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고원.히말라야 종단기

티벳고원.히말라야 산맥 종단여행기5

작곡가 지성호 2005. 8. 6. 21:44

표박(漂迫) 제6일(2005년 8월6일)

 

히말라야 대장정 3일째.

어제 일정의 차질 때문인지 6시 30분에 기상을 시킨다.

숙소 바로 뒤로 수량이 풍부한 내가 철철 흐르지만

병관의 물 사정은 어린애 오줌처럼 찔끔거릴 뿐, 양치하기조차도 벅차다.

출발 전에 최훈용 선생님이 나서서 체조로 경직된 몸을 풀게 하고

스트레칭을 시키는 모습이 유격대 조교보다 더 능수능란하여

우리를 다시 한 번 감탄케 하였다.

이 분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우리를 감탄케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날 이후로 우리 유랑의 무리들은 아침이면 무슨 의식을 치르듯 둥글게 모여

체조와 스트레칭으로 몸 풀기를 마치면

팀장의 하루 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장정에 올랐다.

 

길은 길에 연하여 그 끝을 모른다.

이제 유랑의 동력에 점차 길들어진 무리들은

정처 없는 “떠돎”의 관성에 흔연히 몸을 맡긴다.

우리에게 규칙이란 “잠시도 같은 하늘에 머물지 않고 부단히 떠도는 것” 뿐이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이 대열에 갑자기 어데 선가 백마 탄 사내가 홀연히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잠시 서로가 탐색하듯 바라보는 시선에는 상대방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이 강렬하게 교차할 밖에....

저 사내, 바람의 냄새를 풍기며 바람처럼 짠! 하고 나타난 사내.

거친 산야를 누비며 부대껴온 각다분한 삶의 관록이 짙게 배어 있는

구리 빛 얼굴의 눈초리에는 동경이나 호기심보다는

어떤 연민의 빛이 어려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웬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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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이 저 사내의 모습에서 나는 몰락한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을 떠올렸다.

들에게 문명인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땅을 손에 넣기 위해 밤중에 걸어오는 낯선 자”였다.

이네들은 어머니인 대지와 맏형인 하늘을 물건처럼 취급하여 탐욕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결국은 다 먹어 치워 사막으로 만들었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저 사내는 우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을까?

비록 가난하지만 자연과 이웃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일상에

울긋불긋 아웃 도어 복장을 하고 사륜구동 차에 편히 앉아서 카메라나 캠코더를 들고

떼 지어 몰려다니는 우리의 모습이

혹여 그들에게 헛된 현혹과 동경을 심어주지나 않았을는지......

렇기에 타국을 여행한다는 것은 내 돈 내고 내 맘대로 즐긴다는 무뢰한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피차간에 이해의 폭을 넓히는 진지한

사회적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타고 히말라야의 변방을 누비는 짝퉁 유목민 행세는

때로 가파르고 외진 길에서 진짜 유목민과 맞닥뜨리면

위장된 신분이 들통 나듯 계면쩍기조차 하였다.

뭐랄까, 농번기 때 구슬땀 흘리는 농부들 곁을 관광버스타고 지나가면서

오그라지던 심정과 다를 바 없다고나 할는지....

난데없는 침입자들로 방울소리 한가롭던 양들의 행진은

우왕좌왕 소란이 일었지만 목동은 그저 저 산과 초원처럼 묵묵히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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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무단 라( 해발 5088m) 굽이길이 숨이 찬지 차가 헐떡였다.

잠시 내려 차가 한 구비 느릿느릿 돌아오는 길을 가로질러 오르며

민들레처럼 샛노랗거나 또는 수줍은 산골 색시처럼

순백으로 청초한 야생화들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숨쉬기조차 벅찬 고원의 거친 들에서 너희들은 참으로 보석과 같이 빛나는구나.

너희들에게는 너희들만의 피고 지는 이유가 있겠지만

바라보는 나에게는 참으로 축복이 아닐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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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해발 오천 미터가 넘는다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아득한 높이지만

이곳 티베트에선 그 흔한 봉우리 이름 하나 얻지 못한 체

곰티재나 쑥고개와 같은 단지 언덕으로 명명된다. 라는 언덕이라는 뜻이란다.

무단 라 마루에 오르자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바람이 가스를 이리저리 몰고 다녀

전망도 없었고 정 붙일 곳도 없었다.

군데군데 검은 바위 같은 야크들은 난데없는 침입자들의 소란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풀 뜯기에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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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내려가자 빙하에서 발원한 회색빛 강이

고원을 깊게 파고들며 형성된 거대한 단구대가 나타났다.

강안(江岸)의 청 보리밭에서 일하는 아낙네들에게

저 단구의 거대한 벽은 차마 오르지 못할 절망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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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의 티베트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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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입곡류)

 

까마득한 옛날부터 삶과 죽음, 영광과 좌절, 부귀와 궁핍을 한 줄기로 모아

부단히 흘려보냈을 저 강물을 따라가며 인생을 생각해 본다.

우리 삶도 저렇게 흘러가는 것이겠지.

루소의 말처럼 20대에는 사랑을 얻기 위하여,

30대에는 더 많은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40대에는 야심을 이루기 위하여,

50대에는 손에 쥐기 위한 탐욕을 위하여 앞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러나 앞만 바라보고 흘러가는 흐름은 흉흉한 격랑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를 흘러가는가.

