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가족여행

오키나와 가족여행1

작곡가 지성호 2017. 12. 28. 18:26

124일 월요일

 

12월의 첫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7시인데도 인천공항은 북새통이다.

나라를 떠나는(?) 번거로운 절차를 다 끝내고 보딩 게이트에서 뜨거운 커피를 목 넘기며 오르내리는 비행기들을 무연히 바라보는 이 시간이 가장 한갓지고 행복하다. 나를 닦달하고 억압하던 모든 일에서부터 놓여나는 해방감이 깊은 커피의 뒷맛과 함께 온 몸으로 스며든다.

좋다, 더할 나위 없이 참 좋다!



토요일 어둠이 이슥할 때 까지 나는 차고 짓는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애를 써야했다. 한 달 보름여 동안의 뻑센 노동에 온몸의 근육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고 여기저기 다친 상처로 쓰라렸지만 일요일 새벽 두 시경에는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겨우 추슬러 교회 관현악단 편곡을 해야 했고 예배 마친 후 부랴부랴 김포 사는 아들네로 운전해 올라갔다. 그 과정도 쉽지만은 않았다. 고속도로가 붐벼 그랬는지 똑똑한 내비게이션이 정안 휴게소 근방에서 세종시 쪽으로 유도하는 바람에 국도로 나섰다가 주말 오락가락하는 빗속에서 한없이 정체와 지체가 반복돼 에너지를 소진시켰다. 피곤이 극에 달했는지 오른쪽 눈의 떨림 현상이 심해 운전하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저녁을 아들네와 같이 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체 휴게소 음식으로 대충 때우고 늦은 밤이 돼서야 겨우 도착할 수가 있었다.

 

이륙 라인에 도착한 비행기가 몸을 부르르 떨며 굉음을 울린다. 창가에서 바라보이는 날개가 출렁인다. 드디어 이륙명령이 떨어졌는지 전속으로 내달리던 비행기가 중력의 저항을 깨고 창공을 향해 박차고 올라갈 때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무릎위에 바투 쥐게 된다. 안전한 대지에서 뿌리 뽑힌 승객들에게 묘한 긴장감의 연대가 만들어 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도 이와 같으리라. 일상이 내 뒷목을 잡아끄는 힘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힘을 쏟아 부어야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몇 번인가의 선회 끝에 안정된 항로에 이르렀는지 승무원들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할 일없는 나는 비행기의 단속적인 엔진 음을 들으며 비몽사몽 깊은 상념에 빠진다. 마침 창가에 배정된 자리에서 바라 뵈는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하다. 실체도 없이 잡히지 않는 것들이 저리도 한데 뭉치고 뭉쳐 누천년 켜켜이 쌓인 설원을 방불케 한다. 저러한 집적을 가능하게 한 자연현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가없는 허적 속을 내가 탄 비행기는 난 바다의 조각배와 같이 외로운 한 점으로 운항한다. 광막한 것들이 주는 존재론적 쓸쓸함이 엄습한다. 우주선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우주인들의 심정도 이러려나?

 


이번 여행은 전적으로 며늘애가 나서서 추진한 것이다. 아들네도 큰 프로젝트를 감당하느라 오랜 동안 분투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밤잠 못자고 하는 일이 대물림되었는지 양쪽 다 밤샘을 밥 먹듯 하다가 놓여나는 시점을 며늘애가 겨냥에 날짜를 잡은 것이다.

난 부자간의 정리(情理)를 담담하게 유지하려 하는 사람이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遊學)을 떠날 때 불러 선언하듯 일렀다. “이제 너는 나의 보호를 떠나 전적으로 너의 책임과 판단아래 세상을 살아라. 너는 이제 자유다.”

이후로 먼 곳에서 거리를 두고 지켜볼 뿐이지 불간섭을 원칙으로 했다.

