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사색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는다

작곡가 지성호 2018. 8. 16. 08:23

 

전북대학교 큰사람교육원에서 4주간 진행된 <클래식음악과 사람의 무늬 >를 무사히 마쳤다

사상 유래 없는 폭염이 지구촌을 강타했고 사람들은 미증유의 더위에 어쩔 줄 몰라 쩔쩔맸지만 마지막 날(89)은 자리가 부족하게 청강생이 빼곡히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예정에 없던 질의응답으로 종료시간을 30분이 넘어서는 열기도 있었다.

그 미진함이 있었던지 개강 후에도 강좌는 계속될 모양이다.

나에게는 처음부터 모두 뜻밖의 일이다.

 

마르틴 부버는 실존의 성취라는 말을 사용했다.

“...날마다 내게 생기는 일들이 나의 주요 소임과 내게 가능한 실존의 성취를 내포하고 있다.” 

참으로 값진 말씀이다.

이 재앙과도 같은 더위 속에서 꼼짝없이 서재에 갇혀 뜬금없는 강좌때문에 강의록을 작성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저 실존의 성취라 생각하고 묵묵히 감당하였다.

사실 난 알마의 후속편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8월부터는 올해 안에 마무리해야 할 새로운 오페라에 집중해야 하는 일이 그 첫째 이유이고또 다른 이유로는 지난 번 내 사랑 알마여이후에 전개되는 알마의 러브 어페어가 너무나도 난삽하고 내용도 별로 내키지 않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 유별나게 복잡하게 얽힌 애정사가 세속적 흥미로 전락하여 오히려 작곡가 말러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관심보다는 알마가 더 자주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전도현상이 마뜩치 않은 게 사실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까지 이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럼에도 또 다시 이어가는 이유는 페북으로 연결된 소중한 인연인 최승규 어르신의 긴 댓글과 몇 분의 성화에 굴복했기 때문이다최승규 어르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여든을 넘는 연세에도 문화예술에 대한 전문적 식견으로 (연세대에서 미술사를 강의 하셨다) 우리가 책에서나 접근할 수 있는 전설적인 대가들의 공연현장이나 전시공간을 직접 찾아다니시며 맞닥뜨린 문화현장의 산 증인이시다. 우리에겐 전설이지만 그분에겐 현장이었다. 또한 그분 공부의 이력도 그 세대에 좀처럼 보기 힘든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외국인 부인과 미국 엘에이에서 살고계시는 형편의 속내를 내 알지 못하나 그 세대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뿐이다.

말하자면 최승규 어르신에 대한 오마주로 말러의 후속편을 이어간다는 긴 변명이 되겠다.

 

프로이트(Freud)적 시각에서는 이성을 유혹하는 여성의 심리를 '남성에 대한 지배욕구'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여성성을 무기로 삼아, 자신을 소외시킨 '아버지와 닮은 남성(의 세계)'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팜므 파탈'형 여성을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개념에 딱 들어맞는 여인을 꼽으라면 나로서는 당연 알마가 떠오른다.

만년의 알마는 자신의 공식 이름을 알마 마리아 말러 그로피우스 베르펠(Alma Maria Mahler Gropius Werfel)로 표기해 달라고 했다

마리아는 결혼 전 이름이고, 말러, 그로피우스, 베르펠은 남편들의 이름이니 합법적 결혼만 세 번인 셈이고 알마는 이걸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하게 밝히는 오연함이 엿보인다

그뿐인가? 비록 알마의 이름을 더 길게 하진 않았지만 짧은 시간 알마와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 구스타프 클림트,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도 다 알마가 풍기는 사랑의 마법에 주박(呪縛) 걸린 사람들이다

어떤 호기심 많은 사람의 입방정은 이들이 모두 15명이라고 온라인상에서 도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것도 본 기억이 있다

알마의 이러한 요란한 애정행각은 당연히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렸을 것이고 오죽했으면 톰 레러 (Tom Lehrer)는 알마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음과 같은 알마를 풍자하는 시를 다 썼다.

 

The loveliest girl in Vienna

Was Alma, the smartest as well.

Once you picked her up on your antenna,

You'd never be free of her spell.


비엔나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알마,

가장 스마트하기도 하지요.

한번 그대의 안테나에 그녀를 포착하면

그녀의 마력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지요.

 

그렇다! 알마를 보는 순간, 남성들은 그녀에게 빨려 들어갔다.

이들 사이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은 대게 주목받는 예술가들이라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알마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아버지 쉰들러를 추종하거나 교류하는 사람들이 다 비엔나의 저명한 화가들이었다. 이들은 존경하는 대가의 집을 드나들면서 마치 우리 어릴 적 담임선생님의 딸이 예쁘면 그 반 남자 아이들 모두가 설렜듯이 알마를 보면 심쿵했고, 그중에 누군가는 연정을 불태웠던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

 

알마가 13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알마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제자 카를 몰과 재혼한다

이들은 아버지 생존 시부터 은밀하게 내통하던 사이였다.

