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고원.히말라야 종단기

티벳고원.히말라야 산맥 종단기2

작곡가 지성호 2005. 8. 3. 21:42

2005.8.3

 

표박(漂迫)2일 청뚜에서 라싸로                               작곡가 지 성 호

 

잠자리가 바뀌면 숙면을 못하는, 그래서 이런 내가 싫어지는 긴 밤이었다.

호텔의 공간은 내 일상이 차단된 오로지 잠만 자는 공간이다.

더구나 동숙인이 있으니 그 분의 안면에 방해되는 일도 할 수 없다.

고소지역 여행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도 잠자리를 어수선하게 했겠지.

생리학자들은 생물체가 진화하는 과정 중 뇌의 변연계에서 발생한 최초의 감정이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공격해 지쳐 들어오는 맹수의 발톱에 대한 공포가 없다면 갈가리 찢겨 먹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두려움은 인간 생존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다.

어쩌면 문명 자체가 공포의 산물일 수도 있겠지.

어떤 책에서 인상깊게 읽은 기억이 있다.

"자신에 대한 두려움은 겸손을 만들고, 타인에 대한 두려움은 예절과 법을 만들며, 역사에 대한 두려움은 정의를 낳는다."

이토록 두려움이란 놈의 효용성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그 놈과 친해지긴 쉽지않은 일이다.

살아온 과거조차도 혼돈인데 지금 살아내는 시간의 정체는 더욱 알 수 없으며

다가올 미래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세계의 정점에 떠도는 자의 길이 놓여있다.

그러니 불안을 베개 삼아 선잠을 자는 것이 떠도는 자의 잠자리이다.

성불사 풍경소리에 주지승도, 객들도 다 잠드는데

나만 홀로 잠 못 드는 게 떠도는 자의 숙명일 것이다.

 

호텔에서 새벽에 물 한 병과 빵 한 봉지, 그리고 파란 사과 한 알을 아침으로 배분한다.

당연히 먹지 않을 파란 사과가 이채롭다.

고산 증을 예방한다는 diamox 한 알을 복용하고,

긴 소매 옷을 준비하노라니 긴장이 된다.

공항에서 카메라의 렌즈덮개가 어데 론가 빠져 달아났음을 발견하다.

어쩐다, 다만 여행의 불길한 전조가 아니기를.......

 

라싸로 가는 비행기는 첫날과 달리 순항한다.

마침 좌석이 창가인지라(왠 행운?) 가리개를 열고 창밖을 주시한다.

정상고도를 잡자 형형색색의 운해가 장관을 이룬다.

다쉐산맥일까, 바옌카라 산맥일까, 아니면 탕구라 산맥일까.

조감되는 능선이 날이 서 칼날 같기도 하고 굽이치고 모이고 흩어지는 산맥이

녹색으로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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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아래 뱀처럼 굽이치는 강줄기는

준령의 계곡을 타고 저지를 향하여 흘러내리는 물들이

이 골 저 골 모이고 모여 저런 유장한 선을 형성한 거겠지.

야룽강일까, 진사강일까.

런데 저 아스라한 길들은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고도 때문인가 인적멸의 거대한 산괴 속에 평평한 땅은 한 평도 없어 뵈는데

저 위험한 어느 틈새에 마을들이 숨어있다고

저 길들이 목숨처럼 선을 이었단 말인가.

그런가 하면 부드러운 능선의 초원도 보이는 구나.

내가 지금 이 비행기에서 뛰어내린다 해도

나를 안전하게 받아줄 것 같은 녹색 비로드,

저 우아하고 넉넉한 초원에 양떼를 키우며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어 본다.

어느곳은 마치 지도책의 등고선처럼 벼랑에 다랑논을 형성한 곳도 보인다.

그 선들의 얽힘이라니.

생존을 위한 가공할 노력들이 대를 이어 조성한 생명선 일진데 가슴이 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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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싸행 비행기의 기내식)

 

드디어 만년설을 이고 날 선 칼날처럼 벼려진 고봉들이

운해속에 떠 있는 장관이 펼쳐진다.

빙하지대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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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진 운해, 그 가운데 외로운 섬처럼 떠있는 설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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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해의 형상은 천태만상이다.

