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도

영춘.탐라5

작곡가 지성호 2015. 3. 2. 22:47

          26일 금요일                                

                                        작곡가 지성호

 

 

제주에서 보내는 마지막 일정이다.

여행의 관성이 자리 잡자마자

내일이면 또 일상에 복귀해야한다.

내가 집을 떠나면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이상이 생길 줄 알았지만

오늘 태양은 어김없이 떠올랐고

아침뉴스는 지난밤의 사건소식을 전하기에 바쁘다.

 

남들은 다 출근길을 서둘지만 우리는 오늘의 여행일정을 체크한다.

이걸 불공평하다고 말하지 말라!

지난주엔 나도 막히는 출근길에 발을 동동 굴렀고 밤새워 자판을 두들겼다.

그들에겐 그들의 일이 있고 우리에겐 우리의 일이 있을 뿐이다.

 

 

오늘 일정은 거문오름을 탐방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거문오름은 오르고 싶다해서 오를 수 있는 오름이 아니었다.

하루 400명으로 입장을 엄격히 제한하기 때문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관광지가 이토록 입장을 제한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곳이라는 기대가 부푼 풍선처럼 충천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매표소에서 자연환경을 해칠 우려가 있는 스틱은 절대 소지할 수 없고 신발조차 임대를 해주어 바꿔 신게 했다.

덕분에 우리 유선생님은 꺼림칙하게도 남의 신발을 신어야만 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몇 년 전 미국 서부를 여행할 때 데스벨리를 가기 위해 론 파인(Lone pine)이란 곳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숙소에서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다는 휘트니 산(4,418m)의 전모가 잘 보여 알아보니

이 산을 오르려면  매년 3월에 예약을 받고, 4월에 추첨을 하며 하루에 일정 숫자의 등산객만 입장시킨단다

Overnight Use : 60 / 하루

Day Use: 100 / 하루

 

그러니까 이 넓은 산에 하루에 총 160명만 입장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입산료도 20불 가까이 내야하고

더욱 더 놀라운 건 배변 봉투를 지참해서 용변을 보고 다시 가지고 내려와야 한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미국의 유명한 명소는 대게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통제함으로

자연 훼손을 근본적으로 방지한다.

이 사람들이 이익이 된다면 다른 나라는 사정없이 파헤치고 도처에 전쟁도 불사하는

패권주의자들 인줄 알았더니 자기나라 만큼은 철두철미하게 아낀다는 사실 앞에서

두고 온 산하, 되돌아가야 할 내 땅을 생각했었다.

 

 

 

거문 오름을 이토록 까다롭게 관리하는 이유를 해설사와 함께 산행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알아가게 되었다.

배부해준 출입증을 목에 건 우리들은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해설사분의 탐방시 주의사항과 거문오름에 대한 대략을 브리핑 받고

소풍가는 초등학생이 된 기분으로 무리지어 탐방 길에 나섰다.

정말 모자 쓴 해설사분을 쫄랑쫄랑 따라가면서 난데없는 유년의 기억들이 데자뷰 같이 환기되는 것이었다.

오십 여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진 게 과연 있는 것일까?

 나이 먹는다는 것이 단지 유년기의 경험과 생각들이 어른의 언어와 행동으로 변화됐을 뿐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육신은 늙은 말처럼 노쇠해져 죽을지라도 붉은 뺨을 가진 소년의 기억을 안고 눈을 감을 것이다.

거문오름은 검은오름 검은이오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오름의 색조는 블랙이다.

이곳 흙과 돌도 유난히 검고 분화구 내 울창한 산림지대가 또한 검어 음산한 기운을 띤다는 것이다.

정말 철저히 보호받는 숲이라 그런지 울울칙칙하니 우거질 대로 우거지고 얼크러 질대로 얼크러져 겨울인데도 검은 빛이었다.

 

 

                           굽이쳐 물결치는 오름들이 거문오름을 비켜 흐르는 듯 하는구나!

 

거문오름에서 빼어난 승경을 기대해선 안 된다.

오름의 지질학적, 생태학적 지식이 없다면 그저 빼곡한 숲으로 우거진 여느 산과 다를 바 없어보였다.