아들놈이거니 하는 핑계로 대학을 다니는 동안 한 번도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지도 않았고 졸업식조차도 찾아가지 않았다. 아들놈도 그러려니 한다. 그런 아들놈도 군대에 보내고 돌아설 땐 코끝이 시큰했었다. 짧은 머리로 풀 죽은 체 줄지어 들어가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밟혀 한동안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훈련이 끝나고 공개수료행사를 한다고 통보가 와서 부대를 찾아 갔더니 다른 아들들은 죄 부모를 찾아 얼싸안고 해후를 기뻐하는데 아들놈만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군복을 입혀놓으니 그놈이 그놈 같아 찾을 길도 없었다. 어쩌다보니 연병장에 나만 홀로 남아 있었다. 혹시 뭔 일이 잘못 됐나 해서 소대장을 찾아가 물어보니 훈련을 잘 마치고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왜 만나지 못했냐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좀 창피한 맘도 들고 일을 이렇게 만든 아들놈이 괘씸하게도 생각되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부대 앞 버스 정류장에서 아들놈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아까 버스 타고 집에 간다고 했다면서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세우더니 아들놈을 끌고 내려왔다. 기가 막히고 화도 나서 나무랐더니 이놈 하는 말 아버지가 여길 웬일로 오셨어요? 저는 당연히 안 오실 줄 알았지요.”

외동아들이라 개똥밭에 참외처럼 강하게 키우려 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 했나 회의가 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떻든 이놈이 나이가 들어 지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 했을 때도 네가 평생 같이 살 여자이고 네 선택이려니 하고 며느리 될 애에 대해 물어 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다 치고 아내조차도 그랬다.

결혼식도 너희 둘이 생각을 모아 최대한 군더더기 없이 하거라이르고 양가 사촌까지 로만 하객을 제한하여 꽃피는 봄날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조촐하지만 흡족하게 치렀다.



                    아들과 며늘애 둘이 머리를 맞대고  준비한 호숫가 결혼식장


나는 명절처럼 달뜨고 뒤숭숭한 날 보다는 어제와 오늘이 다를 바 없고 내일이라고 특별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좋아한다. 끊임없이 융융하게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렇게 삶도 죽음도 흘러가길 바랄 뿐이다. 마찬가지로 아들네의 삶에 의무와 도덕률로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애초부터 없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집착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니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아비는 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한다. 그 삶의 눈물겨운 경주는 자식에게 바통으로 이어 갈 뿐이다. 한갓 미물인 동물의 세계도 다를 바 없다.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이다.

 

아들네 집에 도착해서 내온 차를 마시며 아들네와 대화를 하는 중에 아들이 무언가 작은 사진을 내놓았다. 흘깃 보니 초음파 사진이었다. 며칠 전에 병원에서 확인했으면서도 전화상으로 얘기를 안 하고 이 시간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며늘애가 잉태를 한 것이다.

막연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둘은 은근히 애를 태우고 있었나 보다.

아들네가 결혼한 지 4년이 지난 올 추석,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아들보다 늦게 시집간 조카가 애를 안고 왔다. 아들 대()에서는 처음인 아기에게 모두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 내 동생이 불쑥 며느리에게 넌 아직 애기 소식이 없니?” 물어왔을 때 당황하는 며느리를 보았다.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아내가 그날 며느리를 불러 애야 우리는 대를 잇는데 그렇게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니 애를 갖는 문제는 전적으로 늬들 뜻대로 하거라이르는 것을 들었었다.

 

아버지는 기쁘지 않으세요? 장모님은 우시던데

왜 기쁘지 않겠느냐만 나와 아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좀 당황하기도 했었다.

우리 부부가 굉장히 놀라고 기뻐 할 거라고 생각했던 아들은 우리가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좀 서운한 눈치였다. “ 애야, 그렇다면 이번 여행은 좀 위험하지 않겠니?” 내가 물었다. “ , 저희도 그 점이 염려돼서 의사선생님께 물어보니 조심하면 별 문제없다고 하셨어요.” 며느리의 대답에 판단이 잘 서지 않았지만 이왕에 길을 나선 것, 떠나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별 말 못했지만 난 이번 여행을 통해 차분히 아들네의 임신에 대해 아비로서의 내 마음을 전할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난 아들이 미대를 졸업할 즈음, 집에 내려 왔을 때 진지한 애기를 했었다.

너는 이제 졸업하면 너의 진로를 어떻게 할 작정이니?”

전 아무래도 순수 예술 쪽으로 가고 싶어요.”

