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조슈아 트리 밑에서 멀리 평원을 바라보다

작곡가 지성호 2019. 2. 22. 11:11

이제 일주일이 지난 미국 생활도 어떤 패턴이 생긴다.

아내는 오로지 장모님의 간병에 매달리고 달리 할 일이 없는 나는 아래 위층을 오가며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다가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면 나름 할 일이 생긴다.

10시쯤이면 아내는 장모님의 마지막 용변을 돌봐 드리고 2층 침실로 올라가기 전 어머니께 타이르듯 빼놓지 않는 당부의 말이 있다.

엄마, 이제 빨리 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잘 주무세요!”

축축이 젖은 아내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내 가슴속에 왠지 모를 따뜻한 위로가 뭉실 피어오른다

나에게 한 말이 전혀 아닐지라도…….

그 시간부터 나는 거실 한켠 책상에 앉아 최소한의 불을 밝히고 글을 끼적이거나 두고 온 한국의 뉴스를 검색한다.

그러다가 장모님이 방울을 딸랑딸랑 울릴라치면 부리나케 이층으로 뛰쳐 올라가 아내를 깨운다.

아내는 잘 훈련된 병사처럼 벌떡 일어나 비칠대며 계단을 내려가면 그런 아내가 잠결에 허방이라도 짚을세라 나는 뒤에서 아내의 허리를 부축하며 따라 내려간다

하룻밤이면 두셋 차례 반복되는 일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다 워치 독으로 불침번을 서는 길고도 긴 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다.

...................................................


나는 본래 사유적 기질로 태어난지라 어렸을적부터 문밖에라도 나갈라치면 복장을 갖춰입고 남에게 보여지는 부분에 신경을 썼다. 이 소심하고 예민한 성정 때문에 억울한 일이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면 오래도록 잊질 못하고 되새김질 하면서 상처를 키우는 못된 버릇이 있다.

그 억울한 기억 중 하나...

60년이 다되도록 왜 그 대목이 잊히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일 학년 때의 일이다.

입학한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담임 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다니셨다. 직무에 충실하셨던지 나이 지긋한 여선생님은 서완산동 용머리고개 빈민촌까지 가가호호 일일이 다 찾아다니셨다

어린마음에 선생님이 오신다니 그러야만 될것같아서 학교에 갈 때만 입는 새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모자를 쓰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더니 선생님은 그런 나를 보자마자 화를 내시며 호되게 나무라셨다

왜 집에서는 학교갈 때 입는 옷을 입지말라 일렀는데 이런 옷을 입고 있느냐고...

나는 아무 변명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을 뿐 지금까지 억울함으로 남아있다.

내가 사람에게 쉬 다가가지 못하고 쉬 섞이지 못하는 성정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런 나를 미국에 올 때마다 반겨주고 귀한 시간을 내서 어떡하든 좋은 것으로 먹이고 보여주려는 대학동기가 있다.

미화이다.

세상의 변방을 떠돌다가 군대를 마치고 늦게 대학에 들어간 나를 동기 여학생들은 아저씨라고 호칭했다.

미화는 지금도 나를 보면 아저씨라고 부른다.

미화는 이민사회의 장벽을 뚫고 장성한 두 아들을 미국백인사회의 주류들도 진입하기 힘든 전문인으로 키워 낸 여장부이고 이제는 다 분가를 시킨 나와 같이 늙어가는 연배이다.

이런 미화를 나는 달리 호칭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이름을 부르기로 한다.

미화가 나를 지금껏 아저씨라 부르는 것을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듯 미화도 그렇게 이해해 줄 것으로 믿는다.  


  

롱펠로우의 <화살과 노래>라는 시가 있다.

 

나는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았네

그러나 화살은 땅에 떨어져 찾을 수 없었네

 

빠르게 날아가는 화살의 자취

그 누가 빠른 화살을 따라갈 수 있었으랴.

 

나는 허공을 향해 노래를 불렀네

그러나 내 노래는 허공에 퍼져 간 곳을 알 수 없었네

 

그 누가 예리하고도 밝은 눈이 있어

날아 퍼져간 그 노래 따라갈 수 있었으랴.

 

세월이 흐른 뒤 고향의 뒷동산 참나무 밑둥에

그 화살은 부러지지 않은 채 꽂혀 있었고

 

내가 부른 노래는 처음부터 마지막 구절까지

친구의 가슴 속에 숨어 있었네

 

읽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겠지만 나는 미화를 만날 때마다 이미 먼 옛날이 돼버린 대학시절이 고향집 감나무를 바라보듯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화살과 같이 빠르게 흘러가 버린 그 시절이 노래처럼 허공중에 흔적 없이 흩어졌지만 미화를 만나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내가 부른 노래가 상처로서 박힌 것이 아니라 감미로운 추억으로 숨어있다 되살아나는 것이다.

