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프로젝트

조화로운 삶

작곡가 지성호 2018. 10. 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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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프로젝트
 8회째.

열흘에 걸쳐 날마다 한 권씩 소개하는 #굿프로젝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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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젊었을 적 삼천 동 곰솔 밭 건너 아파트에 살 때였다. 
문을 열어놓고 지낼 때였으니 아마도 여름쯤이 아니었을까? 
첫잠을 달게 자는데 한순간 아파트가 들썩이더니 동시적으로 폭발적인 함성이 아파트를 뒤흔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휘둥그레 소리의 향방을 쫒으니 
방 방 마다 다 불이 훤하고 박수소리와 열광하는 함성들로 난리법석이었다. 
“도대체 웬 일이람?” 
상황을 파악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열기의 강도로 미루건 데 아마도 월드컵이거나 올림픽 축구경기 이었을 것이다.

나 뿐 아니라 아내조차 정말 죄송하게도 우리 집은 스포츠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 날, 난바다의 한 점 외로운 섬에 위리 안치된 유배 자와 같은 절절한 고독감이 몰려왔다. 
“내가 반드시 이 아파트를 떠나고야 말리라!” 큰 결심의 심지를 굳건히 한 밤이었다.

매국노라 손가락질해도, 뿔 달린 외눈박이 괴물이라 폄해도 나는 저 열광의 대열에 합류할 생각은 조금치도 없다.
난 승패를 다투는 모든 경기를 보지 않는다. 
꼭 이유를 대야한다면 나에게 저 땀을 쥐는 아슬아슬한 승부의 세계를 감당할 강심장을 하나님이 주시질 않았다. 
태극전사들이 억울하게 졌을 때의 상실감과 선수들이 두 주먹으로 분루를 닦는 모습도 차마 바라보지 못한다. 
또 한 가지. 이건 일급비밀인데, 내가 경기를 보면 꼭 우리나라가 지는 징크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디 나를 나무라지 마시라. 
아니 오히려 큰 감사를 하시라! 
우리나라 선수들이 이만큼이라도 메달을 목에 거는 이유는 다 내가 경기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시겠는가?

아파트를 떠나야 할 현실적인 이유는 이외에도 많았다. 
나는 작곡가로서 집중의 밀도가 가장 높은 한 밤중에 작업을 해야 한다. 
그 당시만 해도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았던 때라 피아노를 치면서 한 음 한 음 오선지에 적어 나가는 작업은 이웃에 피해를 줄까봐 심장이 다 오그라들었다.
이쯤 해서 나라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소심함에 가슴을 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나라고 그러고 싶겠는가? 그렇게 타고난 걸 어쩌라고.

난 무리지어 몰려다는 걸 태생적으로 못견뎌한다. 그것이 설령 나라를 구하는 일일지라도. 
날 자를 정해 모이는 소위 정모 따위는 더더욱 질색이다. 
그럼 너란 놈이 좋아하는 것이 도대체 있기나 한단 말가?

여기에 대한 대답을 일찍이 머나먼 아메리카 땅 인디언추장이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단디 준비해 둔 게 있다.
그는 머리 벗어진 독수리가 날개를 접는 너럭바위에 결가부좌를 틀고 달이 기울고 찰 때까지 오랜 명상을 통해 마음의 벽에 말을 새겼다.(써놓고 보니 쪼매 그럴듯!)

한 번 들어보실려우?

“우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른 아침이면 홀로 깨어 평원에 어리는 안개와 지평의 한 틈을 뚫고 비쳐오는 햇살 줄기와 만나야 한다. 가만히 마음을 열고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보거나 꿈꾸는 돌이 되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지의 한 부분이며, 대지는 곧 오래 전부터 자기의 한 부분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악한 자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 속에서 세상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배워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지 전체가 어머니의 품이고, 그곳이 곧 학교이며 교회라고 믿는다. 대지 위의 모든 것이 책이며 스승이고 서로를 선한 세계로 인도하는 성직자들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교회와 책과 스승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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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전사(戰士)가 입술이 하얗게 되고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듯이, 홀로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오랫동안 갖지 못한 사람은 그 영혼이 중심을 잃고 헤매게 된다. 그래서 인디언은 아이들을 키울 때 자주 평원이나 삼림 속에 나가 홀로 있는 시간을 갖도록 배려한다. 한두 시간이나 하루 이틀이 아니라 적어도 열흘씩 인디언들은 최소한의 먹을 것을 가지고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장소로 가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문명인들은 그것을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한 인간이 이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자기 확인의 과정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인간은 신 앞에서 겸허해진다. 자연만큼 우리에게 겸허함을 가르치는 것도 없다. 자연만큼 순수의 빛을 심어 주는 것은 없다. 자연과 문명인들은 문명화되는 속도만큼 순수의 빛을 잃었다.
목이 마를 때 물을 찾듯이 우리는 영혼의 갈증을 느낄 때면 평원이나 들판으로 나간다. 
그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는 홀연히 깨닫는다. 혼자만의 시간이란 없다는 것을. 대지는 보이지 않는 혼(魂)들로 가득 차 있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곤충들과 명랑한 햇빛이 내는 소리들로 가득 차 있기에. 그 속에서 누구라도 혼자가 아니다. 자신이 아무리 혼자뿐이라고 주장해도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원의 한 오솔길에서 귀를 기울인다. 부산한 소리들 너머에서 평소에는 듣지 못하던 어떤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그것을 강의 소리라고도 하고 신성한 산의 소리라고도 한다. 그 소리는 곧 자기 자신의 소리이며, 위대한 정령의 소리다. 물론 우리 인디언들 사이에도 문명인들처럼 자기가 그 신성한 산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누구나 두려움을 헤치고 자기희생을 통해 그 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각자에게는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인디언 연설문 중에서 류시화 편



