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ctor Berlioz(1803년 12월 11일 ~ 1869년 3월 8일)
베를리오즈가 태어나 활동하던 1800년대 프랑스에서 의사라는 직업이 오늘날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엘리트 직업군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의사인 베를리오즈 아버지는 장남인 베를리오즈가 자신의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세상의 모든 아비와 같이 이 아버지도 아들에게 라틴어 뿐 만 아니라 음악을 포함한 폭넓은 교육을 열성적으로 제공했지만 유독 음악에만 열중하는 아들이 예쁘게 보일 리 없어 피아노를 사달라는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 때문인지 베를리오즈는 피아노를 못 치는 작곡가로 후대에 회자된다.
대게 자아가 강한 예술가는 간섭을 싫어하여 부모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다.
베를리오즈도 다를 바 없다.
1821년 베를리오즈가 18세 때, 아버지는 그의 원대로 의학을 공부시키려고 베를리오즈를 파리로 보냈다.
처음 1년 동안은 그런 대로 의학공부에 충실했던 모양이나 곧 음악에 빠져들어 틈만 나면 오페라를 보러가거나 대가들의 악보를 구해 베끼면서 음악공부에 매진하더니 결국은 파리음악원에 덜컥 입학하고야만다.
격노한 아버지는 학비를 보내주지 않아 부자간에 갈등이 심화 될 수밖에 없었고 대립의 대가는 혹독하여 베를리오즈는 이후 갖은 고생을 감내해야했다.
이로부터 8년이 경과한 1830년, 당시 모든 작곡가들의 등용문이었던 대망의 '로마 대상'을 수상함으로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부자간에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로마대상(Grand Prix de Rome)을 좀 설명하자면 지정된 예술분야에서 대상을 받은 학생들을 루이 14세가 로마에 세운 아카데미 드 프랑스(Academie de France)에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가 제정한 장학 제도이다.
처음에는 그림과 조각부문만 시행되다가 후에 음악과 판화부문이 추가되었다.
음악부문 대상 수상자로는 베를리오즈, 구노, 드뷔시, 비제 등으로 모두 음악사에 길이 기록되는 대가의 반열에 오른다.
베를리오즈가 이 상을 수상하기 까지 다섯 번의 도전이 필요했을 정도로 영광의 뒤안길에는 숱한 좌절과 굴욕이 있었고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활화산을 오르내렸다.
베를리오즈는 이 고통을 양식으로 하여 모든 예술가들이 소원하는 영원성을 획득한 불멸의 작곡가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운명의 여인 해리엇 스미드슨
앞에서 언급한대로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이 끊긴 베를리오즈는 궁핍과 싸우며 로마대상의 원대한 꿈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 와중에 그가 24세 때인 1827년 9월, 영국 극단의 셰익스피어를 보러갔다가 운명적인 여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주역배우인 해리엇 스미드슨 (Harriet Smithson)이다. (베를리오즈는 그녀를 앙리에따 라고 불렀다)
베를리오즈는 셰익스피어의 연극 '햄릿'의 오필리어 역을 맡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넋을 잃고 만다.
“그 순간 나의 운명은 봉인돼 버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심각한 병에 감염된 것이다.
사랑이라는 병, 그것도 메아리 없는 상사병, 얼마나 고약한 병이란 말인가.
이 병은 약도 없다. 왜? 스스로 고치려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베를리오즈는 “몽유병자처럼 거리를 헤매는가 하면 파리 교외의 숲속으로 잠적하곤” 했다.
이럴 때 마다 친구들은 그가 혹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백방으로 찾아 나서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단다.
짝사랑의 열병에 몸이 단 그는 무대에서 그녀가 상대역 남자와 포옹이라도 할라치면 비명을 질러 소동을 일으켰다.
극장에서는 이러한 베를리오즈를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고는 문밖에서부터 입장을 저지시키려고 했으나 어떤 식으로든 객석에 스며들어 번번이 소란을 일으키고는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인가?
스미드슨은 그즈음 리즈시절을 구가하는 콧대 높은 배우였으니, 가난뱅이 무명의 음악가 베를리오즈가 열정적인 구애의 편지를 수도 없이 보내고 만나줄 것을 아무리 읍소해도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아니 그의 광적인 편지는 스미드슨을 놀라고 불쾌하게 했는지 하인에게 다시는 그 같은 편지를 받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기까지 했다한다.
요즘 같으면 스토커로 법의 제제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베를리오즈의 스미드슨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였느냐면 어떤 식으로든 스미드슨 에게 작곡가로서의 자기 존재를 알리고 그녀의 호감을 끌어내기 위해 많은 빚을 내어 파리음악원에서 대연주회를 개최하는 기상천외한 일을 감행하기도 한다. (28년 5월).
결과는 어땠을까?
