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가족여행

오키나와 가족여행2

작곡가 지성호 2018. 1. 2.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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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하우스 카이자(海坐)

깊은 밤. 어김없이 꼭두새벽에 눈을 뜨다. 텁텁한 실내공기가 답답하여 창문을 열고 잤더니 새벽녘에는 싸한 바람이 차갑게 코끝에 닿는다. 문을 닫아야지, 문을 닫아야지, 생각은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멀리 바다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겨우 일어나 문을 닫는다. 아내의 잠자리를 방해 할 수 없어 이불에 누운 채 가만히 우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태곳적부터 본래의 어둠은 이랬을 것이다. 동굴에서 잠 못 이루는 원시인은 절대적 어둠과 고요 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말러의 가곡 중에서 한 구절이 불현 듯 떠오른다


나는 세상에서 잊혀졌네

.................................

나는 세상의 혼잡함으로부터 죽어

고요한 나라에 누워 있네!

 https://youtu.be/TzJyIWxjX9o


이리저리 뒤척이지만 황진이가 그렇게 원했던 동짓달 기나긴 밤은 질기고도 질기다.

동이 터 움직여도 될 만한 시각, 하룻밤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를 찬찬히 살펴본다

이 집, 나의 DIY 본능을 자극한다. 길을 가다 좋은 땅을 만나면 집을 짓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내가 아닌가. 이집의 당호가 해좌(海坐)이니 말 그대로 태평양을 바라보는 언덕배기에 둥지를 튼 형국이다. 구글 지도로 검색해본다. 어젯밤에 서쪽 해안의 나하시로부터 오키나와를 횡으로 가로질러 동남쪽 해안까지 왔으니 제법 먼 길을 달려온 셈이다




객실의 창은 아랫마을과 바다를 담뿍 담았다. 생각해보라! 아침에 눈을 떠 게으르게 기지개를 켜며 침실 창문을 열었을 때 신선한 미풍과 함께 거칠 것 없이 파란 바다가 시야 가득 펼쳐지는 풍경을. 누군가 이런 꿈을 꾼다면 부디 이집을 방문하시라! 이 집을 설계한 사람은 저 경치를 바라고 긴 직사각형 통창을 침대 머리맡에 배치했음이 틀림없다. 창틀에 갇힌 풍경은 그대로 액자 속의 그림이 된다. 그 아래 붙어있는 원목 블라인드 창을 열면 방충망이다. 어젯밤 이곳으로 불어오는 태평양의 바람을 맞으며 잤다




이른 아침이라 산그늘이 바닷가까지 내려갔지만 태양의 고도에 따라 곧 후퇴 할 것이다. 여름에는 아무래도 동쪽이라 아침나절 강렬한 햇빛을 감당하기 쉽지 않아 보여 늦잠은 꿈도 꿀 수 없겠다



 긴 복도에 면한 출입문 위 높은 곳에는 똑같은 직사각형의 통 창이 있어 뒷산의 진녹으로 우거진 숲을 담았다





앞창은 바다, 뒤창은 산. 그래 이 방은 배산 임수가 틀림없어, 명당이여!

산을 절개하고 콘크리트장벽으로 조성한 주차장은 좀 더 공을 들였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뻔했다



주차장에서 집을 오르는 초입에 간판이 보인다. 해좌(海坐)kaiza가 춤을 추는구나



주변의 돌들을 모아 시멘트 몰탈로 만든 계단은 아무래도 쥔장의 솜씨 같다. 손맛 나는 정겨운 돌계단은 그야말로 저 높은 곳을향하고 있다. 정원을 꾸미기에 좋은 경사이다. 더구나 동남쪽 면 아닌가. 누구든 이 은밀한 계단 끝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해 오르고 싶을 것 같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쓸모없는 산자락이겠지만 쥔장의 탁월한 안목이 참 욕심나는 터를 점지한 것이다. 중간에 새끼고양이가 떠오르는 햇빛을 탐하고 있다




아열대의 우거진 숲 사이 시샤도 보이고 



언뜻언뜻 보이는 집은 궁금증을 자아내기 십상이다. 저 모퉁이를 돌면 게스트하우스의 현관이 나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식당 겸 거실로 쓰이는 아래층이 내려다보이고 오른쪽에는 좁고 긴 복도에 면한 침실들이 보인다