도시 사람들은 편리를 최상으로 여기지만 자연을 누리는 것이 편리와 바꿀 수 없는 신의 은총임을 알지 못한다. 
나는 오랜 동안 애타게 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시골생활을 동경해 왔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마음에 울부짖음이 가득할 때 모악산 숲 그늘에 들라치면 마음이 스르르 눅어지는 것이었다. 
어둠이 몰려오는 논에서 그악스런 개구리 울음 소리 들으며 단 하룻밤이라도 살아본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간절함이 지극하면 하늘이 기회를 주시는 겐가.
아무 대책도, 빌미도 없이 그저 혼자 좋아서 찾고 찾는 땅에 어떤 중노가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쭈그리고 앉자 않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어르신, 제가 이 동네에 집을 짓고 꼭 살 고 싶은데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나를 실없는 사람으로 보면 어쩌나 주저하며 물었는데 기다렸다는 듯 선선한 대답이 
“어, 그래? 그럼 내가 하라고 하는 대로 하면 돼”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마침 그분은 이 동네에서 땅을 거간하는 분이셨다.
도로에 면한 열여섯 평 땅이 자기 것이고 여길 밟아야만 건너 논에 집을 지을 수 있으니 자기 땅은 달라는 대로 금을 쳐줘야 하고 건너 논 300평은 시세대로 달라는 것이었다. 
“아, 그런데요.... 제가 공부하는 사람이라 돈이 없는데요. 
죄송하지만 일 년 동안 월부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도 내가 한 소리에 놀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청을 드렸더니 
그분은 더 놀랍게도 흔쾌히 그러라는 것이었다. 
꼭 귀신에 홀린 듯,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땅이 생긴 것이다.
일이 되려면 본시 그런 법이지.

이리하야, 난 미련 없이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이 땅에 손수 집을 지어 보금자리를 틀었다. 
필설로는 형용 못할 그 과정의 신산함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어느 날 백석 시를 읽다가 무릎을 탁치며 내 집의 담벼락에 써 붙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럴 수 없어 내 블로그의 머리띠로 삼은 글귀가 있다.
“높고, 외롭고, 쓸쓸하게” 
백석 시를 약간 비틀어, 이렇게 집약되는 게 스스로 숨어사는 자의 일상이다. 
달콤한 고요 가운데 거하며, 장엄한 일출과 애잔한 일몰을 철없이 조망한다던가, 저녁을 먹고 마당에 나서 그린 듯 요염한 초승달을 우러르며 대원사의 저녁 종소리에 오래도록 귀 기울이면, 
조금은 쓸쓸하지만 실답고 감미로운 행복감이 몰려온다.

이러한 나를 바라보는 도시 사람들은 우선 부러움을 표시하면서도 여러 가지 궁금증을 토로한다. 
외진 곳이 무섭지 않느냐, 외롭지 않느냐, 과연 투자전망이 있느냐, 자녀 교육은? 
등등 온갖 시골에 살수 없는 이유들을 열거하기 시작한다.
가만히 들어보면 ‘이것저것 헤아려 보니 손해 보는 것이 너무 많을 것 같은’ 현대인의 합리적 계산법이 자기들의 꿈을 저어하는 것이다.
소박한 자연의 생활을 즐겼던 <HD 소로>는 그의 저서 <숲속의 생활>에서 삶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음식물과 입을 옷, 그리고 들어가 살 집 을 장만하면 되는데도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온갖 물질들을 소유하고자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포기하고 노예처럼 얽매여 평생을 허덕이며 지내게 된다는 것을 지적 하였다. 
쓸데없는 탐욕과 이기심에 매달리다 보니 평상심을 잃어버리게 되고 진정한 삶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언제나 선택은 망설임을 동반하지만 
소유를 쫓아갈 건가, 자유를 쫓아갈 건가의 문제도 역시 어려운 결단이다. 
그러나 세네카가 말했듯이 우리 인간은 돈벌이를 위해서는 상당히 위험한 곳에 뛰어들며, 또 명예를 위해서는 분골쇄신하지만, 
자유를 누리거나 유유자적한 생활에는 참으로 인색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벌고 쓰는 일에 있는 힘을 다하여 애를 쓰느라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도 보지 못하고, 심금마저 버리게 되니 참으로 남루한 흥정이다.

그래서 잠언의 말씀은 언제나 나를 깨우쳐 준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잠.30:8) 
여기에 덧 붙여, 그 나머지 시간은 참으로 자유롭게 살게 하소서!

시골 생활을 꿈꾸거나 염두에 두는 분들에게 헬렌 니어링, 스콧 니어링 부부가 공저한 '조화로운 삶'(보리출판사 펴냄)을 추천한다. 
'조화로운 삶’은 이 부부가 뉴욕의 도시생활을 접고 버몬트시골로 들어가 살았던 스무 해의 생생한 기록이다. 
다 읽고 난다면 분명 ‘조화로운 삶은 이런 것'이라는 터득이 있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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