하필 아버지의 제자라니... 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하고 존경했던 알마에겐 아버지의 사망과 어머니의 재혼이 이후의 행동양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유년기 아이는 반대 성()의 부모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

알마는 유별나게 아버지를 사랑했다. 애착과 좌절이라는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성장해야 하는데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재는 알마의 내면에 아버지를 갈망하는 마음이 그대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거기다 어머니는 그 아버지의 제자와 결혼함으로 알마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으며 아버지에 대한 갈망은 더욱 확고하게 고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갈망은 의식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면 깊은 곳에 억압되고, 그것이 바로 무의식이 되어 성인이 된 후의 삶을 지배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알마는 19세 연상의 아버지 같은 말러를 남편으로 선택한 것이리라

이것이 내 추측만이 아닌 것이 나중에 말러가 프로이트를 만나 상담한 결과이기도 하다

알마의 한 남자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남성편력은 아버지에 대한 갈망의 대안 때문은 아니었을까?

 

비엔나 분리파


알마를 얘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비엔나 분리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알마와 애정관계로 얽힌 사람들은 대부분 다 비엔나분리파와 연관되어있는 사람들이다

역설적인 게 알마를 추적함으로 우리는 알마가 살아온 시기만큼의 비엔나 예술 활동의 심층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이 점이 이 글을 쓰는 큰 재미이기도하다.


오스트리아는 지금은 한국의 남한만한 영토에 인구 900만의 약소국으로 전락했지만 그 수도 비엔나는 650년 합스부르크왕가의 위대한 역사와 영광을 간직한 도시이다. 오래된 도시인만큼 고인물이 썩듯 아무래도 완강한 보수적 기운으로 활력을 잃고 정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것을 답답하게 여긴 신진 예술가들이 한 번 뒤집어 보자고 일으킨 운동이 바로 분리운동이다

이들은 그동안 황실과 귀족의 후원금만을 바라고 부지불식간에 돈 줄에 예속된 낡은 것들과 분리하길 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이란 멋진 구호를 내걸고 여기에 동조하는 예술가들이 서로 긴말하게 교류하며 시대를 견인해 나갔다

이들의 활약은 괄목할만한 것으로 이제 비엔나 예술은 분리파 운동의 전과 후로 대별하게 된다.

1897년 초대 회장인 '구스타프 크림트'를 중심으로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공예가 콜로먼 모저, 건축가 오토 바그너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카밀로 지테, 아돌프 로스, 요제프 호프만 등이 주축이 되어 그들만의 전시회를 갖고 잡지도 발행했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는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에 의해 분리파의 전당을 마련하게 될 정도로 그 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 전당이 이름하여 제체시온 (secession)이다.

지붕에는 월계수 잎으로 금빛 구를 얹었고 입구에는 신성한 봄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어 그들이 지향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제체시온 (secession)


1902년 제체시온의 개관에 맞춘 제14회 전시회에서 분리파 회원들은 분리파 정신의 귀감이 되는 상징적인 인물로 베토벤을 선정하고 조각가 막스 클링거가 제작한 '베토벤 상'과 클림트의 벽화 '베토벤 프리즈'를 전시하기에 이른다

이 날, 구스타프 말러는 비엔나 궁정 오페라단 오케스트라의 금관주자 20명을 동반하여 본인이 직접 편곡한 환희의 송가를 연주했다고 한다.

클림트가 베토벤의 교향곡 제94악장 실러의 시에 의한 환희의 송가에 깊은 감동을 받고 인류의 구원에 대한 베토벤의 이상을 작품에 반영한 것이 <베토벤 프리즈 The Beethoven Frieze>

무려 34m에 이르는 벽화로 제작되어 제체시온의 3면의 벽을 장식한 이 역작은 오늘날 세계도처에서 제체시온에 수많은 관람객을 불러 모으는 비엔나의 명물로 부상했지만, 당시에는 정작 난해하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자 클림트는 큰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결국 이 일로 클림트는 제체시온을 탈퇴하고야만다.



                   <베토벤 프리즈 The Beethoven Frieze> 일부


이 대목에서 한편 생각해보면 이 날 지휘를 하면서 말러는 비엔나에 뿌리 둔 비엔나 악파의 영광을 분명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

진실로 음악사에 비엔나 악파는 특별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특수한 사회적, 문화적 조건이 교향곡과 기악 실내악의 생장(生長)에 풍부한 지반이 되고 이 나라와 도시를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훨씬 뛰어난 음악왕국으로 만들었다.

비엔나의 궁정은 음악과 음악가를 아낌없이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음악을 거국적으로 애호했다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귀족들은 모두 사적으로 관현악단을 가졌으며, 또한 저택 내에는 사설의 오페라 하우스가 갖추어 있었다.

귀족 저택에 고용된 집사나 하인들조차 악기를 상당수준 연주할 수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무리 작은 도시에도 음악 전문가가 있어 파티나 댄스, 결혼식, 장례식 등의 크고 작은 행사에 관현악을 제공해 주었다.

