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프로젝트 9회째.
열흘에 걸쳐 날마다 한 권씩 소개하는 #굿프로젝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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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지혜는 누구에게나 바닥은 있다고 했다.
나에게도 당연, 고단한 바닥의 세월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난 갑자기 보호받고 양육 받는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카인은 아벨을 살해함으로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당했다지만
난 아버지의 실패로 추방당했다.
그것이 죄라면 죄의 유전인 셈이다.
어쩔 수 없이 강요된 바닥에서 긴 떠돎이 있었다.
반면에 누구에게나 신은 있다.
각자의 주어진 삶에서 등대의 불빛과 같은 구원의 암호가 있기 마련이다.
위태한 칠흑의 바다에서 요동치지만 앞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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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단한 발걸음이 친구가 사는 울산에 머물었던 때였다.
당시 울산은 이후락이라는 권력자에 의해 뽕밭이 바다가 되는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런 기반 없이 논바닥이 도시로 확장되자 많은 문제들이 노정됐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근로자 자녀들의 교육도 그 중에 하나였다.
갑자기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를 교육시설이 감당하지 못했다.
친구 누나는 전공을 하지 않았지만 피아노를 쳤었다.
전주에서 울산으로 이사한 후 집에서 아이들의 피아노를 가르쳤다.
아이들은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누님을 도우면서 한 겨울을 거기에서 났다.
식구들이 다 모이는 설 명절에도 갈데없는 나는 민망함을 견디며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가족들의 격의 없는 유대와 모처럼 찾은 고향집의 편안함이 나로 인해 방해를 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나를 동정한 누님이 어느 날 계명대학의 원서를 사다주셨다.
그것이 내가 그 대학을 딱 한 학기 동안 다니게 된 계기였다.
누구로부터도 경제적 지원 없이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나는 젊었고 젊음이 주는 힘은 고난을 잘 견디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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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그 학기에 정기연주회 레퍼토리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으로 정하고 맹렬한 연습에 들어갔다.
연주회가 열리는 날,
마지막 4악장 “프로이데 쉐넬 괴텔 푼켄!”
최후의 합창이 끝나고 오케스트라의 뚜띠가 질주하듯 프레스티씨모의 절정으로 내달아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리자 폭발적인 함성과 함께 연주장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휘파람소리, 날아다니는 꽃다발, 파도와 같은 박수소리.
무대에 선 학생들도 모두 땀을 흘리며 가슴 벅차했다.
청중이 모두 빠져나간 후, 공연장의 열기는 급속하게 냉각됐다.
팽팽하게 부푼 풍선의 매듭이 풀린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은 불꽃놀이처럼 밤하늘을 찬란하게 물들이다 이내 어둠에 묻히는 덧없음이었다.
전율했던 감동의 끝은 젊은이의 가슴에 허무를 넘어 참담함으로 다가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군중들의 틈에 끼어 공연장을 빠져나왔지만
나를 반기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독하게 외로웠다.
하숙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기다리지 않았다.
한 대를 보내고 두 대를 보내고 결국 버스는 끊겼다.
먼 거리를 나 홀로 터벅터벅 걸어서 갔다.
그날의 기억은 베토벤과 함께 추억된다.
영광과 갈채 뒤의 외로움과 같은 베토벤을 말이다.
베토벤을 진정한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영웅관은 독특했다.
그 사람은 사상이나 힘으로 승리한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마음으로써 위대하였던 사람 들 뿐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이 단연 베토벤 이였다.
그의 문장의 혼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그보다 50년 연상의 여자 마르뷔다였다.
니체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책의 말미에 나의 친구며 어머니며 의사이신 마르뷔다에게 바친다는 헌사를 적었다.
그녀는 “가장 심오한 독일의 심정을 간직한” 여성성으로 19세기 ‘거대한 자유인’들의 연인이자 어머니가 되었다.
그도 마르뷔다와 600통이 넘는 편지를 교환하며 아름답고 고귀한 영향을 받는다.
그와 마르뷔다와의 우정은 베토벤의 음악 속에서 익어 갔다한다.
그의 이름은 로망 롤랑이다.
롤랑은 베토벤의 연구로 <장크리스토프>와 <베토벤의 생애>를 저술한다.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반드시 이 책들을 읽어야한다고 강조를 넘어 강요한다.
그의 <베토벤의 생애>의 서문은 베토벤의 음악처럼 읽는 이를 벌떡 일어서게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힘이 있다.
글이 길어져 전문의 일부만을 도려내보려 했지만 이 시도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임을 읽는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베토벤의 생애> 서문
우리들 주위의 공기는 무겁다. 늙은 유럽은 탁하고 썩은 분위기 속에서 마비되고 있다. 숭고하지 못한 물질주의가 사고를 억누르고, 뭇 정부와 뭇 개인의 행동을 속박한다. 세계는 그 조심스럼고 비루한 이기주위에 허덕이며 질식하고 있다. 세계는 숨이 막힌다- 다시금 창을 열어젖히자. 자유로운 대기가 흘러들게 하자. 영웅들의 숨결을 들이 마시자.
