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사색

하프와 피리의 대결

작곡가 지성호 2018. 12. 6. 07:00

 

니체는 “나는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하였고최종적으로 - 대개 이성적으로 다른 열정이 영혼을 채우는 나이에도모든 현존재 속에서 오로지 예술을 보았다고 말할 정도로 예술 지향적 성향이 강했던 철학자였으며 그중에서도 <음악>은 니체의 삶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음악이 없었던들 나에게는 인생이 전혀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할 만큼 말이죠.

니체는 6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 공부를 시작하였고 작곡도 했습니다

나중에 사이가 틀어지기는 했지만 니체는 바그너에게서 큰 영향을 받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그의 첫 저술인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에게 헌정할 정도였습니다

이 책의 본래 제목은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o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입니다.

사실 이 책은 바그너를 위한 책이라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학에도 정통했기 때문에 25살이라는 약관의 나이에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가 됩니다.   

그는 이러한 전문적 식견으로 그리스를 천착하면서 바그너야말로 고대 그리스의 예술을 현대에 부흥시킨 것이라 평가하면서 바그너의 신예술운동을 지원하려고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비극에 관한 저작들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버금가는 것으로 회자되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예술의 두 가지 대립되는 속성에 대한 성찰로 유명합니다.

단정, 엄격, 질서, 조화를 추구하는 아폴론형(Appollinisch:조형예술)과 도취적, 격정적, 창조적, 충동적인 디오니소스형(Dionysisch:비조형적 예술)이 바로 그것이지요. 

이를 도표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폴론형(Appollinisch:조형예술)

디오니소스형(Dionysisch:비조형적 예술)

단정, 엄격, 질서, 조화를 추구

도취적, 격정적, 창조적, 충동적

조형미술, 서사시

음악, 무용, 서정시


이러한 니체의 생각을 단적으로 압축하면 인간의 이성이 개입되는 예술 형태는 아폴론적이요, 인간의 이성이 배제되는 예술형태는 디오니소스적이라 할 것입니다.


아폴론적 예술


위 도표에서와 같이 아폴론적인 이념이 구현된 대표적인 예술은 조형미술이지요

고대 그리스시대에 아폴론적인 이념이 조각 작품에 투영되는 프로세스를 보면 아르케익 시대의 딱딱한 기하학적 양식에서 출발하여 우미양식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는 작품제작의 중요한 원리는 대칭, 비례, 긴장과 이완의 역학적 균형과 같은 것입니다

최고의 완숙기인 ‘우미양식의 시기에 이르면 엄격한 비례의 최 극점에서 의도적으로 약간의 흐트러짐을 가미합니다

이러한 연출된 결점은 완벽함이 주는 딱딱함에서 벗어나 비로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갖게 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지극한 아름다움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이 때문에 빙켈만 같은 이는 참된 예술은 그리스에서 이미 완성되었으며 후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 완전한 모범을 모방하는 것뿐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이때의 그리스란 바로 그리스의 고전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빙켈만은 이 시기의 미학을 그 유명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edle Einfalt und stille Große>이라고 압축하여 정의를 내립니다.

이러한 빙켈만의 주창으로 촉발된 고대 그리스의 관심은 괴테를 비롯한 독일과 프랑스의 고전주의에 영향을 끼쳤고, 문학뿐 만아니라 독일 교육체계 전체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은 이제 시대적 표어가 되었고 교육의 이상이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자체도 그렇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고대 그리스문화를 예술의 정점으로 본 헤겔철학도 빙켈만의 예술사상을 철학적으로 정립해 완성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진보사관을 가진 마르크스 마저도 예술의 완성은 고대 그리스 예술이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빙켈만의 영향은 이토록 대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완전무결한 완성이라는 조각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나 프락시텔레스의 <헤르메스>같은 것들입니다

학점과 무관하게 오로지 순수한 배움의 열정으로 이 강좌에 참석한 여러분들이라면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조각품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부디 미적 안목을 넓혀 가기 바랍니다

이 부분에서 더 알고 싶다면 다음 주소를 열어 보시길....


http://blog.daum.net/kui337/158



 

 

      출처/ Aphrodite of Cnidos torso (fragment of Greco-Roman copy after cult statue by Praxiteles - original ca. 350-340 B.C.).Vatican Museum, Rome

 

Praxiteles의  Hermes


 

아무튼 니체는 그리스 예술의 이런 특징을 ‘아폴론적’이라 하였으며 후에 고전주의의 이상이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에 가본 적이 있으십니까? 

