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64년 7월, 역사상 유례없는 로마의 대 화재는 네로황제가 시적 감흥을 위해 불을 질러 일어났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플리니우스 같은 이는 네로를 ‘인류의 파괴자’이며 ‘세상의 독’이라 단정 지을 정로도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악의 화신으로 각인되어있다.
네로의 방화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말들이 많지만 그가 얼마나 포악했으면 이런 이야기가 전해졌을까?
내 어릴 적 본 영화에는 네로가 화염이 충천한 로마를 배경으로 하프를 켜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기억난다.
더 웃기는 건 황제가 흘리는 고귀한(?) 눈물을 시종이 공손하게 대롱에 담는 장면이 상기된다.
실소를 자아내는 황제권력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이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으로 봐선 성공한 연출이 아니겠는가?
네로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로마의 전기 작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로마 황제들의 시시콜콜한 소문과 추문까지도 모아서 책으로 펴냈다.
<열두 명의 카이사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수에토니우스는 네로를 “대중의 인기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가진 황제라 평하였다.
황제라고 대중적 인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게 통치차원의 인기가 아니라 예술적 인기에 집착했다는 점에서 네로에게 독배가 되었다.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했던 네로는 직접 류트나 리라를 켜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예술을 사랑하는 황제라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저 예술을 향유하고 후원했으면 좋았을 걸, 힘으로 박수를 강제하려들어 웃픈 일들이 벌어진다.
경비병을 세워 황제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누구하나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연주 도중에 출산을 한 여인도 있었다한다.
교활한 황제는 군중이 원하는 바를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연주 때마다 환호하는 군중에게 만족스런 웃음과 함께 거액의 화폐를 아낌없이 뿌려대니 속으로는 비웃을지언정 영악한 로마시민들은 허풍스런 환호를 시도 때도 없이 보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이 소리가 너무도 역겹고 지겨운 나머지 죽은척하여 밖으로 실려 나오기도 했단다.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했으니 믿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후세에 네로의 작품은 하나도 남지 않고 악명(惡名)만 남았다.
예술가들은 누구나 다 자기의 목숨과도 같은 창작물이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그들의 우레와 같은 갈채 속에 영원히 기억되기를 원한다.
그런 면에서 예술은 매우 정치적인 면이 있다.
아니 오히려 더한 면이 있다.
정치가들은 단지 표만을 구걸하지만 예술가들은 사람의 마음을 원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스스로 유폐되어 자기 예술을 갈고 닦을 때는 자기만족도 없는것은 아니겠지만 그보다는 발표라는 형식을 통해 대중에게 내 예술을 인정받고 싶은 열망이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다.
네로의 괴이쩍은 행적에는 이러한 예술가들의 염원이 잠재해 있다.
그러나 숱한 예술가들이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잠깐 반짝이다 스러져버리고 말았다.
우주의 별 밭에서 잃어버린 별똥별 따위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극소수만이 영원성을 획득하여 살아남을 뿐이다.
음악으로 말한다면 오늘날 세계음악의 현장에는 고작 작곡가 250명의 작품들만 연주되고 있을 뿐이란다.
그중에서도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이 20퍼센트를 차지하고, 16명의 작곡가가 50퍼센트, 36명으로 확대하면 75퍼센트를 차지한단다.
이 현상은 다른 예술분야라고 다를 바가 없단다.1)
그러니 선택받은 극소수의 작곡가 작품들만 뺑뺑이로 돌고 돈다는 사실이다.
이걸 또 베토벤 한 작곡가만으로 한정한다면 베토벤 곡에서도 아주 제한된 작품만 연주된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면 어떤 작품들을 감상자들이며 무대기획자들이 선호할까?
작품성이 탁월하여 고도의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작곡가가 심혈을 기울여 스스로 만족해하는 곡은 의외로 외면 받고 오히려 가볍게 처리한 곡이거나 불만족스런 곡들이 평가받는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가마에서 꺼낸 도자기가 성에 차지 않으면 여지없이 부숴버리는 도예가 처럼 파기하고 싶은 곡들이 나라고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남몰래 부끄러워 가슴앓이 하는 곡들을 사람들이 엄지 척으로 칭찬할 때는 속내가 복잡해진다.
정말 예측불허라 이를 ‘신의 몫’이라 할만하다.
우리가 천재라 우러르는 작곡가들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심오한 작품성보다는 사소한 에피소드나 우연이 곡을 유명하게 만들고 소위 말하는 명곡이 되게 한다.
명작을 바라보는 대중의 관점은 정말 사소한 것이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
베토벤의 유명한 크로이처 소나타가 있다.
사실 이곡의 정확한 곡명은 Beethoven Violin Sonata. No.9. Op.47이다.
음악에서 소나타 영역은 절대음악(Absolute Music)의 영역이기 때문에 음악외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여 번호로만 분리해야 한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는 것과 같다.
이 주민번호에는 당사자의 인격은 철저히 배격되고 오직 관리차원의 고유 식별성만 유효하다.
Beethoven Violin Sonata.No.9. Op.47에 함축된 정보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Op.47은 작품번호라 말하는 것으로 이 곡이 베토벤의 전체 작품목록 중 47번째로 작곡된 작품이란 뜻이다.
통상 출판 순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Violin Sonata. No.9.은 전체 목록 중에서 바이올린 소나타로만 한정하여 그중에 9번째 바이올린 소나타라는 의미이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모두 10곡이다)
다 아는 바이지만 Op는 라틴어로 일, 노동, 예술작품 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 Opus의 약자이다.