스기목 찬넬사이딩 목향이 따뜻한 조명과 함께 은은하다

문틀이나 문짝, 침대와 같은 가구들도 공장식 기성품은 없어보인다. 솜씨 좋은 목수를 불렀든, 아니면 목공소에 맞췄든 죄 구조에 맞게 궁리하고 재단해서 수작업으로 만든 것들이다

이집의 불편한 점이라면 침실에 화장실과 욕실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침에 집 구조를 찬찬히 살펴보니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많은 손님이 묵는 것도 아니고 객실이 3개정도인데 대신 정갈하게 관리되는 공동의 화장실과 샤워실, 노천탕이 있어 불편함은 곧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은 대형호텔이 주는 압도감이나 소외감이 아니라 가정집 같은 친근감이 든다는 것이다. 이런 숙소는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사람은 알아서 걸러지는 건강한 숙소가 아닐 수 없겠다.


쥔장의 세밀한 손끝이 전해지는 내부를 살펴보면 현관에 면한 손 씻는 곳



그 안의 세면실 



창밖의 바다가 보이는 샤워실 




탕목욕은 뒤란의 바다가 보이는 노천탕. 시샤가 눈 부릅뜨고 지키고 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기위해 식탁에 앉는다. 갓구워낸 빵과 커피, 정성으로 잘 차려낸 식탁에 아내의 입은 저절로 벙글어진다. 아내는 묵묵히 식구들의 일용할 음식을 홀로 감당해왔다. 거기다 해도해도 표도 안나는, 그렇지만 조금만 미루면 집안이 엉망이 되는 가사노동에, 찻집경영에, 시부모까지 모시고, 빠진게 또있다. 정원은 좀 넓은가! 하여튼 한결같이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다 남이 차려준 식탁에 앉으니 절로 웃음이 나올만 하다.


디저트이다. 단지 먹기 위해 저 공들인 디스플레이를 흐트러뜨린다면 너무 잔인한 일이다. 먹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이 앞선다



 아침을 먹고 뒤란의 산에 오른다. 한발자국만 들어갔을 뿐인데 숲은 원시림으로 빼곡이 들어차 어둑신 했다

숲의 정령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노출된 나무뿌리들이 얼키고 설켜 제주도의 곶자왈을 보는듯하다



 쥔장의 손길이 여기까지 세세히 미쳐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전망대를 세웠다. 탄성이 나올뿐이다.



여기서 바라보이는 기막힌 조망을 보아라




 우거진 숲속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저 아득한 곳, 감청빛 해원과 맞닿은 수평선에는 무한한 동경을 자아내는 노스탤지어가 어리어 있다. 거기로부터 불어오는 미풍이 숲을 가만히 흔들며 두런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한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루해가 짧을 것 같다. 천지간에 공활한 공간은 먹먹한 본원적 기다림으로 가득차있다.

체통에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듯 난 늘 기다림 속에 살아왔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그 실체를 모른다. 그럼에도 늘 많이 그립다. 내가 끊임없이 곡을 쓰고 글을 끄적이는 이유는 내 마음속에 고인 그리움을 길어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그리움이 고갈된다면 풀 한포기 키울 수 없는 불모의 땅과 같이 난 단 한 마디의 곡조차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리움의 반대편은 녹슬고 낡아 빠진 권태이다. 쥐 오줌으로 얼룩진 천장처럼 남루한 삶이다. 그 무의미한 인생 속에 먼 곳을 향한 동경과 그리움이 고일 때 내 눈빛은 온기로 촉촉해지고 내 존엄은 회복되는 것이다

나의 아마트는 무엇인가? 내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고 불꽃처럼 나를 연소시키는 빛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리움은 고통이자 내 곡쓰기의 근원이다.


숲의 끝자락 안부에 이르면 데크에 빈 나무의자가 바다를 바라보고 놓여있다.



먼저의 전망대는 계단을 올라가 서서 바라봐야만 바다가 보였지만 이제 여기까지 올라 왔으니 편히 의자에 앉아 숲과 멀리 바다를 바라보라는 쥔장의 무언의 권고이다멀리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분요함과 다툼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닫게 되고 스스로 내려놓음으로 모든 불화는 사함을 받는다만약 이 숙소에서 잠만 자고 빠져나간다면 가장 값진 것을 놓치는 셈이다.