나도 딱 한 번 잠깐 스치듯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

한 겨울 춥고 눈이 많이 쌓인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유학생들과 어울려 승용차로 국경을 넘어 그리스로 들어갔습니다.

마케도니아 지방을 지날 때 태고의 정적이 드리워진 광활한 평원에는 양떼들이 그림처럼 풀을 뜯고 먼 산의 정상에는 흰 눈이 눈부셨습니다.

그리스의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햇살은 강렬해졌고 올리브 나무들이 푸르렀습니다.

추위로 목을 움츠리고 다녔던 불가리아에 비교하면 이곳은 따뜻한 남쪽나라,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태양도 대지를 따스한 입김으로 어루만지는 밝고 찬란한 그리스... 과연 아폴론적 세계입니다.

이 축복의 땅 그리스에선 세상살이의 어두운 그늘이라곤 도무지 없을듯한데 여기서 비극이 탄생했습니다. 

왜일까요?


디오니소스적 예술


니체가 이 궁금증을 파헤친 것이 <비극의 탄생>의 탄생 내막입니다. 

그리스의 조형예술은 밝고 명랑한 아폴론적 정신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 복잡다기한 세상을 다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질서정연하기보다는 혼돈하고 반목하고 투쟁하며 소용돌이칩니다. 저 근원적인 데서부터 분출하는 욕망, 열정, 광기, 관능과 같은 통제되지 않는 광포한 힘이 그리스의 예술을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인 것입니다. 

니체는 이를 ‘디오니소스적’ 이라 하였으며 후에 낭만주의의 이상이 됩니다.

니체는 이 둘 사이의 대립되는 상반된 힘이 서로 부딪히며 상호작용하면서 예술이 발전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반목․자극하는 가운데 더욱더 강건하고 새로운 예술적 생산을 계속해 왔다는 것이지요.

더불어 그는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이 ‘예술’이라는 공통의 언어에 의해 단순히 외면적으로는 가교(架橋)를 가지고 있으나, 그 속성의 대립으로 인하여 대립의 투쟁을 영원화해가고 있다고 얘기 합니다.

 

이제 좀 더 음악으로 범위를 좁혀 가겠습니다.

 

리라와 아울로스

 

여러분이 혹시 눈여겨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피아노 책의 표지를 보면 대개는 하프모양의 악기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아폴로신이 들고 다니는 리라(Lyra)라는 악기이지요.

원래 이 악기는 약삭빠른 제우스의 전령 헤르메스가 만든 것입니다.

헤르메스의 악기가 어떤 경로로 아폴로에게 전달되었는지를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제법 길어지니 궁금하다면 그리스의 신화집을 읽어 보구요. 중요한 건 이 리라라는 현악기는 줄이 여러 가닥이라는 사실입니다. 음고가 다른 줄이 여럿이니 이 줄 사이에는 조율이라는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게 됩니다. 더구나 두 줄 이상의 현을 동시에 연주하게 될 때는 두 줄 사이의 어울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협화음이라는 화음현상을 기초로 하는 악기입니다.

여러분들도 피타고라스 조율법을 들어봤겠지만 협화음의 배후에는 수리적 질서가 숨어있습니다.

진동비가1:2 일 때는 완전 8도,  2:3일 때 완전5도가 된다는......

그래서 리라는 <침착한 세계의 관찰의 악기>로 아폴론적 악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화에 나오는 관악기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아울로스(Aulos)라는 쌍피리, 즉 관악기이지요. 그래서 목관악기 연주단체 이름에는 이 아울로스가 들어간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 악기가 만들어진 배후에는 비극적인 사건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네여신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전쟁과 지성의 여신입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하필이면 이 아테네 여신의 신전에서  고르곤의 세 자매 중 하나인 메두사와 정사를 벌입니다. (어느 책에선 겁탈이라고 합니다만...) 자기의 성소가 모독 당한 것에 분노한  아테네는 페르세우스를 시켜 머릿결이 아름다운 메두사의 목을 치게 합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아테네 여신은 메두사를 겁탈한 포세이돈은 놔두고 피해자인 메두사만을 죽여야 했는지....

