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및 리뷰

[공연 리뷰]연극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

작곡가 지성호 2011. 1. 3. 21:32

                                                                               작곡가  지성호
2011년 01월 03일 (월)  새전북신문 이혜경 기자 white@sjbnews.com

   
날이 추우면 마음도 꽁꽁 어는 것 같다. 연말, 아랫목처럼 뭔가 따뜻한 것들이 그리울 짬에 연극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이라는 제목에 끌려 새로 개관한 극장을 찾았다. 요리를 하는 것 보다 보는 것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마눌님(?)을 모시고서….

그런데 이 연극 제목과는 영판 다르다.

처음 등장하는 만화가 아가씨의 푼수 짓이 좀 과장된 느낌이 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 모든 창작하는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이 외로운 만화가도 자폐적 공간에 스스로 갇혀 산다. 어느 날 이곳에 교활하고 능란한 외판원 아줌마가 찾아와 온갖 수단으로 철지난 백과전서를 팔고자 획책한다.

실적증대에 목말라하는 방문판매하시는 분들에게 이 연극의 관람을 진심으로 권하고 싶을 정도로 외판원(홍자연 분)의 연기가 참 리얼했다. 한때 그녀도 만화가의 꿈을 꾸었지만 무능한 남편 때문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용감무쌍한 아줌마 전사가 된다. 높은 분들은 FTA니 신자유주의니 어려운 말들을 하면서 하늘에서 돈비라도 뿌려줄 것같이 떠들어대지만 다 없는 사람 등골 빼먹자는 수작일 뿐이지 착하고 무능하면 굶어죽을 세상이다. 이 외판원 아줌마, 생존을 위해서 품격이고 나발이고 다 던져버리고 악착같은 인간으로 변해야 사는 오늘날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어수룩하고 소심한 만화가는 결국 손을 들고 백과전서를 사기로 한다. 문을 열어준 순간에 이미 승패는 결정된 것이다.

연극의 2부. 언제나 혼자서만 밥을 먹는 외로운 만화가는 가정식 백반을 누구와 같이 먹어보는 게 소원이다. 마침 때가 되었으니 점심을 같이하자고 외판원에게 권한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뻔뻔한 외판원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여기서부터 전율스런 급반전.

1부에서 낄낄 거리던 관객들이 아연 숨을 죽인다. 짜글짜글 끓는 찌개를 놓고 정담을 나누는 행복한 밥상머리를 생각한 뒤통수를 여지없이 내리친다.

작가는 이 대반전을 위해 1부에서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며, 보리차며 치밀하게 떡밥을 던져 놨던 것이다. 만화가는 밥을 먹으며 자기를 빗댄 개구리 이야기를 들려준다. 개구리는 여느 사람들처럼 욕하고 침을 뱉는 게 아니라, 사랑을 주고 눈을 맞춰가며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준 나무꾼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대가는 참혹한 것이었다. 평생을 그 짧은 순간의 사랑만을 기억하면서 외롭게 지내야 했던 개구리는 결국은 끝까지 책임져 주지 않는 사랑에 절망하여 나무꾼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이다.

만화가는 고아원에서 외롭게 자랐다. 봉사활동을 나온 언니가 스케치 북을 주며 다시 온다는 말을 가슴에 품으며. 그러나 그 언니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희망이라는 고문을 당하게 만든 그 언니가 외판원으로 나타난 것이다. 기다림에 지쳐 상처받은 복수심은 이제 개구리처럼 외판원을 죽이고야 말 것인가! 이쯤에서 제목에 낚여 보러왔던 연극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드라마를 보다가 너무나 주인공을 불행에 빠뜨리는 장면에서는 견딜 수 없어 전원을 꺼버리는 우리 부부가 아닌가. 종결은 만화가가 자신이 물에 탄 청산가리를 마시고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
   
  ▲ 지성호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은 우리에게 섬직한 교훈을 준다.

별 의미 없이 무심코 던지는 선의의 거짓말이나 책임이 따르지 않는 값싼 동정심이 때로는 심각한 비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세상에 쉽고도 무관심한 사랑은 없다는 것을….

뒷맛이 개운치는 않지만 2인극의 묘미를 한껏 살린 잘 만든 연극임에는 분명하다.

/지성호(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