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가우디를 생각하다.
작곡가 지성호
1999년 2월 22일
나는 바로셀로나에 있었다.
그해 유럽에 이상 한파 및 폭설이 심해 배낭여행하기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결국 따뜻한 남쪽나라가 그리워 스위스의 주네브에서 도망치듯 야간열차를 타고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향했다.
15년이 지난 기억에도 바르셀로나는 정말 따뜻했고 볼거리도 많았다.
일정에 쫓겨 허둥대다가 그곳을 떠났지만 내 언젠가는 다시 오리라고 다짐했었다.
2013년1월15일
결국 꼭 십오년 만에 아내와 같이 오게 되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이곳은 따뜻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조차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상한파가 우리를 괴롭혔다.
기온이 영하로는 내려가지 않았지만 바람은 세차게 불고 한기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바르셀로나의 랜드 마크인 성 가족 교회 (Templo de la Sagrada Familia)!
십오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여전히 공사 중이었지만 거의 전체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1882년에 짓기 시작했다니까 130년 이상을 계속 짓고 있는 것이다.
완성? 아직도 알 수 없단다.
내가 이 교회를 알게 된 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문이었다.
매체에선 자주 바르셀로나를 소개했고 어느 날 신문 한 면에 그로테스크한 건축물이 눈에 확 띄었다.
“아, 세상에 이런 성당도 있구나!” 경탄을 자아낸 건물이 바로 성 가족 교회였다.
나에게 바르셀로나는 축구나 마라톤 경기장이 아닌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이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교회였다.
그러나 1999년 첫 방문 땐 그리 큰 감동은 없었다.
당시에는 스페인 여행에 치안 문제로 많은 곤란이 따랐다.
여행객들을 노리는 집시들에 대한 여러 불길하고 흉흉한 소문들이 혼자 여행하는 나를 심리적으로 위축 시켜서 그랬는지 늘 불안이 따라다녔다.
바르셀로나의 여러 명소들을 걸어 다니며 구경하다가 많이 지친 몸으로 찾아간 성 가족교회는 입장료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들어 가보니 외관과는 다르게 소란스러운 공사의 현장이었다.
완공도 안 된 교회를 비싼 입장료를 받고 입장시킨다는 것에 내심 불쾌감도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야 이 내막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교회가 이렇게 했던 이유는 가우디의 고집으로, 국가의 지원을 거부하고 서민들의 순수하고 자발적인 기부금에만 의존하기로 했기 때문이란다.
이 방침은 가우디가 서거한 오늘날에도 관광객의 입장료분이 추가되었을 뿐 충실히 지켜지고 있단다.
그러니까 나 같은 관광객도 입장료를 지불함으로 이 교회 건축에 미력이나마 기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교회 측은 가우디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26년을 완공 목표의 해로 정한 모양이지만,
가우디 스스로는 완공일 같은 건 염두에도 없이 짓다가 생각이 바꾸면 설계를 변경하고 점점 형태가 갖춰지면서 또 다른 아이디어를 키우고...
우리 집 가까이에 10년 넘게 누구의 조력도 받지 않고 혼자 집을 짓는 사람이 있다.
이 집이 언제 완공될는지 우리 동네의 화젯거리다.
벌써 어느 부분은 쇠락한 모습조차 보이고 있다.
그 사람에게 집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쯤 되면 단지 주거공간이 아니라 그분의 삶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우디도 숙소조차 아예 현장으로 옮겨 자고 먹으며 공사를 진척시켰다.
가우디에게 이 교회는 피그말리온의 여인상과 다름없다.
대상에 몰입하다 그만 사랑에 빠져 순사하려는- 아니, 순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순사하고 만다.
사실 젊은 시절의 가우디는 예술가 특유의 몽상적 삶을 살았던 모양이다.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늘 고급스런 양복을 입고, 비싼 마차를 타고 연극이나 오페라를 보러 다니는...
거기다 없는 주제에 입맛은 엄청 까다로워 웬만한 음식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로 미식을 탐했단다.
(꼭 나를 말하는 것 같구나)
그러던 그가 교회 건축에 몰입하면서 모든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거리의 고행하는 수도사처럼 다 헤진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녔으며 머리와 수염도 되는 대로 길렀다한다.
