양말을 갈아 신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행군하자니 드디어는 발바닥이 곪아 발바닥 전체가 욱신거리고 열도 많이 나 걷기가 불가능 할 정도였다.

그러나 군대였다.

대대가 오랫동안 준비한 제일 중요한 훈련에 참모부 정보병이 아프다고 열외를 해줄 리가 만무했다.

당연히 쩔뚝거리며 뒤처지는 나를 뒤에서 군화발로 사정없이 걷어차며 군대에서만 들을 수 있는 갖은 쌍욕을 퍼붓는 고참에게 악에 받쳐 나도 모르게 대검을 빼들었다.

잘 참다가 한순간에 욱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내 못된 성격이 폭발한 것이다.

기세등등한 살기(殺氣)에 놀란 대열이 흩어지면서 주변이 쫙 물러서는 순간,

나는 내가 수습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빼든 대검이었다.

나를 끝없이 괴롭히던 고참은 대대정보과 내 사수였다.

평소에도 얼마나 요령꾼이었는지 낮에는 참모부 사무실에서 펑펑 놀다가 취침시간이면 어김없이 머리를 톡톡 치며 불러내 산더미 같이 밀린 일을 시키고 자기는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2대대 본부중대는 내무생활이 가장 힘든 부대로 연대에서도 소문난 중대였다.

중대 고참들의 온갖 부조리와 폭력이 일상화 된 곳이고, 기가 막힌 것은 간부들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는 것이었다.

갖은 사역과 보초와 훈련에 지친 졸병들은 밤이 되면 불려나와 업무를 보느라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해 틈만 나면 졸기 마련이었다때문에 CP에서 보초를 서다가 선채로 나자빠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도 서너 번 경험한 일이었다

근무를 서다가 견딜 수 없는 졸음이 몰려오면 어느 순간에 자갈이 깔린 바닥에 통나무 쓰러지듯 떨어지는 것이었다.

총은 내동댕이처지고 다행히 철모가 머리를 보호해 다치지는 않지만 !”하는 소리가 제법 큰지라 고참들이 뛰쳐나와 군기가 빠졌다고 또 두들겨 팼다.

이러한 적폐가 끝없이 대물림되는 곳이었다.

사수는 순간 내 시퍼런 서슬에 얼마나 놀랐던지 어안이 벙벙해진 체 내 이름만 헛소리하듯 연거푸 부르고 있었다.

난 지금도 그 사수의 고향이 어디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45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발바닥을 곪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참을 수 없는 통증에 온몸에 열이 나고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사수는 보병은 뼈만 부러지지 않으면 걸어야 한다고 의무대도 못 가게하고 내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고 훈련장의 고된 일들을 사정없이 시켜먹는 것이었다오로지 자기 한 몸 편하기 위해서였다.

작전 중에 대대본부의 장교와 선임하사와 사병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순간적인 분을 참지 못해 졸병이 대검을 빼든 후과를 모를 리 없는 나는 순간 심사가 복잡해지고 여러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갔다.

내 간덩이로는 사수놈을 찌를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순순히 대검을 집어넣을 수도 없었다.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칠흑 같은 도로 옆 낭떠러지로 몸을 날렸다.

바로 소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처럼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길이 살 길인지 죽을 길인지도 모른 채.

최전방의 OP는 대개 비상도로가 나 있었다.

어떤 도로변은 뼈도 못 추릴 만큼 까마득한 낭떠러지고 어떤 도로변은 급경사진 비탈길이었다.

나는 흘러내리는 돌멩이들과 함께 사정없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대로 죽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언덕배기의 안부로 굴러 떨어졌다.

산 것이다!

위에서는 외치는 외마디 소리와 작전 중에 절대로 노출돼서는 안 되는 랜턴불이 어둠속을 이리저리 가르고 있었다.

그러나 중대원들은 나처럼 그 벼랑을 내려오지는 못했다.

랜턴 불빛에 비쳐진 위험한 벼랑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내 몸을 점검해 보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탄띠에 주렁주렁 매단 야삽이며 수통이며 탄입대며 뒤에 매단 판초우의와 같은 단독군장이 내 몸을 보호한 것이다.

조심조심 아래로 내려가니 소라 고동처럼 굽이굽이 도는 아래도로가 보였다.

본부중대는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철책 가까운 곳에서 총을 든 졸병이 어둠속으로 몸을 날렸으니 보통 사건이 아닌 것이다.

훈련은 중단되고 사방으로 나를 찾아 나서는지 랜턴불이 어지러웠다.

나중에는 내 이름을 합창하며 부르고 다녔다.

그러나 이 어둡고 넓은 산중에서 그들을 피해 다니는 나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일단 몸을 어디로든 숨겨야 했다. 한참을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헤매다가 마침 눈에 띄는 벙커가 있어 들어서는 순간머리털이 쭈뼛 서게 놀라고 말았다.

벙커에서 어떤 소리가 새어나오는데 분명 P77 무전기의 축음 터지는 소리였다.

이때 갑자기 랜턴 불빛이 내 눈을 찔렀다.

나는 너무 놀라 미동조차 할 수 없이 얼어붙었다.

