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고원.히말라야 종단기

티벳고원.히말라야 산맥 종단여행기 4

작곡가 지성호 2005. 8. 5. 21:43

                    

                                              작곡가 지 성 호

 

표박(漂迫) 제5일(2005년 8월5일 토요일)

히말라야 대장정 2일째.

서서히 여행의 룰이 형성된다.

좌석의 공평을 기하기 위해 시계방향으로 한 칸씩 이동을 한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잔뜩 흐려있다.

오늘의 일정은 눈 뜬 장님처럼 그저 앞차만 따라가는 형국이다.

티베트 여행을 하면서 가장 불편한 점은 정확하고 자세한 지도를 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내가 어디메쯤을 떠도는지 도대체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여러분께서도 궁금하시다면 세계 지도를 살펴보든지

아니면 구글 사이트를 들어가 보시라.

티베트는 온통 암갈색 얼룩으로 칠해졌을 뿐 도시나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전혀 표시

되지 않고 있어 지도상으로만 보면 인적멸의 무인지경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설역고원에도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길이 있고 마을이 있다.

어제 밤 묵었던 링즈 같은 곳은 한족들이 물밀 듯이 들어와 신시가지를 조성해

이미 티베트의 정취는 자취조차 없고 우리나라의 읍 소재지 정도로 번성해 보였지만

이곳의 정확한 위도와 경도를 알 길이 없었다.

이 답답함은 여행을 마치고도 계속되어 여러 방법으로 내가 지나온 여정을

지도상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여태껏 미완으로 그쳤을 뿐이다.

 

낙타를 타고 대열을 지어 사막을 가는 카라반처럼 우리 일행은 일곱 대의 4륜구동 도요타에

분승하여 히말라야 언저리 어딘가를 떠돈다.

차창 밖으론 갠지스 강의 상류라는 리야허 강이 도도히 흐르고 초원엔 방목하는 가축들이

평화롭게 보였다. 마소와 양떼도 있지만 간혹 돼지들도 눈에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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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마을에서 예기치 않은 곤욕을 호되게 치렀다.

중국 여행 중 겪게 되는 에피소드 중에서 화장실 얘기가 빠지지 않지만

나로서는 터무니없는 실수로 여자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 앞에 맹세코 무슨 관음증 같은 음험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식당 샤오지에가 가리키는 건물로 화급한 나머지

무조건 뛰어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 화장실 구조를 잠깐 설명하자면 맨 안쪽에서부터 물매가 져

배설물이 폭 20cm 깊이 30cm정도의 수로로 흘러나가게 돼 있고

칸막이는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 쪽은 완전히 개방되어있고

옆 사람과는 겨우 5-60cm정도의 격벽이 있어

앉으면 가슴께부터 얼굴이 온통 노출되는 그런 구조였다.

한참 참았던 배변에 몰두하던 중인데 황당하게도 여자들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바짝 웅크리고 사태를 파악해보니 온통 여자들만 들락 달락 하는 것이

내가 여자 화장실에 잘못 들어 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나님 맙소사!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가장 안쪽에 납작 엎드려 있어 그네들은

이국의 남자가 자기들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체

태연하게 옆 사람과 얘기도 나누며 일을 본다는 사실이었다.

오호라, 어찌 하오리까!

이 절체절명의 난국을 헤쳐 나갈 묘안이 있을 리 있겠는가.

아무도 없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나중에는 다리가 저려오지, 더구나 간헐적으로 세차게 쏟아져 나오는 수세물이 튀어 오르지

정말 끔찍한 상황이었다.

난 언제까지 이렇게 웅크리고 있어야만 하며

이 상황이 길어진다면 우리 일행들은 어찌될 것인가 전전긍긍 하던 차에

(참으로 하나님이 보호하사) 일순 발길이 뚝 끈기는 것을 확인하고는

잽싸게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밖은 정오의 태양이 찬란했으며 거리에는 사람들이 한가하게 오고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 내가 입을 다문다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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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실 사건의 동네 약국에서 약사와 함께)

 

 

오후의 트레킹 대열은 이름 모를 강을 따라 진행하고 있었다.

저 강물은 굽이굽이 돌고 돌아 한없이 아래로 흘러가지만

우리는 강을 거슬러 흘러온 과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세상과는 이대로 멀어져 영원히 돈절되는 것은 아닐까.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겠지.

사람들은 왜 길을 떠나나.

왜 안락한 정착을 버리고 연어처럼 모천을 떠나 위험한 대양을 향해 모험을 하는 걸까?

왜 고요한 밤 먼 곳의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나 갈매기 끼룩대는 포구의 뱃고동소리는

심장의 박동을 뛰게 하는 걸까.

티베트의 길은 눈물겹다.

다리 하나만 있어도 바로 코앞의 길을 한없이 돌아야 하고

천길 벼랑으로, 때론 진창으로, 때론 초원으로,

어제까지 다녔던 길도 간밤의 폭우에 끊기기도 다반사란다.

사정없이 요동치며 솟구치는 자동차를 왼종일 타다보면

허리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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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인지 강인지.....)

 

우리나라 같으면 강변에 포풀러 나무들 하늘을 쓰다듬으며 반짝일 테고

마을들은 옹기종기 정겨우련만 저 거친 산악이며 황토 빛 넘실대는 강물은

사람들을 붙이지 않는 듯 마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나타난 황금빛 모래언덕,

일행은 예기치 않은 풍경에 차를 세웠고 기어이 그곳을 향해 내달렸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이라더니 히말라야의 속내는 크고도 깊어

구비 구비마다 펼쳐놓은 형상은 지질학의 모든 현상을 집대성 해 놓은 것 같았다.