높은 철책이 둘러쳐진 숲의 끝자락은 햇볕이 잘 드는 곳으로 쥔장의 텃밭인지 아니면 비밀의 화원인지 조금은 방치된 느낌이 든다



숲에서 내려오면서 바라 뵈는 게스트하우스 뒤꼍. 마루에는 헤먹을 메달아 놨다




이 외진 곳에 저토록 세밀하게 살피고 공들여 꾸민 것은 꼭 먹고살기 위한 방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만드는 자의 기쁨이거나 꿈을 실현하는 기쁨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야마구치 부부의 따뜻한 숙소를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로 떠나야 할 시간. 기념촬영으로 하룻밤의 환대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한다. 이들 부부는 커플룩을 입고 나타나 끝까지 감동케 한다




따스한 양광이 내려쬐는 계단을 아내는 며느리의 손을 잡고 내려온다.

아내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내려와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저 모습이 유별나게 보이는 건 내가 가장 부러워 뵈고 아름답게 보이는 모습이 모녀간에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여행을 다니는 것을 목격할 때이다. 아버지만을 제외시킨 모녀간 저 끈끈한 연대의 배후를 알 수 없지만 장성한 딸과 나이든 어머니가 여행을 같이 다니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컷들의 운명인지 부자간에 같이 여행을 다니는 건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오늘, 며늘애가 아내의 손을 잡아 이끌며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니 뭉클하기조차 하다

우주 공간에 블랙홀과 화이트 홀을 연결하는 통로를 웜홀이라 하는가보다. 핵가족 시대에 성가해서 떨어져 사는 자식과 부모와의 거리는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우주만큼 멀어지기 싶다. 더구나 며느리는 긴 세월 기쁨과 슬픔을 공유한 히스토리도 없다.  이런 면에서 두 세대가 여행을 같이 한다는 것은 추억을 같이 생산하고 공유한다는 점에서 웜홀이라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모쪼록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다 힘들고 어려울 때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든든한 위로가 되길 바랄 뿐이다.


 


미바루해안(新原ビーチ)

해좌를 뒤로하고 꼬불꼬불 한적한 마을길을 달린다. 외딴 해안가라 그런지 마주치는 사람이나 차 한 대조차 볼 수 없다. 한두 마지기 비탈진 사탕수수밭도 보인다. 2, 멕시코 꼴리마주에서 압도적으로 광활한 사탕수수밭을 목격한지라  규모면에서 많이 비교되지만 우리나라 농촌과 다를 바 없어 보여 정감이 간다. 미바루 해안에 도착하니 마을 주차장마다 500엔 주차료가 여기저기 명시 돼있지만 철이 아니라 그런지 차도 없고 주차를 해도 내다보는 사람도 없다. 용암이 흘러 바위로 굳어진 모퉁이를 도니 배가 거뤄진 바닷가가 나온다. 미바루해안이다

멀리 반짝이는 바다엔 조는 듯 배들이 떠있다



오월의 훈풍처럼 햇빛이 따사로운 해변은 드넓고 조용하다. 모래사장으로 밀려와 찰랑찰랑 간질이는 바닷물이 내 마음에 꼭 그렇게 잔잔한 평화의 파편들을 찰랑이게 한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시편 96편) 참으로 그러지 아니하는가!




석회암 섬들은 밑동이 억만년 물밀어 온 바닷물에 침식돼 아득한 먼 나라 전설의 해변을 연상시킨다




어떤 섬은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목만 내민 사람의 형상을 보여준다. 코가 우뚝한 것이 그리스 영웅의 조각 같기도 하다



배벌미를 두려워하는 아내와 며느리는 해변 바위그늘에 숨고 


나와 아들은 글라스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로 했다.