무전기 옆에는 어떤 알 수 없는 군인아저씨가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도, 나도 크게 놀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포병부대에서 지원 나온 무전병이 요령을 피우느라 벙커에서 무전기를 개방해놓고 돌아가는 상황을 들으면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대개 지원 부대는 훈련 나오면 배속 받은 부대에서 크게 통제를 하지 않으니까 이런 식으로 요령을 부리곤 했었다.

그는 제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고참 병장이었다.

나의 사정이야기를 다 듣더니 너 지금 나가면 맞아 죽거나 영창에 간다. 저놈들이 너를 찾느라 지치고 걱정이 머리 꼭대기까지 찰 때를 기다려 그때 나가라!”는 충고를 해줬다.

34개월의 짬밥이 꽉 찬 왕고참의 말씀을 듣고 보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도 나도 멀리 아련하게 들리는 나를 애타게 찾는 소리를 귓가에 들으며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밤이 깊어지자 늦게 떠오른 달빛이 깊숙한 벙커까지 파고들었다.

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달빛이 얼마나 처연했던지 지금껏 눈에 선하다.

저녁 먹고 어둠이 시작되자 OP를 점령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이 사단이 벌어졌고 이제는 지쳤는지, 포기했는지 나를 찾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고참은 무전기로 상황을 파악하고 나를 무조건 OP로 올라가면 너는 살 거라고 격려해주면서 등을 떠밀었다.

나는 지금도 이름도 모르는 이 고참에게 감사한 생각을 갖고 있다.

나 혼자라면 내가 어떻게 자대를 찾아 갈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는 천지간에 휘영청 높이 떠 인간사와는 무관하게 교교한 달빛을 흩뿌리는 둥근달을 바라보며 방망이질 치는 가슴으로 절뚝거리면서 OP로 향했다.

멀리 OP 정상에 일군의 군인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철모 뒤의 야광표지가 달빛을 받아 빛나는 곳까지 이르렀을 때 누군가 하나가 소리쳤다.

지성호다!” 내가 듣기에 분명 감격에 차 흥분한 목소리였다.

그랬다. 중대원 모두가 지옥에서 살아나온 사람을 반기듯 환호하고 달려와 껴안고 총을 들어 주는 사람, 어깨를 감싸 부축해 주는 사람, 난리가 아니었다.

그 무리 중에 하나가 내 사수였다.

이 교활한 놈은 다른 중대원들보다 열배는 더 가슴을 쓸었을 것이다.

본부중대원 모두가 음흉하고 잔머리의 대가인 그를 싫어했고 부사수인 나를 엄청 못살게 군다는 것을 잘 아는지라 내가 잘못 되면 그 놈은 틀림없이 영창 감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벙커에서 만난 통신병의 말이 하나도 틀림없음이 사실로 판명 난 것이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짬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떠도나보다.

한 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나를 평소에 무척이나 아껴 주던 정보관이 모든 중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가 3사관학교 후보생일 때 다리를 다쳐 교육 기간 내내 감내해야 했던 고생을 입담 좋게 들려주었다.

갑자기 본부 중대 전체가 등산객들이 텐트를 치고 모닥불에 둘러 앉아 전설적인 산악인의 히말라야 등정담을 경청하는 듯한 분위기여서 나는 안심의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순간 사실이든 연기든 나는 울고 있어야 마땅했던 것이다.

정보관의 결론적 말 맺음은 군대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뎌 건강한 몸으로 전역하는 것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라 했으니 나를 두고 타이르는 말씀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번 일이 영창을 가기보다는 잘하면 내 고달픈 군대생활의 전화위복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원래 말단 소총중대의 소총수였던 내가 중대 음어 대표로 뽑혀 대대 정보과에서 교육을 받을 때부터 마음에 쏙 들어 했던 대위 계급의 정보관이었다.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 부인에게 일개 소총수인 나를 엄청 추켜세우며 졸병에게 과한 쌀밥에 소고깃국으로 배부르게 먹여 부대로 들여보내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정보과의 사수가 제대를 하자 부사수가 사수가 되고 나를 대대본부중대 정보병으로 명령을 내부사수로 일하게 한 사람이다.

정보관은 나를 사수보다 훨씬 더 신뢰하고 가끔은 나를 빗대 사수를 모욕하며 나를 두둔하곤 했다.

그것이 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사수의 미움만 더해진다는 것을 정보관은 몰랐을까?

이 소동이 지나간 후, 대대에선 어쩐 일인지 나에게 아무런 문책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무사히 부대로 복귀했고 이를 정식으로 문제 삼으면 지휘책임부터 부대의 부조리가 노출될 판이고무엇보다 사단이 벌어진 전후 관계를 파악한 정보관의 노력이 있을 것으로만 추측한다.

하여튼 이 사건 이후로 본부중대 고참들이 나를 건드리면 동티라도 날 것이라 생각했는지 조심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특히 내 사수의 태도는 몰라보게 사분사분해졌다.