삶은 벅차다. 범용한 심령으로써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삶은 나날의 고투이다. 그리고 흔히 그것은 위대함도 행복감도 없이 고독과 침묵 속에서 진행되는 싸움이다. 빈곤과 가사의 모진 근심과 쓸데없이 정력만 허비되는 질력 나고 부질없는 업무에 쪼들려서 희망도 없고 한 가닥 기쁨의 광명도 없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서로 고립하여 살고 있으며, 불행에 처해 있는 자기의 동포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위안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그 동포들은 그들을 알지 못하며. 그들도 그 동포들을 모른다. 그들은 오직 그들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굳센 사람일지라도 고뇌 속에 쓰러져 버리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구원을, 한 사람의 친구를 부르고 있다.
그들의 주위에 있는 영웅적인 친구들, 선을 위해서 고민한 위대한 심령들을 내가 모아 놓으려고 꾀하는 것은 그들을 돕고자 함에서이다. 이 “탁월한 사람들의 생애”는 야심가들의 거만한 마음에 바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전기들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바쳐진 것이다.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누군들 불행하지 않겠는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고뇌의 향유를 바치자. 우리 싸움에 있어서 고독한 것이 아니다. 세계의 어둠에 성스러운 빛이 비치고 있다. 지금도 곁에서 사장 성스러운 두 줄기의 불길, 정의의 불길과 자유의 불길이 빛나는 것을 우리들은 본다-피카르 대령과 부어 국민이 곧 그것이다. 그들이 비록 짙은 어둠을 불살라 버리지는 못하였을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갈 길을 섬광속에 가르쳐 주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전진하자. 모든 나라, 모든 세기에 있어서 그들처럼 외로이 흩어져 싸운 사람들의 뒤를 따라 전진하자. 시간의 장벽을 걷어치우자. 영웅들의 족속을 부활시키자.
나는 사상이나 힘으로 승리한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마음으로써 위대하였던 사람 들 뿐이다.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의 하나, 바로 우리가 여기에 생애를 이야기하려는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 나는 선 이외에는 아무것도 탁월의 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인격이 위대하지 못한 곳에 위대한 사람은 없다. 위대한 예술가도 위대한 행동가도 없다. 다만 비루한 대중이 받드는 공허한 우상이 있을 따름이다. 시간이 그들을 모조리 없애 버린다. 성공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참으로 위대함이 중요한 것이요. 위대하게 보인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에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의 생애는 거의 언제나 기나긴 수난의 역사였다. 비극적 운명이 그들의 넋을 육체적 고통위에다가 단련시키고자 하였거나, 혹은 그들의 넋을 육체적 고통 위에다가 단련시키고자 하였거나, 혹은 그들의 동포가 뼈아프게 당하고 있는 말할수 없는 고난과 굴욕의 광경을 봄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심정이 갈가리 찢어지고 그로 인해 그들의 생활이 여지없이 거칠어졌거나, 하여튼 그들은 나날의 시련의 빵을 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의지력으로써 위대하였다면, 그것은 그들이 또한 불행을 통해 위대해졌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그러므로 너무 서러워하지 말라. 인류의 우월한 사람들이 그대들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용기로써 우리 자신을 북돋우자.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잔약할 때는 그들의 무릎 위에 잠시 머리를 고이고 쉬자. 그들은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 그들 성스러운 심령들로부터 청량한 힘과 기운 찬 자비의 분류가 용솟음친다. 그들의 작품을 묻지 않고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도, 우리들이 그들의 눈 속에, 그들 생애의 역사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인생이란 고뇌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풍요하고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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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웅적 대열의 선두에 맨 먼저 장하고 깨끗한 베토벤을 세우자. 그 자신 고난 속에 있으면서 바라던 바는, 그 자신의 실례가 불행한 사람들에게 의지가 되며, 또 “ 모든 불행한 사람들은 한낱 자기와 같은 불행한 사람이 자연의 갖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 닿는 사람이 되고자 진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얻으라”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의 초인적 분투와 노력으로 마침내 고난을 극복하고, 천직을- 그 천직이란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가련한 인류에게 조금이라도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었다 - 완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승리자 프로메테우스는 신에게 애원하고 있던 어느 친구에게 “인간이여, 그대 자신을 도우라!”고 대답했다.
그의 이 자랑스런 말에서 가르침을 받자. 그들 본받아 인생과 인간에 대한 인간적 신앙을 다시 일으키자.
1903년 1월 로망롤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