그래, 너의 결정이니 존중한다만 작가의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알고 있겠지? 난 우리 집에서 그 길은 나 혼자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너는 좀 더 편하게 살면 안 되겠니?” 그런다고 해서 마음을 바꿀 애도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 길을 평생 걸어온 선배로서 얘기를 하마. 네가 정 그 길을 가고자 한다면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살아보니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에겐 한 가정의 가장노릇이 너무나 버겁더구나. 나는 작곡을 합내하고 살았지만 네 엄마는 말도 못할 고생을 했고 너 또한 그러지 않았니? 나 또한 예술을 쫒아 가면 생활이 안 되고 생활을 쫒아 가면 예술이 안 되는 양단속에서 위태로운 곡예를 하면서 이때까지 살아왔단다. 그러니 다 하는 결혼이라고 나도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심각하게 생각하렴.” 애비로서 자식을 앞에 두고 할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뼈를 깎는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버나드 쇼는 이런 말을 했다. ‘참된 예술가는 아내를 굶기고, 아이들을 신발도 못 신기고, 70세나 되는 어머니에게 살림을 거들게 하면서 자기의 예술 이외의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잔인하도록 맞는 말이다. 안정된 수입 없이 살아야 하는 예술가의 삶에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찮은 예술가라도 그것은 피할 길이 없다.

난 좋은 혼사자리를 다 물리치고 나만 바라보는 아내를 어쩔 수 없어 이모님에게 30만원을 빌려 결혼을 하였다. 그 후 오늘까지 작곡가로서 칼날 위에 서서 살아왔다. 아내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삶이었다. 이제 아들네는 곧 한 아이의 부모가 된다. 아기는 당연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아이겠지만 아들네는 그 생명을 양육하고 가르치느라 고단한 삶을 살면서 내가 그랬듯이 생활과 예술 사이에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아 갈 것이다. 난 이러한 대물림이 안쓰러워 차마 아들네의 임신을 축하한다고 섣불리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기가 불안정한지 자주 요동치던 비행기가 오키나와에 근접했나보다. 저 아래 구름 사이로 큰 파도 한 번 들이치면 휩쓸릴 것 같은 환초가 나타난다. 바다의 첨단이 갈기를 세워 환초를 향해 돌진하다 하얗게 부서진다. 기어이 덮어버리겠다고 끝없는 파상공격을 해대는 모습을 외포(畏怖)의 눈으로 조감한다.

난 오키나와를 바라고 여행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유토피아로 설정했던 율도국이 류큐왕국이나 위도(蝟島)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옷깃에 바닷바람 냄새를 풍기는 선원으로부터 막연한 풍문으로만 들었을 허균 에게 오키나와는 차별 없는 이상향을 구현할 환상의 섬이었다. 몇 년 전에 읽은 황석영의 심청이란 소설에서도 팔려간 심청이 매춘녀로 동남아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류큐 왕국에 머무는 대목이 나온다. 태평양상의 작은 점하나 외로운 낙도는 작가들에게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했나보다. 그러나 이제 추운 겨울에도 비행기를 타면 두 시간이면 산호초 해변이 나오는 아열대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무사히 착륙한 후 기장의 굿바이 멘트가 나온다. 오키나와의 현재기온은 22,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한다.

기장 말대로 공항 밖을 나오니 바닷가 특유의 드센 바람이 분다. 문을 나서면 확 트인 바닷가를 기대했는데 회색으로 우중충한 건물들이 예상을 깬다. 실용적인 면에서는 부족함이 없다 하겠지만 미관으로서는 회색의 공업단지같이 삭막하게만 보일 뿐이다. 지난 번 멕시코의 꼴리마 공항에서는 꽃으로 잘 가꿔진 시골 기차역 같은 정겨움에 긴 여행의 긴장과 피로가 확 풀렸었는데...


        

                        한가로운 나하공항 국제선


렌트카 회사의 버스를 타고 나하시로 진입한다. 한적한 섬 인줄 알았더니 고가도로를 비롯해 모노레일도 있고 촘촘한 입체적인 도로시설로 대도시를 방불케 한다.