그러다가 연대 정훈과에 6인조 밴드가 만들어지면서 건반 주자로 차출됐고 우연한 기회에 내 군가 가르치는 솜씨가 사단 군악대장보다 훨씬 능가한다고 판단한 사단 정훈참모가 사단으로 파견명령을 내려 나는 고된 내무생활과 고참들의 간섭 없이 이 부대 저 부대로 대접을 받으며 군가를 가르치러 다니는군대말로 한량한 군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은 절박한 위기뿐만 아니라 여행과 등산과 모험을 좋아하여 한 때는 지리산에 미쳐 다니다가 기어이 티베트고원 쪽 에베레스트(초모랑마) 베이스캠프와 히말라야의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도 트레킹 한 나였다.

그뿐인가 내손으로 꼭 집을 짓고 싶어 집도 짓고 창고도 짓고 주차장도 지었다.

또한 가드너로 사시사철 정원을 가꾸는 내 삶의 방식에서 맞닥트린 무수히 많은 위험 속에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한 전력이 없었다는 것이 내 은근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 신앙인으로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늘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119가 도착하기까지 그 긴(15분이지만) 고통의 시간에 어디서 사모님, 사모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웃에 사시는 병원집 사모님이셨다.

우리 집에서 커피나 한 잔 드시러 왔다가 철쭉 밭에 파묻혀 덫에 채인 짐승처럼 몸부림치는 나와 어쩔 줄 모르고 벌벌 떨고 있는 아내를 발견하신 것이다.

이 사모님은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과 임기응변이 탁월하신 분이었다.

지금생각하면 누가 보낸 것처럼 사모님이 하필 그 시간에 나타나신 것이다.

119대원들은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내 체온을 쟀다. 아마도 코로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 후 나를 에워싼 철쭉을 잘라내고 들것에 옮기는데 나도 모르게 으아악!”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분들이 나를 옮기려면 아무리 조심 한다 해도 내 허리가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그 고통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모든 아픔을 초월한 것이었다

119차에 실려져 흔들리며 가는데 작은 진동이라도 고스란히 허리에 전해져 이를 악물어야 했다.

동승한 사모님은 어느 병원으로 가야할지 결정을 못 내리고 갈팡질팡하는 아내나 나와는 달리 의사인 남편과 전화로 상의하여 예수병원으로 가자고 하셨다.

이 선택은 정말 나에겐 기적을 가져다 준 결정적 선택이 되었다.

응급실에 도착하여 침대로 옮겨질 때 다시 한 번 똑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간호사든 누구든 빨리 진통제를 놓아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처방전이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연로하신 아버님 때문에 응급실을 갈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응급실은 정해진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곳이지 개인의 사정 같은 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어떡하든 이 고통을 벗어나고픈 절실함 때문에 사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호사들은 겨우겨우 내 옷을 벗기고 병원 복으로 갈아입혔다.

그들도 내 몸의 상태가 심각함을 아는지 소변 줄부터 연결하였다.

나는 X-레이와 조영제를 먹고 찍는 CT에다가 MRI 를 옮겨 다니면서 찍었다. 문제는 첫 번 X-레이를 찍을 때 그 섬뜩하게 차가운 침대에 누우면서 허리가 아파 고함을 또 질렀고 사시나무 떨 듯 추위가 엄습해 침대가 들썩 거릴 정도로 떨어야 했지만 누구하나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아내는 아내대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병원이 요구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하느라 나를 따라 다닐 수 없었다.

나중에 그 사모님이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 하나만 빼고 철저하게 통제하는 응급실을 간호사나 의사들이 출입하는 틈에 끼어 용케 들어오셨다.(후에 이러한 정황을 듣게 되었다

진 결과를 놓고 세군데 과에서 과장님들이 오셨다.

등에 피가 고여 내과 과장님이,

척추 3번이 부러져서 정형외과 과장님이,

부러진 끝이 V자를 갈라졌고 특히 왼쪽 끝이 길게 뻗어 척수 신경을 짓누르고 있어 신경외과 과장님이 오신 것이다.

이분들은 그 높은 곳에서 추락했다는데 머리나 엉덩이나 다리까지도 이상이 없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오른쪽 다리를 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내 건재함을 과시해서 어떡하든 수술을 피하고자하는 기재가 발동했는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번쩍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렸다.

다섯을 세더니 내리고 이번에는 왼쪽 발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왼발은 하나를 세기도 전에 힘없이 떨어졌다.

이분들은 상의 끝에 신경외과에서 내 수술을 맡기로 결정을 한 모양이었다.

신경외과 과장님이 대뜸 응급으로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설마 수술까지?

나는 잠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마스크를 쓴 과장님의 눈썹이 크게 꿈틀 거렸다.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눌린 신경이 회복되지 않는다는 말씀에도 나는 고집을 부렸다.

그때 내 속셈은 이랬다. 허리수술은 난이도가 높고 재수술도 많다는데 과연 이 병원의 집도의를 믿고 수술을 맡겨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때 번개같이 떠오른 생각이 같은 병원의 친한 정신건강과 은과장님이 생각났다.

당장 그분께 전화했다. 이 분이 부지런하고 바쁜 분이라 한 번에 전화가 안 되는데 그날따라 내가 놀랄 정도로 단박에 전화를 받으셨다. (이 분이 그날 쉬는 날이면 어찌했을까!)

결과적으로 이 전화 한통은 내 여러 행운 중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은과장님은 내 사정얘기를 듣더니 바로 나타나셨다.