말년에는 활처럼 굽은 허리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걸인과 다름없었고 게다가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아 무릎을 천으로 동여매고 다녔다고 한다.
그의 곁에서 일하던 조수 중 한 명은 “과연 이 사람의 뱃속에 위가 있긴 할까” 싶을 정도로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작업에 몰두하는 날도 있었다한다.
막신일호(莫神一好), 하나의 일에 몰입해서 성취하는 것보다 신명나는 일이 없다고 했던가!
예술하는 사람의 특징이 한 작품에 꽂히면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나 같은 하찮은 사람도 한참 곡에 몰입할 때는 밥도 허겁지겁 몰아넣는다.
배만 고프지 않으면 밥 먹는 시간도 아깝다.
암탉이 알을 품을 때와 다를 바 없다.
이런 치열함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투각세공으로 장식한 높은 첨탑이 인상적이다.
가장 높은 탑은 예수를 상징하는 170m 의 높이란다.
놀랍지 않은가! 옥수수같기도 하고....
저 숭숭 뚫린 공간으로 바람이 유통됨으로
고딕양식의 늑골 궁륭과 부연 부벽이라는 외부 버팀장치가 필요없게 됐다는 것이다.
건축공학적 기능을 염두에 두면서도 이를 교묘히 작품성 안에 수용한
가우디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전통을 수용한 석조건축 옆면에 투각이라지만
오히려 덕지덕지 진흙을 주물러 맨손으로 모양을 빚은 듯한 가우디의 발상이 경이롭다.
동화책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저 조상(彫像) 들 마다 성서적 의미가 다 있다는데...
안타깝게도 도상학(圖像學iconography)에 무지한 나로서는
저 상징체계의 심오(深奧)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영혼 없는 사진기처럼 눈에 들어오는 데로만 바라만 볼뿐이다.
잘 다듬어진 거대한 열주들이 입립한 실내는 강원도 숲속에서 본 춘향목 군락을 연상케 했다.
실제로 가우디는 어느 날 우거진 숲속에 햇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그 거대한 숲을 이곳에 표현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스 신전건축에서 익숙하게 보는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주열(柱列)을
건축 용어로는 오더(order)라고 하는가보다.
그렇다면 이 공간에 나무가지처럼 손벌려 천장을 떠받치는 저 열주들은 무슨 오더라 부를는지...
아직 완공이 안 되어선지 어디에도 파이프 오르간은 없다.
목이 아프게 사방을 둘러보며 어디쯤 오르간과 파이프가 자리 잡을지 궁리를 해본다.
저 장엄한 공간에 바흐의 토카타 와 푸가 d 단조가 울려 퍼진다면 전율에 몸을 떨고도 남을 것 같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하는 신비로운 빛의 스펙트럼
이 성소에서 종교와 예술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그리스 건축에서는 신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삼분의 이를 넘는다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과 상징 등 모든 건축적 역량이 신전에 집중되었다한다.
우리나라 문화재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찰문화도 다 섬기는 신에게 최고의 예술로 봉헌하고자 하는 신앙심의 발로였고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피에따도 여기에 다름없다.
가우디가 실현하고자 했던 종교적 상징체계가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구체화 되가는 현장에 서서
교회나 성당 같은 건축물은 단지 사람이 모이는 기능만을 염두에 둔 공간이 아니라
심미적이면서도 영성이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공간자체가 하나의 상징이자 메시지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바티칸 대성당에서도 느낀 의구심 같은 게 여기서도 떠올랐다.
이 엄청난 재정이 성당축조를 위해 쓰인다는 불편한 사실이었다.
바티칸 대성당은 그 비용을 감당 할 수 없어 면죄부를 강매했고 결국 그것으로 종교개혁이 촉발됐다.
과연 신은 이러한 봉헌을 기뻐하실까?
저 화려한 자리에 신의 자리는 있기는 있는 것일까?
차라리 헐벗고 병들고 굶주린 자들에게 저 돈을 사용하는 게 신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까?
가우디 반교회운동을 극복하다.
1909년 7월,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모로코의 광산에서 노동자들이 임금 투쟁을 벌였다.