일본의 도로체계는 한국과는 정반대다. 렌트카의 핸들도 오른쪽에 있어 한국사람 에겐 적응하는 곤란함과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하겠다. 운전하다보면 돌발 상황에선 이성적 판단보다는 운동신경의 감각적 대처가 앞서는데 좀 걱정이 되는 부분이다



       



우리 부부는 아들네에게 모든 걸 맡기고 그저 뒷좌석에서 구경만 하는데도 내심 걱정이 된다.

, 저기 보이는 저것이 오키나와 사람들의 액막이이자 수호신인 시샤로구나


        


미자라는 간판이 돋보이고. 미자! 우리 한국에선 흔해빠진 이름인데....


       


아들네가 세밀하게 계획해 둔 첫 번째 식당은 오키나와의 이름 난 토속음식점이란다. 다행히 아들네는 두 번째 방문인지라 우왕좌왕이 없어 우리는 열심히 뒤만 쫄쫄 따라다니면 된다.       

               

이 집 오키나와식 소바 맛은 본토의 소바와는 사뭇 다른 뽀얀 돼지 사골국물에 메밀이 아닌 면발이 굵은 밀가루 면이다. 제주도에서 먹는 고기국수 맛이 난다. 고명으로 수육을 넓적하게 썰어 얹어낸 점도 닮았다. 메밀 소바를 좋아하는 내 입에 썩 당기는 맛은 아니지만 오키나와 토속음식이란 면에서 한 번은 맛봐야 할 음식이겠다. 다른 음식들도 다 짭조름하면서 돼지고기를 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꾸 제주도나 대만의 길거리 음식들이 연상되었다


        

      

이 식당의 남다른 점은 마당에 사람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조성한 일본식 정원이다. 산호초 부서진 모래인지 결이 굵은 모래에 동심원을 정성으로 그리고 그 중심에는 검은 화산석을 놓은 것이 전형적인 가레산스이식(枯山水式) 정원의 지정식(池庭式) 정원으로 보인다.  가레산스이식이란 것이 정원의 바닥에 모래를 깔고 갈퀴로 물의 파문을 그려 표현하기도 하고, 돌을 쌓아 올려 폭포를 만들고 그 아래에 모래를 깔아서 흐르는 물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저 동심원 파문의 근원은 두 화산석이다. 이로부터 고요한 수면에 파문이 동심원의 이랑을 그리며 둘레로 퍼져나가는 모습은 정중동의 순간이다. 파문은 있으되 제자리인 고요한 정지의 상태다. 대단히 내밀한 정적과 만길 바다 속 같은 침잠을 상징한 것이겠다. 서슬 푸르게 용맹정진 하지만 그러나 그 겉모습은 결가부좌를 틀고 선정에 든 선방의 정적과 같이... 실제로 일본 선종의 사찰에서 참선하는데 활용하는 정원이란다.

저자거리 한 복판, 고기 삶는 냄새 가득한 음식점의 정원치고는 아이러니하다. 한편 생각해보면 오키나와는 일본이라 하기에는 다른 역사적, 문화적 궤적을 가지고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부대끼며 조공이란 형식으로 왕국을 유지하다가 한국보다는 30년 먼저 1879년 일본 제국에 강제 병합되었다. 애초 일본의 영토가 아닌 것이다.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점령국 미국에 27년간의 통치를 받다가 괌처럼 미국령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일본본토로 복귀할 것인가 아니면 류큐로 독립할 것인가를 놓고 삼분돼 대립하다가 결국 1972, 일본의 오키나와현()’에 귀속된 만큼 다양한 문화가 혼재되어 나타난다고 하겠다. 어쩌면 이 식당은 음식은 오키나와식이고 정원은 일본 사찰식인 혼합문화의 상징적 공간이라 봐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나저나 저렇게 줄 사이의 간격이나 흠 없는 완벽한 동심원을 모래위에 그린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숙련의 결과인지 아니면 내려오는 전승의 비법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오키나와의 수호신 시샤는 제주도의 돌하르방 같이 도처에서 쉽게 목격된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식당 바로 옆 집 출입문 위의 시샤. 그건 그렇고 이 묵은 오키나와 전통 가옥, 참 맘에 든다


        

             슈리성 가는 길, 오키나와현립예술대학 담장에도 예외없이 시샤가 놓여있다. 


