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난분분한 오늘 우연히 타래가의 <알람브라궁전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을 듣다.
기타 곡은 가슴에 안고 연주하기 때문인지 대개 가슴에 스며드는 곡들이 많이 있다.
타래가의 <알람브라궁전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은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닐는지....
독한 실연의 상처를 안고 달빛이 처연한 알람브라 궁전을 찾은 타래가는 깊은 폐부에서 토해지는 탄식처럼 이 곡을 작곡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3/4박자의 아르페지오에 실려 트레몰로 주법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애끓는 선율은 하얀 눈을 이고 선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부터 수로를 타고 먼 길 달려온 물 흐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교교한 달빛이 부서져 흩뿌리는 우윳빛 자태 같기도 하다. 잘게 부서진 선율의 파편들이 유장한 선을 만들어 굽이치고 부풀어 오르는 정점에서는 사랑해 마지않는 여인으로부터 그 사랑을 거부당해 유리조각처럼 파열된 심장의 거친 떨림을 듣는 것 같기 도하다.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이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것은 타래가의 실연이 낳은 결과이다.
이렇듯 작곡가는 실패를 양식으로 하여 살아가는 기묘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한 겨울 추위가 등걸에 사무치지 않고서는 매화의 고혹적인 향기는 얻어질 수 없는 법이다.
그동안 언젠간 써야지 미뤄두었던 스페인 여행기나 짬짬이 써야겠다.
이것이 게을러터진 내가 스페인, 포루투깔, 모로코를 다녀온 지 3년만에 다시 기행문을 시작하는 이유가 되겠다.
2013년 1월16일
혹자는 내가 알함브라 궁전을 알람브라 궁전으로 고집스럽게 오기하고 있지 않나 생각할 수 도 있겠다.
나도 몰랐을 땐 알함브라가 맞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알람브라의 원어는 아랍어로는 الحمراء, 스페인어는 Alhambra로 “붉다”라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다한다. 그러나 스페인어 에서는 h가 묵음이기 때문에 알람브라가 맞는 발음이 되겠다.
성벽을 비롯한 구축물들이 붉은색 점토(타피아)를 사용했기 때문에 알람브라가 됐다는 것이다. 만약 날씨가 좋았다면 석양노을에 비치는 우련 붉은 토담 빛은 얼마나 고울까를 생각하면 이날 궂은 날씨가 원망스러울밖에...
해발 740m의 고원에 위치하는 알람브라는 전체 면적이 142,000 m²로 가이드의 뒤만 쫒다보면 전체의 윤곽조차 그려지질 않는다.
① 그라나다 문 ② 정의의 문 ③ 카를5세 궁전 ④ 포도주의 문 ⑤ 알카사바 ⑥ 코마레스 탑 ⑦ 사자궁전 ⑧ 산타마리아성당 ⑨ 헤네랄리페궁전
알람브라궁전 입구에 정교하게 조성된 알람브라 궁전 미니어쳐
알람브라 궁전 입구에서 가이드가 와이어리스 수신기 하나씩을 분배해준다.
이렇게 하여 나는 가이드의 보이지 않는 코뚜레에 이끌리는 무리의 일원이 된 것이다. 기념품 가게를 지나 멀리 정의의 문(Puerta de Justicia)을 향해 오른다. 이슬람 특유의 말굽 모양 아치 아래 시커먼 쪽문으로 우리 일행은 빨려 들어간다.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이 작은 쪽문이 바로 정의의 문, 또는 심판의 문이란다. 이슬람 지배시대에 소소한 다툼을 즉결 판정하기 위한 재판이 문 안의 방에서 열렸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한다. 당시 무슬림 통치 시스템에 호기심이 인다.
아치 위에 조각된 손 모양 석물은 마치 “이 문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이여, 멈추시오!” 하는 모습인데 실제로 이 손 조각은 적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술탄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는 의미라고도 하고, 펼쳐진 다섯 손가락이 이슬람 교리인 믿음, 신앙의 선언, 기도, 단식, 순례를 의미한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고 지나치지만 이 문 이면의 아치 상단에 열쇠모양의 조각이 있다. 이 대수롭지 않게 뵈는 열쇠모양이 사실은 비밀스런 상징체계의 열쇠임을 설명 없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열쇠 모양은 알람브라 궁정을 지은 나스리 왕조의 상징이란다.
