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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 둘째날

화순 곶자왈새벽 미명에 인근에 있는 화순 곶자왈에 올랐다.화산섬 제주다움의 원형이 곶자왈이다.이끼 먹은 바위틈새마다 나무들이며 덩굴식물들이 울울하여 태고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숲이다. 이른 새벽의 불청객에 놀란 노루가 껑충거리며 사라진다.차갑고 신선한 새벽공기에 소똥냄새가 배어난다.먼 바다를 바라보는 삼방산의 시선이 가파도에 꽂혀있다. 전망대에 올라 양팔 넓게 벌리고 머리를 곧추세운 한라산을 마주한다. 푸른빛으로 서기를 품은 위용이 과연 늠연하다. 아들은 이 광활한 공간을 포착하려는지, 드론을 날려 사위를 영상에 담는다. 집에 돌아오니 마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이니가 머리에 새집을 지은 채 씽긋 웃는다.우리 이니는 눈이 마주치면 일단 눈웃음치는 것으로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킨다.다가가..

제주살이 방문 2025.06.15

눈 오시는 날

어제는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별안간에 햇빛이 방안 깊숙이 환하게 찾아오고, 그렇게 대기는 할 수 있는 온갖 변덕을 다 부리며 이 강산에서 사라진 호랑이 장가가는 날을 상기시켰다. 오후 들어 비는 진눈깨비로 굵어지더니 기어코 눈으로 변해 나풀나풀 팔랑거리며 대지에 젖어 들었다. 지리산 악양 사는 박남준 시인의 전화가 왔다. 시낭송회가 있어 천안 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 하룻밤 묵고 가겠다는 것이다. 덕분에 천안으로 이사와 100일 만에 밤 외출을 했다. 천안 불당동에 있는 인문서점 ‘가문비나무 아래’를 찾아드니 시를 사랑하고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박 시인과 인디언 수니라는 포크 가수의 콘서트를 경청하고 있었다. 천안은 나에게 아무런 연고도 없다. 따라서 천안 시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고..

들장미

며칠 전 겨울을 재촉하는 비바람에 뜰 안의 나무들이 이파리를 온통 떨구고는 벌거벗은 모습으로 입립하여 길고 긴 묵언수행에 들어갔다. 욕망처럼 차오르던 무성한 것들이 죄 떨어지고 버려지는 때인지라 그 성긴 틈새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띈다. 주말에 손자가 내려와 뛰놀던 마당의 뒷정리를 하다가 우연 찮게 장미와 눈이 마주쳤다. 좀 뜨악한 게, 이미 서리도 몇 번인가 내렸고 영하로 곤두박치던 날도 엊그제인데 장미는 여전히 붉었고 이파리조차도 녹색을 유지한 채였다. 색조를 잃어버린 마당 한구석, 양지바른 곳에 보란 듯이 핀 장미가 하, 신기해 다가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이유가 꽃을 피우기 위해 공들인 시간 때문이라 말했지만, 난 우리 집 장미에 대해 손톱만큼도 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