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델라이데

작곡가 지성호 2019. 3. 11. 02:21

201937


오늘 전주고등학교 개교100주년 기념음악회와 관련하여 파이널 무대에 올려질 합창곡을 작곡하는 과정에서 가사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한 시인의 방문을 받았다.

이 시인은 전직 교장선생으로 고등학교 1년 후배이다.

여러 얘기가 오가는 가운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블로그에 올린바 있는 음악다방 아델라이데를 운영하던 후배가 자기와 동기이고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등졌다는 것이다.

설마, 그럴 리가!

그 시인이 떠난 후 도저히 믿기질 않아 동창회 명부를 확인했더니 사망이라는 두 글자가 너무나도 또렷했다.

망연자실............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만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인은 그 후배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운지 그저 건축 공사장 5층에서 떨어져 그렇게 됐다고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고 나도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시인의 표정이나 어투로 보아 단순한 추락사고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깊은 밤, 촛불 하나를 켜고 아델라이데를 들으며 거친 막일에까지 내몰린

후배의 고통을 생각했다.

후배의 절망을 생각했다.

 

, 언젠가 내 무덤에서 

재가 된 내 심장에서 꽃이 피리니 

보랏빛 꽃잎 하나하나에 

그대 이름이 빛나리라, 아델라이데! 

 

슬픔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문득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시가 떠올랐다.

 

물론 난 알고 있다, 단지 운이 좋아서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을.

그런데 오늘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날 두고 하는 말을 들었다.

더 강한 자들이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잠못드는 이 밤, 세상을 떠난 후배에게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미워지는 것이 아니라 많이 미안했다.

단지 운이 좋아서, 단지 비겁해서 난 살아 남은 것인가!

나는 절대 더 강한 자는 아니다.

 


*아래 글은 2018년 6월25일에 포스팅한 글이다


                      아델라이데


운전 중에 F.M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아델라이데가 흘러나온다.

 

아인잠 리필젠 샤우버리트 밀트...”

가슴 떨리는 보랏빛 청초한 사랑의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아델라이데!


                                     아델라이데 꽃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후배가 있다

그는 같은 대학에서 체육을 전공했었다

고등학교 몇 년인가 후배로 꼿꼿한 키가 훤칠하고 눈이 날카로운데다 과묵하기까지 하여 쉬 근접하기 어려운 그는, 정말 생각 많은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음악교육과와 체육교육과는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고 교양과목도 통상 같은 반으로 편성되어 체육과 학생들과는 마주칠 일이 많았다

아무래도 몸을 쓰는 전공인지라 체격도 그렇고 언어생활도 땀내 나는 마초적인 분위기인지라 여학생이 다수인 음악과 학생들의 불만이 되기도 했었다

난 군대를 마치고 동가숙, 서가숙 세상의 어두운 변방을 떠돌다 늦게 입학하여 대학 학번으로는 그보다 밑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예의바르고 정중하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 어색했고 한편 고마운 마음이 앞섰던 기억이 있다

예비역인데다 진중하고 무게 있는 행동거지로 같은 과 학생들도 범접하기 힘든 그가 나를 이렇게 대하니 체육과 학생들도 나에 대한 태도가 꼭 군대의 고참 에게 하듯 깍듯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열렬한 클래식 애호가였고 그중에서도 베토벤의 아델라이데를 좋아했었다.

 “어쩐지 남다른 느낌이더라니!” 

그가 풍기는 아우라의 큰 비밀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었다.


졸업 후 나는 남자 고등학교 음악선생으로 딱 6개월을 근무했었다

나는 대한민국 모든 고등학교가 내가 다녔던 모교와 큰 차이가 없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곰티재 넘어 전주에서 버스로 50분도 채 안 되는 부임지의 환경은 나에게 엄청 큰 충격으로 다가 왔었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음악실도 없었고 피아노조차도 없었다

교감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오르간이 어딘가 있을 것이니 한 번 찾아보라는 심드렁한 말씀이었다

아연실색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음악수업은 어떻게 했나요?” 

그분 말씀이 놀라웠다

전임 음악선생들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래를 한다든지 그런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오 마이 갓!” 

그로부터 이 거칠고 황량한 학교에서 나는 고군분투했었고 음악가와 음악교사는 서쪽과 동쪽처럼 전혀 별개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장과 작곡가의 길을 병행하려 했던 내 얍삽한 생각이 무너지는 절망의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서 깊게 번민했다.