열쇠조각에 관해서는 전승되는 신비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이러한 알람브라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미국의 외교관이자 작가인 워싱턴 어빙이 쓴 <알람브라의 이야기>를 필독해야 한다. 워싱턴 어빙은 작가적 판단인지, 또는 고고학적 호기심인지는 모르지만 알람브라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던 모양이다.
1831년, 방치된 채 버려져 거미줄 틈새로 귀신들이나 횡행하는 알람브라에 기거할 수 있는 허락을 얻어낸다. 아마도 외교관이라는 신분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는 폐허에 살면서 알람브라를 건설한 이슬람 후손들에게 동방의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 해에 모두 45개의 이야기와 에세이로 이루어진 <알람브라의 이야기>를 탈고한다. 이 책이 널리 읽혀지면서 알람브라는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 힘으로 스페인 정부는 궁전 복원을 시작하여 마침내 1870년에는 국가 기념물로, 198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수 있었다. 과연 펜의 힘이 칼보다 월등하다는 실증이 아닐 수 없다.
워싱턴 어빙 동상
워싱턴 어빙의 <알람브라 이야기>에 의하면 알람브라 궁전의 운명은 정의의 문 위의 손과 열쇠가 쥐고 있단다. 이 궁전을 지은 술탄은 영혼을 팔아 궁전의 항구적 안전을 도모하는 마법을 얻게 됐는데 바로 마술에 걸린 손과 열쇠가 이 궁을 지켜주기 때문에 전쟁이나 지진과 같은 어떠한 외부적 충격에도 알람브라 궁전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마법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정의의 문에 있는 손이 내려와 열쇠를 잡아야 만이 비로소 마법이 풀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이 알람브라의 신비를 더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누구도 사실 그러리라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거리가 있음과 없음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사실의 여부로서가 아니라 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그러나 삭막한 현실을 사는 사람들이 전설과 환상을 쫒아 알람브라로 모여드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마법의 주문 때문에 알람브라는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나까지도 불러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정의의 문을 지나 알카사바 Alcazaba지역의 성벽을 옆으로 하고 올라간다.
알카사바는 성곽 도시를 방어하는 성채를 뜻하는 말로서 아랍어에서 유래되어 스페인어 화된 말이란다.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축성된 것으로 전성기 때는 24개의 망루와 군인 숙사, 창고, 목욕탕까지 있었던 곳이라지만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그러니까 알람브라 궁전은 이 성벽을 의지해서 나중에 지어진 것이다. (알람브라 궁전은 나르스 왕조에 의해 1238~1358년 사이에 대부분 건설되었다)
알카사바의 오메나헤 탑을 (Torre del HomenajeTorre)을 지나고 있다.
아리마스 광장 (plaza de Armas)
아리마스 광장은 성벽을 수성하는 군인들의 숙영지와 무기고, 저수조와 지하 감옥 등이 있었던 곳이란다.
우리 일행이 걸어 올라온 알카사바 너머로 그라나다 시내의 알바이신 지역이 보인다.
알카사바 지역은 지형구조가 빙둘러 험준한 언덕으로 되어 있어 천연의 장벽을 이루고 있지만 동쪽편 만은 열려있기때문에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견고한 성벽이 2중으로 구축되어있고 그 사이에 난 좁은 통로를 지나야만 알카사바 요새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다.
일행들이 벨라의 탑(Torre de la Vela)을 올려다다 보고있다.
벨라의 탑은 알카사바 요새 중앙에 감시탑으로 지어진 망루로 최고의 전망을 보여준다.
알람브라의 전경과 그라나다 시내, 하얀 주택들이 밀집된 알바이신 지구와 사크로몬테, 멀리 만년설을 머리에 인 시에라네바다 산맥(Sierra Nevada)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알바이신 지구
그라나다 카테드랄이 보인다.
망루에서 내려다 본 아리마스 광장 (plaza de Armas). 앞에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경비대의 막사에서부터 감옥, 대장간, 저수조까지 많은 수성시설들이 있었다고는하지만 의외로 좁은 면적이다. 아치형의 감실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같은 높이의 건물들이 요새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보이는 것처럼 건물의 기초부분만 남아있다.
대포에 장착할 둥근 포탄을 올려놓기 좋게 성벽 상단에 홈이 파였다
그라나다에 이처럼 난공불락의 알카사바가 구축된 이유는 이곳이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보루였기 때문이다.
