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Vissi d'arte, vissi d'amore from Puccini's Tosca
여러분, 혹시 이런 의문을 품은적은 없는지요?
신은 전지전능하다는데 왜 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가?
왜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끊임없이 농락당하고야 마는가?
상대적으로 행악하는 자들이 승승장구하는가?
왜 그들을 내버려 두는가?
어쩌면 우리의 정치현실 속에서, 삶의 현장에서 매일 되풀이 되는 질문일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세상 도처에는 고통과 비극이 점철되고 있습니다.
최근 태국 동굴 속 소년들의 구출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국민의 트라우마인 세월호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되 살아 났습니다.
언제던가, 저는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2학년 10반 고 김주희 양 어머니 이선미씨의 인터뷰내용을 신문을 통해 읽으면서 가슴에 사무치는 게 있어 메모를 해 뒀습니다.
이선미씨가 출석하던 교회와 이웃이 우는 자와 더불어 울지 않고 오히려 손가락질하고 백안시하던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속에서 “내가 그렇게 열심을 다해 믿었던 신앙이, 교회가 나를 배신했다” 고 토로하면서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무엇 하시는지 알려 달라”고 절규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어처구니없게 딸을 잃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일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 내가 이렇게 고통 받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 아주 유명한 아리아가 있습니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노래 제목을 보면 로맨틱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는 아주 비극적인 내용입니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대강의 줄거리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타이틀 롤 토스카는 아름다운 처녀였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바로 이 외모 때문에 불행에 빠지게 되거든요.
토스카가 사랑하는 남자는 화가 카바라도시 입니다. 이 화가는 성당에서 성모마리아의 벽화를 그리는 일을 합니다. 이 남자가 토스카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는 그가 그리는 성모마리아가 토스카를 닮아가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어느 날 카바라도시가 작업에 몰두하는 성당에 그의 친구 안젤로티가 허겁지겁 뛰어듭니다.
불행은 이렇게 예고 없이 불쑥 찾아드는 것입니다.
안젤로티는 반정부운동을 하는 수배자로 경시총감 스카르피아의 날카로운 추적을 피해 사냥꾼에게 쫒기는 노루처럼 친구에게 뛰어든 것입니다.
반정부운동이라니요?
아무래도 이 오페라의 주인공들이 처한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배경을 말씀 드리지 않을수가 없군요.
그래야 이 오페라의 진면목을 알수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조각조각 쪼개진 도시국가형태로 지내왔습니다.
그러다가 1789년에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그 폭풍이 유럽을 강타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와중에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합니다. 나폴레옹이 태어난 코르시카섬은 원래 이탈리아 영토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이태리식 이름인 보나파르테로 부르며 무한한 애정과 기대를 보였습니다.
그가 혁명의 이름으로 조국을 해방시키러 오는 자유주의자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푸치니의 5번째 작품 ‘토스카’의 무대는 바로 이 혁명사상으로 불타는 시기인 1800년 6월 어느 하루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토스카의 애인인 화가 카바라도시나 그의 친구 안젤로티는 당연히 혁명과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피끓는 젊은이들입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황제가 됨으로 혁명을 배반하지만 말입니다.
카바라도시는 당연히 친구를 외면하지 않고 숨겨줍니다.
제가 대학생활을 하던 1970년대의 익숙한 풍경이기도 해서 남 일 같지 않습니다.
결국 이 일로 카바라도시는 범인은닉죄로 체포됩니다.
당시 로마를 통치하는 나폴리왕의 충견 스카르피아는 로마가 모두 두려워 그의 발앞에 떨었던 가혹하고 비열한 권력자였습니다.
칼을 손에 쥔 자는 날의 예리함을 확인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권력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이라는 칼을 손에 쥔 순간 칼을 휘두르고 싶어 합니다.
토스카의 아름다움이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수컷인 스카르피아는 그 먹잇감으로 토스카를 선택한 것입니다.
수컷들의 본능은 욕망하는 암컷들을 손아귀에 넣는 것이지요.
토스카의 미모에 혹한 스카르피아는 자기의 흑심을 채우기 위해 토스카와 사악한 거래를 제안합니다.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만 해준다면 애인을 풀어주겠노라고, 그러면서 토스카가 거부할 수 없는 쐐기를 박습니다.
만약 응하지 않으면 카바라도시를 총살시키겠노라고.
타락한 권력은 늘 그래왔듯 이토록 야수와 같은 폭력을 수반하기 마련입니다.
토스카는 엄청난 혼란에 빠집니다. 절체절명의 덧에 걸린 것입니다.
만약 거절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짐승 같은 스카르피아에게 몸을 허락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부르는 아리아입니다.
가사의 대강을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전 착하게 아름답게 살려고 했어요.
남모르는 구제도 많이 했고요.
헌금도 많이 했어요. 교회의 제단에 꽃도 바쳤고요.
노래에 살고 사랑을 위해 살았을 뿐 누구에게도 몹쓸 짓을 한 적이 없는 저에게
하나님 왜 이런 가혹한 벌을 내리시나요?