슈리성에 맞닿아있는 예술대학은 슈리성 일대의 잘 보존된 세계문화유산을 앞마당처럼 향유하는 기가 막힌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차량 출입을 금지하는 차단 시설을 벗어나자마자 왼편으로 보이는 오래된 성문


이 일대는 2000 12, “구스쿠 유적 및 류큐국 유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바 있다. 예술대학에서 들어가는 초입, 숲에 감추어진 은밀한 연못이 보인다. 처음엔 깊이 파인 성채의 해자인줄 알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녹색의 물에 에워싸인 '베자이덴도'라는 조그마한 사찰인데 1502년 조선으로부터 전해진 불경을 보관했던 장소란다





이 건물에 진입하는 저 공들여 만든 다리는 텐뇨 바시, 즉 천녀교(天女橋)로 일본에서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석조교라 한다




창조의 샘이 고갈됐을 때, 그리하여 절망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이 길에 들어선다면 돌담이며 이끼며 오랜 세월 풍우를 견딘 것들이 풍기는 향훈과 울울창창한 수목들을 뒤흔들며 웅웅거리는 바람들이 풀어놓는 숱한 서사(敍事)에 귀 기울이며 많은 소재적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예술가에게 산책은 모든 감각하는 것들이 내부에 찾아와서 발상의 배아를 꿈틀거리게 하는 봄날의 훈풍과 같은 것이다.
입구에서 바라본 슈리성은 류큐왕국의 총본산답게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면서도 겹겹이 튼튼한 성벽을 구축해 난공불락의 요새로 보인다. 중국과 일본의 축성 양식을 융합하여 류큐 왕국의 독자적 건축양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문화적,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조금 오르니 공들여 만든 예사롭지 않은 석문이 보인다. 소노햔우타키 석문(園比屋武御嶽石門)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이라 한다.  이 석문은 류큐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왕이 외출할 때 안전을 기원한 예배소였단다. 오키나와 전투 때 일부가 파괴되어 1957년에 복원되었단다. 석회암이 색깔이 사뭇 다른 것이 여실한 복원의 흔적이겠다




한 젊은이가 소노햔우타키 석문(園比屋武御嶽石門)앞에서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무어라 읊조리며 있다.




성벽의 모서리마다 버선코처럼 들려져 있는 것이 독특하다




 성벽을 유심히 드려다 보면 퍽이나 정교하게 석회암을 가공하여 축성한 것이 관찰된다. 잉카의 공중도시 마추픽추의 칼로 자른 듯한 석벽이 연상된다



    뿐만 아니라 검은 이끼가 번진 틈새로 넝쿨식물들이 뿌리를 내린 고색창연한 성벽이 있는가하면  



       개축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반듯한 성벽도 보인다.




