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프로젝트

플루타르크 영웅전

작곡가 지성호 2018. 10. 12. 19:30

#굿프로젝트 5회째.

열흘에 걸쳐 날마다 한 권씩 소개하는 #굿프로젝트 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모 교수의 강압에 의해 수행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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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이라고 다를 바 없지만 초등학교 때 약골이었다. 
코피도 자주 흘렸고 마른버짐이 핀 얼굴에 키도 작은 편이었다. 
그래도 나의 인생 중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경력은 뭐니 뭐니 해도 5.000명을 대표하는 전교어린이 회장이 아닐까 한다. 
나의 정통성은 민주적 절차에 의한 대의원 선거에서 2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몰표로 당선됐기 때문에 우쭐거려도 될 만한 것이었다. 
조회 때면 단에 선 내 구령에 맞춰 5.000건아(健兒)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유년의 공간에서 이보다 더 선망 받는 영웅이 또 있을까?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처럼 난 그 세계의 엄석대였다. 
그러나 내가 독재자 엄석대와 다른점은 
권력의 명암을 헤아릴 줄 아는 혜안이 있었기에 결코 나대지 않고 겸손함과 자애로움을 잃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여학생으로부터 주목을 받는 왕짱이었으며 
그 중에 동급생 한 명은 장성하여 나의 아내로 간택의 은사를 입어 오늘날까지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해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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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4학년 무렵이 아니었을까? 
내가 초등 1학년 때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군 출신인 우리아버지는 졸지에 서완산동장에 임명되셔서 재건 복을 입고 성실하게 직책을 수행하고 계실 때였다. 
그 시절은 공무원의 월급이 박할 때라 여섯 식구의 호구지책에 급급하셨던 아버지는 당숙을 불러들여 동사무소 길 건너에 세를 얻어 벽돌공장을 운영하고 계셨다. 
우리가 사는 집은 용머리 고개였고 벽돌공장에는 당숙이 기거하시는 방 이외에 벼룩이나 빈대가 출몰하는 어둑신한 빈 방이 있었다. 
마침 여름방학 때이고 방 한 칸에 여섯 식구가 복닥거리는 게 싫어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나만의 절대적 공간이 그리운 나는 용머리 고개 집으로부터 오리는 너끈하게 떨어진 빈 방에 읽을 책과 함께 가끔 합법적 가출을 하곤 했었다. 
그날은 어디에선가 <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마라톤 전투, 알렉산더, 알프스를 코끼리를 타고 넘는 한니발, 카이사르, 브루투스 ……. 
영웅들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그만 밤을 꼴딱 세고 말았다. 
집에서는 불가능했겠지만 거기서는 가능했다. 
문제는 새벽이 되자 탈진한 나는 꼼짝할 기력조차 없었다. 
공복에 회가 동하는지 입에서는 맑은 침이 넘쳐흐르고 천장과 바닥이 빙빙 돌고 정신은 아득하여 숨조차 쉬기가 힘들었다. 
그때는 공교롭게도 당숙조차 안 계셨다. 
이러다 죽는구나 싶은 나는 진땀을 흘리며 기다시피 용머리 고개를 올라갔다.
그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너무나도 먼 길이었다.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걷다보면 갑자기 눈앞에서 길이 곤두서기도 했다. 
도저히 걷기가 불가능하면 미루나무 등걸에 기대어 흐르는 땀과 침을 추스를 기력조차 없이 어깨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새벽 어스름이라 누구도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집에 도착한 나는 마루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마침 아침을 지으러 나오시는 어머니가 놀라 꿀물을 한 대접 타오셨다. 
그걸 마시니 거짓말처럼 몸이 회복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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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아내가 임신을 하였다. 
난 비록 가난한 학생이었지만 임신한 아내와 뱃속에서 자라는 태아를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큰 용기를 내어 <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을 할부로 주문을 했다. 
그 당시는 초음파검사 같은 게 없어 아들인지 딸인지는 몰랐지만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아내와 나는 딸을 원했지만-
그래도 왠지 꼭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혀야 할 것 같았다. 
책이 도착한 날, 아내가 몹시 기뻐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짠!” 책 박스를 내려놓자 미소 짓는 뒤 끝에 언뜻 어두움이 스쳐지나갔다. 
책값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참내…….



평소 내가 아내를 자주 빈정대는 말이 있다. 
매일 책을 끼고 사는 아내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 한 게, 들어가면 나오는 게 있어야지. 
어찌 그리 매일 책을 읽으면서도 나오는 게 없단 말이요?” 
그러던 아내가 영웅전 1권의 몇 페이지를 읽는가 싶더니 까무륵 잠이 드는 것이었다. 
이후로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끝내 1권을 다 읽지 못하고 말았다.
참말로 이상한 일이지! 
아내말로 너무 재밌고 궁금해서 화장실까지 들고 간 책은 성경의 창세기, 출애굽기가 유일하다고 말하던 사람이 그보다 더 흥미진진한 영웅전은 왜 못 읽는단 말인가? 
말로는 테세우스가 어쩌고저쩌고 출현하는 이름들이 낯설어 도저히 안 읽힌다는 것이다. 
뭐라?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이 이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그럼 내가 강력한 증거를 대지. 
자, 보라구, 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낳고, 낳고, 낳고....

“ 자, 영웅전 이름이 어려워, 성경의 이름이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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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영웅전 읽히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문인지 우리 아들은 사춘기 때도 속 썩인 적이 없었는데 딱 하나 소심하고 병약한 몸 때문에 부모의 걱정거리다. 
난, 그녀석이 태중에 있을 때 아내가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지 않아서 생긴 탓이라고 생각한다. 
저 책만 읽었으면 아들놈이 웅혼하고 늠연한 기상으로 능히 세상을 구 할 수 있었을 터!
그녀석이 장가를 가 며느리가 임신을 했다는 말을 듣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눈길이 자주 머물렀다. 
아내에게 며느리에게 저 모셔둔 책을 보내자고 제안하자 펄쩍 뛰며 말리는 것이었다. 
눈치 없이 며늘애에게 왜 그런 부담을 주느냐고....
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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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는 말씀! 
본 굿프로젝트는 정부의 주 5일제 방침과 림교수의 주일성수를 위해 토, 일은 쉽니다. 
따라서 오늘, 시리즈 5편을 미리 올리는 바이오니 널리 이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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