Opera란 명칭도 여기서 비롯됐다.
작품번호는 아무 곡이나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통상 다음과 같은 범위 안에 들어 있는 음악을 선별하여 붙인다고 보면 되겠다.2)
① 악보로 고착된 음악, 음악이 유동적 상태로 떠돌아다니지 않아, 분석. 해석. 연주의 고정적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
② 노고(勞苦opus)가 들어 있는 예술품으로 제한한다. 쉬운 민요나 유행가 등은 작 품으로 불리우지 않는다.
③ 개인적인 것 이어야 한다. 음악이 단체로 만들어지지 않고 단독적 창조자에 의 해 만들어진 것이어야 한다.
④ 유일무이한 것이어야 한다. 모방된 작품은 비작품으로 본다.
⑤ 가능한 한 불후 성을 가져야 한다. 즉, 한 번 듣고 마는 음악이 아니라 시대 를 넘어서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곡에 ‘크로이처’란 이름이 붙게 된 내력은 정말 별거 아니다.
크로이처란 이름이 하도 유명하여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 같지만 그저 사람 이름일 뿐이다.
베토벤이 이 소나타를 프랑스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크로이처에게 헌정했기 때문이다.
루돌프 크로이처(1766~1831)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크로이처’라 부르기를 즐겨할까?
사실 이 작품을 베토벤 바이올린소나타.No.9. Op.47로 부르느냐 ‘크로이처’라 부르느냐는 일견 작고 사소한 것 같지만 서쪽과 동쪽만큼이나 음악 미학적 함의의 편차가 큰 개념이다.
이에 대한 뭔가 적당한 예가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문뜩 펜데레츠키 <교향곡 제 5번>이 떠올랐다.
펜데레츠키 <교향곡 제 5번>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y)는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로 폴란드 정부차원에서 그에게 좋은 작곡환경을 제공해 주기위해 고성(古城)을 마련해줄 정도로 국민적 사랑을 받는 현대 작곡계의 거장이다.
1992년, 우리 정부는 '광복절 경축 음악회'에 초연할 작곡을 펜데레츠키에게 위촉한다.
그 당시 주무부서인 문화부(현재는 문화관광체육부)는 '한국의 광복이 세계대전의 종말이자 세계평화의 시발점으로 승화됨'이라는 숭고하고 뻑적지근한 음악회의 취지를 설정하고 여기에 걸맞은 작곡가로 펜데레츠키를 선택한 것이다.
이미 2차대전의 시대성을 담보하는 역작으로 회자되는 그의 <히로시마 희생자들을 위한 애가>라는 작품 속에서 광복절 주제와의 연관성을 고려했을 때 적임자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왜 하필 외국작곡가인가’라는 문제가 우선 떠오른다.
다른 것도 아닌 빼앗긴 주권을 되찾은 의미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선양하려 했다면 당연히 작곡가가 한국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스타 마케팅이라는 말과 같이 우리 정부가 세계적 지명도가 있는 작곡가의 유명세에 편승해 쉽게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노렸다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고 그 발상의 부박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국민의 세금으로 지불할 20만 마르크의 작곡료도 당시 화제가 되었었다.
문제는 펜데레츠키가 작품을 완료한 곡명이 그냥 '교향곡 제 5번'이라는 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우리 정부가 의도한 <히로시마 희생자들을 위한 애가>와 같은 그럴듯한 제목이 붙지 않은 것이다.
당연 문화부는 이의를 제기하지만 펜데레츠키에게 잘 먹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작품에 정치적, 혹은 역사적 사실이 끼어들면 자칫 값싼 작품이 될 수 있다' 면서 절대음악적 입장을 고수했다.
펜데레츠키도 처음부터 우리 정부의 의도를 모르진 않았을 텐데 그 입장변화의 이유를 알 수 없다.
겨우겨우 타협한 것이 <교향곡 제5번 'Korea'>라는 정도였다.
사실 'Korea'라는 부제는 억지춘향격으로 삽입된 형국이었지 작곡가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문화부가 계약단계에서 위촉 취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세밀하게 문서화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
결국 펜데레츠키 개인의 교향곡 작곡에 우리 정부가 돈을 대준 셈이 되어 버렸다.
씁쓸한 뒷맛을 남긴 이 사건은 사실 그 배경에 음악 미학상의 영원한 두 주제인 절대음악과 표제음악,
즉 형식미학과3) 내용미학4)의 다툼에 다름 아니었다.
2013년 80세를 맞아 내한했던 펜데레츠키
사람들은 문학적 암시나 상징 같은 어떤 지시적이나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 절대음악의 무 지시성, 무 기표성을 갑갑해 한다.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아주 오래된 일이다.
음악의 기원론까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음악의 기원을 언어에 두는 견해가 있다.
이와 같이 음악을 언어에 종속시키는 개념은 오늘날까지 그 뿌리가 장대하다.
원시 기독교가 로마를 통해 세계의 종교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음악을 수용하는 문제가 현실의 문제로 대두될 때가 있었다.
결론은 가사가 있는 성악음악은 허용하되 기악음악은 추방시켜버린다. 367년 라오디기아(Council of Laodigia)종교회의의 결정사항이다.
그러면 왜 교회는 기악음악을 추방시켜버렸을까?
악기는 물질이고 이교도적이고 신을 찬양하는 구체적인 가사를 노래할 수 없고... 뭐 대충 그런 이유였다.
사실은 악기뿐만 아니고 여자들도 교회에서 노래하는 것을 금지 당한다.