글라스보트라는게 말 그대로 배 밑창을 유리로 만들어 비취 및 바닷속을 관찰할 수 있게 만든 배이다



나이 든 선장은 바닷속 속내를 손금 보듯 속속들이 아는 듯 고기들이 모여 있는 곳이나 산호초가 아름다운 곳이면 어김없이 정지한 채 구경할 시간을 준다



바다의 겉과 속은 너무나 다르다. 표면은 거칠게 요동치나 속은 어항 속같이 고요하다



 물고기들도 관중의 시선을 의식하는 곡예사처럼 온갖 군무를 보여준다



간의 호기심은 유리상자라는 도구를 통해 기어이 바다에 틈을 내어 내밀한 해저 용궁의 비밀을 엿보는 것이다




30분정도 야생마처럼 바다를 휘젓던 보트는 원래의 자리에 복귀하여 얌전히 묶인다

바다는 그 흔적을 지워 평정을 되찾고는 이내 무수히 많은 잔물결로 출렁이며 반짝인다.

밀물인지 물에 잠긴 계류장은 상판을 간지르는 물결을 아랑곳하지 않고 수평선을 향해 기다림의 자세로 침묵한다

그림처럼 고요한 대낮이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바다를 향해 만세 부르듯 두 손을 번쩍 들고 브이 자를 그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호젓한 해변에서 아내는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만좌모 (万座毛)


미바루해안을 빠져나와 오끼나와의 중부에 위치한 만좌모를 향하다 이날 묵을 호텔에서 언제 도착 하냐는 메일이 자꾸 온단다. 할 수 없이 우선 숙소에 첵크인을 하고 거기서 가까운 만좌모를 가기로 했다.


            

   만좌모와 La Casa Panacea


La Casa Panacea- 문자적으로 본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치유의 집이 되겠다



오후 들어 하늘은 음산했고 바람이 거세졌다. 어둑신한 로비로 들어서니 압도적으로 커 보이는 검은 가죽소파와 검은 그랜드 피아노가 눈길을 끌었다. 웬 피아노지? 나도 모르게 다가가 (어쩔 수 없는 음악 하는 사람들의 행태이다) 뚜껑을 열고 아래에서 위로 스케일을 연주 해보니 소르디노 펠트를 내렸는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의 무례함을 방지하기 위해 그런 조치를 해놨나 보다. 둘러보니 오래된 재즈음반들이 눈에 뛴다. 마흔은 넘겼을까, 우리를 맞이한 여자 분의 취향인가보다. 검은 머리에 짙은 눈썹에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키가 컸고 운동선수같이 군살이 없어, 다소곳하고 오종종한 일본여인이라기 보다는 집시와 같은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인적 끊긴 외진 바닷가, 썰렁한 리조트에 바람은 드세지 사람이라고는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여자 한 분뿐이니 마법의 성에 들어온 듯 좀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내놓은 음료가 역시 얼음을 띄운 차가운 물이니 손이 갈 리 없다. 이 여자, 가볍지 않은 트렁크를 서슴없이 들고 성큼성큼 숙소로 안내한다. 이층 계단을 올라 모퉁이를 도니 거침없는 찬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문을 열고 닫을 때 바람의 강한 힘을 느낀다. 힘으로 제어하지 않으면 사정없이 부딪혀 위험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정돈된 실내는 겨울 오후가 주는 서늘하고 내밀한 기운이 완강한 침묵으로 내려않았다. 커튼을 열고 창밖을 본다. 바라보이는 철지난 수영장의 옥색 수면이 빙하를 보듯 오싹 한기를 돋운다



 먼 바다엔 까칠한 파도가 하얗게 날을 세워 밀려온다. 나무들은 미친 듯 머리를 주억거리며 세찬 바람을 견디고 있다



아내는 이미 체력이 방전돼 쉬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지만 아들네가 정한 오늘의 나머지 일정 때문에 도리 없이 일어선다.


만좌모 주차장에 도착하니 철시한 상가의 천막이 바람에 소리를 지르며 펄럭인다. 만 명이나 앉을 수 있다는 만좌모의 확 트인 벌판에 바람의 갈래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로 부딪쳐 울부짖는 신음소리만 가득하다. 납작 엎드린 관목들이 몇 해 전 겨울 마라도의 데자뷰 같다



제주도에는 용두암이 있듯 오키나와에는 코끼리 바위가 있다. 석회암 절벽에 억만년 세월을 파도가 조탁하여 아주 그럴듯하게 코끼리를 형상화했다.