이렇게 된 까닭은 슈리성 일대가 가장 치열하고 비참했던 태평양전쟁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은 총사령부를 성내에 두고 무수히 많은 참호를 파고 결사항전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미군의 포격목표가 되었다. 미군은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일본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수순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오키나와에 상륙하기 위해 1945525일부터 3일 동안에 이 일대에 그 무섭다는 무차별 함포포격을 가한다. 이런 식으로 오키나와 전쟁 중 미군은 270만 발이 넘는 포탄을 오키나와에 퍼부었고 이는 오키나와 인구 1명당 50발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를 '철의 폭풍'이라 한다. 마침내 529일 슈리성은 함락된다. 류큐 왕조의 수많은 문화재는 이때 대부분 소실되었다한다. 전후에 무너진 성벽은 복원되었고 지금과 같이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오키나와는 환상의 관광지가 아니라 참혹한 전쟁의 상흔이 점철된 곳이다.
슈리성에서 참패한 일본군 사령부는 섬 남쪽 지역의 마부니 고지 동굴로 퇴각하여 옥쇄를 선택한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본군부의 죄상은 미군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하여 죄 없는 오키나와 인들에게 집단 자결을 강요한 사실이다. 일본군의 만행은 이것뿐만 아니라 아이를 업고 있는 아녀자의 몸에 폭탄을 두르게 하여 적진으로 내몰았고 아이들에게는 수류탄을 주어 적진으로 내몰았다. 종국에는 옥쇄라는 미명으로 해안 절벽에 몸을 던지거나 가족끼리 서로 목을 졸라 죽이는 참극이 일어났다. 이렇게 희생된 민간인이122,228명이다. 여기에는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1만 명도 포함되었다. 지금도 평화공원에서는 미군에 쫓기던 사람들이 집단 자결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한다. 수학여행 온 일본 학생들은 그걸 보고 운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이 부분을 좀 발췌하자면 평화공원의 딜레마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이 다 섞여서 새겨졌다는 점이다. 모두가 희생자가 되면서 역사적 맥락이 휘발됐다. 원래 일본군이 오키나와 주민을 총으로 겨누는 조형물이 있었는데, 자민당 쪽에서 (총구 방향을) 바꾸도록 했다.” 재앙을 일으킨 일본은 이 추악한 역사를 반성하기를 꺼려한다. 오히려 반복하려 획책하고 있다.
내가 오래 전 대만에 세미나 참석차 갔을 때 묵게 된 집의 며느리가 오키나와 사람이었는데 그 여인은 일본본토인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난 지금도 묵직한 역사물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도 도서관에서 전사(戰史)를 많이 읽었었다. 태평양전쟁에 관한 실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군부의 무모한 진주만 공격부터 미드웨이 해전,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의 옥쇄부분도 상기된다. 그 참혹한 전쟁의 참상에 진저리치며 잠 못 이루던 기억이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그 유명한 <전쟁론>에서 전쟁에 도덕의 논리를 개입시키지 말라...전쟁이란 극단적 폭력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전우들로 가득 찬 헛간에 누군가의 부주의로 갑자기 화재가 발생하자 문밖의 병사는 헛간 주위로 몰려들어 몸을 녹일 뿐, 안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아우성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한 병사의 기록이 있다. 전쟁은 인간을 야수로 변모시키는 광기의 산물이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한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기원전 3500년부터 20세기까지 14500회의 전쟁이 발발했고 35억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평화의 시기는 고작 300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그럴듯한 명분으로 전쟁의 필연성을 포장했고 명분이 없으면 조작이라도 했다. 그 사지에 젊은이들을 애국심이나 정의로 현혹해 내몰았다. 인간에게 전쟁의 유전인자는 통제하기가 힘든 모양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핵무기를 가지고 위험한 도박을 벌이는 북한과 강대국들의 치열한 패권다툼과 힘의 논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종잡을 수 없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핵전쟁일 확률이 높고 우리 한반도는 재기불능의 재앙을 입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명운이 달린 이 시점에 무책임하게 전쟁을 선동하는 정치가들과 집단이 있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슈리성에서 일본본토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아직도 내가 중, 고등학교 다닐 때 입었던 것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고 여학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해방되고서도 여전히 일본을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 가까운 곳엔 교복을 입는 예술고등학교가 있는데 일본 학생들과는 교복을 입는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여학생들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새빨간 루즈를 칠하고 짧은 치마에 어떻게 활동하나 걱정될 정도로 꼭 죄는 교복을 입는다. 남학생들도 교복을 단정히 입고 다니는 학생들을 보기가 힘들다. 풀어 헤치거나 어떤 식으로든 변형된 교복을 착용하고 있다. 이들에게 교복은 참을 수 없는 족쇄로 작용하나보다. 저럴 바에는 차라리 교복을 자율화하는 게 낳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에 비해 일본 학생들은 촌스러울 정도로 단정하고 소박하다. 여행이라면 사복도 허용 할 만한데 하나같이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학생들의 태도도 유심히 관찰해보면 질서가 있고 크게 떠들거나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요즘 한국의 말 안 듣는 같은 또래의 학생들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오죽하면 북한이 전쟁을 도발하지 못하는 게 남한의 중학생들이 무서워서 그런다는 우스개가 나올까.