이에 대해 스페인의 중앙정부는 하필이면 카탈루냐지방 예비 군대를 모로코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카탈루냐 사람들은 모로코인들과의 전쟁에 목숨을 바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총파업을 일으켰다.
당황한 중앙정부는 이를 5.18 광주처럼 무자비하게 총칼로 진압하였다.
이 기간 동안 200여 개의 성당과 30개 이상의 수도원이 파괴되었으며 120명의 노동자가 살해되었다.
이토록 많은 종교시설이 파괴된 건 반전운동으로 시작된 반란이 반교회 운동으로 양상이 바뀐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교권주의자들이 중앙정부와 결탁하여 민중들을 수탈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의 부패상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수도원에서 위조지폐를 찍질 않나, 엄청난 거금의 주식이 쏟아져 나오질 않나, 그뿐만이 아니라 손발이 묶인 채 매장된 수녀들의 시신이 수도원 뒤뜰에서 발굴되기도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비리가 가장 신성하다고 믿는 공간에서 자행됐던 모양이다.
이러한 반교회운동의 와중 속에서 어떻게 성 가족교회는 건축을 지속시킬 수 있었을까?
나는 가우디의 역량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 얘기 했지만 가우디는 이 교회가 민중의 자발적 헌금으로 완성되길 원했고 그것을 실행했다.
바르셀로나 민중은 교회는 불신했지만 가우디는 신뢰했다.
까칠하고 예민했고 고상한 품격을 추구했던 가우디는 명성을 얻고, 부를 얻을수록 낮은 곳으로 시선을 두었던 모양이다.
대개는 젊었을 때 좌파적 이상주의자이다가 나이 들어 관록이 쌓이면 보수주의자가 되는 경향과 반대되는 현상이다.
소위 ‘비극의 주’라고 불리는 폭력이 난무하던 시기, 가우디는 공사판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위해 공사현장 지척에 성가족 교회 부속학교를 세우고 무상교육을 받을 수 있게 조치하기도 했다.
스스로는 가진 자, 성공한 자이지만 이러한 세속적 욕망을 초월에서 누더기를 입고 침식을 거르면서 성전건축에 헌신하는 가우디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었겠는가?
가우디는 자신의 종교적 열정에 노동자들과 범시민적 열정을 감동적으로 이입시킨 예술가이다.
교황의 일방적 의욕으로 시작된 바티칸과는 그 궤적을 달리한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한 예술가가 온 정신을 집중하여 오로지 신을 찬미하기 위해 짓는 성소라면 향유옥합을 깨트린 마리아의 마음을 받아들인 예수처럼 신도 기쁘게 흠향하시지 않을까?
더군다나 권력자나 정부기관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민중의 자발적 헌금으로 짓는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잖은가!
인류는 지금까지 궁핍이 뼈 속에 파고들어도 살아왔고 부귀가 하늘을 찔러도 죽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먹고사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누군가는 꿈을 위해 분골쇄신한다.
그것이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예술가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가우디는 그 표상이다.
가우디의 예술적 상상력에 사람들이 깊이 공감하여 그 현실화를 위해 숱한 세월동안 재정을 투입하고 갖은 정성을 들이는 이네들의 문화풍토가 부럽고도 또 부러우면서 불현 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사업이라고 흰소리 치면서 임기 내의 실적 쌓기에 급급한 막무가내가 있었다.
그 사람은 <빨리빨리> 부자가 되고 싶다는 대한민국 사람의 욕망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무척 영악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잘 속아 넘어가는 청맹과니였다.
두 손을 들어 머리위에서 하트모양을 그리며 "여러분 부자 되세요" 하던 그 사람의 모습이
느닷없이 사그라다 파말리아의 대장정 (大長程), 대역사(大役事)의 현장에서 오버랩 되는 것이었다.
MB 같은 사람을 틀림없이 대통령으로 뽑았을 어느 건설회사 직원이 성가족교회 현장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한다.
"우리 같으면 6개월이면 끝내는데..."
막무가내 불도저 정신은 토목 같은 하드웨어만 밀어붙인 게 아니라 대학에서조차 취업률을 무차별적으로 내세워 인문대와 예술대를 초토화 시켰다.