영상자료를 봤는지 당장 수술해야 한다며 신경정신과 신과장님은 나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코로나로 다행히 수술실 하나가 비어 옮겨 가기 전에 나는 잠깐 시간을 달라는 요청을 하고 전화를 두 군데 하였다.

한곳은 출판문화원 송 교수였다. 내가 지금 사고를 당해 응급 수술을 해야 하니 오늘 오후에 전달하기로 한 교정본은 나중에 보내겠다고 말하고  다른 한 곳은 오늘 예약된 치과에 갈수 없는 형편을 말하였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전혀 사용할 줄 모르는 아내에게 전화를 건네면서 받는 방법과 거는 방법을 설명하고 수술실로 실려 갔다.

수술실 분위기는 응급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무슨 스페인의 마을 축제가 벌어진 듯 시끌벅적하였고 오늘 저녁에는 아무개가 통닭을 쏜다는 말도 들렸다.

축제분위기에 맞게 화장을 짙게 한 간호사 한분이 수술실의 한쪽 방에서 창밖에 몸을 내밀고 혹시 틀니나 의치 같은 게 있냐고 물었다마침 오늘 오후에 앞니 2개의 의치를 빼고 본치를 끼우는 날이라고 말하니 수술 중에 의치가 빠지거나 깨져도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서명을 하라는 것이었다.

마취과 과장님 앞으로 실려 가면서 접착제로 굳힌 의치가 깨질 정도로 수술이라는 게 요란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취과장님은 지금부터 자가 호흡을 멈추고 기계가 대신 한다는 말씀을 하시며 내 코와 입에 투명한 마스크 같은 걸 씌웠다.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향취가 느껴졌고 계속해서 과장님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의식을 잃어버렸다.

수술실에 들어간 시간이 오후 3시쯤 이였는데 10시가 넘어서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의식을 차려보니 내 몸에는 무수히 많은 수액 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깨어난 나를 보고 집도하신 선생님은 수술은 아주 잘되었고 토할 수 있으니 그럴 땐 자기들이 준비한 조치를 하겠다는 말씀과,또 하나는 아주 강력한 진통제와 무통주사를 맞고 있으나 그래도 마취가 풀리면 상당한 통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더욱 강력한 마약 주사를 놓겠다는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이 끝나자마자 토하기 전의 오심증상도 없는데 난데없이 속에서 치솟는 것이 있어 손짓을 하니 바로 준비된 비닐봉투를 달아주어 연거푸 두 번이나 토했다.

문제는 내 혈압이 85 뿐이 안 돼 병실로 못가고 중환자실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지는데 옆으로 줄지어 서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 한분은 이웃에 사시는 원장님은 분명한데 다른 분들은 흐릿해서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중환자실에는 보호자인 아내만이 환자에게 필요한 물품 때문에 잠깐만 들어오게 하였다.

아내는 나에게 병원 집 내외분이 병실 밖에서 이 시각까지 기다리고 계시니 내일 아침 면회시간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나는 중환자실에 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내 의식이 이렇게 말짱하고 통증조차 없는 나를 왜 중환자실에 놓아두는가 말이다.

한 편으로는 명징한 의식을 가지고 병원의 모든 걸 경험하라고 이곳까지 보낸 어떤 계시적 섭리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수간호사께서 오셔서 내가 누구인지를 들어 알고 있다며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36일 금요일

그러나 이곳 중환자실은 수술실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간호사들의 움직임은 뛰다시피 바빴고 오고 가는 대화도 “~습니까?”“~습니다!”를 반드시 붙이나 군대처럼 어투가 각이 서 있었다.

중환자실은 나같이 의식이 말짱한 사람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어떡하든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으면 어떤 할아버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짜증과 지겨움과 고통이 혼재된 하품과 같은 신음소리를 일정한 주기로 길게 토해내,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의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바로 저 소리야말로 지옥의 울림소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할머니는 무슨 헛것을 보시는지 끝없이 헛소리를 중얼거리시는가 하면 어떤 할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요구로 간호사에게 계속 윽박지르는데 중환자실의 지침인지는 모르겠지만 간호사는 감정 없는 기계처럼 꼬박꼬박 응답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려는 순간 이내 냉정을 되찾는 어투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인간의 귀는 눈처럼 꺼풀이 없는 가장 수동적인 감각기관인지라 이 모든 소리를 어쩔 수 없이 들으며 간호사라는 직업도 감정노동자이고 노동 강도가 높은 힘든 직업군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수시로 혈압과 체온, 맥박과 혈당을 체크 하는 분도 계시고 다양한 복장을 한 분들이 다가와 아버님! 여기가 어디예요?”, “성함이 뭐예요”, “나이는요?”, “왜 오셨어요?”, “오늘이 며칠이죠?”와 같은 똑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묻는 것이었다.

나는 유니폼이 각각 다른 분들의 직책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이 문진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내가 얼마나 말짱한지를 확인 시켜줘야 빨리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겠구나하는 희망으로 초등학교 1학년 반장처럼 아주 분명하고 성실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나 아무도 날 똑똑하다고 칭찬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눈만 감으면 두 가지 망상이 교대로 나타나는데하나는 내 작업실의 컴퓨터 모니터에 탈고한 원고의 문장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나는 문장을 반복해서 읽으며 현실처럼 열심히 수정에 수정을 반복하였다.