그러나 이 오름 자체가 화산박물관이라 할 만큼 왕성한 화산 활동을 보여

벵뒤굴과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과 같은 용암동굴이 다 이곳에서 분출하여 생성된 것이라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제주에서 가장 긴 용암협곡을 지니고, 용암함몰구와 수직동굴, 화산탄 등 화산활동 흔적이 잘 남아 있기 때문에 세계에 드문 지질학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곶자왈'은 제주도 생태계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다.

제주도는 곶자왈의 땅이다.

그러나 개발열풍으로 이 곶자왈의 면적이 날로 줄어드는 상황 속에서 이곳 검은 오름은 곶자왈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다 한다.

 

 

                            곶자왈의 나무들은 토양이 아니라 돌밭 틈새에 뿌리를 뻗어 돌과 함께 얼키고 설켜 자란다.

                             돌짝밭에 뿌리 내리려고  애쓰고 애쓰는 우리네 삶도 저와 같을지니....

 

 

천지개벽의 날, 용암이 펄펄 끌어 넘쳤을 분화구엔 세월의 더께가 저리 쌓여 원시림을 키워냈고

하늘엔 한가로운 구름만 태평하다. 

 

 

오늘은 모처럼 날씨도 청명하려니와 해설사 분의 성의 있고 기품 있는 해설에 탐방이 덩달아 즐거웠다.

기품 있다는 말은 닳고 닳은 달변가로서가 아니라 좀 적다싶은 목소리지만

정말 거문오름과 제주도의 자연을 사랑하는 진심이 가슴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경상도 억양과 가끔씩 섞이는 사투리가 오히려 다소곳한 여성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묘하게 사람을 끌어드리는 매력적인 분이었다.

좀 착각하실 분들을 위해 밝혀둔다.

이분의 나이는 5십대 초반정도로 시장 통이나 낡은 아파트의 계단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아줌마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시다.

그런데 이분의 해설가운데 저기 저 앞에 보이는 오름이 오름의 여왕 다랑쉬 오름입니다에 꽂힌 여자분 들이 계셨다.

 단지 여왕이라는 수식어에 현혹되어 점심후의 일정은 쏜살같이 다당쉬오름으로 정해져 버렸다.

점심은 거문오름 근처 블랙푸드촌에서 생각지도 않은 깔끔하고 정갈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오름나그네 집, 두고두고 제주 갈 때 찾고 싶은 집이다.

딱 들어서자마자 베토벤의 심포니가 적당한 볼륨으로 흘러나오니 그렇게 고맙고 반가울 수가 없었다.

멀리 타국에서 고향사람을 만난 기분 이었다.

이런 주인장이면 나머지는 물어보나 마나다.

파전도 바삭하니 간도 맞아 딱딱 입에 앵긴다.

톱톱한 보말칼국수는 재료들이 블랙푸드 답게 검은색을 띤 자연식재료다.

msg에 민감한 내 혀가 이상무의 신호를 보낸다.

달거나 짜거나 맵지않고 기름지지 않아 베리 베리 굿!!!

소박하지만 흡족한 점심을 마친 후 다랑쉬로 향한다.

 

 

 

다랑쉬, 오름, 올레, 굼부리, 쇠소깍, 송이, 곶자왈, 노꼬메, 할망바위 외돌개 등등,

본토에서는 들을 수 없는 제주도 냄새 물씬 나는 지명이나 용어들이다.

그중에서도 오름은 제주다움의 표상이다.

흔히들 제주 사람은 오름에서 태어나고 죽어서 오름에 묻힌다고  말할 정도로

크고 작은 368개의 오름 자락에 기대 삶을 영위해왔다.

지금 우리가 향하는 오름은 제주 동북권에서 가장 높은 오름으로 그 모든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이다.

 

 

 

 

오름의 여왕답게 다랑쉬는 자기 모습을 빼닮은 새끼 오름을 곁에 두고 있다.

그래서 이끈오름 이란다.

이끈오름- 자연스럽게 화성학의 이끈음(reading tone)이 떠오른다.