신의 손길일까?

절대적 진리처럼 모든 대단한 것은 형용불가능이다.

온 우주에 편만한 신(神)을 신학자가 자기 인식의 자를 가지고 규정지으면

이미 신의 본질로부터 멀어진다.

단지 도그마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펼쳐진 파노라마도 필설로는 표현할 수 없기에 차라리 절망이다. 예술가는 자기 표현의 수단을 가지고  이런 형용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이겠지만

그것도 언제나 부분이거나 미완성이다.

아, 저 광대무변, 저 가없음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이 우주적 시공속에서 존재의 무상함에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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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가공항에서 환영의 따까를 걸어준다)

공가 공항. 해발3600m.

백두산보다 1100m 하고도 몇 십미터나 더 높다고 해야 실감이 나겠지.

비행기 트랩을 내리니 태양빛이 작렬한다.

정말 무섭도록 강렬하고 유리조각보다 더 날카롭다.

하늘은 시퍼렇다 못해 남빛이다.

산소희박 때문인지 찡하니 아득하고 아찔한 느낌이 든다.

너무도 건조한 공기는 숨을 깊숙이 들이쉬기가 부담스럽다,

공항 둘레 어디를 봐도 지구의 변방에 불시착 한 듯 달 표면 같이 거칠고 깊게 패여 황량하기만 하다.

산이 이와 같이 패인 것은 고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토질에 염분이 많아 식생이 어렵기 때문이란다.

강물은 흙탕물로 도도하고 위압적으로 흘러간다.

우리나라의 은사시나 포플러 같은 나무들이 강의 양안에 자라고는 있으나

그 느낌이 평화롭거나 넉넉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칠게만 보인다.

티베트의 자연은 우리나라의 <청산에 살어리랏다>와 같이 자연친화적이 아니라

인간을 무기력하게 하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들녘은 다크 브라운의 라이 보리가 내리쬐는 태양빛에 빛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추수의 계절이었다.

타작을 하여 마치 우리나라 농촌풍경처럼 낱가리를 쌓아놓은 곳도 보인다.

농부들의 옷차림이 먼 이국땅에 왔음을 실감나게 해준다.

대개 검은 빛의 중절모 같은 것을 쓰고 있고 검은색 자켓 차림으로 일을 한다.

이들은 우리나라 여자들처럼 햇빛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커피색으로 그을은 거친 얼굴,

여기다 다소 생뚱맞은 원색의 색동장식들이 자극적이다.

지오그래픽이던가 자연환경이 척박하고 황량한 곳 일수록

이런 강렬한 원색으로 치장을 한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인간에게 너그럽지 않은 가혹한 조건에서

인간들은 저토록 찬란한 환상을 가지며 현실의 고통을 견디는 것일까?

왜 저들은 하고많은 대지의 공간에서 하필이면 이곳에 머무는가?

이 땅이 아닌 기름진 땅에 대한 동경이나 목마름은 없는 것인가?

그 이룰 수 없는 꿈이 옷깃이나 모자의 테두리에 저토록 적나라한

원색으로 드러나는 것인가?

거리에 오가는 여인들은 칙칙한,

그렇다. 바람과 강렬한 햇빛에 엉켜 칙칙한 유난히도 검은 머리를 땋고

그 머리를 색동으로 장식한다.

그래서 이곳의 여인들은 육감적인 아름다움은 없다.

그보다는 거친 조건 속에 살수 밖에 없는 숙명의 굴레를 견디며 살아낸 안쓰러움,

짠함이 있다.

호텔의 일하는 아가씨들조차도 말들이 없고, 미소도 없이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이방인들에게 주눅이 든 모습 같기도 하다.

첫날은 고소적응을 하기 위해 호텔 침대에 누워 비몽사몽을 헤맨다.

우리들 중 두통이 심한 사람은 산소 베개를 사서 부족한 산소를 흡입하기도 하는데

호텔에서 내려다 뵈는 벽돌공장의 인부는 노동 강도가 강한 벽돌 찍는 일을

잘만 하고 있다.

멀리 바라 뵈는 앞산은 기슭에서 부터 정상부근 까지 걸쳐진

오색 타루쵸가 바람에 아우성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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