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고원.히말라야 종단기

티벳고원,히말라야 종단기6

작곡가 지성호 2005. 8. 7. 21:45

 

표박(漂迫) 제7일(2005년 8월7일)

히말라야 대장정 4일째.

캐러밴은 이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티베트 제2의 도시 시가체를 향한다.

얄룽창포강을 따라 달리는 도로는 포장도로이다.

고산증세와 여행의 피로가 누적 되는지 캐러밴이 잠시 도로변에 쉴 때면

증세가 심한 여선생님들이 고통스럽게 구토를 하기도 한다.

공가공항 옆을 지나친다.

아니 공가 공항이라니,

우리는 3일씩이나 쉬지 않고 히말라야 오지의 중심을 파고든다고 생각했었는데

난데없는 공가 공항이 나타나니 이게 왠일인가 싶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따져보니 여행의 진로가 라싸를 기점으로 동북쪽으로 갔다가

다시 서남쪽으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얄룽창포강이 라싸강과 합류하는 츄술(曲水)에서

얌드록 쵸 로 접어들었던 이날의 행로도 한국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갔던 츄슬의 다리가

바로 달라이라마가 망명길에 황망히 걸어서 건넜던 다리였다는

사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젠장! 지도가 없으니 장님과 다를 바 없었다.

 

얌드록 쵸

 

티베트에선 좀처럼 경험할 수 없었던 잘 정비되고 포장된 도로지만

아름다움으로 가는 모든 길이 그러하듯 구비 구비 거대한 산을 휘감으며

캄바 라(4794m)정상부까지 굽어 도는 긴 오름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개 마루를 넘어서자

오호라! 시야 가득 ‘푸른 보석’ 얌드록 쵸가 펼쳐진다.

남쵸, 마나사로바와 더불어 티베트의 3대 성호(聖湖)로 일컬어지는 곳.

호수의 물이 마르면 티베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러니, 이 호수의 물은 영원히 마를 수 없다는,

그러니까 결국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말과 피장파장인 셈이다.

호수의 길이는 130km, 너비는 70km, 총 둘레는 250km에 달한다니

내 시야에 잡힌 건 부분에 불과하다.

높이가 높이 인지라(4488m) 에워 싼 산들에는 나무 하나 없이 녹색 벨벳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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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맥과 구름과 이것들을 비추고 누운 무한량의 물의 집적은

시원과 닿아있는 어떤 외포(畏怖)감을 주었다.

저 광대한 풍광에 압도된 미미한 존재가 말을 잃는다.

빙하호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저 사무치는 물 빛.

언젠가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마주친 오싹하도록 신비로운 녹색의 소,

그 깊이를 알수 없는 짙푸름에서 오는 초월적 빛깔도 저랬었다.

왼 종일, 아니 평생을 이 고지에서 망부석처럼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

저 호수를 바라만 보고 있어도 내 삶이 구원을 받을 것 같았다.

티베트 사람들은 침묵에 의한 교감을 다르샨(darshan)이라 부른단다.

구체적으로 대화를 하지 않고 침묵의 상태로 바라만 보아도

깨달음을 상대방에게 주는 경지를 말함인데,

내게 다르샨을 줄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 호수와 산과 하늘이었다.

자연이 주는 의식변화가 인간의 삶을 고양시킬 때,

우리는 그런 곳을 샹그리라로 부르는 데 인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렇다면 이곳이 바로 그런 샹그리라가 아닐까?

나 이곳에 서서 저 호수와 산과 하늘을 바라보며

휠덴린의 히페리온 중에서 한 부분을 기도하듯 암송해본다

‘이기심으로 얼룩진 인간들끼리의 일들은 잊도록 하라.

그리고 온갖 번민과 슬픔으로 가득차서 갈구하는 마음이여,

돌아가라! 그대의 근원인 자연으로,

방황없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그 품으로.....’

 

신이시여,

당신이야말로 저 성산에 계시며 미풍과 함께

저 호숫가를 거니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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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바 라를 내려와 맑고 투명한 물이 기슭을 핥는 호수 가에 이르니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절대적 고요와 절대적 평화였다.