강변에 갑자기 나타난 엄청난 모래지대,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우리는 나이도 잊고 철부지 악동이 되어 산처럼 높은 사구(砂丘)의 사면에 바람이 그려놓은 그 섬세하고도 고운 선을 마구 유린한 체 정복해버리고 말았다.

죄책감으로 걱정하는 나에게 일행은 바람이 하루 만에 원상회복할거라고 아무 걱정 말라고 하였다.

이 모래는 어데서 온 것일까.

강물이 퇴적해 놓은 것으로 보기에는 그 높이와 규모가 너무도 컸다.

그렇다면 히말라야가 까마득한 옛날에는 바다였다니 바다가 융기하여 생성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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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나타난 사구, 그 섬세한 바람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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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어이 올라가누나. 왼편 양교장 선생님, 학생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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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좋기도하겠수!)

 

마침 근처에 용암으로 형성된 바위까지 있어

답사 나온 학생들처럼 히말라야의 궁금증이 더해 갈 즈음,

나의 룸메이트인 최훈용 선생님이 나서서 특유의 달변으로

전문가다운 시원하고도 해박한 설명을 할 때 우리는 분명히 감동하였다.

왜냐구요?

우리는 이 한 번의 설명으로도 단박에 최 선생님이 얼마나 유능한 지학선생님인지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겉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 선생님의 의외의 진면목이

그 감동을 더 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말 잘 듣는 착한 모범생으로 변한 우리에게

그것은 오랜만의 아주 기분 좋은 무흣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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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이 굳어 형성된 바위)

 

 

이 예기치 않은 이탈로 우리는 팀장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아야만 했다.

영문도 모른 체 앞서 가기만 하던 1,2호 차는 아무리 기다려도 뒤 따르던 차가 오지 않자

그러잖아도 협소하고 위험한 도로에서 무슨 사고나 당하지 안했나 걱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혼날 일을 했기 때문에 기꺼이 질책을 받아들였지만

그 좋은 풍경을 놓치지 않았으니 속으론 즐겁기만 했었고

결과적으로 이날 밤에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일정에 차질이 생기자 팀장은 예정에 없던 랑시엔(해발2950m) 에서 묵기로 하였다.

오늘 하루의 여정은 260km

랑시엔은 관광객들이 지나치는 도로에서 안으로 상당히 들어 온 변방으로

원래 군인들의 주둔지였다 한다.

마을 이름조차 늑대와 관련이 있다니 늑대가 우는 마을, 마치 전설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러니 병관의 시설은 형편없었고 만약 방 열쇠를 잃어버리면

3일치의 숙박비를 지불해야 한다는 주의를 단단히 받았다.

왜 3일치냐면 열쇠를 다시 맞추기 위해 왕복 3일이 소요되는 곳까지 갔다 와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만큼 오지 중 오지이다.

외국 사람들은 우리가 처음이라는 이 동네에 저녁은 의외로 먹을 만했다.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친 30여명의 사람들이 이것저것 음식을 주문하고

요구사항이 많아지니 처음에 신이나 하던 식당의 예쁜 샤오지에가

사소한 일로 나중엔 토라져 화를 여과 없이 발산하는 모습은 어이없기도 하였지만

한편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본성 그 자체였고

일행 중 몇 남정네들은 그 모습을 은근히 즐겨하기도 했다.

저녁을 마치고 몇 사람이 병관을 나서 동네를 한 바퀴 둘러 볼 참이었다.

마을은 가로등이 없어 어두웠고 상점에 알전구가 깜박이는 모습이

60년대 우리네 면소재지 모습과 다를 바 없어보였다.

무슨 혁명 기념탑이 있는 광장을 돌아 병관으로 오는데

우리 팀장께서 원주민 서넛과 창주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일행이 합류해서 손뼉치고 흥을 돋우며 노래를 부르자

어디서를 오는지 순식간에 온 동네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어 흥겨운 동네잔치가 벌어져 버렸다.

우리 일행 중 몇 사람이 주변 가게에서 마실 것 먹을 것을 잔뜩 사가지고 와

이것을 나누어 먹고 마시며 이쪽에서 노래 한 곡조를 뽑으면

저쪽에서 답창으로 한 곡조 뽑는 형식으로 그 열기가 갈수록 더해지더니

우리 여행단 중 막내 최동욱군이 ‘자 여행을 떠나요 신나게 신나게 떠나요’를

그보다 더 신나게 부르자 결국은 내남없이 어우러져

같이 춤추고 노래하는 굉장한 잔치판이 벌어진 것이었다.

음악을 직업으로 사는 사람이지만 이토록 감동적인 소통의 현장이 또 있었을까!

아, 사람이 사는 모습은 다를 바 없었다.

이네들과 우리 사이에 이념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지리적 물질적 환경은 다르겠지만,

노래를 매개로 하여 인간적 감정을 소통하는 데는 조금치도 어려움이 없었다.

설령 아주 까마득한 석기시대 사람들을 만난다 해도

인간인 이상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네들은 잔치가 파한 후에도 헤어지기 애석해 하며 병관까지 따라왔다.

이들과의 우연한 만남이 한 순간이었지만 나에겐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겠지.

그리고 많이 그립겠지.

인연이란 헤어지기 위해서 있는 걸까.

나비는 꽃샘의 꿀을 탐하지만 꽃을 소유하지 않는다.

꽃도 나비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게 자연의 법칙이다.

우리들은 이들에게 기압차로 팽팽하게 부풀은 초코파이와 볼펜을 나누어 주며

석별을 못내 아쉬워했다.

여러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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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까지 따라온 동네 사람들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