오로지 스미드슨만을 위한 연주회에 그녀는 조금치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베를리오즈란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한다.
부수적으로 몇몇 신문들의 찬사를 얻어내는 효과 외에는 베를리오즈의 애타는 사랑은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던 것이다.
질풍노도운동의 상징인 젊은 베르테르가 사랑에 순사를 하는 것이 당시의 유행이었고 시대정신이라 하지만 베를리오즈의 격정은 좀 유별난 데가 있다.
그의 감정과다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도 도취의 극점에서 때로 실신하기도하고 경련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고백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미쳤다’고 말한다.
그런 만큼 그의 음악 또한 너무 개성이 강해 양극단의 반응을 불러일으켜 열광과 혐오사이를 오갔다. 그러니 사랑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에게 스미드슨은 첫사랑이 아니었다.
베를리오즈의 회고록에 의하면 열여덟 살 눈부시게 아름다운 금발 소녀 에스텔 뒤뵈프(Estelle Dubœuf)를 처음 봤을 때 그는 전기충격을 당한 것처럼 강렬한 사랑에 감전된다.
그의 나이 무려 12살 때 일이다.
이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나는 전기충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사실상 나는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절망적으로, 구제할 수 없게. 나는 아무런 소망도 희망도 없었고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격심한 고통을 느끼며 괴롭게 불면의 밤을 보냈다.
낮에는 마치 상처 입은 새처럼 몰래 도망가 나는 옥수수 밭과 과수원 속에 자신을 숨기곤 했다.
「사랑」의 그림자 같은 단짝인 「질투」가 지긋지긋하게 날 괴롭혔고, 어떤 남자건 나의 우상에 접근하기만 해도 미칠 듯한 고통이 나를 고문했다.
나의 삼촌이 그녀와 함께 춤을 출 때에 그의 박차가 쩔렁거리던 소리를 상기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12살 나이에 이런 정서적 반응을 보인다는 게 과장이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부모로부터 보호받고 양육 받는 유년의 공간이 언제나 행복한 것은 아니다.
비록 어린아이라도 그 나이가 감당할 고통과 슬픔의 분량은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비나 매미의 우화과정과 같이 완전히 유년기와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유년기의 경험이 보다 심화되고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뿐 그 바탕은 유년기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이런 조숙성과 감정과다는 천재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단테는 9세, 루소는 11세, 바이런은 8세 때 여자에게 반했으며, 16세 때 자기 연인이 결혼했다는 소리를 듣고 거의 기절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가하면 일흔넷의 괴테가 열아홉 소녀 울리케 에게 구혼했다 거절당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확실히 창작과 사랑은 같은 정열의 샘을 공유하는가보다.
많은 예술가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창작의 강렬한 욕구가 일어나 많은 작품들을 쏟아낸다.
슈만과 같은 작곡가는 140여 곡의 가곡이 클라라와 결혼한 해, 단 1년 동안에 만들어진다.
알다시피 슈만은 장인의 격렬한 반대로 법적 소송까지 겪으면서 어렵게 사랑을 쟁취했었다.
Harriet Smithson
환상 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 Op.14)
세익스피어는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말했다.
베를리오즈야 말로 이 말의 확실한 증거이다.
베를리오즈는 바다가 끊임없이 육지를 연모하여 밀려들 듯 스미드슨을 향해 광적인 집요함으로 노도처럼 부딪쳤지만 그녀는 공략불가의 절벽이었고 그 만큼의 강도로 포말처럼 부서져 허공중에 비산해버리고 말았다.
그 열정이 큰 만큼 반향 없는 짝사랑의 대가는 혹독했다.
통제 불능의 무너져 버린 마음으로 쓰라린 비애와 좌절감속에서 쓴 곡이 바로 '환상 교향곡'이다.
비록 마음의 상처는 혹독했지만 그 쓰라림의 폐허에서 초라한 몰골로 적나라한 자신과 마주하며 피땀의 진액을 펜에 찍어 한 음표 한 음표 오선지를 메웠을 것이다.
이게 예술가의 저주받은 운명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통도 슬픔도 시간 속에 용해되어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예술가는 다르다.
예술가는 이 순간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저마다의 표현수단으로 가장 심오하고 정치하게 기록하는 자다.
고통을 회피한다면 고통을 표현할 수 없다.
평탄하고 안락한 삶속에선 천만 영혼의 심금을 울리는 공명의 파장을 일으킬 수 없다.
1830년 베를리오즈가 로마대상을 수상한 그 해에 파리에서 초연된 이 곡은 ‘어느 예술가의 생애 (Épisode de la vie d’un Artiste)라는 부제가 붙여졌다.
이로보건데 자신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비망록임을 알 수 있다.