도처의 분쟁과 다툼이 이곳에선 아득한 꿈만 같았다.

하다못해 8월의 기승을 부리는 더위조차도 이곳엔 발을 붙이지 못한다.

마치 5월의 강가에 서 있는 듯 고원의 눈부신 햇살 아래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왜 티베트인들이 이 호수를 ‘분노한 신들의 안식처’라 했는지 이해할만 했다.

사람도 자글자글 분노가 끓어올라 걷잡을 수 없게 되면

방어기제가 작동되어 산과 물을 찾아 마음을 달래지 않던가?

신들이라고 다를 바 없나보다.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저 무수히 밀려오는 물결을 하염없이 바라본다면

분노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직한 목소리로 항용 말하는

근심이나 걱정도 다 눈 녹듯 스러질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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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 탈속의 여행은 세상살이에 지친 상처받은 자의 회한과 환멸이 내포되어 있다.

그들은 위로받기를 원하고 치유받기를 원한다.

그래 오래된 지혜는 모든 앎 모든 아름다움 모든 참됨 모든 거룩함의 원형으로

곧잘 자연을 암시해왔다.

자연에는 同等과 不同이 존재하지 않고 단지 태곳적 적막으로  거기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 속에 들어가는 영혼 역시 관조와 침잠을 계시 받고

자연과 동화되어 동등과 부동을 헤아리지 않으며 모든 불화는 사함을 받는다.

평화! 평화! 평화!

여기서 불현 듯 내가 지나온 티베트의 강이나 호수에서

낚시꾼이나 고기 잡는 어부를 한 명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저 호수에 만약 배 한척이라도 떠 있다면 분노한 신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티베트의 인적 없는 광막한 산하는 적멸의 신성한 기운으로 가득할 밖에…….

 

나가체

 

호수 주변의 나가체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위생적이고 맛있어 뵈는 음식점을 찾아 이 집 저 집 기웃거려 보았지만

그것은 그날의 요행일 뿐이었다.

마을 주변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꼭 한국의 눈 녹는 날 질척이는 도로변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마을을 벗어나면 그리도 아름다운데

거기에 몸담고 사는 사람들의 환경은 왜 이리 구질구질한지…….

제도와 물적 토대가 사람의 의식을 좌우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가난 때문에?

내 군대 시절이 생각난다.

강원도 최전방 향로봉 지척에 있는 둥글 봉에서 벙커작업을 할 때였다.

물도 전기도 없는 고지에서 가혹한 작업량 달성에 시달리는 군인들에게

습한 텐트는 그냥 짐승들의 굴처럼 잠만 자는 공간이었다.

동해안에서 구름이 밀려와 이 산에 부딪히면 어김없이 비로 뿌려

아침에 일어나면 모포에 하얗게 곰팡이가 피고 질척이는 산길 때문에

군인들의 신발에는 흙덩이가 엉겨 붙어 걷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바짓가랑이는 언제나 젖어있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말년이었던 나는 고참이 움직이면 귀찮을 수밖에 없는 졸병들의 은근한 눈총을 애써 무시하고

텐트 주변의 환경을 짬짬이 가꿔 나갔다.

물기를 머금었다가 뿌리는 나무를 베어내고 그 가지를 잘라 계단을 만들고

둘레의 관목들을 쳐 없애고 해가 조금이라도 나면 모포를 널고…….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별장처럼 쾌적하게 가꿔 나갔다.

제도와 물적 토대가 사람의 의식을 좌우한다면 환경 또한 사람의 의식을 좌우하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가난하더라도 기왕이면 자연을 누리며 쾌적하고 아름답게

인간다운 존엄을 가지고 살자는 것이다.

목숨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당연하려니와

내 주변 환경을 위해서도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죽으면 썩어질 몸뚱이를 아껴서 무엇 한단 말인가…….

그나마 관광객들이 화장실을 찾는데 적지 않은 돈을 요구한다.

돈 받을 만한 시설도 없으면서 오로지 급한 사람들의 형편을 이용한 돈벌이일 뿐이다.