포세이돈을 상대하기엔 버거워 그랬을까요?

아무튼 메두사의 자매중 하나인 에우루알레가 메두사의 억울한 죽음을 비통해 하며 탄식과 슬픔으로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아테네 여신은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죽일 때는 언제고 정작 에우루알레가 몸부림치며 울부짖으니까 아테네 여신의 마음에 변덕이 지핀것이지요. 

더욱 가관인 것은 이 인상적인 감동을 영원한 것으로 고정시키기 위해 만든 악기가 바로 아울로스입니다.


                            메두사의 잘린 목을 들고있는 페르세우스


Cristian Gentilini - Aulos - assolo per launeddas


그 때나 지금이나 여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비극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아울로스는 그 때문인지 또 다른 비극을 가져옵니다.

어느 날 아테네 여신은 신들의 회합자리에서 예의 아울로스를 꺼내어 자기 딴에는 감정을 넣어 열심히 불었었나 봅니다.

그런데 몰입하여 들을 줄 알았던 신들 중 하나가 감동은 고사하고 피식 웃는 것을 보고야말았습니다.

자존심 강한 아테네 여신은 그만 기분이 상하여 연주를 중단하고는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인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기분이 안 좋을 때 연못가에 앉아 가만히 물이랑을 바라보노라면 기분이 잦아드는 것을. 

아테네 여신도 꼭 그랬었나 봅니다.

잔잔한 물가에서 상한 기분을 다스리기 위해 아울로스를 꺼내 음을 고르고는 한 곡조 뽑았었나 봅니다.

그야말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수면에 거울처럼 비추는 자기의 연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볼을 부풀리며 눈에는 힘을 모으고 빨개져서 부는 자신의 흉한 모습을....

그때서야 비로소 왜 신들이 웃었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화가 난 아테네 여신은 미련 없이 아울로스를 숲속으로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냥 던진 게 아니라 저주를 담아서....

세상에는 언제나 재수 없는 사람이 꼭 있게 마련입니다.

어느 날 마르시아스(Marsyas)라는 사람이 숲을 지나다가 발 뿌리에 뭔가가 채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한 두 개의 뿔로 만들어진 이상한 물건이었습니다.

이게 뭘까? 이리저리 돌려보고 만져보고 두드려 보고 눈에도 대보고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참 이상한 물건이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입에 대고 불어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텅 빈 쌍관 이었으니 아마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관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대단한 보물을 횡재한 마르시아스는 열심히 연습한 끝에 능수능란해지자 이 악기를 들고 저자거리로 나가 마음껏 자랑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르시아스의 아울로스 연주를 듣고 굉장히 열광했던 모양이고, 시쳇말로 감동 먹은 사람마다 요란한 입 소문을 냈었던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히말라야 산중에서 경험한 것 중 하나인데 30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에는 전기가 없기 때문에 해가 지면 롯지에서 잠자는 것밖에 할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새벽 한 시면 어김없이 잠이 깨는데 동이 틀 때 까지 억지로 누워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전기가 없던 시절, 동짓날 기나 긴 밤은 활동의 정지이고 참고 견디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고향사람들은 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영상(映像)에 비가 줄줄 오는, 끊기기 예사 인 무성영화를 보기 위해 밤길 시오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그러니 옛날 아무 오락이 없었던 시대에 마르시아스의 연주는 굉장한 사건이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누구를 칭찬할 때면 꼭 남과 견주어서 하는 못된 버릇 있잖습니까? 

그냥 마르시아스의 연주가 대단하다면 될 것을 아폴로보다 잘한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아폴로가 이런 말을 듣게 될 때 기분이 어떻겠어요. 명색이 음악의 신인데...

마르시아스도 그렇지요. 아무리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해도 분별력 있게 대처했어야 했는데 이 친구가 그만 우쭐해져서 아폴로에게 도전장을 내게 됩니다.

이 도전은 아폴로에게 충분히 모욕적이었을 것이고 아폴로의 분노를 촉발시킨 모양입니다.

 “감이 인간이 신을 능멸하다니.....이노옴, 어디 두고 보자!”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이렇게 해서 유사 이래 최초의 콩쿨 경연대회가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신과 인간 사이에... 누가 이겼을까요? 