그러나 나는 규칙에 잘 순응하는 일본 학생들을 보며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일본인 개개인은 친절하고 예의바르다. 그러나 이들이 집단화하면 어떤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정치후진국으로 전락해 견제 받지 않는 일본의 자민당과 아베의 우경화가 아주 위험하게 보일 뿐이다.

오후가 되면서 하늘은 잿빛으로 흐리고 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저 태평양에서부터 몰려오는 바람이 아열대의 메숲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고 높고 검은 성곽사이를 우우 소리 지르며 몰려다닌다. 슬픈 역사의 뒤안길을 걷는 이방인의 눈에는 으스스하게 심상치 않은 광경이다

 



세나가 비치(瀬長ビーチ)

 

슈리성을 빠져나와 어디 전망 좋은 곳에서 고단한 몸을 쉬며 여유 있게 커피 한 잔을 할만한 장소를 물색하다 노을의 명소라는 세나가 섬을 가기로 했다. 세나가 섬은 나하 공항이 빤히 바라 뵈는 섬으로 방조제로 연결되어있다. 바람이 무척 거세 태풍수준인데도 비행기 운항에는 지장이 없는지 굉음을 울리며 연신 뜨고 내린다. 놀라운 것은 어떤 용감한 사람이 걷기조차 힘든 대찬 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홀로 윈드서핑을 한다. 돛은 활처럼 휘고 파도 위를 거의 날아가는 속도로 내달린다. 저러다 좁은 방조제안에서 암초라도 부딪히면 어쩌나 보는 사람이 다 조마조마하다



    마침 대한항공이 착륙하고 있다. 윈드서핑하는 사람이 아직은 돛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겹겹이 중첩된 구름 틈새로 우리 보라는 듯 태양은 필사적으로 빛을 모아 바다로 투사한다



 지중해의 건물들처럼 흰색으로 통일된 상점들이 언덕배기에 바다를 향해 군집을 이루고 있다.



 그럴듯한 카페를 열심히 찾아보지만 의외로 카페는 보이지 않고 기념품 가게이거나 음식점뿐이다. 그러고 보니 오키나와엔 한국처럼 카페가 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맛집으로 소문난 팬케이크 가게만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있을뿐 나머지 가게들은 비철인지, 아니면 바람 때문인지 썰렁하다. 전망 좋은 카페에서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가없는 바다에 침잠하는 낙조를 바라본다는 기대가 무너진다 생각하니 황금빛 크레마 거품 넘치는 에스프레소 한 잔이 더욱 절실해진다. 어렵사리 찾은 카페는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다. 비닐봉지에 담긴 과자와 빨갛고 파랗고 노란 음료수, 보잘 것 없는 크리스마스 장식들, 그보다 더 보잘 것 없는 기념품들, 그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싸구려 음악이 흘러나온다. 내키진 않지만 들어 온 이상 그냥 나가기가 뭐해 에스프레소와 과자 한 봉을 주문했다. ,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크레마 거품을 머금은 에스프레소가 의외로 순하고 부드럽고 맛이 있다. 과자도 모양은 시골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과자 같은데 너무 단 것 빼고는 의외로 고소하고 맛이 있다. 봉지를 보니 오키나와 특산품이란다. 난 하루에 딱 한 잔, 점심 후에 에스프레소를 즐긴다. 그러나 그 한 잔은 에스프레소 잔이 아니라 보통 카페에서 통용되는 투샷보다 더 많은 양을 마신다. 의식처럼 고착된 점심 후의 커피를 걸렀더니 금단현상처럼 몸에서 자꾸 커피를 목말라하는데 이렇게나마 해소 할 수 있어 다행이다



      날씨도 쌀쌀해져 거센 바람과 함께 체감온도도 많이 떨어졌다. 고부간에 추위를 타는 것도 똑같아서 혹시나 해서 준비해        간 겨울 옷을 입고서도  추위를 탄다


이제 오늘 묵을 숙소를 찾아 간다. 퇴근 시간인지 차가 정체된다. 오키나와는 표준시가 한국과는 동일하지만 위도때문인지 어둠은 한국보다는 늦게 찾아온다. 나하시를 빠져나와 어둠이 내리는 이국땅의 알 수 없는 도로를 차는 쉬지 않고 달린다. 뒷좌석의 나와 아내는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른 체 그저 따라 갈 뿐이다. 아들이 어렸을 땐 내 의도로 목표를 정하고 내가 운전을 했었다. 이제 아들이 장성하여 역할이 바뀐 것이다.