낙숫물이 바위를 파듯 중단 없는 꾸준한 것들이 결국은 이루어놓은 형상 앞에서 나는 말을 잃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상적인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시간을 카이로스kainos'로 구분해서 불렀다. 거센 힘으로 응축했다 절벽을 때리는 파도는 이내 부서져 무의미하게 흩어지는 것 같지만 그 끊임없는 운동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코끼리 형상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 한갓 파도도 그럴진대 인간임에랴

예술art 은 유한한 인간이 신의 소명인 카르마Karma'를 인식하고 그 수행을 위해 불멸, 곧 영원성의 가망 없는 언덕을 시지프스처럼 오르고 좌절하면서 또 오르는 고단한 몸짓이다. 권태로 가득한 일상의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 슬픔과 기쁨, 사랑과 절망과 같은 어펙션affection을 자기 예술의 수단을 가지고 영원한 것으로 기록하려는 몸부림이다.  

베이먼이 담장에 목숨으로 그린 마지막 잎새는 그 표상이다. 나는 죽어 없어질지라도 내 작품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현실의 고통을 순교자처럼 감당하면서 고지를 오르고 또 오르지만 밤하늘에 빤짝 소멸하는 유성처럼 대개는 이름조차 없이 명멸해버리고 소수의 천재만이 영원성을 획득한다.


성난 바다는 분노로 가득 차 대가리를 세운 채 밀려와 장렬하게 부서진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예술가들은 이 가망없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나도 그 무리 중 하나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비록 부서질지라도 그 흔적은 남을 것이다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어쩌자고 이 험한 날 관광객들은 바람에 동동거리며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우리도 쫓기듯 만좌모를 빠져나왔다.


산벳테이 식당

이제 저녁을 먹으러간다. 가다가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접해본다는 의미로 편의점에 들러 이것저것 먹거리와 소소한 것들도 사고 서쪽 해안을 따라 달리고 달려 푸른 동굴이 가깝다는 산벳테이 (燦 別邸 島豚琉球牛) 라는 식당에 도착했다. 며늘애가 일본에서 살다 온 친구를 통해 어렵사리 알아 놓은 스키야키 샤브샤브 전문점이란다. 붉은 휘장을 걷고 들어가니 작은 공간이 일본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테리어로 꾸며졌다. 옳거니, 제대로 된 일본음식을 먹나보구나



어째 소문난 집 치고는 주방장이 젊어 관록 있어보이진 않고 서빙 하는 아가씨 둘도 앳돼 보인다



여기도 앉자마자 유리컵에 얼음을 가득 넣은 차디찬 물을 내놓는다. 언뜻 한국어로 된 메뉴판을 보니 가격이 가슴이 쿵 내려앉을 만큼 비싸다. 아들네가 스키야키를 주문한다. 고기는 아구 돼지와 미사키와규 꽃등심이다. 이 소고기는 오키나와보다는 오히려 대만과 가까운 이시가키 섬에서 자연방목으로 키우는 소고기란다. , 정말 궁금타! 오염원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절해고도에서 정갈한 풀을 뜯으며 들짐승처럼 배회하던 소고기 맛이란 과연 어떤 맛일까!

나와 아들은 아내가 해주는 스키야키에 입맛이 길들여졌지만 이곳 스키야키는 요리 방식이 사뭇 다르다. 집에서는 양념으로 잰 소고기와 두부, 버섯을 비롯한 갖은 야채가 육수를 부운 돌 냄비에서 펄펄 끓으면 참기름 떨어뜨린 달걀 노른자위에 찍어먹는 방식이라면 여긴 먼저 야채를 냄비에 볶다가 나중에 얇게 슬라이스된 고기를 넣어 같이 볶는다



