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90일만의 해후

작곡가 지성호 2019. 2. 2. 17:52

2019년 1월30일


이니를 백일날 안아보고 90일이 지나서야 다시 안을 수 있었다

나에겐 서울이 그렇게나 먼 곳 인가보다

아파트의 문이 열리고 이니를 대면하는 순간 엄마 품에 안겨있는 녀석의 누구지?”하는 표정에는 약간은 쑥스러워 하는 모습도 섞여 있었다

클로즈업된 동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보던 이니를 막상 건네 안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작아보였다

숱이 많은 머리에 피부는 백옥 같고 아기단풍잎처럼 생긴 다섯 손가락이 그렇게 앙징맞을수가 없다.

이니는 어떤 거부감 없이-아니 당연하다는 듯 나에게 잘도 안겼다

사람들은 이래서 핏줄이 당겨서 그렇다고 말하나보다.

핏줄이라 했으니 여러 겹 겨울옷을 뚫고 가슴에서 가슴으로 따뜻하게 스며드는 어린 것의 체온도 다 핏줄을 통해서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깊어지는 동안 덧없이 흘러가는 줄만 알았던 시간은 어린 생명을 이렇게 키워냈구나

백일날에는 고개도 못가누고 허리도 세우지 못하는 어린 것을 조심스럽게 받쳐 안아야 했지만 이제 스스로 안기는 녀석의 무게감이 실하고 묵직하다

코끝을 간질이는 어린것의 머리카락냄새를 흠흠 맡으며 가슴 깊은 곳에 고이는 감정을 그저 행복이라는 말속에 담기에는 뭔가 미진함이 있다.

사람들은 쉽게도 행복이란 말을 되뇌지만 나에게 행복의 실체는 모호하여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다

무슨 풋사랑의 고백처럼 낯간지러움조차 있다

내가 행복의 소여(所與)에 대해 깊이 성찰한바 는 없지만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에는 뭔가 고귀함과 숭고함이 결여된 채,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욕망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한 상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행복하다하고 값나가는 패딩을 구해 행복하고 원하던 집을 구해 행복하고…….

그러나 그건 또 다른 결핍이 내포된 순간의 만족일 뿐이다.



이니를 안고 거실을 거닐며 차오르는 이 충만한 느낌을 뭐라 해야하나를 생각했다.

따지고 보니 내가 키운 아이가 자라 제 아이를 낳기까지 3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한 세대(世代)를 격하는 동안 내 아이는 장성한 수컷이 되어 둥지를 떠났다

가난한 작곡가를 애비로 하여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들은 내가 지금껏 그러는 것처럼 밤잠 못자고 동동거려야 겨우 일상을 지속시키는 삶의 조건 속에서 안간힘을 다하여 제 둥지를 틀었다.

리하여 아들과 나는 다른 하늘밑에서 다른 거리를 걷고 다른 음식을 먹으며 점점 분리되어졌다

그러나 이니가 태어나자 어쩔 수 없이 격절된 둥지에 다리가 놓여졌다

이 핏줄로 연결된 통로를 건너 나는 이니를 안았다

이니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할애비를 각인시키는 과정인가 보다

머루같이 검고 보석같이 빛나는 눈동자의 깊이는 깊고 깊어 그 끝을 모르겠다

그러다 내 눈과 마주칠라치면 햇살처럼 터지는 미소를 보내 할애비를 어쩔 줄 모르게 한다


그런가하면 그 꼼지작거리는 앙증맞은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고 수염을 만지기도 한다

이윽고 잠이 오는지 가끔 눈을 부비더니 머리를 내 가슴에 쿵쿵 찧기도 하고 몸을 버팅기기도 하고 노래도 아니고 울음도 아닌 제법 큰 소리를 내지르기도 한다

이 알 수 없는 언어를 나는 해독할 방법이 없다

애 엄마를 불러야하나 망설이는 순간, 이니는 털썩 고개를 꺾더니 까무룩 잠의 나라로 쏜살같이 떠나버린다

곱게 잠이 든 이니의 코와 입이 갑자기 작아져 보인다

이니의 얼굴은 잔잔한 호면이 변화무쌍한 하늘을 투영하듯 여러 모습이 교차한다

때로는 지 애비와 에미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뉘면 깰세라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이니를 가슴에 안는다.  

내 아들이 이니 만할 때 재우던 방식이다



이상한 게 애들은 잠이 들면 몸뚱어리가 뜨거워진다

잠자는 동안 체온이 떨어져 질병에 노출되는 것을 막는 생명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니의 심장박동은 내가 호흡을 맞출 수 없을 정도로 숨 가쁘다

나는 이니의 팔딱이는 심장을 통해 이니의 몸뚱어리로 깊게 잠입해 이니와 한 몸으로 동화된다

이니는 잠의 나라에서 무슨 일을 맞닥뜨린 것인지 갑자기 몸을 들썩이며 흠칫 놀라기도 하고 그지없이 그윽한 아기천사의 웃음을 짓기도 한다

그 배후를 짐작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오래도록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다

문득 견성(見性)이란 말이 떠오른다

본래적인 것을 바라본다는 뜻일 게다

무념무상의 바라봄 속에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멈춘 듯 깊은 평정의 세계로 침잠한다

마른 지푸라기 같이 버석거리던 마음자리에 방순한 샘물 같이 고여 드는 것은 미처 몰랐던 생명에 대한 깨우침이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엄마와 함께 즐거운 이니(생후 17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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