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프로젝트

생쥐와 인간

작곡가 지성호 2018. 10. 15. 08:30

#굿프로젝트 6회째.

열흘에 걸쳐 날마다 한 권씩 소개하는 #굿프로젝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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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타인백 <생쥐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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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긴급조치 
1972년 8월 3일, 절대권력자 박정희는 긴급명령으로 시장경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채를 동결해 버린다. 
사채에 허덕이던 기업들은 만세를 불렀지만 우리 가족은 씁쓸했다. 
조금만 먼저 이 조치가 내려졌어도 우리 집은 부도를 면할 수 있었다. 
그때는 삼성이나 현대도 다 고금리의 사채에 자금을 빌렸고 이자는 터무니없이 높아 죽어라 벌어서 사채업자들에게 갖다 바치는 꼴이었다. 
오죽했으면 이런 혁명적 조치를 다 내렸을까. 
난 그 당시 대입을 코앞에 둔 고3이었다. 
부도나기 전에도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의 분위기를 먼저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심약하고 예민한 나에게 이런 환경은 치명적이었다.
일이 터진 후 우리 집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빚쟁이들이 진을 쳤고 아우성으로 들끓었다. 
난 목욕탕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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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쯤 되었을까?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형의 눈물겨운 주선으로, 
난 서울 북아현동에 있는 피아노 선생님 집에 기거하면서 입시를 준비했다. 
나의 딱한 사정을 받아준 선생님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피아노 교습생들이 다 빠져나간 깊은 밤이면 
낡은 소파에서 불편한 잠을 잤지만 19공탄 난로가 있어 추위는 그런대로 견딜 만 했다. 
가장 늦은 시간에 서울예고에 다니는 남학생이 피아노를 연습하러왔다. 
그 학생은 내 교복을 보더니 “ 아 전고 생이네요?”
놀라는 나에게 자기도 전주 출신이라 했다. 
더구나 그도 나와 같은 작곡전공이었고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그때부터 둘이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는 이제부터 그를 경이라 부르겠다. 
아무래도 실명이 공개되면, 그리고 그가 살아있다면, 그의 인생에 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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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부도가 나기 전에는 주말이면 고속버스를 타고 동숭동에 사시는 김성태 교수께 개인지도를 받았다. 
그때는 대학교수들도 다 개인지도를 하던 시절이었다. 
난 갈 때마다 그분께서 쓰신 화성법 초판의 문제를 풀면서 오류가 난 부분을 말씀드리면 
그분은 일일이 원본에 기록을 하시면서 칭찬을 해주셨다. 
초판인지라 의외로 오류는 많이 노정됐다. 
어떤 때는 개인지도보다도 내가 첵크한 오류를 확인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의 입시에 대해서는 아주 낙관적으로 생각하시는 말씀을 한두 번 하셨다. 
집이 그렇게 됐어도 이미 준비가 다 끝난 공부였으니 마무리만 잘하면 합격에는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지만 난 입시보다는 풍비박산난 집과 흩어진 식구들 걱정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거나 말거나 입시에만 전념했어야 했었다. 
실기시험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극도로 위축된 나는 나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는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합격자 발표 날 우리 집에는 여기저기서 합격을 축하한다는 전화가 걸려와 어머니를 눈물짓게 했다. 
그 해, 내 동급생 셋이 같이 응시했었는데 지방지에 서울음대에 둘이 합격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당연히 내가 됐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전화였던 것이다.

이후로 나는 선망 받는 부잣집 둘째아들에서 차디찬 모멸의 시선을 견디며 버려진 존재로 살아야 했다. 
하루아침에 재를 뒤집어쓴 신데렐라 신세였다. 
광야의 돌짝 밭, 가시넝쿨 헤치며 먼 길을 돌고 또 돌아가야 했다. 
빚쟁이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소란을 피우는 집에는 갈 수 없고, 오갈 데 없는 나는 경의 자취방에 끼어들었다. 
그 즈음 경은 한창 개발붐을 타고 동네가 형성되기 시작한 화곡동 쪽방에 세 들어 살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쪽방이라지만 본체와 담사이의 공간에 슬래브 지붕만 덮은 방이라서 난방도 안 되고 화장실조차도 없었다. 
비라도 내릴라치면 벽에서 죽죽 물이 흐르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물은 마당의 정원관리용 수도를 호스로 끌어와 사용했다. 
소변은 담벼락에 일을 보고 호스로 씻어 내리는 방법으로 해결했지만 대변은 밝히기 어려운 방법을 써야만 했다. 
이런 방을 세를 놓다니! 서울 사는 사람들의 비정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어린 학생들이 사니 한 번이라도 주인이 굽어 볼만 하지만 전혀 그런 일은 없었다. 
경은 그 당시 서울예고 2학년 재학생이었다. 
경이 학교에 가고나면 나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경이 물어다 주는 최소한의 음식을 먹으며 군용야전침대에 누워 책 읽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곰팡이 냄새나는 방에서 책읽기에 진력나면 손수건만한 창사이로 기가 막히게 파란 하늘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창틀의 네모에 갇힌 하늘은 그 너머의 무한한 자유의 입구였다. 
내 의식은 그 입구를 통해 광활한 창공을 비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쳐갈 수 있었다. 
kbs 제1FM에 고정된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선 언제나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적당히 배가 고파 정신은 맑고 책과 음악이 있으니 존재의 보잘 것 없음은 상쇄되었다. 
더 이상 낮아질데 없는 막장 같은 삶이지만 책과 음악이 주는 위로는 내게 부족함이 없는 자족을 주었다.
경은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음식뿐만 아니라 책을 두세 권씩 물어왔다. 
학교의 도서관이 책을 교체하면서 묵은 책을 복도에 쌓아 놓은 것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어차피 버리거나 고물상에 넘길 것이니 형이라도 읽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니냐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나는 내 독서 취향을 불문하고 숱한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다 읽고 난 책은 침대 밑에 쌓아 놓았다. 
점점 책의 부피가 늘어나자 야전침대의 바닥천이 불쑥 올라올 정도가 되었다.
그때 읽은 숱한 책 중에서 지금까지 기억에 또렷한 책이 존 스타인 백의 <생쥐와 인간>이다.