그러다 눈을 뜨면 하얀 천정이 눈에 보여 , 여기가 중환자실이로구나.’하는 좌절감이 들었다.

또 한 가지 망상은 내가 누어있는 병실에 광목 같은 긴 천이나 우레탄 폼의 거품 같은 것이 점차 크게 부풀어 오르며 내 침대를 향해 압박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되풀이 되는 망상과 온갖 소음 속에서 온 밤을 꼬박 새웠다.

아침 절에 복장이나 나이로 보아 관록 있는 의사선생님 같으신 분이 찾아와

지성호 선생님이시죠? 어제 수술자 명단을 보고 깜작 놀랐습니다.”하는 것이었다.

내가 전혀 기억에 없는 분인지라 저를 아시는 분이신가요?” 물었으나 잠시 뭔가 말할 듯 하다가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이었다.


오전 930, 코로나로 하루에 한번으로 줄어든 유일한 면회시간이었다.

밖에서 기다렸던 보호자들이 우르르 입장하여 익숙하게 자기 환자를 찾아가는데 나에게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10분 동안에 별의별 생각들이 떠올랐다장롱면허 소유자인 아내가 구이까지 택시를 호출하는 방법을 몰라서일까? 대체 무슨 사정으로 못 오는 것일까낙담할 즈음에 아내와 병원집 사모님이 함께 들어오셨다.

병실로 옮기게 되면 필요한 물품을 사느라 늦었다는 것이었다.

사모님은 119구급차에 실려 올 때부터 점심과 저녁도 굶고 아내와 더불어 꼬박 병원에서 하루를 보내셨다.

원장님은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나에게 달려오셔서 저녁을 거르고 내 수술에 입회해 주셨다.

아마 내외분이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가셨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아내를 태우고 같이 병실에 오신 것이다.

아내는 외출을 싫어하고 집안에서 정원 가꾸는 취미와 살림만 하는 사람이었다.

핸드폰도 싫다하고 그 흔한 카드 한 장도 가지려고 하지 않아 내가 늘 봉쇄수도원 원장님이나 어디 심심산골 구름에 가린 암자에서 홀로 정진하는 수도승이라 놀리는 아내였다.

그런데 막상 이런 난데없는 횡액을 당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자실 할 때 사모님이 꼭 사고 난 시간에 맞춰 우리 집에 오셔서 모든 중요한 결정을 척척 내리시고 아내를 막내아들처럼 거둘 뿐만 아니라 보호자 외에는 입장이 금지된 중환자실에도 어떤 수단이었던지 기어이 아내와 같이 나타나신 것이다.

당신은 이런 이웃을 두었는가?”묻고 싶을 정도로 이웃에 이런 사모님이 살고계신 것을 큰 자랑이자 행운으로 알고 산다.

하룻밤이지만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잠을 못 이루고 새운 긴 밤이었다.

아내와 사모님이 허락된 시간에 쫓겨 병실을 나가자 집도하신 과장님이 수련의들과 같이 회진을 오셨다.

내 두발을 여러 각도로 움직여 보라 하시더니 재활만 잘되면 두 발을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시고 자신도 스스로 놀라는 기색이었다.

왼쪽 발은 분명 장애가 있을 줄 알았는데도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결과에 흡족해하시는 것이었다.

이때를 놓칠 손가?

과장님의 수고에 감사를 드리면서 재발 병실로 옮겨달라고 청을 넣었다.

과장님은 혈압만 정상이 된다면 바로 병실로 옮기자고 흔쾌히 동의를 해 주셨다.

그러나 혈압은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어느 시간이 되니 네 분의 간호사들이 환자들 침대를 찾아다니며 침대보 네 귀퉁이를 들어 환자를 감싸고 반팔 정도 올렸다 다시 침대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아마도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그러나 본데 난 허리를 수술한 사람이고 어제 늦은 밤에 들어온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아 허리 통증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가 되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간호사가 내 심장 부근 삽입관 주위에 피가 흘러 굳었던지 소독 솜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러나 남자간호사는 이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에 세 번이나 다른 여자 간호사들의 호출과 호된 질책 때문에 자리를 떠야 했다.

다시 나에게 왔을 때 나도 모르게 여기서 졸병이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간호사는 대답을 피하며 굳은 피를 닦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군대가 그랬다.

세수를 하다가 바로 옆에 손만 뻗으면 집을 수 있는 비누를 굳이 50m, 100m나 떨어진 졸병을 큰 소리로 불러 뛰어오게 했다.

조금이라도 동작이 굼뜨면 원위치!”실시!”를 반복하여 졸병 괴롭히기를 즐겼다.

그뿐인가? 졸병 하나를 두고 두 군데, 세군데서 다른 지시를 내리면 졸병은 어떤 일에 우선순위를 둬야 할지 종잡을 수 없으니 그 결과는 뻔하였다. 왜 내가 지시를 내렸는데 다른 사람 일을 먼저 하느냐며 이 고참 저 고참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이 하위계급을 도구와 수단으로 삼고 상급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하는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시스템을 못견뎌한다.

