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6
새별오름
어젯밤에 아들이가 내일 새벽에 새별오름을 오르자 해서 별 생각 없이 그러마했다.
막상 새벽이 되니 노독에 몸도 피곤한데 그 숨찬 오름길을 꼭 올라야하나 하는 망설임으로 뒤척이고 있는 참에 아들이 문을 두들겼다.
시계를 보니 어김없는 여섯시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옷을 좀 든든하게 입고 길을 나섰다.
1135번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한 30분 달렸나?
이윽고 새별오름 밑 관광타운에 도착하니 쌀쌀한 날씨에 이른 새벽인지라 사람하나 얼씬거리지 않고 찬바람만 뺨을 때린다.
민둥산에 억새만 주억거리는 북서쪽 사면을 통해 올랐다.
길의 침식을 방지하기 위해 야자매트가 깔려 푹신한 촉감이 오르기에 한결 수월했지만
일정한 급경사를 오르자니 숨이 턱에 찼다.
몇 번인가 숨을 고르고 나서야 정상에 올랐다.
519m의 정상인지라 차가운 바람이 바늘 끝처럼 얼굴을 파고들었다.
추위라는 게 계엄령이 선포된 것처럼 주위를 삼엄하게 만드는 것이어서
멀리 보이는 풍경도, 가까운 골프장도, 네모진 돌담에 누워있는 무덤도 다들 경직된 채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나 또한 동쪽 방향으로 한라산 정상의 일출을 기다리는 내내 엄습하는 추위를 다독거리며 견뎌야 하고.
일출을 보긴 했지만 기상조건이 따라주지 않았는지 기대만큼의 큰 감흥은 없었다.
뷰파인더를 통해 정면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오랫동안 바라봐서인지 한동안 눈앞이 캄캄하여 정상을 되찾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방향으로 내려갈까 망설이다. 아무래도 올라올 때 보았던 길이 억새가 지천인 만큼 오른 길로 되잡아 내려갔다.
억새는 무리지어 흔들려야 제 맛이 난다.
역광 속에서 바람 따라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숙인 채 백만, 천만으로 술렁이며 파도치는 군무,
그 빛나는 처연함은 가을의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리하여 억새는 꽃 중에서도 하얀 꽃이 된다.
박남준 시인의 시처럼 하얗게 새어서, 새어서 죽어 피어나는 꽃이 되는 것이다.
가을은 모든 게 투명해지는 계절이다.
하늘도 바다도 바람도 다 투명해진다.
간밤을 꼬박 세우느라 창백해진 달조차도 순백으로 투명해져 아직도 둥실 창공에 떠 있다.
억새도 어쩔 수없이 저렇게 순백으로 투명해지나보다.
홈즈테이블
아침을 먹고 애월읍에 있는 ‘홈즈테이블’을 바라고 길을 떠나다.
홈즈테이블 젊은 사장은 아내 친구의 아들이다.
각박하고 비정한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인간다운 삶을 찾아 제주에 터를 잡고
기초부터 완공까지 손수 집을 지어 아이 둘을 키우며 그야말로 열심히 산다.
1135번 도로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홈즈테이블’ 마당에 서면
멀리 코발트 블루의 애월 앞바다가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에 제주공항을 향해 하강하는 비행기들이 그림처럼 떠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건물 하나하나가 주인장의 의지와 개성이 드러난, 손 맛 나는 보헤미안 스타일이라 보기에 친근하고 편안하다.
생각지도 않게 맛있는 피자를 먹게 생겼다.
사실 음식은 그다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려운 일도 겪었던지라 제주에 온 김에 꼭 한 번 들러 격려해주고 싶었던 곳이다.
어쿠스틱 벤드 무대세팅이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라이브 퍼포먼스도 있나보다.
친구 아들내미의 컨츄리 스타일 옷차림과 콧수염, 거기다 어쿠스틱 음악이라면 그의 삶의 지향점이 짐작이 가는 것이라 왜 그가 서울 생활을 마다하고 제주도에 정착했는지 알만하다.
우린 좌우간 먹고사니즘에 매몰되어 인생을 노예로 살기보다 좀 부족하더라도 자유를 추구해야한다.
우리 아들네가 제주살이 한 달을 한다 했을 때도 빠듯한 일상의 쳇바퀴에서 그런 결정이 쉽지 않았을 터이지만 나는 존중하고 응원할 뿐이다.
다 지나고 보면 부족한 건 메워지고 삶은 지속되는 법이다.
테이블 세팅이며, 허브 잎 든 향기 은은한 물이며, 이 집 주인의 손끝이 보통 여문게 아니다.