각박하고 살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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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룸메이트 최훈용 선생님의 왕성한 식욕.

어느 때든 뭐든 가리지 않고 싹싹 비워낸다.

난 단지 내게 없는 것을 다 갖고 계신 최 선생님을 엄청 부러워 할 뿐이다.

뒤편 좌석에는 원주민들이 짜이를 마시고 있다.

 

 

 

카로 라 빙하

얌드록 쵸를 순례함으로 어릴 적부터 세계지도를 볼 때마다

길 떠남을 충동질 했던 호수며 강이며 산맥들,

그 숱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커다란 호기심 한 덩어리를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이제 또 다른 설렘이었던 카로 라 빙하를 찾아간다.

빙하라니, 중학교 지리시간에 빙하지형을 경험하지 않은

선생님의 심드렁한 설명을 들을 때 내 상상의 나래는

에티가 산다는 눈부신 설산의 경사면을 미끄러져 가고 있었지.

해발 5,010m의 카로 라를 오르는 길,

멀리 노진캉짱산(7191m)이 구름 속에 흰 눈의 더깨를 이고 위용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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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밑에 도착하여 차 문을 여니 냉장고를 열었을 때 느껴지는 싸한 서늘함이

과연 이곳이 빙하지대임을 실감케 하였다.

얌드록 쵸 에선 내려다 봤는데 이제는 우러러 본다.

빙하 녹은 물이 검은 바위틈에 하얀 띠를 이루며 여기 저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설선이 2년전 까지만 해도 카로 라 언덕 도로 인접까지 흘러 내려왔었다는 데

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인해 100여 미터나 후퇴했단다.

불과 2년 만에 100미터라니…….

이런 설명은 마음을 한없이 우울하게 한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시 올려다보니 문명에 쫓긴 다급한 하얀 용들이

경사면을 몸부림치며 올라가는 듯도 보였다.

저 만년설 속에 기어이 올라야만 승천할 수 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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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고원은 동남아시아 지방의 대부분의 강이 발원하는 곳이다.

양쯔 강·황허 강·메콩 강 등 아시아의 주요한 강은 거의 모두 티베트에서 발원한다.

그러므로 티베트의 생태 위기는 곧 하구 지역 국가들의 생태 위기로 연결된다.

최근 마크 제롬 월터스가 쓴 <자연의 역습, 환경전염병>이라는 책이 소개되었다.

이 책을 보면 문란한 성생활 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알려진 에이즈는

사실 인간들의 무분별한 야생동물 사냥과 원시림 파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살기에 더 적합한 곳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오히려 질병을 일으키는 수많은 미생물의 안온한 서식처가 되어

그 결과 불치의 병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특별한 종이 아니라

기후와 생태계 그리고 서로 얽힌 생태계 그물망 속에 있는 종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문명은 탐욕으로 중심을 잃었다.

삶의 중심을 잃었고, 대지와의 관계도 깨어졌다.

우리가 자연을 함부로 다루면 뉴우 올리언즈의 카트리나 처럼

자연은 우리에게 역습을 가한다.

그 위험한 경고를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저 설선 밑에 펄럭이는 타루쵸도 턱밑까지 쳐들어온

무차별 개발론 자들에 맞서는 외로운 퍼포먼스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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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에서 흘러내린 물에 손을 담가본다.

손끝이 아프도록 시리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섬뜩한 차가움이 내 몸이 정상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일행들은 기어이 빙하를 향해 올라갔지만 나는 몸이 너무도 좋지 않아 포기하였다.

사실 어제부터 설사가 심했고 오늘은 열까지 올라

온 몸의 뼈마디가 다 아파 고통스러웠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는 고산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기서도 나의 룸메이트인 최훈용 선생님이 괴력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일착으로 설선에 올라 웃통을 벗어 제키고 그 차가운 물로 몸을 씻는다.

보는 것만으로도 내 몸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는다.

열에 들뜬 내 눈엔 모든 게 몽환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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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인 최훈용선생님(이동준 선생님 사진)

 

간체

간체 가는 길

먼지 펄펄 나는 길은 끝없이 호수를 따라간다.