성경을 문자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한 피해를 여자들이 본 것이지만 이 얘기는 <파리넬리>라는 강좌에서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이러한 교회의 기악음악에 대한 편견은 르네상스 때까지 지속된다.
이 시기 라파엘이 그린 <체칠리아 성녀의 황홀경>을 보면 체칠리아 성녀가 황홀한 표정으로 우러르는 천상에는 천사들이 합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반해 세속음악을 상징하는 악기들은 땅에 내동댕이 쳐져있다.
당시의 교회가 악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투영된 그림이다.
체칠리아 성녀의 황홀경/라파엘
그러나 바로크시대에 이르면 사정이 바뀐다.
종교적 힘이 약해지고 각종 악기의 진화가 완성되면서 기악음악이 질적이나 양적으로 성악음악에 필적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기악음악은 성악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체의 이디엄과 형식을 확보한다.
콘체르토나 소나타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드디어 기악음악은 라오디기아 종교회의 이후 천년 하고도 사오백년 동안의 성악음악의 굴레를 벗어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다. 학자들도 팔을 걷어 부치고 기악음악을 편들기 시작한다.
디크 같은 이는 “ 기악에 있어서 예술은, 자립적이고 자유로우며 자기 법칙을 스스로 만들어 가며, 놀이의 목적이 아니라 더욱 충실한 상태의 상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 충동에 따르고, 그 즐거움을 가장 심오하게 해주는 가장 경탄할 만한 것을 표현한다” 고 찬사를 늘어놓았으며 노발리스는 “ 무용곡이나 가곡은 원래 음악이 아니라, 단지 그 변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까지 주장하고 나선다.
그 전의 학자들이 기악음악을 소음에 불과한 것이라고 공격하던 것에 비하면 뽕밭이 바다가 되는 놀라운 변화다.
이들의 기악음악에 대한 편견은 한마디로 기악음악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대상을 분명하게 묘사하는 것도 아니고 의미하는 바를 도대체 알 수 없는 그저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들이 공격하는 기악음악의 추상성과 모호함이야말로 기악음악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강변이 쏟아져 나온다.
호프만 (Hoffmann)같은 이는 기악음악이야말로 “인간의 유한성(죽음)을 물리칠 수 있는 오르페우스의 리라에 흡사하다”면서 이제 기악음악의 지위를 종교수준에 까지 끌어 올린다.
이 죽음을 초월한 “미지의 왕국”은 감각과 개념의 접근을 거부하는 “형용불가능의”의 세계이고, 이 왕국은 지리적으로 존재하는 왕국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고 이 정신적 왕국으로 인도해주는 것이 음악, 그중에서도 특히 기악음악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철학자들도 이 칭송의 대열에 합류한다.
모든 <결정적>인 것은 형용불가능하다는 성찰 끝에 기악음악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형용 불가능한 것>을 예감케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데아)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이미 천 년 전의 신라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었나 보다.
온 우주에 편만한 진리(불교)를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어 신라인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범종을 주조한다.
그 정성이 어느 정도였냐면 어린아이를 쇳물에 녹여 종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올 만큼.
우리가 에밀레종이라 일컫는 성덕대왕신종이 바로 그 종이다.
신라인들 신심의 결정체인 이 종의 명문(銘文)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무릇 진실로 참다운 도(至道)는 생김새 그 너머를 담으므로 보고자 하여도 그 근원이 보이지 않으며,
진실로 커다란 소리(大音)는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울리므로 듣고자 하여도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방편의 가르침을 열어서 여러 깨달음(三眞)의 심오함을 보이고,
더하여 신령한 종을 걸어서 모든 깨달음(一乘)의 완전한 소리를 깨우치는 것이다.
단적으로 요약하자면 진리를 말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어 종소리를 통해 깨우치게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종소리를 기악음악으로 환치시키면 서양 철학자들의 주장과 크게 다를 바 없겠다.
성덕대왕신종에 양각된 비천상
이와 같이 결정적인 것, 궁극의 것은 우리 언어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기에 형용 불가능한 것이 되고, 그것이 바로 기악음악의 속성과 같다는 것이다.
하여, 쇼펜아우어(Schopenhauer1788-1860)같은 철학자는 기악음악을 모든 예술의 정점에 올려놓는다.
그에 따르면 다른 구체적인 예술들은 추악한 세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현실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되지만 형용 불가능한 고도의 추상적 언어인 음악만이 이 세상을 전혀 반영하지 않으며, 이 닮지 않은 것으로 추악하고 고통스런 환경들을 뛰어넘어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게 한다고 믿었다.
이때의 음악은 당연히 기악음악을 말한다.
이제 실체가 없는 추상성으로 모든 예술의 최 상위 하이어라르키를 확보한 음악은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부러움과 닮고 싶은 대상이 된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베를렌느 같은 시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구체적인 묘사보다도 암시를 주려했고, 사물에 대해 진술하기 보다는 상징을 제시하려 했다.
베를렌느가 발표한 작시법(作詩法)을 보면 이들의 시를 짓는 이념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먼저 음악적이어야 한다” 는 시구로부터 시작하여 말미에 “다시 한 번 음악을” 이라고 강조하며 “본래 시인의 것이었던 음악의 부(富)를 다시 시의 세계로 탈회(脫會)해” 와야 한다고 열심히 주장한다.
이때의 음악의 부는 당연히 기악음악이 갖는 모호함과 추상성이고 이것을 다시 시의 세계로 빼앗아 오자는 것이다.
이리하여 기악음악은 기능과 표제와 언어와 같은 모든 음악외적인 요소를 다 제거해버리고 오직 음향으로 구현되는 음악의 절대화를 선언한다.