본래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던 서코트왕국이 711년 이슬람 세력인 우마이야왕조의 침입을 받아 붕괴된다.
이슬람을 기반으로 한 신정일치의 우마이야 왕조는 아라비아반도로부터 시작하여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반도까지 3개 대륙에 걸쳐 그 세력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까지도 노렸으나 732년의 "투르 푸아티에" 싸움에서 패배한 이후 이베리아반도로 물러나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약 700년간 기독교국가들은 끊임없이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반도에서 축출하려는 운동을 벌인다. 이를 레콩키스타( Reconquista) 즉, 국토회복운동이라 부른다. 결국 1492년에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의 부부 왕에 의하여 이슬람 최후의 보루 알람브라를 정복하여 레콩키스타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슬람세력들이 심혈을 기울여 구축한 난공불락의 요새 알카사바는 정작 이 두 문명권이 격돌하는 최후의 전투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왜?
알카사바의 치명적인 결점은 배후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궁전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베리아반도에서 명운을 다 한 것을 알게 된 마지막 왕, 나스르 왕조의 보아브딜은 마술에 걸린 손과 열쇠의 마법인지는 모르지만 어떡하든 아름다운 알람브라의 궁전을 파괴의 재앙으로 부터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철옹성 알카사바를 놔두고 전투장소를 의도적으로 계곡 건너편의 작은 산, 사크로몬테 지역으로 유도한 후 격렬하게 저항하다 결국은 역부족으로 항복을 하게 된다.
예로부터 극명한 아름다움은 이토록 치명적이다.
1492년! 이해는 욱일승천의 기운이 스페인에게 임했던 해였다.
이사벨 여왕은 고통으로 단련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남편 페르난도와 함께 1월에는 보아브딜의 항복을 받아내 781년의 염원인 고토를 회복, 대망의 레콩키스타를 완성함으로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고
10월 12일에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함으로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스페인 제국시대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위의 그림은 1492년 1월2일, 패왕 보아브딜이 이사벨 여왕에게 알람브라궁전의 열쇠를 건네는 모습이다.
보아브딜 뒤로 멀리 알카사바가 보인다.
이날은 무척 추운 날씨였다 한다. 보아브딜이 탄 검은 말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과 비교되게 승자 이사벨여왕이 탄 눈부신 백마는 고개를 곧추들고 있다. 영욕의 교차를 화가는 저런 식으로 표현했나보다.
두 당사자가 아닌 나의 입장은 승자보다 패자에게 마음이 쏠린다.
8개월 동안의 격전 끝에 알람브라궁전을 보호하기 위해 어느 순간 군대를 거두고 항복한 보아브딜의 결정은 당시에는 지탄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 패배의 선택 덕분에 알람브라 궁전은 이슬람 문명의 정수박이로 인류의 영원한 보물이 된 것이다.
781년간 이 땅에서 누렸던 왕조의 영광을 일거에 망실하고 쓸쓸히 그라나다의 언덕을 넘어 모로코로 패퇴하는 보아브딜은 뼈속까지 스미는 한기로 몸서리쳤을 것이다.
그까짓 궁전을 보호한다고 질 수 없는 전쟁을 말아먹고 확 불 싸질러도 시원찮을 궁전 열쇠를 통째로 적에게 바치고 만 미친 왕이라고 은연중 비난하는 신하들의 따가운 눈초리는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흔들리는 마상에서 난마와 같이 얽히고설킨 생각들을 곱씹어 보고 또 곱씹어 봤을 것이다.
그의 선택은 과연 옳았던 것일까?
내가 믿는 선은 누구에게는 악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것인가?
그가 치욕을 감수하고 기독교 세력에게 '무혈인계'를 통해 통치권을 헌납한 것이 오로지 알람브라 궁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목숨이 오가는 살육의 현장에서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더할 나위 없는 궁전의 아름다움에 따르는 그럴듯한 호사가들의 입방아 일수 도 있겠다.
실제로 그는 항복협상에서 그라나다왕국의 종교와 재산권 그리고 상권을 유지시켜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한다.
왕으로서는 수십만 명의 무슬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의 어머니조차 아들의 결정에 대해 크게 노해 “네가 남자답게 이 왕국을 지키지 못했으니 여자처럼 울어라“는 말을 남기고 궁전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대저 세상의 인심이란 대의를 말하는 목소리는 크나 사세를 살피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