사람은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고통의 반대편에 있는 것을 꿈꾸며 가혹한 현실을 견딘다. 
옥죄는 고통의 힘에 비례해 꿈의 농도는 짙어지고 영역은 확대된다. 
그러나 그토록 소원하며 꿈꾸던 일은 이루어지기 일보직전에 사소한 일로 어그러지고 만다. 
인간의 귀가 가장 예민해지는 때이다. 
깊은 절망 속에서 구원의 미세한 신호라도 포착하려는 예민함이다. 
운명의 덫에 치인 인간은 그 순간에도 구원이라는 꿈을 포기할 수가 없다. 
아니, 더 열렬하게 매달린다.

"하지만 생쥐야, 앞날을 예측해 봐야 소용없는 건
너만이 아니란다.
생쥐와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
일이 제멋대로 어그러져
고대했던 기쁨은 고사하고
슬픔과 고통만 맛보는 일이 허다하잖니!"

<생쥐와 인간 중에서>



이 소설은 경과 내가 처한 상황과 비슷한 점이 많아 내 기억의 창고에 각인된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쯤에서 경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언젠가 때가되면 꼭 경의 얘기를 세상에 남겨놓고 싶었다. 
그 참혹한 죽음과 남겨진 자의 회한을.
이제 내 나이가 이쯤이니 때가 된 것으로 판단한다.

경의 집안은 전주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이었다. 
남문주변의 땅 대부분이 그 집안의 것이었다 한다. 
그의 부친은 경성제대던가, 동경제대던가 하여튼 법대 출신의 인텔리였고 어머니 또한 이대출신으로 사람들이 욕망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춰 부러움을 사던 집안이었다. 
1960년대 말쯤이었을 것 같은데, 당시 전국적으로 TV든 신문이든 끔찍한 비보를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해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었고 나도 그 보도를 접했던 기억이 있다. 
유명한 전주 모 부잣집 가족 집단 자살사건이었다. 
가산이 기울자 아버지는 마지막 돈을 다 털어 가족들을 청평유원지로 데려가 실컷 놀게 하고 그날 밤, 배고프고 피곤한 자식들을 청산가리가 든 빵을 먹여 죽이고 자신도 처와 함께 죽은 사건이었다. 
그때 유일하게 빠져나온 막둥이가 경이었다.
어느 날 밤, 경은 당시 인하대학생이던 형이 그 참혹한 죽음의 순간에 남겨둔 유서를 보여주었다. 
이대에 다니던 여동생이 죽자 형은 이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자각하고 그 무서운 자리를 뛰쳐나간 동생에게 파란 싸인 펜으로 급하게 글을 남겼던 것이다. 
나는 45년이 더 지난 지금도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 경의 형이 뚝뚝 떨군 눈물자국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파란색 글씨에 똠방, 똠방 튄 눈물의 파편은 당시의 처절한 순간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그만큼 내용도 충격적이었다. 
살다가 도저히 살 수 없으면 청산가리를 남길 테니 뒤를 따르라는 내용이었다. 
경은 그 청산가리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결코 보여주지는 않았다. 
경의 의식과 행동에는 죽음의 자리를 홀로 뛰쳐나온 복잡한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었고 어딘가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청산가리에 닿아 있었다. 
경은 자기아버지의 그런 행동을 성리학에 깊이 심취하셨기 때문이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을 몇 번인가 하였었다. 
나는 그 말을 그의 아버지의 꼿꼿한 자존심이라고 이해해서 들었다. 
그 생활을 접고 내가 다른 곳을 떠돌 때에도 그는 나를 찾아오곤 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살고 계시는 밀양도 같이 가서 뱃놀이며 밤이면 횃불을 들고 고기잡이에 며칠을 보낸 기억도 있다. 
대갓집 종부 같은 서슬 푸른 할머니가 경을 바라보는 애틋한 슬픔의 눈초리가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진안 어딘가 높은 산마루에 자리 잡은 경 집안의 선산을 같이 방문한 적도 있었다. 
내가 대구에 있었을 때도 경은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긴지 몇 십 년이 흘렀지만 뜬금없이 경이 떠오를 때가 있다. 
아마 살아있다면 반드시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아니 어디선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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