일컬어 절대음악이라는 것이다.
이 절대음악을 구현하는 음악의 형식은 소나타형식이다.
베토벤의 크로이처도 본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이다. 절대음악의 영역이다.
이 절대성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음악외적 요소도 끼어들 틈이 없는 Beethoven Violin Sonata. No.9. Op.47 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작품번호가 주는 이야기 부재의 메마름에 갈증을 느껴 크로이처라 즐겨 부른다.
나도 Beethoven Violin Sonata. No.9. Op.47이 너무 길어 그냥 크로이처 소나타로 부르고 있다.
편리함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음악을 언어를 빌어 명명(命名)한다면 그 작품을 들을 때 환기되는 무한한 상상력은 증발돼버리고 제목의 틀에 갇히고 만다.
<운명>이면 운명에 갇히게 되고 <월광>이면 월광에 갇히게 된다. 다른 상상력을 제한해버리고 만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교육환경에서는 이것만이 정답이 되고 나머지는 틀린 답이 되고 만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은 <크로이처>로 명명되고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 매체변이나 다른 장르와의 접목을 통해 베토벤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가 되었다.
자, 이제부터는 이 소나타가 왜 크로이처가 됐는지, 그리고 이 소나타의 어떤 점이 타 예술에 영감의 기원이 됐는지, 또한 타 예술과의 접목을 통해 크로이처의 명성이 어떻게 확산되어가는 지,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본래 베토벤이 이 곡을 헌정한 사람은 크로이처가 아닌 바이올리니스트 브릿지타워5)였다.
그는 화려한 연주 스타일과 뛰어난 기교로 당대의 명성을 얻고 있었고 무엇보다 베토벤이 그를 선호했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초연을 앞두고 연습하는 과정에서 베토벤이 기대했던 이상으로 브릿지타워의 곡에 대한 해석과 연주력이 출중했던지 “다시 한 번만 해보게! 내 사랑스런 동반자여!” 감격하여 외쳤다고 한다.
그러던 둘 사이가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금이 간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한 여인을 두고 미묘한 감정의 엉킴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베토벤은 심사가 꼬였던지 악보를 출판하면서 엉뚱하게도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루돌프 크로이처(1766~1831)에게 헌정하고야만다.
이런 돌발적 우연으로 ‘크로이처 소나타’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나 평소 베토벤에게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크로이처는 베토벤의 호의에 감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심한 적의를 드러냈다고 한다.
베를리오즈가 날것으로 증언한 바에 따르면 “난폭하고 무식한 곡”이라 했다니 그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 만약 크로이처가 베토벤과 함께 길이길이 기억되는 유명 인이 된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한편으로 브릿지타워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브릿지타워 야말로 이일에 더할 나위 없이 억울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시간에 쫓겨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베토벤의 자필악보를 가지고 거의 초견으로 연주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이 곡의 초연을 대성공으로 이끈 공로를 크로이처에게 몽땅 빼앗긴 형국이 되었다.
정말 애증이 엮어내는 인과관계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협주곡인가, 소나타인가?
베토벤은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을 출판 하면서 초판본 표지에 다음과 같은 말을 써 놓았다.
“Sonata per il Pianoforte ed un Violin obligato, scritta in uno stilo molto concertante, quasi come d'un Concerto”6)
“거의 협주곡처럼, 극히 협주곡과 같은 스타일로 작곡된 바이올린 오블리가토에 의한 피아노 소나타”
Beethoven.Violin.Sonata.No.9.Op.47.kreutzer 초판본 표지
우리나라에서 콘체르토(concerto)는 협주곡(協奏曲)이라 번역돼 사용한다.
협(協)의 자전(字典)적 풀이는 합할 협, 화합할 협이니 화합해서 하나가 되는 의미가 강조되나 본래의 콘체르토가 갖는 의미와는 간격이 있다.
콘체르토의 어원은 라틴어 ‘콘체르타레’(concertare)이고, 그 의미는 ‘투쟁하다, 논쟁하다’ 이다.
그러나 어미(語尾)의 변화만 빼고 같은 철자를 쓰는 이탈리아어 콘체르토(concerto)는 ‘협력하다, 일치시키다’라는 의미이니 이탈리아적 의미만 수용한 것이 되겠다.
그러나 실제 콘체르토에는 라틴어적 의미와 이탈리아적 의미가 혼재해있다.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가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화합하는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토벤이 “거의 협주곡처럼, 극히 협주곡과 같은 스타일” 이라 굳이 이 곡의 성격을 못 박은 이유는 기존의 피아노처럼 반주에 머무르지 말고 바이올린과 대등한 입장에서, 그러니까 듀오 소나타처럼 연주하라는 지침이 되겠다.
1악장, 처음4마디에서 바이올린이 중음주법으로 아다지오7)의 유장한 흐름 속에 서정적인 모티브를 제시하면 피아노가 이를 받아 응답한다.
18마디 페르마타에서 서주부가 마무리가 되면 19마디부터는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불꽃 튀기는 레이스가 프레스토8)의 급한 템포를 타고 숨 가쁘게 펼쳐진다.
상상력 이론
아놀드 세링(Arnold Schering)9)이라는 독일의 음악학자가 있다.
그는 <상징에 의한 해석>의 이론을 적용하여 베토벤의 작품 중에서 음악과 시의 신비적인 결합을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한 학자이다.
세링은 이 곡을 들으면서 전쟁 중의 치열한 접전양상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그의 상상력은 날개를 펴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시인 타소의 서사시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10)의 이야기를 아주 그럴듯하게 이 곡에다 짜 맞춘다.