요동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안간힘으로 발버둥 치고나 있지 않은가.

어느 때 쯤이나 고이고 누어서 깊고 융숭해져 배도 띄우고

산 그림자라도 안을 수 있을까!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마을에 이방인을 보고 꼬마들이 몰려들었다.

꼬마들은 그대로 어렸을 적 코 훌쩍이던 내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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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콩 볶듯 요란한 폭음소리에 혼비백산 뛰쳐 나가보니

식당 옆집이 마침 오늘 개업 날 이란다.

이네들은 개업 집에 양초나 두루마리 화장지를 선물하는 우리네 풍습과는

달리 화약이 장착된 붉고 긴 띠를 사서 불꽃놀이를 한단다.

연기 자욱하게 작렬하는 폭음소리에 악귀가 놀라 도망간다나 어쩐다나.....

이것이 중국의 풍습인지, 아니면 티베트 고유의 풍습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정말 악귀가 놀라 까무러칠만한 위력은 있어 보였다.

옛날에는 사람이 귀신을 무서워했지만

이제는 귀신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변방 오지에도 귀신이 발붙일 자리가 없으니

귀신 신세도 하 따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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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맛나게 잘 드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나같이 색다른 음식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지저분한 기명에

고개를 외면하며 쫄쫄 굶는 부류가 있다.

대개는 마른 사람들이다.

마른사람에게는 마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 있는 법이다.

여자들은 자기 남편이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사람이라고 자랑을 한다.

그럴 때마다 난 속으로 이렇게 대꾸를 하곤 했었다.

“맛도 모르고 주는 대로 먹는다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요?

내 듣기에는 짐승을 키운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여성분들, 부디 용서하시라)

그래 사찰음식처럼 담백하고 정갈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길을 나서면 쫄쫄 굶고 다니기 마련이다.

이 날도 식당의 냄비가 하도 불결해 먹을 엄두가 안나

점심을 포기한 체 현관에 나와 앉아 있는데

어리게 뵈는 중국 군인이 담배를 권한다.

담배를 안 피우는 내가 몸짓으로 거부의 뜻을 표시하자

멋쩍어 하는 모습이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이사람 중공군, 무서운 붉은 오랑캐가 아닌가.

그러나 뿔도 나지 않았고 앳되고 순진하기 조차 보였다.

사진을 같이 찍자하니 의젓하게 포즈를 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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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시 경에 체탕을 멀리 바라보는 얄룽 창포 강변에 도착하였다.

험하고 좁은 계곡을 곤두박질쳐온 강은 이제 한시름 놓은 듯 고단한 몸을 부리고

유유자적 한가롭게 반짝였다.

산도 저 멀리 물러나 있고 하늘도 드넓게 보여

그동안 험산준령을 헤치고 온 우리들에게는 모처럼의 광활한 풍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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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언덕에서 팀장은 일행을 모여 놓고 목표했던 사미에 사원에 갈수 없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여기서 사미에 사원에 가려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1시간가량 들어가야 하고

다시 버스로 20분가량을 더 가야하는 여정인데

그 시간이면 사원이 이미 문을 닫을 시간이란다.

어쩔 수 없이 설명을 듣는 것으로 가름하기로 하였다.

체탕은 티베트 문화의 발상지인 산난(山南)의 중심 도시로 최초의 삼보사찰인

사미에 사원과 최초의 법전인 트란드룩, 그리고 최초의 궁전인 융부라캉 궁이

모두 이 주변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체탕 사람들 사이에는 ‘마을은 야롱이요, 궁은 융부라캉이며,

왕은 네츠찬포가 가장 오래 되었다’는 말이 회자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입향조가 터를 닦은 고장일 터이다.

우리들은 사미예 사원을 포기하는 대신 멀지않은 융부라캉을 가기로 했다.

융부라캉(雍布拉康), 어감이 독특하여 알아보니

‘어미사슴의 뒷다리 위에 지어진 궁전’이라는 뜻이라는데

내공이 부실해서인지 멀리서 전체의 윤곽을 아무리 열심히 헤아려 봐도

‘어미사슴의 뒷다리모습’은 그려지지 않았고 대신 하얗게 우뚝 서있는 모습이

궁전이라기보다는 외로운 섬의 등대처럼 보였다.

입구에 도착하자 화려한 꽃장식의 말과 야크가 사람들과 함께 북적거려

무슨 큰 축제라도 벌어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호객꾼들이었다.

일행들이 말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혼자 헉헉거리며 비탈길을 올라서니

전망이 탁 틔어 거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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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래의 건물들이 많이 훼손됐는지 궁전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빈약해 보였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암자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니 의지한 산 쪽을 빼고는 깎아지른 절벽에

우뚝 솟은 건물이라 천연의 요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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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는 저 멀리까지 티베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잘 정리된 넓은 평원에

보리가 누렇게 익어 추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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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가 정해진 체탕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슨 군사령부나 되는지

유별나게 우람한 정문에 복식을 갖춘 위병이 부동자세로 근무를 서는 모습은

“여기는 중국 땅이야. 절대 내 줄 수 없어!”하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제법 규모 있는 신식 건물들로 들어찬 체탕은 티베트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기보다는

차라리 중국의 여느 신흥 도시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묵게 된 호텔도 의외로 고급이었다.

더구나 탁자에는 먹음직스러운 과일접시가 놓여있어 탄성을 지르게 했다.

유니소니언 사장님의 호의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