메인 메뉴는 나폴리식 피자이고 서브메뉴는 파스타와 감바스란다.
이 집 사장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조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니 미리 숙성된 반죽을 참나무 장작 화덕에 넣어 구워내는 주방장의 솜씨가 노련하여 적이 안심이 되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얇고 바삭하고 담백한 도우에 루꼴라가 듬뿍 얹힌 피자가 먹음직스럽다.
맛을 보니 역시나 엄지 척!
주문한 딱새우 감바스에 찍어먹어도 좋고 부드럽고 쫄깃한 도우만을 즐기려면 그냥 먹어도 좋다.
블로레레 파스타도 면발이나 식감이 로마에서 먹어보았던 바로 그 맛이다.
이만하면 맛 집으로 대박나지 않는 점이 이상할 정도였다.
흡족한 점심이었다.
이만큼 일궈낸 그동안의 눈물 나는 과정을 아는지라 모쪼록 그 수고와 노력이 아름답고 풍성한 결실이 있기를 응원하면서
다음 행선지인 산굼부리로 향한다.
산굼부리
한라산을 오른쪽으로 돌아 제주도 동쪽의 산굼부리에 도착했다.
산굼부리는 제주도 동쪽지역의 섭지코지나 비자림 숲과 함께 제주관광의 인기 있는 방문지라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오늘도 역시 수학여행 온 학생들과 일반관광객이 뒤섞여 시장바닥같이 떠들 썩 했다.
산굼부리라했으니 '산이 구멍난 부리'라는 제주도식 명칭이 되겠다.
즉 화산폭발로 생긴 분화구이다.
지질학적으로 마르(Maar)라 부르는 현상으로 화산 폭발시 발생하는 화산재나 용암의 분출 없이 암석을 포탄처럼 날려 그 움푹 팬 구멍이 산굼부리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100~146m의 깊이에 둘레가 2km인 웅덩이가 드러날 정도로 바위덩어리들을 날려버린 천지개벽의 모습을!
땅이 요동치고 하늘은 찢기었을 것이다.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은 참으로 티끌보다 못한 미미한 존재이다.
이런 화산으로서는 우리나라 유일의 곳이고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화산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정부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한단다.
비록 낮은 곳에 위치해서 그렇지 백록담 화구보다도 더 크고 깊은 곳이란다.
백두산 천지나 백록담같이 바닥에 물이 고였다면 더 좋으련만 바닥이 갈층으로 물이 고이질 않고 스며들어 이 물이 바다로 흘러간단다.
깊이가100~146m 나 되고 둘레가 2km가 넘어 분화구 전체를 카메라에 담을 수 가 없다.
멀리 이내빛 한라산과 오름들이 평화롭다.
이니는 자꾸만 어른들의 품을 벗어나 저 혼자 자행자지할려고 떼를 쓴다.
놓아두면 풀밭을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기어 다닌다.
얼마나 빠른 낮은 포복인지 무슨 먹이를 쫓는 악어나 이구아나의 재빠름 같다.
무릎이 까질까 염려되어 잡을라 치면 거의 발악수준으로 몸부림치며 울어 제친다.
하긴 밥 먹을 때도 의자에 묶이고,
차에 타면 유아시트에 묶이고,
유모차를 타면 또 묶이고
맨 날 이리저리 묶이니 저러는 게 이해는 간다만...
할아버지, 싫단 말이예욨! 날 내려주세욨!
오로지 풀밭을 기고 싶은 생각뿐!
붙잡으면 앙탈하고 기어이 빠져나가는 이니. 엄마, 아빠도 어쩌지 못한다.
머리에 꽃을 꽂고...
날, 제발 내비둬!
하니문하우스
이제 오늘 여정의 마지막으로 다시 서귀포로 내려와 소정방폭포 인근에 있는 허니문하우스를 향한다.
처음에는 허니문하우스가 어딘가 했더니 옛날 파라다이스 호텔을 재단장해 카페로 변신하면서 허니문하우스라 한 모양이다.
소정방폭포로 이어지는 칠십리 바다와 섶섬, 문섬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제주 제일의 해안 절경을 자랑하는 이곳은
내가 미국 서부 태평양 연안을 여행하면서 경탄해마지않은 세븐틴마일즈 해변보다 더 비경이면 비경이지 못지않은 비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레6코스가 여길 지나가는 곳이다.
찬찬히 둘러보니 스페인 풍의 옛날 파라다이스 호텔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바다가 조망되는 곳에 크게 카페를 열어 올레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차 한 잔 값에 부담 없이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