마치 베토벤이 이 서사시의 배경음악을 작곡한 것 같이 말이다.
크로이처 소나타 1악장의 느린 서주부는 싸움이 시작되기 전의 긴장된 분위기를 암시한다.
피아노는 십자군 용사 탄크레디를, 바이올린은 무슬림의 여전사 클로린다이다. 19마디, 프레스토에서 시작되는 a단조의 제1주제를 바이올린이 연주를 하는 부분은 클로린다가 먼저 칼을 휘두르는 장면이란다.
여기에 맞서서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는 피아노는 탄크레디가 되고.
91마디 온음표로 연주되는 부분은 둘 사이의 불꽃 튀는 공방전은 잠시 중단되고 가쁜 숨을 몰아치며 상대를 노려보며 탐색하다가 117마디 부터는 다시금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뭐 이런 식의 해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그럴듯하지만 아무런 근거 없는 세링 혼자만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베토벤은 세링과 같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곡을 쓴 것이 아니라 절대 음악적 입장에서 곡을 쓴 것이다.
그러니 세링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듣든 사람마다 자기의 상상력을 맘껏 발휘해서 들으면 그만이다.
번스타인도 그의 음악론에서 이런 실험을 시도한다. 똑 같은 음악에다 얼마든지 다른 이야기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11)
Beethoven Violin Sonata No.9 1st Mov 일부 악보
콜링우드(R.G Colingwood 1889-1943)나 사르트르(J.P,Sartre,1905-1980)의 상상력 이론이라는 게 있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히어링(hearing)이 아니라 리스닝 (listening)으로서 음악을 듣는 사람의 상상력에 의해 음악을 재구성하는 ‘전체적 상상 체험’이라는 것이다.
먼저 콜링우드의 주장을 소개하면
“음악은 결코 감각적으로 들리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음악은 청자에게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상시키는 그 무엇이고, 청취자가 상상력을 사용함으로써 감지되고, 의식하는 전체 활동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라고 말했다.12)
이점에 대해 사르트르의 어조는 좀 더 분명하다.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귀로 포착되는 물리적 소리는 아직 음악이 아니라 단지 아날로곤13)일 뿐이고, 이것을 음악작품으로 환원하기 위해서는 듣는 자의 상상력을 통해 스스로가 음악작품을 만들어내는 활동이라는 것이다.14)
그런 까닭으로 아무리 훌륭한 음악도 그 음악을 작품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상상력이 없다면 단지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다.
인간의 감각기관 중 가장 수동적인 감각기관은 청각이다.
보기 싫은 것은 눈을 감으면 피할 수 있지만 우리 귀에는 커플이 없어 들리는 소리를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청체험은 귀에 포착되는 소리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소리를 음악작품으로 환원시키는 능동적인 창조체험이 되는 것이다.
나는 콜링우드와 사르트르의 상상력 이론이야말로 감상교육의 금과옥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내를 죽인 베토벤
베토벤의 크로이처소나타를 듣고 아놀드 세링과는 전혀 다른 상상력을 자극받아 소설을 쓴 문호가 있다.
톨스토이다.
여기서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세링이 톨스토이보다 49세 밑이니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를 읽었을 것이고 그 영향을 받았을 걸로 생각되지만 그 여부를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정확히 따져보면,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가 출판된 지(1799년) 91년 만에 톨스토이가 소설 크로이처를 썼고(1890) 여기로부터 46년 후에 세링이 <베토벤과 시(1936)>에서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을 언급했다.
그러니까 순서로 보자면 톨스토이를 먼저 얘기해야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톨스토이를 세링보다 늦게 얘기하는 이유는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에 자극 받아 음악이나 연극 등으로 매체변이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세링이 크로이처에서 치열한 칼싸움을 연상했다면 톨스토이는 치정이다.
이와 같이 세상을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에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는 절대음악은 듣는 사람에 따라 환기되는 반향이 천차만별의 양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둘 사이의 공통점이라면 상황이 격렬하다는 점이다.
크로이처 소나타의 속도감과 두 악기가 접전을 벌이며 전개해나가는 팽팽한 긴장감의 영향일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음악이 뿜어내는 섬뜩할 정도로 압도적인 힘이 사람들에게 준 충격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Beethoven.Violin.Sonata.No.9.Op.47.kreutzer.1st mov [Anne-Sophie Mutter.-.Lambert.Orkis]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는 긴 기차여행에 무료해진 여행객들의 대화내용이다.
이틀 동안 궤도를 달리는 단속음 속에서 잡담 이외에 달리 할 일이라곤 있을 턱이 없는 승객들은 이상적인 사랑과 결혼에 대한 얘기에 열중한다.
이때 참을 수 없었던지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이들의 대화에 끼어든다.
정신적으로 깊게 결속하는 사랑이라는 게 가능한 일도 아니고 “평생을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양초 하나가 평생 탄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면서 영원한 사랑에 대한 신랄한 반론을 편다.
그는 더 적극적으로 자기가 바로 증오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아내를 죽인 뽀즈드니셰프 라고 밝히면서 그 살인사건의 발단을 ‘빌어먹을 음악’, 바로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 때문이라고 말한다.
몰락한 지주의 아들 투르하체프스키- 러시아 소설속의 이름들은 참으로 복잡 하도다-가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돌아온다.
세련된 파리의 바람을 몰고 갓 돌아온 “촉촉한 눈, 미소를 머금은 붉은 입술, 포마드를 바른 콧수염, 최신 유행의 머리 스타일”을 가진 이 남자는 다크서클 처럼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포즈드니셰프 부부의 일상에 불길한 전조를 일으킨다.
