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프로젝트

커피 밭 사람들

작곡가 지성호 2018. 10. 19. 07:17

우선, 내가 왜 굿 프로젝트의 낚시 바늘에 코가 꿰여 열흘 동안 일방적으로 곤혹을 당했는지를 밝히도록 하겠다.

내 페이스 북에 아래와 같은 림수진 교수의 매우 긴 글이 떴다.

(원문은 세배나 기나 편의상 잘라냈다)

무심코 읽어 내려가다가 아연실색, 난 이제 죽었구나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 바쁜 일정으로 보아 당연히 거절해야 마땅했으나 내가 거절한다면 굿 프로젝트라는 좋은 취지가 중단될 우려가 있었다. 까짓것 못 한다 두 발 뻗으면 되련만 명분 앞에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10회의 연재동안 나는 울면서 겨자를 먹었었다. 그것도 독한 겨자를.

내내 하필 나일까? 라는 억울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

림교수의 글

 

처음,, 내 친구 권농부가 나를 지목하였을 때,,

나는 그의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책도 없는데,, 무슨,,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자하니,, 마음에 영판,, 미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꾸역꾸역 기어 나와,,

어찌 저찌,, 열흘을 이어 왔습니다.

하다 보니,, ,, 굿,, 프로젝트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처음에,, 친구의 청을 거절하였기에,,

나는,, 지난 1회부터 9회까지,,

반성하는 마음으로다가,, 어떤 친구도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목하고 싶은 나의 페이스북 친구가 있었지만,,

꾸우우욱,, 참았습니다.

마지막,, 10회차에 이르러,,

나는,, 나의 페이스북 친구 한 명을

#굿프로젝트에 초대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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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에 살고 계시는

지성호선생님입니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당시 2-3년에 걸쳐 뵙고 이후 오랫 동안 뵙지 못하였습니다만,

20대와 30, 그리고 40대에 걸쳐 50을 목전에 두기까지

제 삶의 방향에 영향을 많이 주신 분입니다.

1990년대 중반 선생님께서는

당시 정말 시골이었던 구이 논 한가운데 집을 지으셨습니다.

우연히도,, 제가 선생님을 뵈었던 시기가

선생님께서 집을 짓던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겹쳐집니다.

선생님께는 상당한 고생의 길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정말 멋진 삶으로 보여졌습니다.

,, 그리고,, 제가요,, 선생님댁 이사 하는 과정을 보게 되었는데요,,

,, 책이요,, 책이요,, 그렇게도 많을까요,,

여러 사람이 모여서요,,

큰 방에,, 벽돌을 쌓고 오래 된 나무판을 얹어 책꽃이를 만들었는데요,,

그 책꽃이 만드는 데에만도 여러 날이 걸렸지요,,

하여간,, 그렇게 여 러 날에 걸쳐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을

책꽃이에 꽃아넣는데,, 성공을 했어요,,

그리고,, 책꽃이의 완성을 자축하며,,

어마어마하게 즐거운 파티를 했는데요,,

그만,, 며칠을 못 견디고,,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는,, 전설이 있어요.

선생님께서 얼마나 황당,, 하셨겠어요,,

어쩌다 선생님 댁에 가서 바닥과 천장에 콩기름을 먹이는 작업을 하고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집 밖에 나가서 본

사방 천지로 나락을 벤 논에 하얗게 내려있던 무서리는

오늘까지도,, 제가,, 한국을 그리며 갖는 향수의 한 장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굿프로젝트 의 틀 안에서

열흘에 걸쳐 열 권의 책을 소개해주시면 됩니다.

책에 대한 설명 없이 표지 그림만 올려주셔도 됩니다.

물론, 제가 처음에 그러했던 것처럼,, 바쁘시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으시다면,,

거절을 하셔도 됩니다.

다만, 선생님께서 10권의 책을 소개해 주신다면,,

저 뿐만 아니라,,

이 땅의 40대 중년 아줌마들 혹은 아저씨들에게 (대부분의 제 페이스북 친구들이,, 그렇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앞 날에

엄청난,, 힘을 실어주시는 것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선생님,, 부디,, 담 갖지 마시길,,, ^^

부탁,, 드리겠습니다.

.....................................

드디어 오늘, 울며 겨자 먹으며 추던 억지 춤도 마지막이다.

후련한 한편, 혹사당한 내 몸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어이쿠, 서론이 많이 늘어졌네!

이제부터 <커피 밭 사람들>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라틴아메리카 커피노동자, 그들 삶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커피 밭 사람들>의 저자는 임수진이다.

우리에게 페이스북이라는 방편을 통해 매일매일 멕시코 꼴리마 사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꼴리마 통신>의 주인공, 바로 림수진 교수이다.

그럼, 왜 임수진이 림수진이 되었나?

공교롭게도 동종 업계에 임수진이 둘인 모양이다.