얌드록 과는 달리 물빛이 푸르죽죽 죽은 색깔이다.

마치 금속판처럼 비정하게도 보인다.

주위엔 나무 뿐 아니라 지의류조차도 없어 더욱 사막처럼 황량하기만하다.

그런 길을 두 시간 정도 내처 달려가지만 마주치는 차도 없고 사람도 없다.

단지 우리 일행들만 꽁무니에 먼지구름을 달고 외롭게 달릴 뿐이다.

은하철도 999처럼.

아픈 나에게는 고통의 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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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4시40분 쯤 간체에 도착.

해발고도는 4000m에서 50m가 부족한 3950m 란다.

이곳을 장체라고도 불러 처음엔 장체와 간체가 다른 도시인줄 알았었는데

나중에 보니 같은 도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어의 표기는 갼체(Gyantse), 한자로는 江孜이니

갼체는 본래의 지명이고 장체는 아무래도 중국식 발음인가보다.

나라를 뺐기면 이름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것임을…….

팀장이 이곳을 주목하라고 한다.

바이취사(백거사) 쿰붐, 간체종(산성) 모두 중요한 곳이고

팀장 개인으로서는 티베트에서 이곳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티베트를 수십 번 가이드한 전문가의 말이니 새겨들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내 몸은 정말 심상치 않았다.

일행에 누가 될까봐 내색도 못하고 말 그대로 속으로 끙끙 앓으며 견디었다.

결국 쿰붐사원 입구에서 사진만 몇 컷 찍고 밖에서 일행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1418년에 지어졌다는 높이 35m의 거대한 황금색 스투파,

십만탑 간체 쿰붐의 내부는 나에게 미답의 공간이 돼버렸다.

나중에 보게 된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보다나뜨 스투파나 몽키 템플의 스투파도

다 이와 유사하게 탑체 꼭대기 부분 4면 벽면에 ‘보호의 눈’이라 불리는

부처의 눈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이러한 스투파 모양을 네팔양식이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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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투파 양식에서 알 수 있듯 간체는 얼마 전에 우리나라 TV에도 소개된 적 있는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연장으로서 15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부탄과 인도 네팔을 잇는 대상(隊商)무역의 관문이었다 한다.

근세에는 영국군이 이 길을 타고 티베트를 침공했고,

달라이라마는 이 길을 타고 다람살라로 망명했던 통한의 길이기도 하다.

우리 여행단이 라싸에서 잠시 동북부로 우회한 것을 빼면

대체로 이 루트를 타고 여행하였다,

즉 라싸 → 나가체 → 시가체 → 라체 → 팅그리 → 니얄람 → 장무를 거쳐

네팔의 코다리에 이르는 코스다.

지금은 이 루트를 우정공로(友情公路 Friend Ship Highway)라 불러

내륙국(?) 티베트가 타국과 소통하는 국제도로가 되었다.

 

간체종

 

쿰붐사원 마당에서 오른쪽으로 멀리 가파른 산등성이에 간체종이 보인다.

간체자체가 4000m대의 고지대여서 나무하나 없이 벌거벗은 산등성이 인지라

성곽의 윤곽이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진주성이나 행주산성과 같은 곳으로

이곳 사람들이 영웅성(英雄城)이라 부르며 기린단다.

과거 신식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이 이곳에 침입했을 때

조잡한 재래식 무기로 극렬하게 저항하다가 끝내는 수비대 대부분이

절벽에서 투신하여 옥쇄(玉碎) 했다는 비장한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나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티베트가 중국에 유린됨에 따라

역사조차도 중국으로 편입되어 간체종의 전사들은

졸지에 제국주의자와 맞서 싸운 중국의 애국자로 둔갑하고 말았다.

아마 이들이 살아서 중국의 침략에 당면했었다면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저항했을 거다.

망국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성내에는 아직도 당시의 포대가 있으며,

성곽의 외관도 잘 보존되어 있단다. 멀리 보기에도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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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일행을 기다리기가 뭐해 사원을 나와 먼저

이 코스를 다녀가셨던 선생님의 권유가 생각나서

사원 앞 골동품 노점상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들은 하나라도 팔기위해 결사적이었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어도 그냥 나올 수는 없다. 그

만큼 절박하다는 것이겠지.