 


아마 그때쯤이 아니었을까

홍지서림 부근에 그 후배가 <아델라이데>라는 다방(茶房)을 냈다는 풍문을 들었다

맘먹고 찾아가 2층 계단을 올라가는데 <아델라이데>가 흘러 나왔다. 피셔 디스카우의 목소리였다

실내는 그의 성격대로 구석구석- 하다못해 화장실까지도- 격조 높고 우아했으며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여느 다방이라기보다는 음악 감상실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공간이었다

만약에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곳에 왔다면 압도적인 음향 때문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그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 짓는 오연한 표정으로 바라 봤을 때 

나는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었다

그는 자부심으로 충천했고 비장의 오디오 시스템을 자랑했으며 앞으로의 포부와 운영계획을 득의만만하게 설명했다.

그 순간, 그 후배는 성공한 사람이었고 나는 실패자였다.

 

학교는 보름 꼴로 숙직이 어김없이 돌아왔다

연탄가스냄새가 코를 찌르는 숙직실에서 당직을 같이하는 용인이 침을 발라 말아 피는 매캐한 담배연기와 잇내를 맡으며 그의 되풀이 되는 술주정을 들어주어야 했고 온갖 냄새로 쩔은 침구를 차마 덮지 못하고 선잠을 자면서 사표를 고민하다가 6개월 만에 학교를 떠났다.


사표를 내기 전 아내에게 말했다

앞으로 무엇으로 생계를 꾸려갈 것인가 막막하지만 난 학교를 떠나고 싶소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보오난 음악을 하고 싶소학교에 출근해 호봉 순으로 배치된 신발장에 구두를 넣고 슬리퍼로 바꿔 신으면 그냥 하루가 허망하게 꺼지는 것이오60도 더 먹은 백발의 노 교사가 교장 선생님 앞에서 부동자세로 쩔쩔매는 모습이 바로 내 늙어서의 모습이오이건 죽은 목숨과 진배없소. 차라리 배추장사를 하더라도 모험을 하며 살고 싶소.”

아내는 크게 내색하지 않고 나지막한 한숨을 쉬더니 그렇게 생각했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돌아눕는 것이었다

지금생각하면 철없는 내 말에 아내는 얼마나 당황했을까(나란 놈은 정말 멋대로 살았구나!)

최근에야 아내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왜 그 때 내 터무니없는 결정에 반대를 하지 않았냐고

아내의 말인즉 어차피 말릴 수 없는 사람이니 그랬다는 것이다


그 후로 고난의 삶은 정해진 수순 이였다

빈털터리가 일정한 수입 없이 각박하고 비정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파도 흉흉한 난바다를 항해하는 조각배 같이 위태하고 불안정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 가년스런 세월을 통과한 후 뒤돌아보니 살아온 날이 다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몇 년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방<아델라이데>를 다시 찾으니 썰물이 빠져나간 뻘처럼 썰렁했었다

음악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지만 엠프의 출력은 어딘가 힘이 부쳐 장사가 안 되는 집 특유의 어둡고 무거운 기운을 내몰지 못하고 있었다

후배는 부재중이었고 부인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맞이해 주었다

부인에게 다방의 근황과 후배의 안부를 묻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이 교직도 포기하고 그야말로 모든 걸 걸고 시작한 일인데 찾는 이가 너무 없어 폐업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편이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하고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너무나 아까운 사람인데 실의에 빠져 고민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가 견딜 수 없노라고 검고 굵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눈물을 훔쳤다

그 순간. 부인의 슬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되었다

음악다방 <아델라이데>의 가치를 모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말했다.

악이란 본능으로서의 자유 추구가 극대화된 상태이며

선이란 가치로서의 자유 추구가 극대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그 후배는 가치의 자유를 추구하다 절망의 덫에 치인 것이었다

가치의 자유, 얼마나 목마른 것인가

그도 나도 이 길에 들어서서 고난을 당한 것이었다.


나는 먹고 사니즘에 매몰된 무의미한 세상을 떠나 무거운 발걸음으로 진창길을 걸어 예까지 왔다

그 길에 후회는 없었으며 나름의 예술적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다방<아델라이데>는 오래전에 간판을 내렸고 후배의 행적을 나는 알 수 없다

어쩌다 아델라이데를 들으면 그가 어김없이 떠오른다.

그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도이틀리히 쉼머트 프프블레첸

 아델라이데! 아델라이데!

 


아델라이데

 

나뭇가지 사이로 빛나는 햇살에 

부드럽게 둘러싸인 봄의 들판에서 

나는 외로이 방황하네, 아델라이데!

 

거울 같은 강물에서, 알프스의 눈 속에서, 

저물녘의 황금빛 구름을 볼때,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에서 

그대의 모습이 빛나네, 아델라이데!

 

, 언젠가 내 무덤에서 

재가 된 내 심장에서 꽃이 피리니 

보랏빛 꽃잎 하나하나에 

그대 이름이 빛나리라, 아델라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