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책을 버리다

작곡가 지성호 2020. 12. 21. 07:41

한 때, 만권당(萬卷堂)을 꿈꾸면서 한 권 한 권 사 모은 책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고 살았습니다.

바라 볼 때마다 부자가 곡간에 가득 쟁여진 쌀가마를 바라보는 심사가 이러려니 하면서 말입니다.

3십년, 4십년 넘은 묵은 책들을 열흘 전쯤 1톤짜리 용달차가 두 번에 걸쳐 실어갔습니다.

누렇게 책갈피는 갈변되었고 세로로 두 단 씩 작은 활자로 빼곡히 채운 글씨를 더는 읽을 수 없는 노안이 되었음을 진작 알았지만 버리지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책에 따라서는 사연도 더깨더깨 쌓여있는 손때 묻은 책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은 너무 욕심나는 책이었지만 우리 세 식구가 한 달을 좋이 먹고도 남을 쌀값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가격인지로 들었다 놓았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그만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당시 비싼 하숙집이 쌀 일곱 말 이었습니다)

아내가 이 말을 벌로 듣지 않았던지 벙어리저금통에 동전 한 닢 한 닢, 일 년을 모아 내 앞에 내놓았습니다.

방학이면 큰 배낭을 메고 서울의 유명 서점을 돌며 책 순례행각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오가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물 한 병 안 사마시고 점심은 언제나 짜장면 한 그릇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모은 책들인지라 애착이 없을 수 없습니다.

뭐든 버리기 좋아하는 아내도 책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아내가 우리가 죽으면 이 책 더미를 아들네가 없애야 한다는 말에 생각을 바꿨습니다.

불요불급한 책들을 다 정리하여 책꽂이에 들어갈 정도만 남겼습니다.

드나들 때마다 열 평인 서재가 휑하니 이토록 넓은 줄 몰랐습니다.

시원섭섭이 바로 이런 심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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