그래 물건보다도 가장 남루해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골동품을 사기로 했다.

티베트인들의 얼굴은 따가운 직사광선에 노출되어

특히 광대뼈 부근이 벗겨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그 정도가 심하였다.

한 번도 감아 본적이 없었을 것 같은 떡진 머리에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누런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너무나 애절하여 몇 점을 더 사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때 사온 골동품을 볼 때마다 그 아주머니의 눈빛이 떠올려진다.

 

시가체에서 고산병을 앓다.

 

시가체 가는 길.

제법 넓어 보이는 평야에는 보리가 파랬었지.

농부들이 하루 일을 끝내고 풀을 잔뜩 구럭에 지고 가는가하면

소떼를 몰고 가는 사람도 보였었지.

모두가 남루하고 고단한 인생의 짐을 지고서 가고 있었지.

이때 돌연히 하늘이 컴컴해지고 먹장구름이 몰아치더니

가로수가 미친 듯이 머리를 뒤 흔들고 바람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보리밭을 온통 분탕질을 쳐댔었지.

기어이 소나기가 먼 산을 집어 삼키고는

벌판을 가로질러 차창을 세차게 두들겨대기 시작했었지.

그러나 길을 가던 농부들은 누구하나 비를 피하지 않고

갈 길을 가고 있었지. 하다못해 소떼조차도 당연한 일상인양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지.

난 신열에 들떠 자꾸만 떨리는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아프기 까지 했었지만 옆 사람이 불편할까봐 이를 악물었었지.

가도 가도 끝없는 길. 빨리 몸을 부리고 눕고만 싶었었지.

너무도 고통스러웠어.

비가 그치고 스멀스멀 구름이 물러가더니

거짓말처럼 짙푸른 하늘에 말갛게 씻긴 찬란한 오후의 태양이 비스듬히 비치는 거야.

난 잊지도 않아. 산동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었지.

그때 난 굉장히 비관적이었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는 거야.

그러고는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모르겠지만

헤이룽장 성 출신이라는 덩치 큰 조선족 가이드가 내방에 와서 의사를 부르겠다는 거야.

다행히 시가체는 티베트 제2의 도시고 호텔이 큰지라

고소 증 전문의사가 있어 부르면 바로 왕진을 온다는 거지.

근데 내가 한국에서 들은 소리가 있어 현지 의사를 부른다는 게 영 마뜩찮아.

중국에선 일회용 주사기가 없어 주사기를 끓인 물에 소독하여 사용하는데

그 바늘을 하도 여러 번 사용하여 끝이 무뎌진 것을 쓴다는…….

그리고 그때 난데없는 수호지가 생각나는 거야.

인적 없는 주막집에서 나그네의 간을 들어내어 만두속을 한다는 대목 말이지.

난 솔직히 말해 만두속이 되고 싶진 않았거든.

그래서 그렇게 말했어. 의사를 부르긴 하겠는데

우리 일행 중에 수련의가 있으니 그 사람을 입회시켜 달라고.

그랬더니 그 덩치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야.

무슨 음모가 있나?

그러나 어쩌겠어, 아파죽겠는데. 떨이가 나고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새어나오는데 의사라는 사람이 왔어.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난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

차라리 가운을 입지 말던가.

원래 흰 가운이었을 텐데 한 번도 세탁을 하지 않았는지

때가 쪄들었어.

손톱 밑도 새카맣고, 머리도 감질 않아 번들번들해.

그게 무슨 의사야. 없던 병도 옮기게 생겼는데.

그런데 방법이 없는 거야. 정말 죽기 아니면 살기였지.

그 의사선상, 그럴듯한 왕진가방도 없이 꾀죄죄한 주머니에서

수은 체온계를 꺼내더니 다행히 입에 넣지 않고 겨드랑이에다 넣더라고.

입에 넣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거부 했을 거야.

설마 했는데 열이 40도인거야.