이 좁은 바닥에서 동명이인으로 인한 피해도 본 모양이고, 마음고생도 따랐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개명을 하는 대신 두음법칙을 통한 회피의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 글은 언젠가 내가 블로그에 올렸던 내용이다.

내가 림교수를 처음 본 건 그녀가 대학교 졸업반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짧은 스포츠머리에큰 안경에, 40리터쯤 되 보이는 대형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신은 그녀의 모습은 한때 산에 미쳐 다녀본 안목으로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딱 산사나이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때 대학 내 고전기타 동아리에서 클래식기타에 경도되어 있었고

기타 선생님과 함께 그룹을 지어 나에게 서양음악사며 화성학이며를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정작 전공 학생들은 학점에 매여 피동적으로 공부했다면

이들은 탐구심에 불타 그 향학의 열기가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 정도였냐면 전공학생들이 한 학기에 정해진 텍스트의 1/3정도나 겨우 공부했다면

이네들은 끝까지 독파했었으니까.

그 뒤로 서울대학으로 대학원 과정을 하러 올라갔다는 말을 들었었고

박사 학위를 끝 낸 후 멕시코 어딘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말을 스쳐가는 바람처럼 들었었다.

그러다 내가 놓치지 않고 챙겨보는 “세계테마기행” 코스타리카 편에서 “혹시 림교수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보고 있었는데 정말 림교수가 출연한 것을 보고 

내가 언젠가는 림교수를 빌미로 남미 여행을 해야겠구나” 생각했더랬다.

그러고는 그만 이였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내가 페이스북이란 걸 알게 되어 사회와 소통 하던 중 난데없이 림교수로부터 메신저를 타고 소식이 왔다.

림교수는 한국에 귀국할 때마다 의식을 치르듯 공항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여권갈피에

깊숙이 찡겨둔(림교수 특유의 표현임) 만 원짜리를 꺼내 서점에서 책 한권을 사는데

그 책은 산악전문 월간지였다

그리고 다시 멕시코로 나갈 때는 같은 방식으로 여권 속에 만 원짜리 하나를 끼워놓아 귀국할 때를 대비했었단다

작년에도 귀국하면서 언제나 그렇듯 예의 산악잡지를 사서 읽는 가운데 놀랍게도 내가 떡 특집으로 소개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숱한 책속에서 하필 그 책을그 중에서도 그 해 그 월에 맞춰 내가 그 잡지에 실렸고 그걸 림교수가 구입해서 읽었단다

인연의 섭리가 놀랍지 않은가!

출판물의 위력은 이렇듯 뜻밖에 신묘한 마술을 부린다.

 

                   저자  림수진


짐 로저스란 사람이 ‘투자의 전설로 불릴 정도로 돈벌이에 귀재인 모양이다

사실그 뭣이냐 스티브 잡스랄지 이런 분야의 사람들을 나는 잘 모르고 별로 흥미도 갖지 않는다가는 길이 워낙 달라서 이들이 일군 신화에 별 감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폐북에서 우연히 눈에 띈 대목이 읽혀졌다.

"한국 공무원 열풍 깜짝 놀랐다부끄러운 일"

"사랑하는 일 찾는 청년 줄어들면 5년 안에 몰락 길 걸을 것"

짐 로저스가 jobsN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한 말이란다.

"한국 청년들이 사랑하는 일을 찾지 않고 무조건 안정적인 공무원이나 대기업만 쫓을 경우,

5년 안에 활력을 잃고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경고했단다.

난 이 사람이 소유한 재산은 너무 큰 액수라서 현실감이 없지만 이 탁월한 진단만큼은 무릎을 치며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내가 사는 동네는 도시근교의 산자락인지라 도처에 고시원이 박혀있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다 어디로 갔나 했더니 다 고시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은 노량진쪽으로 몰려 그나마 고시원도 한물 간 것 갔등만...

하여튼왜 한국의 젊은이들이 내적명령에 따라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 고시 족으로 그 아까운 젊음의 때를 썩히는지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에 비해 림교수는 자신 속에서 스스로 생성되는 내적명령에 충실히 살아가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그가 쓴 책 “ 커피밭 사람들” 프롤로그 부분을 발췌해 보자면

림교수는 새로운 세상미지의 세상에 대한 갈망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어릴 적 소원이 관광버스 운전사였단다

결국 관광버스운전사는 되지못했지만 대신 지리학을 선택했단다

공부를 핑계 삼아 원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단다

이쯤해서 나도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실컷 돌아다니고 싶어 고고학자를 꿈꿨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하여 림교수는 지리학이라는 명분 있는 틀 안에서 열심히 발품을 팔며 천지사방을 싸돌아 다녔고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사는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단다.

마침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함께 ‘지역연구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인문사회과학분야에서 지역연구에 대한 수많은 정의와 이론들이 뜬구름 잡듯 횡행할 때

림교수 나름대로 지역연구란 ‘일정한 지역땅 위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 시도라고 정의를 내리고는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 로 고민하다가 라틴아메리카로 결정했단다.