요즘과 같은 시국에 박정희 예찬론자나 그 딸이라고 추앙하는 군복 입고 태극기 든 우리 세대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그들과 같은 세대라고 통으로 극우로 분류되는 게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일제에 충성하다 쿠데타로 정권을 강탈하고 유신이라는 미명으로 종신 권력을 획책한 독재자를 몸소 경험해 본 사람들이 한 개인의 소시민적 자유를 박탈하고 두발부터 의식까지 일사분란하게 통제한 자들을 우상시하는 그 심리적 기재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대한민국에 기레기라 불리는 수많은 괴벨스들이 그 힘들었던 독재시기에 대한 어떤 거짓을 획책하더라도 앞장서 막아서서 증언해야 할 우리 세대 일진데, 오히려 그들이 그 시대에 대한 환상을 신념화 하여 전파하려 들다니나이 값 못하는 유아기로의 퇴행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중환자실은 병원 내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가장 중증의 환자를 다루는 특별한 곳이다.

자칫 자그마한 실수나 실기(失機)도 치명적인 위험을 불러 올 수 있는 곳이니 일정한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할 것이고 이런 업무적 특성이 구조화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젊은 간호사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였다.

그러나 간호사는 피 묻은 상태로 병실에 가게 되면 병실 간호사들에게 욕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간호사의 말에서 오늘 중으로는 일반 병실로 옮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 닦아내기를 마친 간호사는 떠나면서 나에게 곡진하게 말했다. “어르신, 다시는 중환자실에 오지 마십시오!”

나는 콧날이 시큰해진 채 고개를 간호사에게 끄덕여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내 혈압은 좀체 오르지 않았다.

겨우 오후 5시가 넘어서서야 병실로 옮겨가라는 오더가 내려왔다.

침대를 옮기는 분은 큰 키에 신체도 건강하게 보였으나 거칠고 자기 맡은 일에 성실성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을 올라갈 때부터 환자에 대한 배려가 없더니 긴 통로를 이동할 때는 무슨 물건 다루듯 거침없이 몰고 갔다통로의 이음새 부분이나 요철부분에서 올라오는 충격이 고스란히 허리에 전달돼 진땀이 흘렀다.

병실에 자리 잡자 45병동 간호사분이 체온을 재더니 38.5도라면서 열이 있다고 하였다.

두 번째 체온부터 정상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아 이동하는 짧은 시간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37일 토요일

"목요일부터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수액에만 의존하고 산다. 지금은 절대로 등을 바닥에 두고 누워 있어야 하는 상태다. 이러고 3일째가 되니 힘이 든다. 그래도 어제 밤늦게 가스가 나와 오늘부터는 죽도 먹을 수 있단다. 회복과정에서 앉는 게 가능해지면 이번 사고에 얻고 느낀 게 너무 많아 자세한 소식 올리고자 한다. 누워서 천장을 보며 핸드폰으로 글을 쓴다는 게 팔도 아프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게 가능하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 잠도 못자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 뭔가 해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혹 면회는 코로나 때문에 통제되니 생각도 마시길……."(37일 페이스북)

 

간호사분들은 내 방에 올 때마다 가스가 나왔냐고 물었었다. 나는 위장이나 소화기관을 수술한 것도 아닌데 왜 같은 질문을 반복하나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척추수술도 역시 가스가 나와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드디어 어젯밤 늦게 완벽한 ~”소리가 나왔을 때 나는 의식하지 못했으나 옆에 있던 아내가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가스가 나왔다고 통보하니 이제부터 죽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난 수액에 의지해 금식하는 동안 텅 빈 위와 맑아진 머리가 좋아 내심 며칠이고 더 금식하고 싶었는데 몸의 회복을 위해서는 그게 아니란다.


오후에 난데없는 제자의 방문을 받았다. 장대한 키에 검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불쑥 들어선 그를 처음에는 이게 누구야?’ 하고 깜짝 놀랐다어떻게 여기를 들어 올 수 있었냐고 물으니 병동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른 사람이 들어 올 때 묻어서 들어 왔단다(모든 병동 입구는 병원에서 제공한 바코드가 없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

요즘 가정사로 심적 고통이 심한 그의 형편을 잘 아는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를 찾아 왔을까소식은 또 어찌 들었단 말인가.

그는 흉심을 털어놓고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듯 보였으나 침대에 누운 내 형편을 보고 억제하는 게 역력해 보였다. 는 신실하고 맑아 세상의 때를 타지 않은 굳건한 자존심이 콧날에 어린, 탤런트처럼 준수하고 잘 생긴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나에게 무엇이든 도움이 되길 원했다.

운전을 못하는 아내는 병원 생활에 필요한 옷가지며 연로하신 시아버지를 챙겨야 할 일이 있어 어떻게든 집을 다녀와야 하는데 마땅한 방편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었다많은 분들이 차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 했지만 못난 아내는 선뜻 누구에게도 부탁을 못했다그나 되니까 아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낼 수 있었고 그는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기꺼이 앞장섰다.