음악사적으로도 이 곡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과 맞먹는 충격을 그 당시 사회에 끼쳤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기존의 교향곡이나 그 관현악법에서 유를 볼 수 없는 파격과 혁신으로 점철된 5악장의 대작이다.
베를리오즈, 마침내 사랑을 쟁취하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게 이 곡으로 인해 베를리오즈는 스미드슨의 사랑을 얻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이제 베를리오즈는 무명의 굴레를 벗어나 주목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그 배경까지도 관심을 받게 되면서 환상교향곡이 베를리오즈의 상처받은 사랑의 기록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1832년 12월 9일, 베를리오즈는 파리 음악원에서 환상 교향곡을 포함한 자작곡들로 연주회를 개최한다.
청년기의 특징이 사랑을 대상에 두고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친구가 사랑을 얻도록 맹목적이고도 헌신적인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베를리오즈의 친구들은 갖은 책략을 다 동원하여 이 연주회에 스미드슨을 참석시키는데 성공한다.
생각해보라, 자기를 향한 연모를 배경으로 이러한 세계사적 작품을 남겼다는데 감격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를.
그 즈음 이 오만한 여인도 인기의 정점에서 비껴나 한참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무대에 서는 사람에게 인기는 마약과 같아서 영원할 것 같았던 자신이 점점 잊혀져 가는 존재라는 걸 확인하는 건 죽음과도 같이 견디기 어려운 일 일진데 한갓 미치광이 인줄 알았던 촌놈이 대 작곡가가 되어 자기의 존재감을 과시해주는 기적을 몰고 왔으니 외면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둘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긴 했으나 그렇다고 사랑이 진전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사랑은 마음에 고여야 가능한 것이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스미드슨 보다 세 살이나 아래인 베를리오즈에게는 도저히 마음이 가지 않았는지 베를리오즈의 끈덕진 구애에도 좀처럼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베를리오즈가 물러설 사람이겠는가?
마침내 베를리오즈에게 그녀의 마음을 얻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상대방의 불행은 나의 기쁨이 되는 순간이었다.
스미드슨이 속해있던 파리의 영국극장이 흥행에 실패하여 문을 닫게 되면서 수입이 끊긴 스미드슨은 막대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거기다 타고 가던 마차가 사고를 당하여 발까지 부러진 것이다.
물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베를리오즈는 친구인 쇼팽과 리스트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위해 자선음악회를 개최하여 그 수입으로 빚을 갚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쯤이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스미드슨은 요지부동이었다.
희망의 싹이 보이는가 싶더니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은 그녀에게 좌절한 베를리오즈는 그만 자살을 시도하고야 만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다량의 아편을 삼켜버린 것이다.
다행이 몇 시간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아편을 토해내 목숨은 건졌지만 사흘이나 일어나지 못했다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이 스미드슨의 얼음장 같던 마음을 녹였는지, 아니면 사람 하나 살리고 보자는 동정심이 발동했는지는 모르지만 마침내 1833년 10월3일, 친구 리스트의 입회하에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베를리오즈가 30세, 스미드슨은 33세가 되는 해였다. 6년 동안의 집요한 구애 끝에 얻어진 결혼의 소감이 왜 없겠는가.
베를리오즈는 이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녀는 파산했고 아직도 환자였지만 나는 그녀와 결혼했다. 우리가 결혼한 날 그녀는 부채와 다시는 유리한 조건으로 무대에 설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 이외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나로 말하면 친구 구네에게서 꾼 3백 프랑과 양친과의 새로운 불화가 나의 총재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세상에 도전했던 것이다.”
사랑은 환상이다
베를리오즈의 말대로 스미드슨은 만 사천 프랑의 빚이 있었고 거기다 장모와 처제까지 부양해야 했다.
그러나 베를리오즈에게 무슨 모아놓은 재산이 있을 리 만무했고 「로마 대상」에서 들어오는 월 2백 50프랑의 수입이 전부였다. 베를리오즈가 그토록 소원했던 사랑의 성취는 이러한 실체를 들어내며 현실이 됐다.
어쨌든 결혼한 이듬해엔 아들 루이가 태어났고, 그럭저럭 한 5년 동안은 남 보기에 평온한 결혼생활이 유지됐다.
그러나 사랑의 환상이 깨지고 콩깍지가 벗겨진 두 사람 사이엔 몇 가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다.
우선 언어의 장벽이 있어 부부사이의 소통에 문제가 있었고 기질이나 성격도 서로 달라도 너무 달랐다.
거기다 연상의 부인은 갈수록 살이 쪄 왕년의 미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배우로서의 명성도 이젠 까마득한 옛날 일로 잊혀진 퇴물에 불과했다.
베를리오즈를 눈멀게 한 마법은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안개와 같이 이제 해제되어 버린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그 자신이 스스로 상정한 허구를, 환상을 사랑했던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것이 이 모든 것이 그의 출세작 환상교향곡의 내용대로 되어 버린 것이다.