 

페이스 북을 통해 내가 미국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미화한테 연락이 왔다.

나는 이번에는 형편이 그러니 가까운 곳에서 점심이나 같이하자 했더니 기어이 날을 잡아 남편과 함께 생각해 둔 어디 좋은 곳을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모처럼 쾌청한 날을 골라 그렇게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Joshua tree National Park)을 가게 되었다.

땅덩이 넓은 미국의 국립공원이 대게 그렇듯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은 면적이 800,000 에이커에 이른단다.

에이커라? 한국 사람에게 낯선 도량형인지라 그 면적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은 국제도량형인 미터법을 쓰지 않고 야드파운드법을 쓰는 나라다.

글로벌한 지구촌에서 소통에 많은 불편을 주는 이런 행위는 미국의 안하무인적 오만함중에 하나로 지적되는 부분이기도하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평으로 환산해야 개념이 확 선다.

찾아보니 1에이커는 1,224.17407평이란다. 소수점을 털어 단순화하면 1224평이 되겠다.

그럼 800,000에이커를 평으로 환산하면, 대략 98000만평이 되니 그 넓이가 짐작도 안가지만

서울의 크기와 비교한다면 다섯 배가 넘는 면적이다.


조슈아트리는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과 콜로라도 사막(low Colorado Desert)이 맞닿는 생태학적 교차로에 위치해 있단다.

사막이라 하니 우리가 상상하는 샌드둔의 모래사막이 아니라 멀리 흰 눈을 이고 선 하신토 산맥을 바라보고 조슈아 트리가 군락을 이루는 밑동 주변에는 희귀한 사막 식물군이 지천으로 자생하는 거친 황야이다

뿐만 아니라 가혹한 풍화작용이 조탁한 모래빛 기암기석들이 갖은 형상을 만들어내 여행자의 눈을 즐겁게 한다.





     코큰내미 바위의 시선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먼 곳을 향하고 있다.



바위산을 뒤로하고 조슈아 트리가 잘 가꿔진 정원수 처럼 자라고 있다







가까이서 본 조슈아 트리.

둥치는 거친 갑옷을 둘렀다

자세히 보니 유카처럼 찔리면 아픈 뾰족한 잎들이 성장하면서 말라붙어 그리 된 것이다.

미화는 조슈아를 좌샤라 했다. 그게 네이티브들의 발음인가보다.

내가 이 나무가 여호수아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 물으니 그렇단다.

1800년도 중엽, 몰몬교도들이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피해 그들만의 가나안 땅을 찾아 유타 주를 바라고 사막을 횡단하다가 그만 길을 잃고 목이 말라 사경을 헤맸던 모양이다.

사막의 이스마엘처럼.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누군가 어둠속에서 나타나 물을 찾게 해주고 방향을 알려 주어 생명을 건졌단다.

다음날 날이 밝아 그 은인을 찾아보니 사람이 아니고 바로 거친 나무였단다.

몰몬교도들은 이 나무에 기사회생의 감사한 마음을 담아 조슈아, 그러니까 여호수아 나무라고 명명했단다.

여호수아가 누구인가.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후계자가 아닌가.

모세의 가나안 입성은 좌절됐지만 여호수아는 끝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한다.

몰몬교도들이 이 나무에 여호수아란 이름을 붙여준 것은 그들의 염원이 투영된 결과가 아닐 수 없다하겠다.


       


미국의 지명들이 대개 그렇듯 이곳의 지명도 어떤 문자적 암시나 의미가 내포되지 않은 대단히 즉물적이어서 상상력이 결여된 사람들, 그러니까 추상적이거나 관념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유아기적 행태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잃어버린 말의 계곡(Lost Horse Valley) 

양이 지나는 곳(Sheep Pass) 

숨겨진 계곡(Hidden Valley) 

검은 바위 캠프장 (Black Rock Campground)


그러나 이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거칠고 척박한 조슈아의 황야에도 다양한 형태로 인간 군상의 삶은 계속됐던 것이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연을 즐기고 있었다.

암벽을 오르는 사람, 사막의 트레일을 걷는 사람, 지천으로 피기 시작한 들꽃을 찾는 사람, 특히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메트레스 같은 것을 등에 지고 걷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최근 국제 다크 스카이 파크 (International Dark Sky Park)로 지정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슈아 공원의 으뜸가는 매력이 어떤 문명의 불빛으로부터도 철저히 차단된 태고의 밤하늘, 그 광대한 우주의 별 밭을 우러러볼 수 있다는 것이라더니 저 메트레스를 펼치고 누워 별을 바라보려는 사람들일까?