혼자 있는 내가 걱정되어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아내에게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부랴부랴 생각나는 대로 물건을 챙겨 마당에 나와 보니 제자가 소나무에 걸친 사다리 끝까지 올라가 밧줄을 풀고 사다리를 내려 창고에 넣고 있더란다가슴이 철렁한 아내는 병원으로 돌아오는 차속에서 그 위험한 일을 왜 했냐고 나무라니 사모님이 사다리를 보실 때마다 마음이 아플까봐서요!”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올라가도 좁아진 중간 이음부분이 엄청 출렁이는데 몸무게가 나보다 훨씬 무거운 그는 어떻게 꼭대기까지 올라갔을까?

사다리의 구조를 모르면 잘 접어지지도 않고 밖으로 뺀 다리를 원래대로 집어넣기도 쉽지 않은데 그걸 어떻게 했단 말인가!

사실 나는 소나무에 걸쳐진 사다리를 어찌해야 하나 병상에서 많은 궁리를 하고 있었다. 대로 방치하기도 흉하고 누구를 올려 보내기도 두려워 스카이 차와 인부를 부를까도 생각했었다아내는 보기 싫은 소나무를 아예 베어 버릴 생각까지 했더란다.

바삐 사라진 그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사고가 난 후 토요일 까지 3일간의 가장 큰 고통은 반드시 누어 꼼짝없이 천장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불면증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복식호흡을 하고 기침을 하면 회복에 좋다 해서 복식호흡을 백을 세도록 해도 시간은 겨우 몇 분뿐이 가지 않았다. 욕창이 생기지 말라고 깐 에어매트에서는 전기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온도는 지나치게 높았다.

(온도를 낮추거나 전기를 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더구나 커튼 옆 침대에는 86세 되신 노인분이 50여 일 동안 투병하고 계시는데 대상포진이 폐로 와서 들 숨 날 숨이 어찌나 요란한지 도대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침이 오기까지 한 숨도 못자고 1, 1초 시간을 세면서 그 긴 시간을 견딘다는 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이런 상태로 이틀이 지나자 병실 생활이 두렵고 무서웠다.

첫날부터 하루도 안 빠지고 찾아와 내 상태를 확인하고 가시는 은과장님이 마침 정신건강과 과장님임을 깨닫고 내 불면증을 하소연했다.

진즉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천연재료로 만든 약인지라 습관성이거나 부작용이 전혀 없이 심신이 편안한 상태로 자연스럽게 잠을 유도하는 조그만 알약 3정을 정식으로 처방해주셨다. 그날 밤부터 잠을 겨우 잘 수 있었다.


38일 일요일

"방금 수술을 집도하신 의사선생님께서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오셔서 제 몸 상태를 꼼꼼하게 점검하셨습니다. 수술할 때의 상황은 휠체어를 타야할 형편이었는데 천만다행으로 사지 말초까지 신경이 잘 전달되어 재활만 잘하면 일상적 복귀에 문제가 없다고 너무 기뻐하시며 가셨습니다. 여러분의 염려와 기도에 기쁜 소식으로 답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천장을 쳐다보며 문자드리기가 너무 힘들어 여기까지만……." (38일 페이스북)

 

이 날, 신과장님은 내 몸을 세심하게 체크하셨다.

나와 아내는 그동안 궁금했던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들을 물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침대를 20도 정도 올려도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이만해도 어디냐!

하루 뒤에는 정식 병원 밥이 나왔다.

반드시 누워 죽을 먹어도 기도로 들어갈까 봐 걱정이었는데 밥과 반찬을 씹어 식도로 넘긴다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어려운지 끼니마다 두 숟갈을 더 먹질 못했다.

밥을 먹게 되면서 수액대신 하루 세 번씩 한 움큼의 알약으로 대체되었고 그 알약들 중에는 붉은 봉투에 든 마약도 있었다.

오후에 이웃 원장님이 사모님과 오셨다.

사모님은 보자기를 풀어 전복죽에 반찬들을 이것저것 꺼내 놓으셨다.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귀신같이 알아서 해 오신 것이다.

사모님은 이와 같은 일을 일요일이면 원장님과 동행하여 어김없이 반복하셨다.

 

312일 목요일

"이 단순하고 답답한 공간에 누워 보낸 일주일 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한 인간으로 직립하는 모든 과정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침대 각도는 조금씩 높여졌고 심장 가까운 쪽에 깊숙이 박혀있던 관과 등 부위에 고여 있는 피 배출하는 관도 빼내고

오늘은 부분적으로 수술 자리를 봉합한 스태플러 핀을 제거하고 소독도 마쳤습니다.

, 소변 줄도 빼내 자력으로 소변관리가 가능해졌습니다.

엉킨 링거 줄들이 하나씩 제거될 때마다 해방감을 만끽하게 됩니다. 나는 곧 자유로워 질 거라는…….

주문한 복대를 두르고 앉기와 서기를 하는데 온몸이 다 젖더군요.

이렇게 제 두 번째의 삶은 위태롭지만 안정되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할 수 있어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들네가 블루투스 헤드폰을 택배로 보내주어 유투브로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오페라 아리아들도 맘껏 듣습니다나도 모르게 양 볼로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영상은 누워 핸드폰을 눈앞에 올리고 봐야하기 때문에 팔이 너무 아파 음악만 듣습니다.

그렇지만 음악에만 집중 할 수 있으니 더욱 좋을 뿐입니다.