에구머니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의사 선상의 진단은 고산병이래.

난 티베트 오기 전에 이 고산증에관한 공부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었지.

그런데 그 고산병이 실체가 없는 거야.

무슨 전설처럼 허풍인지 사실인지 영 헛갈리데.

옛날에 내가 지리산을 한참 다닐 때 보면 원래 산사람들이 허풍이 좀 세거든.

그 예방법도 무슨 선문답 같은 것들도 있고.

가장 좋은 대처 방법은 물을 많이 마시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본인만의 페이스로 절대 서둘거나 무리하지 말라는 거지.

그런데 계급도 없고 장사도 없다는 고소증이 하필 나에게 오다니.

난 원래 과민성 체질이야. 조금만 환경이 바뀌어도 설사를 하는.

난 처음에는 그런 증상이 좀 심한 거라고 생각했었어.

한족들이 점령한 식당들의 음식이 워낙 다 기름졌었으니까.

의사가 병원인지 약국인지 가서 주사를 준비해 오겠데.

다급해서 내가 덩치 가이드에게 말했어. 어떻게 생긴 주사기냐고 물어달라고.

가이드가 내 말을 잘 이해를 못하더라구.

그래 다시 말했지. 혹시 여기는 일회용주사기는 없는 곳이냐고.

나로서는 대단히 중요했거든.

그랬더니 가이드가 나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더니 여기도 다 일회용을 쓴다는 거야.

한참 만에 의사가 검은 비닐봉지를 탈래탈래 들고 왔는데

링거를 4병이나 맞아야 된다는 거야.

아니 난 조그만 1회용 주사를 맞는 줄 알았는데

링거를 그것도 한 병이 아니고 4병씩이나?

난 예방주사도 맞기가 싫어 도망 다닌 사람이야.

난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빼면 병원 근처도 안가는 사람이야.

그건 말도 안 돼! 흑! 흑! 흑!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흑! 흑! 흑!

그래도 여기서 객사할 수는 없었지.

그 의사 선상 링거바늘을 팔뚝 혈관에 꼽고 고정 테이프를 붙이는데

아 글쎄 테이프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그 꼬질꼬질한 소매에다

죽 붙였다가는 그걸 하나하나 떼어내어 바늘을 고정 시키는 거야.

티베트산 병균이 수액을 타고 흘러 들어갈 것만 같았었지.

그렇게 해서 난 꼼짝없이 환자가 돼 버린 거야.

텔 내에 어떤 소문이 그리도 빨리 돌았는지

조금 있으니까 문병객들이 내 방으로 오시데.

감동적인 것은 우리 점잖으신 신동희 선생님이 과자를 가지가지 종류별로 가져오셨어.

환자에 문병객에 위문품에 이쯤 되면 병실의 구색은 다 갖춘 셈이지.

그런데 말이지 열이 쩔쩔 끓고 입이 바삭바삭 타는 환자가 그 과자를 어찌 먹누!

다 나의 룸메이트 이신 최운용 선생님 차지이지.

남은 건 다음날 내차의 동행들이 드시더군.

그래도 그 정성만큼은 내가 죽어도 잊을 수 없지. 암, 못 잊고말고!

밤이 깊어 가는데 수액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별 생각 다 드는 거야.

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누!

우선 창피하기도 하고 만약 내일까지도 낫지 않으면 어찌돼나 걱정도 되고.

죽더라도 초모랑마를 꼭 봐야만 하는데 아침까지 차도가 없으면

무조건 네팔 쪽 저지대로 후송하겠다는 거야.

참, 내 지금도 가끔 생각하려니와 그 의사선상 되게 성실한 분이였어.

꼬박 밤을 새며 날 지켜주던 그분의 유달리 검은 눈동자를 난 영원히 기억할거야.

그리고 이참에 나로 인해 마음고생이 만만찮았을 팀장과 가이드에게

감사하고 고마웠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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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체의 고산병 환자

링거병을 조명 스탠드에걸고, 신동희 선생님의 위문품과자가 침대 왼편 머리맡에 놓여있다.(이동준 선생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