9명의 무사이 들이 심판관으로 배석하고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어 이 흥미진진한 경연대회를 침을 삼키며 지켜봤을 것입니다. ,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프스의 신들이라고 이 구경을 놓칠 리 있겠습니까

먼저 마르시아스가 아울로스를 불었습니다.

끊어질듯 이어질듯 때론 격렬하게 때론 속삭이며 애간장을 녹이는 소리는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제 흥에 겨운 마르시아스는 감시르르 눈을 감거나 온몸을 열정적으로 비틀며 몰아입신의 경지에서 신묘한 음악으로 사람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천둥소리와도 같은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승리는 두 말할 나위 없이 마르시아스 것같이 보였습니다.


                         The Aulos


아폴로는 애써 태연한 척 청중의 환호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리라의 줄을 골랐습니다.

이윽고 잘 조율된 현을 퉁기자 마르시아스의 격렬함과는 다른 기품 있는 격조가 아름다운 화현을 이루며 내밀하게 스며드는 것이었습니다. 마르시아스에 의해 고양된 흥분이 일순 스러지며 잔잔하게 그러나 깊숙이 사람들의 영혼에 다가선 위무와 행복감이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보통사람들의 삶이란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 없는-건조한 일상이 되풀이 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폴로의 빛나는 화현이 도처에 흩뿌리는 선율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잠재돼 있던 숭고함과 웅혼한 기상을 깨우쳐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니라 아름답고 찬란하고 존엄한 존재로 변하게 하는 특별한 감동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The Lyre of Apollo - Ancient Greek Music


아폴로의 연주가 끝나자 신들 뿐만 아니라 청중도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둘 사이의 우열을 분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판관들의 격렬한 논쟁 끝에 결국 무승부라는 어정쩡한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되자 음악의 신인 아폴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겠지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아폴로는 새로운 제안을 하게 됩니다. 악기를 거꾸로 들고 연주를 하면서 제우스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 제안은 현악기만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관악기를 잘 불어도 취구의 반대편으로 그러니까 벨 쪽으로 소리를 낼 수는 없는 것이지요. 더구나 악기를 불면서 신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마르시아스는 패배자가 되었고 승자의 처분에 따라 나무에 묶인 채 살가죽을 벗기우는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마르시아스의 가죽을 벗기는 아폴로


이쯤에서 우리는 신화의 의미를 곰곰 따져봐야 합니다.


신화는 이것을 만들어낸 집단이 세상을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관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문화는 신화를 바탕으로 발전한 종교문화라고 말 할진데 그 신화적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대의 아테네든 스파르타든 그리스에서는 음악학습을 교육의 중요한 교과로 한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음악교육의 중심은 가창이었고, 기악교육은 중세 때처럼 가창에 종속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악기가 오늘날의 피아노처럼 보편화 되었을까요?

바로 현악기인 리라나 이와 유사한 키타라였습니다.

피리와 같이 부는 악기는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지난번에 얘기한 아테네 여신과 같이 악기를 불 때에 얼굴 모습이 추하게 보인다는 미용상의 문제와, 또 피리 소리는 사심(邪心)을 불러일으킨다는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관악기는 이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현악기에 비해 고상하지 못하다는.....

관악기의 대표격인 아울로스가 현악기의 대표격인 리라와의 경연에서 패했다는 이면에는 이렇게 아름답지 못하다, 즉 추(醜)하다는 그리스 사람들의 편견이 투영된 결과입니다.

신(神)에 비해 추(醜)하고 열등한 인간이 감히 절대적 아름다움인 아폴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신성모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폴론적인 것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단정, 엄격, 질서, 조화를 추구하는, 즉 인간의 이성이 개입되는 예술 형태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탁월함이 바로 인간의 이성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인간의 미덕은 곧 인간의 이성을 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인간의 미덕은 이성을 발휘해서 감각이 주는 착오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형이상학이라 하지 않습니까?

형이상학은 계시를 근거로 하는 종교와도 다릅니다. 형이상학은 이성으로 모든 것을 규명하고자 합니다.

세계의 기원, 영혼의 본성과 운명, 우주의 심오한 의미 까지도 말이지요.