이쯤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베를리오즈에게 스미드슨은 진정한 사랑 이였을까?
자크 라깡은 욕망은 완벽한 기의를 가지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텅 빈 연쇄고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욕망 충족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지만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미드슨은 베를리오즈의 욕망의 대상이었기에 충족되지 않은 환영이었다. 멀리서 아른아른 환상을 띄우나 도달하면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다.
스미드슨은 욕망하는 베를리오즈를 거부함으로서 그를 애태웠고 그의 우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감으로 모든 무장은 해제되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 둘 사이에 이제 잔인한 사랑의 법칙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베를리오즈의 사랑은 자꾸만 식어 가는데, 그에 비례해 스미드슨의 사랑은 뜨거워지는 밀당의 역전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초초해진 스미드슨은 질투하고 간섭하고 투정을 부렸다.
이럴 때마다 들쑤실수록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베를리오즈의 마음은 냉담해져갔다.
열정 끝의 냉담은 가난이나 배신보다 무서운 재앙으로 그들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갔다.
위태롭게 흔들리며 기울던 가정(家庭)은 끝내 복원력을 상실한 채 전복되고 만다.
1842년, 결혼생활 9년 만에 결국 이혼으로 결말나고야만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서로 비난 하지 않고 사이좋게 헤어진 것이고 헤어진 뒤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헤어진 후 스미드슨은 병마와 싸우다 비참한 모습으로 1854년 3월 3일에 죽음을 맞는다.
베를리오즈는 이후로 15년을 더 산다.
베를리오즈는 그녀가 숨을 거두는 최후의 순간에 그녀의 이마에 작별의 키스를 하면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자서전에 기록하였다.
“아찔할 정도의 미모와 재능으로 빛나던 절정기의 초상화를 끔직한 병으로 예전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변해버린 그녀의 죽음의 침상에 놓았다.” 무지갯빛 광휘로운 환상은 그 빛을 상실한 채 잿빛 어둠으로 소멸하고 만 것이다.
베를리오즈의 절친 리스트는 베를리오즈를 위로하며 그녀의 죽음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녀는 당신에게 영감을 주었소. 당신은 그녀를 노래했으니 그녀의 과업은 완수된 것이오.”
Hector 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Op 14
1악장 : 1 Rêveries - Passions (Daydreams – Passions)
한 저명한 작가가 상상의 나래를 편다. ‘정열의 파도’라는 마음의 병에 걸린 한 젊은 음악가가 마음속에 그리는 이상적인 매력을 모두 갖춘 여성을 만나 곧 무서운 사랑에 빠진다.
2악장 : Un bal (A ball)
음악가는 자신이 인생의 가장 복잡한 시절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축제의 소용돌이 속에 끼어들기도 하고, 전원의 평안한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나 마을에서도 들에서도 어디를 가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의 앞에 나타나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
3악장 : Scène aux champs (Scene in the Country)
시골의 어느 날 저녁, 멀리서 두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가 들린다. 이 목가적 이중주, 미풍으로 조용히 살랑이는 나무들의 속삭임, 최근에 발견한 희망의 싹, 이러한 모든 것이 합쳐서 그의 마음을 이상하게 평온하게 하고 마음속의 생각을 밝게 물들인다. 그는 스스로의 고독을 다시 생각하며 이제는 고독을 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한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모른다고 배신한다면 어쩌지…’ 희망과 불안이 교차한다,
4악장 : Marche au supplice (March to the Scaffold)
사랑이 거절되었음을 확인한 작곡가는 마약으로 음독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치사량에는 이르지 못하고 무서운 환상을 수반한 깊은 잠속으로 떨어진다. 그는 애인을 죽이고 사형을 선고받아 단두대로 연행되고, 자신의 처형 장면을 목격하는 꿈을 꾼다.
5악장: Songe d'une nuit de sabbat (Dream of a Witches' Sabbath)
자신을 매장하기 위해서 유령, 마술사, 마녀, 그밖에 갖가지 요괴들이 모였다. 작곡가는 그 무리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을 본다. 야릇한 소리, 신음, 오싹하는 웃음,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고함소리에 다른 고함소리가 서로 호응하는 듯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선율이 다시 나타나는데 그것은 고귀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것은 이제 야비한 선율에 불과하고, 보잘 것 없는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그녀가 이 밤의 향연에 찾아온다. 그녀가 도착하자 환희에 들뜬 요괴들…. 그녀는 악마적이고 기괴한 밤의 향연에 동참한다. 장례를 알리는 종소리는 그레고리오 성가 중 ‘분노의 날’(Dies Irae)을 익살스럽게 풍자한 것이다. 마녀들의 향연, 돌고 도는 윤무는 ‘분노의 날’과 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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