따분한 결혼생활로 권태가 찾아오면 부부간에 사소한 것으로도 다투기 마련이다.
단물 빠진 권태,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치명적인 질병이나 가난 같은 것만 삶의 위기가 아니라 권태란 놈도 만만찮은 무서운 놈이다.
뽀즈드니셰프는 불안하지만 결국 아내에게 빠리에서 온 남자를 소개시켜 주고야만다.
“대화가 곧 바로 음악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더니 그자가 아내와 함께 연주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아내는 그 무렵 늘 그랬듯이 우아하고 고혹적이었으며 불안하리만큼 아름다웠죠.
아내는 처음 본 순간부터 그자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게다가 바이올리니스트와 합주를 하게 된다는 것에 기뻐했습니다.”
아내는 그와 연주를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처럼 변한다.
고지식한 외모의 키 작은 남자 ‘포즈드니셰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의심의 시선에는 그렇게 믿고 싶은 상상력이 가미되기 마련이다.
연주자 사이에 당연히 오가는 사소한 눈짓조차 둘 사이의 은밀한 교감으로 의심을 증폭시킨다.
그는 의혹의 색안경을 끼고 이 둘의 생각까지 읽어낼 요량으로 예의 주시한다.
아다지오 서주부에서 꿈꾸는 듯 아득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고 활을 긋는 트루하체프스키의 유난히 희고 긴 손가락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윽고 화답하는 아내의 피아노 소리에는 그 남자를 갈망하는 설렘과 목마름이 담겨있는 것 같이 들렸을 것이다.
한번 의심의 씨앗을 품게 되면 의심의 속성이 갖는 잔인한 외골수로 그 소용돌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마련이다.
포즈드니셰프는 벌써 여기서부터 두 사람이 “음악으로 맺어진 음욕의 관계”라고 확신한다.
음악회에 모인 사람들과 남편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둘만이 연주를 통해 은밀하게 교감하는 가장 우아한 간통이 지금 지금 벌어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이윽고 연주가 프레스토에 이르자 포즈드니셰프의 질투는 극에 달하고 만다.
이 부분을 포즈드니셰프는 기차에 동석한 사람들을 향해 비명에 가까운 큰소리로 묻는다.
“두 사람이 연주했던 곡은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였습니다. 도입부에 나오는 프레스토 부분을 아십니까? 알고 계시냐고요?
아! 정말 끔찍한 소나타입니다. 특히 그 부분이요. 원래 음악이란 거 자체가 끔찍한 거지요.
그게 뭡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음악이 뭡니까?
음악이 뭘 만들어 낼 수 있죠?
음악이 뭔가를 만들어 낸다면 도대체 왜 그런 걸 만들어 내려는 거죠?
흔히들 음악은 정신을 고양시켜 준다고들 합니다만 다 헛소리고 거짓말입니다!
음악이 하는 거라곤 끔찍함을 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음악은 저의 정신을 조금도 고양시켜 주지 않죠.
정신을 고양시켜 주지도, 그렇다고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흥분만 돋울 뿐이죠.”
톨스토이의 소설 속에서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 이야기는 이 대목이 전부이지만 톨스토이는 포즈드니셰프를 통해 자기가 생각하는 음악에 대해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본래 음악을 좋아한 사람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고 전문가에 버금가는 피아노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한다.
그런 그가 이 소설에서 왜 이다지도 신랄하게 음악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것일까?
그 ‘빌어먹을 음악’ 때문에 자기의 부인을 칼로 찔러 죽이게 할 정도로 음악은 위험한 것일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아니 그 반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소설이니까 그렇게 쓴 건 아닐까?
아니다. 톨스토이는 <크로이처 소나타>의 에필로그를 통해 소설 속에서 음악의 위험성을 고발한 발언과 자신의 음악관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소설 속에는 톨스토이 본인의 결혼생활과 결혼관이 많은 부분 투영돼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톨스토이는 군대를 마치고 영지에 돌아와 농노들의 삶에 뛰어든다.
그들을 위해 학교도 세우고 험하고 고된 농사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향 처녀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Sophia Andreevna Behrs, 1844~1919)를 만나 미친 듯한 사랑에 빠진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넷이었고 소피아는 겨우 열여섯이었다.
열여덟 살이나 차이 나는, 이제 겨우 열여섯 어린 소녀와 미친 듯한 사랑이라니?
하기는 천하의 바람둥이 피카소와 그를 사랑했던 여인들을 보면 사, 오십 살의 나이 차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테레즈나 쟈크린 같은 여인은 피카소가 죽자 자살을 선택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슬픔 때문에!
1862년, 이들의 격렬한 사랑은 6개월 만에 결혼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결혼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결혼 전날, 톨스토이는 소피아에게 불쑥 일기장을 내밀며 말한다.
“ 지나온 내 34년의 발자취요. 당신에게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소.”
어린 소피아는 이 일기장을 읽으며 충격을 받는다.
톨스토이가 적나라하게 기록한 수많은 여성과의 성적 관계 앞에 어린 신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피아는 어리지만 강인한 여성이었다.
파혼을 고민하다 결혼 후에도 서로의 일기를 공개하는 조건으로 톨스토이를 남편으로 맞이한다.
이후 이들의 결혼 생활은 13명의 자녀를 낳을 만큼 금슬도 좋았고, 대문호의 부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대영지의 큰살림을 도맡아 꾸려가는 안주인으로서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
사실 톨스토이 문학의 이면에는 부인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었다.
