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의 길 떠남인가!
난마와 같이 얽히고 얽힌 삶의 여정은 한순간도 단절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오로지 앞으로만 진행되기 마련이다.
지금과 같은 서바이벌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구체적 경쟁상대나 성취할 목표가 없더라도 그냥 앞만 보고 달려간다.
도처에서 바쁘다고 아우성이다.
은퇴하신 분들 근황을 여쭈어 보면 열이면 열, 한결같이 현직보다 더 바쁘다고 말씀하신다.
바쁘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는 맹목적 관성은 이제 시대의 슬픈 숙명이 되었나보다.
강단의 한 한기가 마무리 된 후 ‘정착’의 진부함에 진저리 칠 지음, 때맞춰 김홍경 선생님의 전화가 왔다.
티베트 식구들의 제주도 여행 공지가 떴으니 한 번 보시라고....
이걸 보는 순간 아, 내가 과연 갈 수 있는 형편인가를 따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갈 수 없는 형편이 더 많아 보였다.
길 떠남은 일상의 단절이다.
관성의 엔진을 꺼버리고 전혀 낯선 길과 시간으로 나서는 것이다.
이게 두려운 것이다.
이런 망설임의 때는 어김없이 울 각시가 단칼에 정리를 해 준다.
당장 항공편을 알아보라고...
그러나 그 쾌도난마의 이면을 짐작하는 나로서는 심사가 편할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등 떠밀리듯 떠난 여행이었다.
2월2일 월요일
티베트 식구들의 공식적 모임이 시작되는 날까지 제주도를 홀로 떠돌 생각으로 월요일 비행기를 탔다.
(군산 발 13:30-제주 착 14:20)
비행기가 등속도로 안정되어서야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서기 전의 망설임을 내려놓는다.
국외든 국내든 비행기에서 내리면 막막하다.
입국장에서 손 팻말을 들고 사람을 찾는 열띤 시선들을 피해 황급히 공황을 빠져 나오면 잠시 동안 갈 바를 몰라 망연자실한다.
어디로 가야하나, 묵직하게 어깨를 파고드는 배낭을 추스르며 서성이다가 일단 100번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그래, 오늘은 마라도를 바라고 배를 탈 수 있는 모슬포 까지만 가자꾸나.
마침 출발선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오르니 이 버스는 제주도의 서쪽 해안을 더트며 바다를 향한 포구와 산자락 마을을 다 들르는 일종의 시내버스였다.
낯선 사투리들이 왁자하니 밀려 왔다가 사라진다.
소금기 머문 짙은 상록수 잎들, 검은 돌담,
해안을 향해 끊임없이 밀려오는 포말이 그리는 하얀 선,
좌석 깊숙이 등을 묻고 들릴 리 없는 갈매기들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먼 바다와 그보다 더 먼 하늘의 쓸쓸함이 사무친다.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배기에는 샛노란 유채꽃이 선명하다.
5시가 다되어 모슬포에 도착.
바다 쪽에서 몰려오는 매서운 찬바람 앞에 서니 배고픔이 한기와 함께 몰려온다.
아, 점심조차 걸렀구나.
승객들은 분명한 방향감을 가지고 저마다의 목적지로 뿔뿔이 흩어지는데 난 또 어디로 향해야 하나...
일단 모슬포항을 향하기로 했다.
찬바람이 송곳같이 품을 들쑤신다.
따뜻한 남쪽 나라인 줄 알고 허술한 차림으로 나섰는데 낭패스럽다.
날씨가 차가우니 바라보이는 모든 것이 차갑게 다가온다.
추위 앞에 종종걸음 치는 사람들에게 길 묻기가 구차하여 무거운 배낭을 메고 무작정 항구로 짐작되는 곳을 향하다 보니 길을 잘못 든 게 분명하다.
으스스한 바닷가에는 철시한 상점들의 완강하게 닫힌 문과 빛바랜 상호들이 세트장처럼 적막하다.
찬바람만이 우우 함성을 지르며 몰려다닌다.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개새끼 한 마리 어른거리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남단 항구라 해서 겨울의 추위를 피해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는다.
곡절 끝에 식당들이 밀집한 항구에 도착.
배가 너무 고프지만 아무 식당에나 갈 수는 없다.
기웃거리다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다.
고등어구이 한 마리와 밥 한공기가 최소한의 밑반찬과 함께 나온다. 가격은 13000원!
전주 같으면 한 상 가득 반찬을 쌓아놓고 먹을 음식 값인데....
그래, 여기는 제주도야.
밥을 먹으며 느려 터져 전혀 스마트 하지 못한 폰으로 숙소를 검색한다.
이방인을 완강하게 거절하는 것 같은 이 항구의 삭막함이 싫어 아다지오 라는 게스트하우스를 낙점한다.
Adagio라는 음악용어를 사용했다면 클래식 음악을 아는 사람일 것이고 그런 숙소라면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런데 웬걸 이 숙소는 다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를 가야하는 화순리 산방산 근처에 있었다.
도착하니 7시. 고단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