그러니 도취와 망아를 강조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당연히 배척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결과로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비극을 쓰는 시인들을 국가로 부터 추방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플라톤은 신화적 사유와 시적 사유의 파괴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플라톤적 사고방식은 2000여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서양 문화의 근간, 서양성의 구심점이 됩니다.

말하자면 마르시아스의 도전이 실패한 이후 아폴로의 이성중심주의가 서양세계의 주류가 된 것이지요.

서양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런 현상이 목격됩니다. 

중국의 고대에 은(殷)나라와 주(周)나라가 있었는데 은나라는 디오니소스적문화요, 주나라는 아폴론적 문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은나라의 순장묘나, 방대한 청동기문화가 실증하듯이 그것은 술의 문화요, 제의의 문화요, 죽음의 문화- 디오니소스 축제와도 같은 “취함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주(周)의 문화는 종교적 광기에 빠져있는 은 문화의 취함의 상태로부터 탈피하여, 어떻게 하면 합리적 문아(文雅)의 덕성으로 인간을 살려내느냐 하는데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성중심주의는 예술조차도 이성의 세계에 편입시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이라는 유명한 책의 제목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니체나 하이데거 같은 겁 없는 철학자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들은 어떻게 보면 마르시아스나 시지프스의 후예와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더욱 확실하게 신의 권위에 치명타를 날립니다.

니체는 본래적 인간성에 내재했던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기독교와 철학이 억압하고 압살해버렸기 때문에 인간이 왜소화 되고 말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성주의가 강제한 인간성의 질곡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하이데거는 초월적 진리 대신에 '지금 여기 있는' 인간의 실존에 주목했습니다. 

이들은 인간 존재 뒤에 완전하고, 불변하며 영원한 뭔가가 있다는 식의 형이상학을 비판합니다.

세계를 절대적으로 초월한 타자로서의 신, 그러기에 세계는 그의 통치의 영역이 된 것 등은 이 아폴로적인 면의 억압과 독주의 현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결정판이 얼마 전에 작고한 프랑스의 자크 데리다입니다.

여러분은 해체론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데리다는 바로 이 해체론을 들고 나와 아폴론적, 다시 말해 이성중심주의를 해체하고자 하였습니다.

아름다움만이 진리이고 추함을 사갈시 했던 서양의 강고한 형이상학을 공격하고 추함도 마땅히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말하자면 디오니소스적 가치의 복권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들은 아폴론적 형이상학이 현실을 왜곡시킨다고 봅니다.

우리는 언제나 절대적인 가치, 특히 미적 개념의 절대 "완벽"에 대한 맹신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일종의 정신착란으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유토피아의 형태로 현실과 환영을 뒤섞게 되어 현실을 왜곡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익숙하다고 느끼면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지는 착각들, 예컨대 바비 인형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외모와 또 그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끝없는 욕구 그리고 자신을 대변해 주는 포장된 사회적 지위 등에 의해 암암리에 묵인된 허상을 제공해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전혀 실용화할 수 없는 패션 쇼의 의상이나 바비 인형들은 현실 도피를 위한 대리만족이나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 바벨탑의 허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대립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우리가 오늘 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 건전하다고 말하는 것, 기성세대라고 말하는 것들은 아폴론적이라고 말 할 수 있겠고,

인간의 자연적인 것, 본구(本具)적인 것, 본능적인 것, 육체적인 것, 반문화적인 것은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날줄과 씨줄이 서로 교직하여 피륙을 짜듯이 이 양 면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주의 현장에서도 너무 이성적인 연주는 건조하여 듣는 재미가 없습니다.

반대로 너무 감정에 치우친 연주는 천박해지기 쉽습니다.

일만하고 놀 줄 모르는 사람, 놀기만 잘하고 일 할 줄 모르는 사람 모두 문제입니다. 

아폴로적인 면은 남성적이고 가치창조의 활동이고 테크놀러지의 인간상(homo faber)을 부각시킨다고 합니다. 

디오니소스적인 면은 여성적이고 가치발견의 감수성, 곧 놀라움(wonder)을 지니고 춤추는 인간상(man-the dancer)을 부각시킨다고 합니다. 

어느 한 면이 다른 한 면을 억압하게 되면 그 속에는 불안만이 깃들게 되지만 두 성향이 상호작용하면 좀 더 높은 가치를 창조할 수 있게 됩니다.

남성과 여성이 사랑하여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듯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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