문득 도종환 시인의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

내 인생의 시계는 지금 몇 시일까? 몇 시간이나 남았을까?

지혜자로 불리는 솔로몬 왕도 알 수 없는 생사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한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전도서6:12)”

사람들이 내 나이를 물으면 대답을 주저하는 나이가 되었다. 헤아려 보다가 스스로 깜짝 놀라는 나이가 된 것이다. 내가 조선 시대 왕이라면 전하, 이제 세자에게 보위를 넘기시고 상왕으로 물러나 여생을 편히 쉬심이 옳을지 아뢰오!” 라는 충신의 간언을 들을 나이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왕도 아니고 물려줄 보위도 없지만 이번 가족여행을 통해 내가 상왕으로 퇴임하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산길로 접어든다. 길은 좁고 한없이 구불구불하다. 칠흑같이 어두운 차창에 언제부턴가 꽉찬 달이 따라온다. 보름인가? 어디 깊은 산 속 외진 곳인지 좁고 급한 경사면을 오르내리다가 지나쳤다며 왔던 길을 되집어 나오기도 하다가 길이 나올 것 같지 않은 방향으로 올라가더니 다 왔단다. 일단 숙소에 첵크인을하고 저녁먹을 식당을 가기로했다. 주차장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경사급한 돌계단을 한참 오르는데 숨이 찼다. 숙소는 절간처럼 깊은 정적에 쌓여있었고 새어나오는 불빛만 외로웠다. 다른 손님들은 없나보다. 문을 여니 따뜻한 실내 공기에 짙은 목재향이 베어있었다.

주인 여자가 반갑게 맞이한다. 아들네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일본식 억양의 서툰 영어지만 어떻든 통한다. 첵크인하는 과정에서 내온 음료. 오키나와는 더운 지방인지 모르지만 모든 음료에는 얼음이 떠있다. 정성이 한가득이다만 찬걸 마시지 않는 나와 아내에겐 그저 눈으로만 바라볼뿐이다.



해만 지면 저녁을 생략한 채 일찍 잠자리에 드는 아내는 그냥 쉬고 싶은 눈치지만 아들네가 예약한 식당을 찾아 나선다. 나와 둘이만 왔다면 당연히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한치 건너 아들이 아닌가. 밤길에 식당이 제법 멀다. 20분 어디론가 산길을 달리던 차가 멈춘 곳도 멀리 해안가의 불빛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이다. 이런 곳에 무슨 식당이 있을까 싶은 궁벽한 곳이다



며늘아이가 며칠을 사이트를 뒤져 최대한 숙소 가까운 곳의 유명 맛 집을 찾았다한다. 이 식당은 이태리음식 전문식당으로 유기농과 신선한 재료만을 사용한단다. 물론 예약은 필수이고. 이것으로 미루어 오키나와 섬 전체는 관광 인프라가 잘 발달 한 곳인가 보다. 우리나라로 치면 어디 이름모를 산골 깊은곳에 이태리 전문식당이 있는 꼴이다. 식당의 내부는 바다를 향해 길게 자리한 제법 큰 규모로 천장과 벽체가 다 노출 콘크리트공법이다



손으로 쓴 메뉴를 보니 온통 일본 글자이다. 더구나 주인과 간단한 영어조차 통하지 않는다. 그만큼 이곳은 외국 관광객들이 찾지앉는 오지인가보다. 이 난감한 상황을 아들은 구글 번역기로 해결한다. 나도 내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 폰에 이런 기능이 있는지를 몰랐다





음식은 신선했고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특히 갓구운 뜨끈뜨끈한 빵이 얼마나 맛이 있던지...나중엔 배가 부른데도 코스의 순서로 내오는 음식이 너무나 많아 대부분 남길 수밖에 없었다.



9시가 넘어 숙소로 되돌아 왔다. 아들과 둘이 멀리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싸한 바람을 코 끝에 느끼며 노천 온천에서 긴 하루의 여독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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