기름이 타는 누릿한 냄새와 매캐한 연기로 눈도 따갑고 목도 칼칼했다. 이때 놀라운 건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같이 넣어 볶는다는 점이다. 한국이라면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같이 볶진 않는다. 상식으로 생각해도 소고기맛과 돼지고기 맛이 다를진대 왜 이러나 싶다. 나는 아구 돼지 맛도 궁금했고 그 비싸고 유명하다는 미사키와규 꽃등심 맛도 궁금했다. 그런데 이렇게 뒤섞어서 볶다니, 의아해 하는 나를 아내는 사정없이 무지른다여행을 왔으면 현지방식을 맛보고 즐기라는 훈계의 말씀이렷다. 그 이면에는 아들네가 맘먹고 귀한 음식을 대접하려하는데 맛있게 먹어야지 눈치 없이 흥 깨지 마라는 질책이겠다. 뭐 지엄한 아내의 말씀이니 자라목처럼 냉큼 목을 움츠린다만 어째 납득이 잘 안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나를 빤히 바라보는 두 아가씨의 시선이 좀 민망하다. 나중에 야채가 좀 부족하여 달라했더니 주문서부터 꺼내든다. 한국, 그것도 전주 같으면 야채는 당연히 무한 리필이련만 그래, 여긴 일본이다. 놀라 손사래를 치며 포기한다. 이 비싼 음식에 밑반찬도 없고 디저트조차 없다. 아들네에게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해야 하는데 입안에서만 뱅뱅 돌뿐 말이 나오질 않는다.

호텔로 되돌아오니 누적된 피곤이 몰려온다. 아내는 무조건 침대에 몸을 던져 이불을 파고든다가족여행의 마지막 밤을 아까 편의점에서 산 군것질거리를 나누며 아들네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려 했는데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도 며늘애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장미향이 은은한 거품을 풀어 어머님, 피곤하시더라도 꼭 거품목욕하시고 주무세요.” 당부를 하고는 제 방으로 간다

여기까지가 매사 치밀한 며늘애가 계획한 오늘 여행의 미션이었나 보다

임신초기라 누구보다 가장 피곤할 텐데 그 마음씀씀이가 고맙다. 재촉을 해보지만 아내는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는지 일어나질 못한다. 물은 식어가지, 며늘애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나라도 해야하나보다. 페르시아의 제왕처럼 팔자에 없는 호사를 누리고는 잠자리에 든다. 비몽사몽간에 아내가 탕에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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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꼭두새벽이다. 다행이 아내의 잠자리를 방해하지 않는 별도의 공간이 있어 태블릿을 켜고 여행기를 쓴다

창문이 밝아와 내다보니 밤을 꼬박 지센 달이 둥실 높이 떠 아직도 초롱하다환기를 위해 창문을 여니 꼭 우리나라의 늦가을 아침처럼 청신하고 삽상한 바람이 여간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바다를 바라보는 식당의 테이블에서 여유 있게 아침을 마치고 산책에 나선다. 며늘애의 얼굴이 좀 부어 뵌다아무래도 어제 일정이 무리였던가 보다


눈치 빠른 여사장이 쪼르르 달려나와 가족사진을 찍어준단다



 짙은 나뭇잎 새로 찬란한 황금빛 햇살이 눈부시다.



 바람도 잔잔하고 파란 하늘엔 흰 구름이 한가하다



호텔 담장을 끼고 수로를 따라 바다로 나간다.



이름 모를 열대 수에 주렁주렁 빨간 열매가 이채롭다



호텔 바로 옆에는 바다와 만나는 수로가 있다. 멀리 산과 마을을 흘러 예까지 왔겠지만 옥빛으로 깨끗하다



이 방파제를 따라 수로는 바다와 합류한다



 고부간은 오늘도 다정하다.

이 방치된 숲에 작고 그림같이 예쁜 집을 짓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옆에는 바다와 맞닿은 수로, 앞에는 바다! 바다와 마을 사이에는 방풍림이 있다. 바다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로 접어든다



바나나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땅으로 휘었다. 마을은 개 한 마리 어슬렁거리지 않고 조용했다. 어느 집에선 돋보기를 낀 노인이 화분을 들고 화초를 세밀히 살피고 있었다

공항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미나토가와를 들르기로 한다.


미나토가와

미나토가와는 외국인 주택거리라 불리나 보다. 이때 외국인은 정확히 말하면 미군과 그 가족들이 살았던 거리이다. 구획정리가 잘된 골목에 고만고만한 단층집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제 미군은 다 떠난 그곳에 일본의 끼 있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아기자기한 수공예 공방이나 빈티지 샾, 카페 등이 들어서 명소 화된 곳이다.