사실 내가 한참 지리산을 다닐 때 며칠이고 걸어서 사람하나 마주칠 수 없는 그런 절대적 자연을 꿈꾸기도 했었다

지금은 금지됐지만 천왕봉이나 제석단에 텐트를 치고 발치에 빤히 내려다 뵈는 아랫마을의 깜박이는 불빛을 보면서 좁아빠진 산하에 태어난 것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게 얼마든지 가능한 광대한 땅이다


 

시간이 제한된 우리 일행은 이 공원이 갖는 수많은 볼거리 중에서 한두 가지밖에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선택이 바커 댐(Barker Dam) 이었다

선택의 이유는 사막에 댐이라니 마냥 궁금할 수밖에.

바커 댐 트레일을 걷는 길, 

요 며칠 자주 내리던 빗줄기가 시내로 흐르다 모래 속에 잠적한 흔적이 보이더니 드디어 물줄기가 흐른다.

사막에 물이 흐르리라가 묵시된 예언이 아니라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식생도 다른 모습을 뵌다. 조슈아 트리는 사라지고 거친 관목들과 물을 탐하는 나무들이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댐 가는 길에 한 컷!


바커 댐 가는길, 암반속에 뿌리 내린 나무들.  저 뿌리 촉수가 깊게 뻗어내린 지하 어딘가 깊숙한 곳에 물길이 닿나보다.


그런가 하면 선인장도 보인다.


바커 댐 가까이 물길이 닿으니  전혀 다른 식생을 보이고 있다.


발치에 찰방거리는 물을 피해 걷다보니 쉽사리 바커 댐에 도달한다.

원래는 내리는 강수량에 따라 물이 고이고 증발하는 곳이었나 보다

그러다가 1902, 본격적으로 자본이 투입되어 인위적인 제방을 구축하면서 댐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란다

그 회사는 목축업을 하는 Barker and Shay Cattle Company로 여기서 바커 댐의 유래가 된다

이로보아 이 주변에서 대단위 목축업이 성행했던가보다.


바커 댐에 고인 물. 요즘 내린 잦은 비로 만 수위를 이뤘다.

물색깔이 갈색인 것으로 보아 무슨 탄닌 성분이 우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바커 트레일을 되잡아 나와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제법 내려가니 들판에 지천으로 야생화 군락이 나타난다

아직 만개하진 않았지만 시야 가득 장관을 이룬다

메마른 돌짝밭에서 이것들은 시절을 좇아 생명을 길어내 색깔로 뿜어낸다.





대기는 어떤 미세먼지도 없이 신선하고 공기는 쌀쌀하여 의식은 쇄신된다.

광야는 인위가 제한되는 척박한 곳이다.

인간은 단지 광대무변의 공간속에서 한갓 미물과 같이 무기력한 점으로만 존재한다.

자연을 마음껏 공략하고 침범하는 인간의 오만은 길을 잃고 겸손을 배우는 공간이다.

그 때문인지 좁쌀만 한 인간이 우주적 사색을 통해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신의 섭리를 헤아리는 각성을 얻게 된다.

예수도 40일간의 광야 생활을 통해 신의 아들이 된다

조슈아 공원을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이 광야에 고인 태고의 침묵과 사무치는 존재의 쓸쓸함을 깊숙이 호흡하며 이곳을 성의로 안내해준 미화부부에게 감사를 드린다.


  


미화 신랑은 이 날, 밤 늦게까지 운전의 수고를 즐겁게 감당해주었다.


저녁은 미화 부부의 치밀한 계산으로 리버사이드의 유명한 호텔에서 먹게 되었다.

닉슨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도 묵었다는 이 호텔의 공식이름은 <The Mission Inn Hotel and Spa>이다

남부캘리포니아의 보석이라 불리는 이 호텔은 스페니쉬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미션스타일의 건물로도 유명하단다.





마침 얼마 전의 밸런타인 축제 때문인지 생울타리이며 건물이며 나무들도 온갖 현란한 조명으로 장식되어 이 극단적인 변화에 적응이 잘 안될 정도였다.

공간별로 이탈리아 식당을 비롯하여 4개의 식당을 운영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멕시코 음식을 먹기로 했다.

메뉴를 보니 팁을 포함하면 한 사람 앞에 백 불을 훌쩍 넘어서는 가격에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었지만

어쩌랴, 감사한 마음으로 이 성의를 받아드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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