통찰력은 어디서 나오나?
인문학이다.
창의성은?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전부다.
당장 돈이 되지 않고, 실적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이런 것을 도외시 한다면 카피캣 밖에 더되겠는가?
공장형 양산형 인재만 찍어내서는 언제나 2류 밖에 될 수 없다.
기업에서 할 수 없는 백년대계를 지원하는 게 국가가 하는 일이거늘!
이 사람들아, 보라! 세계 도처에서 가우디의 건축물 앞에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보라!
사실 바르셀로나는 천재 건축가 가우디를 팔아서 먹고살고 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거대한 보라빛 돌기둥은 보석보다 더 귀하고 쇠보다 더 단단한 것으로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것이라 한다.
가우디 말년의 낮은 데로 임하는 시선은
파사드에 새길 성서의 인물들을 동네 사람들, 노동자, 잡상인들과 같이 몸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찾았다한다.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 중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을 섭외해서 그들의 몸뚱어리와 얼굴에 기름을 바르고 석고를 떠 실제 크기로 완성했다한다.
아기예수의 조각을 한다면 살아있는 아기를 오랜 시간 동안 꼼짝 못하게 고정시키고 석고를 뜰 수 없으니까 죽은 아이의 시체를 병원에서 구해 작업을 하기도 했단다.
파사드의 조각들이 이런 식으로 우러러 경배해야 할 성인성자들이 아니라
바로 나와 다를 바 없는 노동자들의 모습이니 당연히 친숙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제 성가족교회의 대역사는 있는 사람들이나 없는 사람들 모두의 중요한 일이 되었고,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로 다시 스페인 전역으로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의 성지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순례 코스가 되었다.
가우디가 생전에 완성한 탄생의 파사드에 있는 조각들로 사실적이고 둥글둥글한 곡선으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해 수난의 파사드 조각들은 추상적이고 직선으로 되어 있다. 수난의
파사드는 카탈루냐 출신 조각가인 조셉 마리아 수비라체가 담당하였다고 하는데,
가우디의 조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가우디의 죽음
1926년 6월 7일 오후 여섯 시
오후의 긴 그림자를 끌고 남루한 노인이 걸어가고 있었다.
행색으로는 노숙자 같기도 하고 술주정뱅이 같기도 한 노인이었다.
이 노인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며 걷고 있는 듯 다가오는 전차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전차 운전사는 뒤늦게 노인을 발견하고는 다급하게 종을 울렸지만 이미 노인은 전차에 치어 쓰러졌다.
그러나 운전사는 치인 노인을 갓길로 옮겨놓고는 제 갈 길로 떠나버렸다.
요즘말로 하면 뺑소니를 친 셈.
이를 목격한 행인들이 병원으로 노인을 옮기려고 했으나 택시들은 이 달갑지 않은 상황을 외면하고 사라져 갔다.
한 행인이 힘들게 잡은 택시로 산따 끄레우 병원으로 옮겼다.
이 병원은 노숙자나 극빈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이었으니 노인의 행색에 맞는 병원을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간호사들은 휴식 시간을 이유로 위급한 ‘걸인’의 치료를 방치했다.
그날 밤 늦게까지 노인이 돌아오지 않자 친구들이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와 큰 병원으로 갈 것을 권했으나
노인은 가난한 사람과 있고 싶다며 거절했다.
이 대목이 좀 의심스럽다.
노인을 지나치게 미화한 부분이 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이 무슨 의식이 있어 거절까지 할까?
어떤 글에서는 이 노인이 돌아오지 않자 교회 주임신부는 바르셀로나의 온 병원을 뒤져
마침내 피투성이로 의식을 잃은 채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초췌한 노인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나는 후자가 맞는다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그로부터 3일 후 이 노인은 임종을 맞았다.
이 노인이 바로 일흔 여섯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였다.
그날도 매일의 일과처럼 사그라다 파밀리아 지하의 작업실을 떠나
산 펠립 네리 광장에 있는 성당에 고해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본인은 원하지 않았지만 그의 장례식은 바르셀로나 전 시민이 추모하는 가운데 거국적으로 치러졌으며,
그의 전 재산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기부되었다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미래에 완성될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