 기지촌 특유의 낡고 볼품없는 슬래브 집인지라 가격이 헐했을 것이고 이 때문에 가난한 보헤미안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솜씨로 개수를 해 개성을 드러낸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기웃 어슬렁거리는데 유치원에서 들려오는 원아들의 노랫소리 드높아 평화롭다


            

내가 젊었을 때 신문에는 오키나와문제가 자주 보도되곤 했었다

1995, 미국 해병대와 해군 소속이었던 군인 3명이 12세의 오키나와 소녀를 납치해 집단 강간한 사건으로 오키나와 내 반미 감정이 촉발되어 후텐마 기지 및 미군기지 반환을 요구하는 시위가 크게 일어났었다. 후텐마 기지는 여기서 가까운 기노완 시 의 중심부 인구밀집구역으로 도시 면적의 25% 정도에 해당하는 큰 기지이기 때문에 가끔 헬기가 추락한다든지 소음 및 공해발생으로 주민들과 마찰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모양이다. 우리나라도 군산같이 미군기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오, 이건 뭐야? 개방된 도로와의 경계면에 이러한 설치를 통해 충분히 담장과 대문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빈티지 공구 샾에서 사고 싶은 핸드메이드가 너무 많지만 멕가이버 멀티 툴 하나를 샀다.


점심을 여기서 먹고 비행기를 탈 요량으로 브런치 카페를 기웃거리는데 젊은 처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 적극적인 몸짓에 열심히 살려는 의지가 읽혀 안으로 들어선다. 남편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빵을 굽고 있다. 여기 오븐이며 주방기구들이 다 오래된 빈티지이다. 카페 안의 가구들은 DIY로 뚜닥 뚜닥 땀 흘려 만든 것 같고 천장이나 벽 칠도 부부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작업한 흔적이 역력해 보인다. 주문한 커피와 음식도 무엇보다 믿음이 가고 적당한 가격에 맛도 있어 먹는 즐거움이 크다



편안하고 즐거운 기분 속에 한 가지 큰 각성이 온다. 우리는 다국적기업이나 대기업의 상표에 현혹돼 한갓 생각 없는 소비자로 전락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이 동네, 얼마나 소박하고 건강한가! 백화점같이 현란함으로 욕망을 부추기지도 않고 건강한 생산과 건강한 소비가 있다. 재벌이 골목상권까지 장악해 소시민을 소비하는 노예로 전락시키는 이 비정한 구도를 깨는 대안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귀국


귀국하는 비행기 안. 기류가 불안정한지 비행기가 크게 요동친다승무원들의 움직임도 제한을 받는다. 

이럴 때마다 바로 뒷좌석의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어댄다. 이 원초적 울음은 다시 비행기 안의 승객들에게 불안감을 상승시킨다. 옛날 같으면 이 상황에 짜증이 앞서겠지만 며늘애가 임신을 한 상황에선 저 아기엄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힘이 들까 동정이 간다. 쇼핑몰에서 아내와 난 그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앙증맞은 아기 옷에 눈길이 자주 간다고 마주보고 웃기도 했었다


정상고도에서 바라본 묘묘한 풍경



황혼이 곱게 물드는 묘묘한 풍경속에서 나는 신의 눈길을 느낀다.

이 가없는 공간에 내 생명의 시간은 얼마나 짧은 것인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모든 아버지는 죽는다, 아들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서'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러나 아비가 자기의지로 사라져 주는 게 아니라 죽을 때가 돼서 사라질 뿐이다.

생명은 끝없이 태어나고 반드시 죽는다

나는 이때까지 나는 죽어도 내 작품은 남는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나는 한 번에 두 가지 일은 못하는 성정인고로 다른 건 다 하찮은 일이고 군더더기였다

그럼에도 한 여인의 지아비가 되었고 한 아이의 아비가 되었다. 내가 그랬듯 그 아이는 장성해서 내 품을 떠났고 한 여인의 지아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한 생명을 잉태하였다

꽃이 지고 꽃이 피듯 핏줄을 타고 이어지는 생명의 연속성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봄이되어 얼음장 밑에 새움이 트는 게 언제나 경이롭듯이







                          드디어 인천 앞바다에 점점이 검은 섬들이 어스프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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