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의 전북대 정문일대는 차가 엄청 밀린다. 이번 신호를 받을 수 있으려나 조바심 대며 하릴없이 대학 전광판의 공허한 자랑 질에 눈길을 준다. FM음악방송에선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이 막판의 종결을 향해 숨 가쁘게 내달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진행자의 말이 귀에 꽂힌다.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포트르 안데르제프스키(Piotr Anderszewski)
1990년 영국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준결선에서 베베른의 곡을 연주하다 말고 갑자기 무대에서 퇴장했다. 준결선에 오르기 전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연주했고 베베른도 더할 나위 없이 잘 가고 있어 우승이 점쳐졌는데 이런 돌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주미 강이 차이코프스키 콩쿨 최종 결선 할 때 공연장 천장에 새 한 마리가 난입해 날아다녔다지만 뭐, 그런 방해요인이 생긴 것도 아니고 좌우지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생겨 심사위원 뿐만 아니라 모두를 궁금하게 한 모양이다.
안데르제프스키의 말이 놀랍다.
음악은 스포츠가 아니다!
겨뤄서 순위다툼에 연연하지 않고 전에 연주한 디아벨리 변주곡이 너무 만족스럽기 때문에 그걸로 만족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중도에 퇴장했다고 밝혔다. 그 사건으로 우승자보다 더 유명해진 그는 지난 2002년엔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에게 선사하는 '길모어 아티스트 어워드'를 수상했다.
“음악은 스포츠가 아니다” 란 말에서 큰 각성을 얻는다. 깨달음이란 깊은 산중 부처님 전에만 있는 게 아닌가보다. 1990년이면 그가 약관의 어린 나이였을 텐데 이런 성찰은 어데서 오는 걸까?
작곡자가 창조의 순간 음표 하나하나를 그려 넣는 행위는 보잘것없는 인생이 질적으로 고양돼 신이 되는 특별한 시간이다. 연주자는 기보 된 기호와 기호의 이면에 숨어있는 비밀을 밝혀 그 특별한 시간을 귀 있는 자들에게 재현해 주는 선지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일종의 메신저인 셈이다. 만약 내가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를 친다면 그 연주를 통해 베토벤과 만나는 것이다. 밥 먹고 잠자고 화를 내는 베토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순간 정신적으로 고양된 특별한 베토벤을 만나는 것이다. 그 길로 이르는 길이 이 길일까 저 길일까, 이 문으로 들어가려면 이 소리를 내야 하나 아니면 저 소리를 내야 하나 내밀한 비밀을 속속들이 밝혀내 형상화 하는 기쁨이 연주자에게는 있는 것이다. 마치 집을 짓는 목수가 깎고 다듬어 설계대로 형상을 만드는 재미가 있듯이, 온전히 집중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는 콩쿨이라는 행위를 통해 이게 잘됐으니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것이다.
안데르제프스키는 우승이라는 욕망을 넘어 그걸 넘어선 인간의 길, 삶의 장소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보통 목표를 세우고 이 목표에 도달하기위해 분골쇄신한다. 그 목표가 돈이기도 하고 명예이기도 하다. 그러나 목표는 목표일 뿐 그 목표가 크면 클수록 좌절도 깊다.
얼마 전 주미 강의 멍든 손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연주자들 사이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뿐만 아니라 세계적 연주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이들에게 설 기회가 얼마나 협소한지를 알게 해주었다.
천민자본주의를 살아가면서 돈의 길이 아닌 가치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의 고통이 갈수록 험난해진다.
어느 월간지의 기사 한토막이다. “끊임없이 콩쿠르에 도전하고 연주 경력을 쌓아도 빛을 보기 어려운 클래식 연주자들의 처지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사회, 거침없이 진화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험난한 ‘스펙 쌓기’의 정글 속에 있는 이 땅의 다른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다. 최고 콩쿠르의 우승으로 조성진은 마침내 최종적인 성공을 거둔 걸까? 이제는 음악가로서 편안한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안데르제프스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음악을 겨루려 말고 느끼고 즐겨라>이다.
내 음악인생도 제발 그러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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