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프로젝트

에반젤린

작곡가 지성호 2018. 10. 10. 10:07

#굿프로젝트 2일째.

열흘에 걸쳐 날마다 한 권씩 소개하는 #굿프로젝트 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모 교수의 강압에 의해 수행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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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이 20권짜리 전집이라 그보다 더한 엄청난 것을 기대했다면 좋다구요! 
이번에는 기름진 음식 뒤에 따르는 따끈한 차 한 잔과 같은 책을 올리려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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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고등학교 음악선생을 딱 6개월 만에 집어치우고 난 처가가 있는 서산으로 이사를 떠났다. 
대부분이 책인 이삿짐은 생각보다 물량이 넘쳐 적재함이 턱없이 부족했고

차를 한 대 더 불러야 할 난감한 상황이었다.
다행이 화물차 기사가 어떻게 한번 해보자고 선선히 나오더니 신공을 발휘해서 그 많은 짐을 다 싣는 것이었다. 
그 순간 얼마나 고맙던지 이후의 내 앞날이 창창하고 양양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어야지!

드디어 출발! 
화물차 앞자리는 우리 세 식구가 타기에는 비좁고 불편했지만
어떠랴, 이 정도는 참고 견뎌야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당시 화물차에는 에어컨도 없는 시절이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팔월 말에 살이 뜨거운 두 살배기 아들을 안고 가는 먼 길은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차가 너무 낡아 조수석은 등받이조차도 없었고 시트도 푹 꺼져 엔진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더구나 지름길로 들어선 길은 일부구간이 비포장인지라 
차가 요동칠 때마다 허리도 아프고 아기를 안은 무릎도 저리고,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처럼 일가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는 나의 행로는 좌우지간 고난의 행군이었다.

뭐, 그래도 이런 일쯤이야 그 시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으레 따르기 마련인 소소한 불편이었다. 
문제는 이 성실한 기사님이 짐을 다 내리고 나더니 표변하여 약속한 운임의 두 배나 달라는 것이었다. 
이 대단한 기사님의 논리는 두 배의 짐을 실었으니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어쩌랴! 
싸움을 못하는 나는 요구하는 대로 줄 수밖에.
아,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이 사건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서산생활의 전조였다. 
안정된 직장을 때려치운 죄과는 혹독했다.

당시 서산은 오랜 가뭄으로 제한급수를 하고 있었다. 
숨쉬기조차 힘든 무더위 속에서 이삿짐을 이층에 올리는 일은 시지프스의 형벌 체험이었다.
가파른 계단을 수도 없이 오르내리며 그 많은 책 박스를 나르느라 온몸이 땀범벅이고 무릎 팔이 후들거릴 정도로 녹초가 됐지만 씻을 물조차 나오지 않다니 이런 난감한일이 또 있겠는가.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벌어졌다.
눈을 떠보니 바닥이 발목까지 젖는 온통 물바다였다. 
수도가 나오지 않아 잠그지 않고 잠이든 사이에 물이 공급된 모양이었다. 
기가 막히게 한 권 두 권 사 모은 책들이 다 물을 먹어 못쓰게 돼 버린 것이다. 
난 이후로 TV에서 보여주는 수재민들의 망연자실함에 가장 큰 공감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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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사람의 운명이 있듯, 책은 책대로 책의 운명이 있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이때 살아남은 책이다. 
1968년 발행된 에반젤린이다. 
난 이 책을 아끼고 또 아낀다. 
이 책에 길들여진 나는 다른 책을 읽을라치면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이 책의 번역은 옳고 다른 책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길들여진 책이다. 
나의 청소년기에 롱펠로우의 유려하고 세련되고 아름다운 사랑의 서사는 다 암기하고 싶은 보물이었다. 
이 책의 반절은 원문을 실었고 나머지는 번역을 실었다. 






난 욕심 사납게도 영문을 통째로 암기하고자 하였으나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 흔적을 보면 내 턱없는 의욕이 부끄러울 뿐이다.


오래전에 책이 낡아 표지가 헤어지고 책장이 흩어지는 것을 내 손으로 제본해서 볼펜으로 제목을 적어 넣은 것이 내가 이렇게 꼼꼼할 때도 있었나 싶다.




“인간의 유대가 점점 깨지기 쉽게 박해지고 있다. 
연인들은 예전처럼 충실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당신과 내가 어울려 파트너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오직, 만족을 느낄 때까지다. 
그 기분이 떠나면, 같이 있어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이다.

요즘 미투니 페미니즘이니 메갈이니 따위가 미디어에 범람하여 온라인에서 보면 여자나라와 남자나라와 사이에 무슨 큰 전쟁이라도 벌어진 것 같다. 
딜리트 키 하나로 모든 자료가 사라지듯 요즘 사랑은 깃털처럼 가볍고도 가볍다.
이제 남녀 간의 사랑은 퇴화된 꼬리뼈처럼 흔적으로만 기억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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