독자의 입장에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악필이었던 톨스토이의 원고는 소피아에 의해 해독되어 원고지로 옮겨졌다.
그러니 한 편의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끝없이 수정되는 모든 원고를 소피아가 일일이 필사를 해야 하는 고통스런 작업이 따랐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톨스토이가 농노들의 비참한 삶에 연민하며 그들을 돕기 위한 자선을 펼치자 러시아 전역에서 병자와 가난한 농민들이 몰려들었고 여기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다 소피아의 몫이었다.
소피아는 진정 거대한 러시아 대평원의 딸이었다.
소피야와 딸 알렉산드라 톨스타야
문제는 톨스토이가 전 재산을 가난한자들에게 환원하고 극빈자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면서부터 발생한다.
소피아는 격렬하게 반대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남편으로부터 자식과 손자, 손녀의 삶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다.
소피아를 악녀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것이다.
팔을 걷어붙이고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소피아의 기세 앞에 톨스토이는 한발 물러선다.
토지와 저작권 관리를 소피아에게 맡기는 것으로 이혼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일이 수습된다.
톨스토이는 소피아와 48년간의 결혼 생활을 싸우면서 살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둘이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싸웠다”15)고 말한다.
“인류역사상 가장 불행한 결혼”16)이라고도 한다.
종국에는 톨스토이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 가출을 결행하고 결국 그 일로 객사하고 만다.
작가가 맞닥뜨린 경험은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기억의 저장고에 축적되다가 어떤 식으로든 그의 작품에 투영될 수밖에 없다.
어떤 기록17)을 보면 이즈음, 톨스토이는 자신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와 유사한 사건을 겪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소피아와 갈등이 깊어지던 1889년, 톨스토이에 실망한 소피아는 자택에서 음악회를 열었고 그때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Kreutzer Sonata)〉를 연주하던 젊은 음악가와 밀애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둘의 관계를 톨스토이는 의심을 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속앓이를 했다는 것이다.
대개 남자들의 질투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더 은밀하고 치졸하다.
더구나 세계적인 대문호의 반열에 오른, 그리고 그것을 충분히 의식했을 톨스토이에게 이 사건이 주는 수치심과 고통은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이때의 참담함을 소설로 승화시킨 것이 《크로이처 소나타》라는 것이다.
예술을 백일몽이라 부른다.
현실에서 살인을 하면 범죄이지만 꿈속에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포즈드니셰프는 질투 끝에 아내를 칼로 살해한다.
“코르셋 안쪽에서 피가 솟구쳐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전 그제야 돌이킬 수 없는 일이란 걸 깨달았고 그와 동시에 ‘돌이킬 필요 없어.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거야.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야’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포즈드니셰프의 외침에는 톨스토이의 외침이 겹쳐 들린다.
톨스토이는 칼이 아니라 펜으로 그들을 죽인 것이었다.
작가는 이렇게 쓰라린 고통을 양식으로 작품을 생산하는 기묘한 존재이다.
다른 예술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여기서 얻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
사랑을 아름답다 하지만 사랑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교미의 순간에 잡혀 먹히는 사마귀처럼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앞서의 질문을 다시 해본다.
왜 톨스토이 소설<크로이처소나타>를 통하여 음악의 위험성을 고발했을까?
톨스토이는 본능을 통제하는 도덕적 의지나 이성의 영역을 음악의 힘이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로망 롤랑18)은 톨스토이의 이런 견해를 베토벤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며 그 공격을 긍정적으로 옹호하는 글을 쓴다.
"도대체 톨스토이는 베토벤의 무엇을 비판하였던가.
그것은 그의 힘이었다.
그는 괴테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마음대로 복종시킨 이 거만한 거장에 대해 노여움을 느꼈으며, 그래서 반항했던 것이다.
베토벤을 그토록 부당하게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톨스토이는 오늘날 베토벤의 음악을 찬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깊이 그의 음악을 이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귀머거리 노인’의 예술 속에 메아리치고 있는 저 미칠 것 같은 정열과 저 거칠고 굳센 힘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 그 어떤 거장도, 그 어떤 오케스트라도 그것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아마 베토벤은 애호가들의 맹목적인 애정보다 톨스토이의 증오에 더 만족했으리라."
어쨌든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는 베토벤의 <크로이처>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켜 한동안 금서로 지정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저자거리의 논쟁이 황실에 까지 번져 짜르는 극찬했고 황후는 충격을 받아 노여움을 표출했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법무장관은 이 소설이 담긴 신문의 배송을 불법화했으며 루즈벨트 대통령까지 나서 공식적으로 톨스토이를 “성적, 윤리적 변태”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소설이 주는 언어의 전달성이 음악보다 큰 것도 있겠지만 소설 내용이 당시의 결혼관이나 여성관에 비추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톨스토이는 <크로이처 소나타> 에필로그에 논란에 대한 해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하니 사회적 파문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러한 논란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의 지명도와 관심을 폭발적으로 높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즘엔 이렇게 얻어지는 광고효과를 <노이즈 마케팅>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어떤 작품은 대중에게 사랑받고 어떤 작품은 존재감 없이 소멸된다.
형이상학에서 진리란 ‘사고(思考)와 존재의 합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뛰어난 작품성이 곧 명작으로 살아남아야 하는데 그 합치가 꼭 일치 되지 않다는데 묘함이 있다.
작품성, 또는 예술적 절대성과 무관한 조그만 단서나 우연이 빌미가 되어 대중에게 선택을 받는 작품도 많다.