이끈음은 조성(調性)의 중심인 으뜸음을 으뜸음답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다랑쉬라는 말은 오름 정상의 굼부리(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마을 사람들은 도랑쉬, 또는 달랑쉬 라고도 부르는가보다.

평지에서 멀리 뵈는 다랑쉬 오름은 그 외모가 단순한 선으로 높이 솟아 우뚝하여 절제된 균형미를 보여준다.

마치 사막의 피라미드 같다.

빙켈만은 그의 저서 <고전예술>에서

그리스의 예술정신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여 고귀한 단순과 조용한 위대라고 설파한 바 있다.

그렇다. 단순한 절제가 고귀한 감정을 일으킨다.

위대함은 현란함이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 드러나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 또한 과욕으로 분식하고 과장하고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위대한 자연은 뭇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의 전형으로 다랑쉬를 빚어 놓았나보다.

매일매일 보며 가슴에 새기고 배우라고!

 

 

                                                            먼데서 본 다랑쉬와 이끈 다랑쉬 

 

거친 숨을 토하며 다랑쉬를 오른다.

 일만분의 일 축적의 지도를 본다면 등고선이 동심원일 것이다.

원추의 꼭지점을 향해 갈지자로 뻗은 길을 따라 오르는 길은 경사가 몹시 가파르다.

허벅지가 경직되고 종아리가 당긴다.

어드메쯤 올라섰나 뒤를 돌아보면 와! 거침없는 제주의 들녘이 꿈꾸듯 펼쳐진다.

헉헉거리며 굼부리의 능선에 도착하니

멀리 한라산이며, 검은 숲이며, 올망졸망한 오름들이며, 하늘과 맞닿은 끝에 바다가 어슴프레하다.

 세화리, 종달리, 하도리, 성산일출봉- 일출봉은 어디서 봐도 딱 한눈에 제 존재를 부각시킨다.

 멀리 우도까지 아마도 제주도 반절은 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 같다.

산림감시초소가 있는 꼭대기에 서니

정상을 등정한 자의 통쾌함과 광대한 시야가 주는  먹먹한  고독이 몰려온다.

 넓고 아득하고 가이없다.

묘묘한 영혼의 풍경 앞에 말을 잃는다.

 

 

 

왼쪽에 우도가 어렴풋하고  오른쪽으로 약간 치우친 중앙에 성산일출봉이 떠있는듯 보인다.

 

 

 

 

             북쪽을 바라본 모양이다. 저 인위적으로 길게 뻗은 활주로 같은 게 무얼까?

 

 

시계의 반대방향으로 날선 능선을 돈다.

안쪽으로는 115m 깊이의 굼부리가 둥글게 함몰한 것처럼 꺼져있다

바깥쪽으로는 급경사면을 타고 올라오는 세찬바람이 나를 날려버릴 것만 같다.

양쪽 모두 의지가지가 없는 좁은 옛지를 조심스레 걷는다.

긴장된다.

살아서는 불을 토하고 죽어서는 바람을 토하는 분화구라더니 저 바람에 내가 중심을 잃고 미끄러진다면 당근 끝이다.

오금이 저리고 머리털이 곤두선다.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오름 높이의 반 이상이 패어있는 굼부리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놀랍게도 저 아스라한 깊이의 바닥에는 마을 사람들이 경작하던 밭이 있었단다.

한 뼘의 경작지를 찾아 바람 맵찼을 이곳까지 오르내렸던 농부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이

저 바닥에 어려 있는 듯하다.

산다는 것의 엄숙함에 마음 한켠이 서늘해진다.

 

 

 

 

 

굼부리의 동쪽에 서니 비탈에 선 어질함이 진정되고 다시금 마음에 평정이 찾아온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세상의 아귀다툼이 다 부질없어 보인다.

불편한 것, 더러운 것, 무질서함은 보이지 않고

새의 한가로운 날갯짓처럼 평화가 어려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오름을 내려가면 세상은 좀 더 자세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미시적 삶은 나에겐 고통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높은 곳에 올라 낮은 곳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야지...

, 그래야하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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