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도

영춘, 탐라2

작곡가 지성호 2015. 2. 11. 15:24

23일 화요일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새벽 130.

십여 년간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굳어진 습관이다.

통상 930분경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130분 정도가 되면 일어나 곡을 쓰거나

일감이 없을 땐 책을 읽기도 하고 강의 준비도 한다.

그러다가 창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기 시작하면 배도 고프고

지쳐 울 각시가 아침 먹자고 깨울 때까지 정말 달디 단 잠을 잔다.

 왜 하필 130분이냐고? 그건 나도 모른다. 일어나 시계를 보면 그 시간이니까.

신기한 것이 미국에서도 히말라야 산 중에서도 꼭 이때쯤 잠을 깬다는 것이다.

내 생체 시계는 여행 중에도 어김없이 작동될 뿐 아니라 시차도 모른다.

이것이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누구에게도,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절대적 시간.

내가 남다른 게 있다면 바로 이 특별한 시간 때문이다.

아침까지 뭘 하고 보낸다?

 배낭무게 때문에 책 한 권 챙겨오지 않고 마냥 벽만 바라 볼 수 없어

 노트를 꺼내 여행기라도 끄적여 볼 수밖에....

 

9시를 기다려 배낭을 단단히 꾸리고 신발 끈을 조여 매고 길을 나선다.

황금빛 햇빛이 찬란하다.

정갈하게 포장된 마을길을 걸으니 볼을 스치는 차갑고 청신한 바람,

바람결에 묻어나는 신령한 대기의 냄새,

누리에 평화가 가득 둘렀다.

평화! 평화! 얼마나 좋은 것이냐!

오늘 하루 이 평화를 호흡하고 평화 속에 유유자적함으로 나는 참 자유인이 될 것이다.

 

오전 10, 모슬포항에서 마라도로 출항하는 삼영호에 오르다.

 

선실은 안전하고 따뜻하겠지만 갇혀있는 답답함이 싫어 2층 갑판으로 오른다.

 바람의 위력이 얼마나 드센지 사진을 찍는 핸드폰이 흔들린다.

기둥을 의지하지 않으면 서있기 조차 버겁다.

금세 제주 본토가 저곳으로 멀리 뵌다.

멀리 봐야 전체를 알 수 있다.

멀리 왼쪽 켠에 송악산이 누에처럼 누워있고 중앙부근에 평지돌출의 산방산이 불끈 솟아있다.

그 너머는 한라산이 구름을 이고 있다.

 

 

 

 

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난바다를 헤쳐 나간다.

물빛이 푸르다 못해 검다.

거대한 물의 집적이 솟구쳤다 스러질 때마다 배가 요동친다.

모든 풍경이 드넓고 광대하다.

외포(外包)감이 압도적일수록 좌절 같은 존재의 미미함이 밀려온다.

 

 

 

납작 바다에 엎드린 가파도를 지난다.

가파도(加波島)! 한글이나, 한자가 주는 뉘앙스가 가파른 파도에 휩쓸리는 섬을 연상케 하지만

정작 그 모양이 가오리처럼 생겼다해서 가파리, 가파섬, 가파도 등으로 불렸단다.

가파도에 뿌리박은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외로운 손짓처럼 허공을 휘젓는다.

둘레가 4km남짓이고 해발고도는 고작 20.5m밖에는 되지 않는다하니

성난 파도가 한번 크게 솟구쳐 휘몰아치면 여지없이 쓸려나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30분의 항해 끝에 내 언젠가는 꼭 한번 가리라 했던 마라도에 오른다.

오른다는 말은 배가 접안한 곳에서부터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야 하는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남단 절해고도인 줄 알았더니 올라가는 사람,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인다.

이곳을 마라도 선착장이라 하지 않고 굳이 살레덕 선착장이라 부른단다.

해안선 길이라야 모두 4.2km에 불과한 손바닥만 한 섬이지만 이런 식으로 요소요소에 이름을 붙여 놨다.

섬을 관광자원화 하는 허풍 같기도 하고...

섬에 오르니 골프장처럼 반지르한 잔디밭이 펼쳐져 의표를 찌른다.

웬 잔디밭?

 가만 살펴보니 거센 바람이 풀을 자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 시골 산자락에 사는 사람으로서 한여름 키를 넘는 잡초의 놀라운 생명력을 잘 알기 때문에

얼마나 바람이 얼마나 드세면 이럴까 하는 생각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끌리는 곳으로 사라지고 바람 앞에 홀로 선다.

마라도는 바람의 섬이다. 시선을 막는 어떤 장애물도 없다. 사위가 온통 바다와 하늘이다.

 

 

 

조그마한 별에 갇힌 어린왕자는 하루 종일 해 넘어가는 광경을 바라봅니다.

해가 꼴깍 넘어가면 의자를 뒤로 물러 또다시 해넘이를 바라봅니다.

하염없이...지금 저는 마라도에 스스로 갇혔습니다.

한눈에 조망되는 정말 조그마한 섬입니다.

천지에 들리는 건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뿐....

어디서도 세찬 바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좀 여유를 누리고자 4시간 시차를 두고 표를 끊은 것이 화근입니다.

문명의 시간이 아닌 자연의 시간이 지배하는 이곳의 시간은

한없이 느려 터져 더디만 갑니다.

1시간 정도면 더 이상 볼 것도 머물 곳도 없습니다.

마라도 주민들은 이 바람의 땅에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긴 겨울을 나는지 궁금해집니다.

숱한 생각들이 집적되어 형상을 만들지 못하고 바람처럼 흩어지고 마는 것인가요...

전 지금 바람에 등 떠밀리면서 곱은 손으로 작은 문자판을 눌러

흩어지는 생각의 파편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제가 이 섬에 한철만 갇혀도

어쩔 수 없이 두루마기처럼 길고 긴 곡을 다 쓸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곡엔 바람냄세, 짭조름한 파도냄세가 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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