한번 불씨가 살아나면 걷잡을 수 없이 맹렬한 세력으로 번지는 들불과 같은 이치가 이 세계에도 작동된다.
베토벤의 작품 중에서 오페라 피델리오가 있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이다.
<피델리오>는 베토벤이 10년에 걸쳐 세 번이나 개정을 거듭하는 바람에 네 가지의 버전이 있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는데도 세계의 오페라 현장에서 그 연주의 빈도수가 제한적이다. 베토벤의 명성에 비하면 의아할 정도이다.
대개 대중에게 각광받는 작품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과 같이 작품번호 외에 <크로이처>라는 뭔가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름이 붙어있고 거기에다 이 곡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풍부한 곡들이다.
대중은 작품의 질적 가치보다도 에피소드에 집착하는 측면이 강하다.
한 가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는 원곡이 가지는 특별한 캐릭터에다 여기에서 파생된 에피소드가 덧입혀져 그 유명세가 확장된 보기로서 설명한 것이지 작품성을 논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어떻든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는 많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부추겨 장르를 불문하고 활발한 매체변이로 가지에 가지를 뻗는 확장성을 보여준다.
그중에 몇 가지 사례만 소개해 보기로 한다.
첵코의 작곡가 야나첵(Leos Janacek, 1854-1928)은 1923년, 그의 현악사중주곡 제1번이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 때문에 이곡은 현악4중주 제1번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 영감을 받아> (inspired by Leo Tolstoy's novella 'The Kreutzer Sonata)라는 긴 곡명을 붙이게 된다.
그러나 곡명이 길면 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보통은 줄여서 <크로이처 소나타>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와 헷갈리기도 한다.
야나첵은 피아노 제자이자 은사의 딸인 즈덴카 슐초바와 1881년에 결혼을 한다.
즈덴카는 야나첵보다 열한 살 연하이다.
그러나 62세인 야나첵은 1917년 온천휴양지에서 자신보다 서른여덟 살이나 어린 카밀라 슈테슬로바(Kamila Stösslova1892~1935)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카밀라는 이미 결혼을 한 여자였다.
야나첵은 1928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카밀라에게 무려 700통이 넘는 사랑의 편지를 보낸다.
이 불륜은 야나첵 노년의 창작활동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야나첵의 고백처럼 카밀라는 창작의 원천으로 작용하여 ‘말년의 전성기’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작품을 쏟아낸다.
1923년에 작곡한 현악 4중주 1번 ‘크로이처 소나타’는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남편의 칼에 죽는 여주인공을 카밀라와 동일시하여 연민을 느껴 작곡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 등장하는 고통 받고, 아파하며, 쓰러져 가는 가련한 한 여인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Leos Janacek
Leos Janacek string quartet no.1
네덜란드 작가 마르흐리트 더 모르 (Margriet de Moor, 1941- )는 야나첵의 현악4중주 제1번 <크로이처>를 듣고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 2002>를 발표한다.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영감을 받아 톨스토이가 소설을 쓴 것과 같은 양상이 되풀이 되는 모습이다.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의 영향은 미술이라고 비켜가지 않는다.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자비에 프리네((Rene Francois Xavier Prinet, 1861-1946)가 1901년에 그린 <크로이처 소나타>이다.
이밖에 영화나 연극으로도 그 매체변이는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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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베르 주르뎅 지음/ 채현경.최재천 옮김/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 / 궁리출판사/ 312쪽
2) 홍정수 저/미학적 음악론/정음문화사/ 273쪽
3) 음악 표현의 내용을 음악 외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를 철저히 배척하는 것이며 음악이 표현하는 의미를 순음악적 이념이라고 하는 주 장이다.
형식 미학은 18세기 이후에 발달한 기악음악. 절대음악을 옹호하며 프로그램 음악을 배격 한다. 또한 음악이 다른 예술보다 더 인간의 내면을 탁월하게 드러낸다는 주장을 펴며, 음악의 형식이라는 구체 성과 냉철한 언어사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4) 음악내용을 음악외적인 것으로 포착하려는 태도에서-타율미학, 음악이 어떠한 감정이나 개념적인 내용을 표현하려는 것으로 보아
-표현미학, 음악이 감정을 표현한다는 주장을 하기 때문에 감정미학이라고도 불리운다.
5) Bridgetower(1780-1860)/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6) Newman, Williams/The Sonata in the Classic Era 3rd ed./New York/W.W.Norton &Co.1983/p.541
7) Adagio:느리게
8) Presto:매우 빠르게
9) Arnold Schering(1877.4.2.-1941.3.7.)/독일의 음악학자/ 그는 베토벤 관한 여러 저작을 남기고 있지만 위의 글에 대한 언급은
그가 1936년에 간행한 <베토벤과 시>에서 발췌된 것이다. 그는 음악과 시의 신비적인 결합을 찾아내려고 한 점에서 절대음악의 신 봉자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10) 이 서사시는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까지의 서사 중에서 열두 번째 이야기이다
11) 번스타인/음악론/삼호출판사/ p.57-61
12) 國安 洋 著/ 金勝一譯/음악미학입문/도서출판 삼호출판사/102쪽
13) Analogon:동류대리물
14) 같은 책 같은 쪽
15) 석영종/톨스토이 불륜을 말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K745hQctAhA&feature=player_detailpage
16) 위와 같음
17) 이동연/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33XX54800002
18) 로망 롤랑(Romain Rolland 1866.1.29.-1944.12.30)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수필가. 19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베토벤을 존경해서 그를 모델로 <장크리스토프>란 장편소설을 썼고 <베토벤의 생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