세상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 풍부한 영성으로 말입니다!

모든 게 엉망진창 갈피를 못 잡던 일들이 나름대로 질서를 찾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도 주시지만 그 깊이에서 삶의 통찰을 주시고 놓여남도 주십니다.

방금 전에는 출판사 사람이 와서 사고로 전달하지 못한 2차 교정지도 아내가 대신 전달했습니다.

코로나사태도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보내주시는 격려와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312일 페이스북)

 

319일 목요일

"오늘로써 딱 2주째 병원생활이다.

아침에 여기저기서 전화연락이 왔다.

전주지역10번째 코로나 확진자 최종방문지가 내가 입원한 병원 선별진료소라는데 괜찮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병동의 간호사들도 청소하는 아줌마도 아무 기미도 없다.

밍밍한 병원 밥에 식상한지라 뭔가 달달한 것이 먹고 싶어 아내에게 커피모카 한잔과 진한 부라우니를 사달라면서 바깥동정을 살펴보고 오라고 부탁했다. 아내의 전언에 따르면 이 병원 선별진료소는 병원본체와 떨어져 있고 호흡기 환자들은 다 이쪽으로 보낸단다. 그러면서 편의점 사장님 말씀이 이 병원은 안심병원이라 하셨단다.

안심병원! 얼마나 안심되고 위로되는 말인가!  

부라우니나 커피모카에는 소독약 냄새도, 이를 악무는 신음소리도, 불면의 고통도 섞여있지 않았다.

안타까운 봄날, 흐드러진 벚꽃 향을 탐하는 꿀벌의 잉잉거림처럼 나는 이 달달하고 뜨겁고 쌉싸름한 커피모카를 홀짝거리며 안심병원이란 말을 음미한다." (319일 페이스북)

 



 

입원 생활 4주 동안 병실에 꼬박 갇혀 온갖 수발을 들어준 아내는 그날 현장을 목격하면서 놀란 나머지 손뿐이 아니라 발에서 쉰내가 날 지경으로 땀을 흘렸다이 때문에 밤이면 그 좁아빠진 간이침대에서 자그마한 발을 내놓고 자는 모습이 애처러워 달래마늘 같이 쬐그만 숙아...”라는 미당선생의 시구가 저절로 떠올랐다

나는 아내에게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준 것이다.

 

두 번째로 의지한 것은 보조기구 돌돌이었다.

솜씨 없는 사람이 조립한 티가 역력한 돌돌이는 다리의 좌우 길이가 달라 반원형인 상단 부분이 한쪽으로 내려앉았을 뿐만 아니라 어느 구석 하나 반듯함이 없어 못나 뵈는 기구였다.

그러나 난 돌돌이에 의지해서 일어서고 걷고 용변도 봤다. 변기에 힘겹게 앉아 두 다리를 내려다보니, 꼼짝 못하고 누워 지낸 9일 동안에 근육이 다 빠져나가 앙상할 대로 앙상해진 모습이 꼭 아프리카 난민과 같아 서글퍼졌다

가장 감격적인 것은 칫솔로 양치를 하는 순간이었다그동안은 음식을 먹고 가글로 입안을 행궈 옆으로 고개를 돌려서 뱉어냈었다. 이때도 돌돌이는 내 허리가 돼 준 것이다그뿐인가 2주 정도에서는 샤워도 할 수 있었다. 물론 난 어린아이처럼 아내의 손에 내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교회 목사님은 어떻게 아셨는지 수술 중에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오셔서 불안을 가슴에 안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일행과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가셨다는 것이다나중에 알고 보니 은과장님이 연락을 드렸다는 것이다.

전화도 수시로 주셔서 내 몸의 상태를 물어 주시고 병실까지 찾아오셔서 기도도 많이 해주셨다.


아내의 오랜 친구들은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여 수시로 찾아와 외부인도 출입이 자유로운 원무과 앞 로비에서 반찬거리도 건네 고 커피와 함께 대화도 나누는 등, 지친 아내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주셨다.

이 때문에 곤란한 일도 벌어졌다. 반찬이 너무나 많이 들어와 두 군데서 나눠 사용해야 할 냉장고가 빈 공간이 없어 아내는 내내 애를 먹었다뿐만 인가. 면회가 일체 금지된 병원을 방문할 수 없어 애만 태우며 기도와 문자로 투병생활을 이겨낼 수 있게 성원 해주신 한 분, 한 분 어찌 그 고마움을 다 전할 수 있을지.....

나는 많은 분들에게 은혜를 입었고 그만큼 빚진 자가 되었다.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페북의 친구들이다. 책도 읽지 못하고 눕거나 서있어야만 하는 나의 그 많은 무료한 시간들 속에서 페북의 친구들로부터 수많은 격려와 쾌유를 비는 메시지는 내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그러나 내 몸의 상태로 일일이 답글로 답할 수 없음이 죄송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놓칠 뻔했구나! 원래 예수병원이 친절한 병원이라 소문을 들었지만 45병동의 간호사분들, 한 번도 찡그리지 않고 환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까다로운 요구에도 가족 같은 친절과 인술을 베풀어 주셨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이렇게 인내심과 직업의식이 투철하다니!

지켜보는 나로서는 그저 매일 매일이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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