제가 이토록 고통을 받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보고만 있으시나요? “
Puccini - Tosca - Vissi d´arte - Angela Gheorghiu
이 노래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인데요.
고통도 노래하면 이토록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어떤 생각이 떠오르냐면 미국의 유대계 작가 엘리 위젤이 쓴 <흑야黑夜>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이 분은 이 자전적 소설로 1986년 노벨평화상을 받습니다.
이분이 15살 때 아우스슈비츠에 끌려갑니다.
어느 날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포로가 된 몇 사람이 아무 죄도 없이 나치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우연히 목격하게 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동원되어 입회를 하게합니다. 공포를 통해 포로들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려는 비열하고 잔인한 나치의 작태이지요.
소년 엘리위젤은 어쩔 수없이 죄 없는 자들의 죽음을 지켜봅니다. 교수형에 처해지는 어른들은 그 몸무게 때문에 빨리 숨이 끊어지지만 새털같이 가벼운 소년은 쉽사리 죽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통을 당합니다. 천사같이 순진무구한 소년이 교수대에서 신음하며 서서히 죽어 가는 참혹한 모습을 보고는 “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처절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엘리 위젤은 마음속으로부터 ‘신은 바로 저기 교수대에 계시다. 바로 지금 저렇게 죽어 가는 저 소년 속에서 신도 함께 죽어 가고 있다. 이젠 신도 없지 않느냐?’하는 신앙적 절망을 느낍니다. 실제로 엘리 위젤은 이때의 경험으로 후에 유대교 신앙을 버립니다.
리처드 루빈슈타인은 “아우슈비츠 이후에 우리가 신을 믿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고 묻습니다.
이렇게 2차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 참상과 원자폭탄과 같은 대량살생무기는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습니다. 신학의 위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신학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전반에서도 인식의 대전환을 갖게 됩니다.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그동안 이성(理性)이 인간을 구원할거라는 낙관적 전망이 오히려 인간을 미증유의 대재앙에 빠트린다는 사실에 놀라 이성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품게 된 것입니다. 결국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 같은 사람은 플라톤 이래 서구성의 근간인 이성중심주의의 해체론을 들고 나오기까지 합니다. 이후로 예술은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추악하고 왜곡된 현실을 드러내려 합니다. 왜냐고요?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을 되풀이 합니다.
참으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신이 직접 개입해서 인간의 오만과 불의를 싹 없애 주지 않는가?’
정의 보다 불의가 승리하고, 의롭고 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신은 어디 계시냐?, 신은 과연 정의 편이냐?”고 근본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의문을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답을 얻었습니까?
쉽게 얻을 수 있는 답이 아닙니다.
본래 구도자의 삶은 이러한 근본에 대한 질문과 의문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사람이겠지요. 여러분도 이런 질문과 의문을 화두로 삼고 진지하게 답을 찾기 바랍니다. 다만 이런 답은 자판기처럼 누르면 얻어지는 명료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2013년도에 오페라 루갈다를 작곡했습니다. 이 루갈다의 배경은 1801년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사건입니다. 이를 신유사옥이라 불릴 만큼 많은 신자들이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처형되고 유배를 당했습니다. 저는 이 오페라를 쓰면서 정말 믿기지 않는 만행이 법의 이름으로 자행됐던 기록들을 보면서 숨겨진 인간의 잔혹성에 몸서리치기도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소망에 비추어 역사의 응답은 더디기만 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절망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죄 없이 죽어간 그들은 수없이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신은 어디에 계시냐고. 계시다면 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느냐고.
이제 목숨을 담보로 해서 믿는 사람은 없는 시대입니다. 누구든 믿든, 믿지 않던 양심의 자유에 따라 판단하고 선택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정의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일상에서 악이 늘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정의를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능욕합니다. 그렇다고 악이 정상이고 선이 비정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촛불정국을 거쳐 온 우리로서는 미약한 촛불 하나하나가 모여 결국은 역사를 바꾸는 현장을 경험했습니다.
거짓과 악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당의정처럼 쓰디 쓴 속내를 쉬 드러내지 않지만,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것 같지만, 그 모순 때문에 한순간에 무너져버리고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혹, 궁금해 할 것 같아 토스카의 결말을 말하겠습니다.
잔인하고 교활한 스카르피아는 형장에서 가짜총알을 사용 할 테니 카바라도시는 무사할 것이라고 토스카를 안심시키면서 탐욕을 채우기 위해 다가갑니다. 겁에 질린 토스카는 탁자의 칼을 들어 스카르피아를 죽여 버리고 맙니다. 토스카는 카바라도시를 찾아가 처형은 가짜이니 죽은 척하라고 이릅니다. 하지만 총알은 진짜였고, 카바라도시는 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살인까지 저질렀지만 끝내 카바라도시는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때 스카르피아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수하들이 토스카를 잡으러 옵니다. 토스카는 결국 높은 안젤로 성벽에서 뛰어내립니다.
카바라도시도 죽었고 스카르피아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토스카도 죽었습니다.
모두가 죽는 것으로 비극은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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