왜 하필이면?” 하고 묻는다면 그건 ‘운명’ 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었단다

달리 설명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지도교수가 이 턱없는 황당한 말에 동의를 해줄리 만무해서 10시간 이상 논쟁은 격렬해졌고 급기야는 감정으로 까지 대립될 정도였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림교수는 밤을 새워 열장도 넘는 긴 편지를 지도교수에게 썼고

돌아온 답장은 “니 맘대로 해!” 였단다

어찌어찌해서 코스타리카의 오지까지 찾아들어 가장 밑바닥 커피노동자들의 현장에서 그들의 땀과 노동의 고달픔에 끼어들어 ‘곁다리 불량노동자 2년간을 살았단다

필드워커로 지내면서 나름대로 스페인어도 익히고 논문의 방향도 설계하고 싶었겠지만

축사에서 기거하며 하루 4000원 정도의 임금을 바라고 열대의 작렬하는 뙤약볕에서 커피를 따는 그들 노동자들의 고통이 너무 커그들 삶 앞에서 림교수의 학문적 틀이나 과학적 시도는 공소할 수밖에 없었고 망망대해의 일엽편주와 같이 표류할 수밖에 없었단다.

림교수는 엘레나, 얀시, 기예르모, 플로르,아우구스팅, 하이메, 에드윈, 프레디, 안토니아, 둘리아....이런 못 배우고 가난한 바닥인생들을 연민하며 그들 진솔한 삶의 애환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다가갔다.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넓은 라틴 아메리카를 종횡으로 누비며 반복적으로 그들 삶의 기록을 축적해 갔다.

(한 가지림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 값도 못되는 커피 밭 노동자들의 일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커피 원가의 1/300내지 1/400분량의 몫이 겨우 그들의 노임이라는 것이다대한민국의 커피 열풍이 광풍처럼 몰아쳐도 그들 막장 노동자들의 임금에는 하등 변화가 없는 모양이다)


거대 담론과 통계가 포착할 수 없었던 커피밭 노동자들의 삶을 학문의 영역으로 수렴한다는 게 쉽지 만은 안했을 터우여곡절 끝에 인간들의 커피열망이 코스타리카를 세계 체제 속에서 어떻게 규정하였고 변화시켰는가에 대한 내용으로그러니까 커피를 매개로 한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이해로 논문을 쓸 수 있었고 박사가 되었단다.



2005년 가을림교수는 서울대학에서 막 박사학위를 받고 첫 학기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논문심사의 일원이었던 교수 한 분이 전화로 앞 뒤 설명 전혀 없이 멕시코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고 림교수 역시 앞 뒤 잴 것 없이 가겠다고 대답했단다.

알고 보니 당시 꼴리마대학교가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교류재단을 통해 한국인 교수 한 명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한 상태였다고 한다재단 쪽에선 이미 여러 차례 공고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자가 없었던 것은 아마도 멕시코 하고도 지방이기도 했고 또한 스페인어로 강의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 그랬을 거라고 림교수는 추측한다.

림교수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땡큐베리마치” 하고 응했단다교수라는 그럴듯한 “레떼르” 때문이 아니고 라틴아메리카 지역학을 전공한 자로서 멕시코에 있을 수 있는 여건이라면 최상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단다림교수에게는 멕시코가 곧 현장이었으니까.

그런 전차로 벌써 열 두 해를 멕시코 꼴리마에서 그곳 주립대학교 정치사회과학대학 교수로 살게 됐단다.

더구나 그곳 교수 사회에서 가장 명예롭고 권위를 인정받는 국가 연구원으로도 선임되어 국가단위의 학문적 기여에도 힘을 쏟고 있음을 내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림교수에게 내가 크게 배우는 게 있다림교수가 한국건설회사 법인장에게 했다는 말 중에 림교수가 사는 삶의 지향이 그대로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법인장님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참 재미있습니다내 재미있는 일을 하고 사는데 학교에서 월급까지 주니 황송한 지경입니다하여저는 학교가 지금 주는 월급의 반절만 준다 해도 아무런 불만이 없을 것 같습니다하오나당신이 제안하는 일은 내 적성이 맞지도 않을 뿐더러 아무리 생각해봐도 재미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일입니다그러니 나는 당신이 지금 내가 받는 월급의 열 배를 준다 해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관두고 당신의 회사 사무원으로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놈의 맘몬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는 림교수의 명확한 태도가 속 시원하다

20172, 난 아내와 함께 둘레의 만류를 무릅쓰고 기어이 멕시코 꼴리마의 림교수를 방문했었다. 나중에 헤어지기 직전, 과나후아또에서 저녁을 같이 하며 림교수가 아주 진지하게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저 꼭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제가 이렇게 사는 모습이 미친년 널뛰는 것 같기도 하고이렇게 살아도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암몬잘살고 있고말고더할 나위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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