오랜 전통, 풍부한 음악적 재능, 여러 계급의 사람들이 열심히 음악을 사랑하고 지배계급은 매우 부유해서 예술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결집해서 기악의 이해와 연주력을 높여 위대한 비엔나악파의 꽃을 피게 한 것이다.

리히텐시타인공. 시바르쩬베르크공. 발트시타인 백작. 리히노브스키 공, 그밖의 에스테르하지와 같은 명문은 서로 사설 오케스트라의 우열을 다투었다.

여름이면 이들은 시골의 호화로운 성에 거주하며 매일 음악을 즐기면서 생활하였다.

겨울에 비인에 되돌아 갈 때는 반드시 음악가들을 데리고 함께 갔다.

따라서 비엔나에는 가가호호마다 직업 음악가 이거나 아니면 열심인 아마추어 이거나, 아무튼 음악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풍토위에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비엔나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기를 총칭하여 비엔나 악파라 부르고, 이는 그대로 음악사의 고전악파가 된다

이때부터 독일음악은 서양음악의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현대음악도 다를 바 없다.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도 다 비엔나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신 비엔나 악파라 부른다

난데없이 비엔나 음악을 독일음악(Deutsche Musik) 이라 부르는 이유는 오스트리아도 같은 독일어권이기 때문에 독일음악의 범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범위를 넓혀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지역의 음악도 독일음악이라 부른다.

본래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프랑크왕국시대부터 신성로마제국까지 그 뿌리가 같았고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도 같았다

2차대전 후 연합국들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오늘날과 같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나뉜 것이고 나치의 본고장도 오스트리아이다.

 

                                      에스테르하지 궁전


1902년이면 말러가 알마와 결혼을 한 해이고 그의 교향곡 5번이 완성된 해였다. 뿐만 아니라 유태인이라는 인종적 편견 속에서도 비엔나 궁정 오페라극장의 지휘자와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맹활약을 하던 시기였다

이 두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비엔나는 당시 세계 오페라의 중심지였으니 이곳의 지휘자는 세계가 주시하는 음악계 최정상의 자리였다

그런 만큼 말러는 선배 베토벤의 최후의 교향곡을 지휘하면서 이 날 행사의 역사적 무게와 본인이 감당할 책무사이에서 분명 어떠한 자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말러는 평생 지휘와 작곡을 병행했지만 기를 쓰고 교향곡을 9개나 작곡을 하고 10번째에서 미완성으로 숨을 거둔 것도 비엔나 선배 베토벤을 의식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편 말러가 지휘자로만 만들어진 음악을 소비하지 않고 9개의 교향곡을 남겼다는 것은 인류에겐 축복이요, 말러에겐 비록 죽었으나 영원히 사는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겠다.

 

                             비엔나 국립 오페라극장


알마의 의붓아버지 카를 몰은 클림트와 함께 이러한 비엔나 분리파 운동의 산파 역할을 한다.

때문에 그의 집에는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찾아들었고 알마는 친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들과 접촉하게 된다. 이들 가운데 아도르노나 주커칸들 같은 음악미학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의외의 인물도 노정되어 깜짝 놀라게 된다. 그만큼 알마 주위에는 당시 비엔나을 주름잡던 젊은 예술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마는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고양이처럼 그 누구의 품에도 안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들의 욕망에 불을 지르고 애타게 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과정에서 이들은 창작의욕을 자극받아 불후의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사랑의 열정은 그게 성취든 좌절이든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제49회 비엔나 분리파전시회 포스터(1919년)

 

 

결혼전의 연인들

  

알마는 말러와 결혼하기 전 이미 공연감독 막스 부어카르트,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1871-1942 ), 그리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와 염문설이 있었다.

알렉산더 쳄린스키는 알마에게 작곡과 피아노등을 개인교습 해줬던 사람으로 알마와 말러의 인연을 만들어 준 사람이다

알마의 회상에 의하면 처음 추커칸들의 집에서 말러를 만났을 때 자기의 선생님인 쳄린스키가 국립오페라에 발레곡을 써서 보냈는데 여기에 대한 아무런 답변이 없자 이의 부당함을 말러에게 따지면서 인연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알마는 말러와의 로맨스가 진행되자 쳄린스키에게 연인관계를 접을 것을 종용하면서도 계속해서 그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모순된 행동을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쳄린스키는 알마가 말러와 결혼하고 나서 교향시 '인어공주(Die Seejungfrau, 1902-1903)'를 작곡한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1871-1942 )

 

알마가  사춘기 시절, 구스타프 클림트를 좋아해 그와 첫 키스를 했다는 말은 전편에서 얘기 한 바 있다

그 유명한 클림트의 그림 <키스>도 알마 와의 추억을 그린 것이라는 설이 떠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가 연주하는 말러의 교향곡 5번의 디스크 재킷 표지에 이 그림이 실어져 더욱 이런 소문이 증폭된 모양이지만 그럴듯하기는 하나 별로 근거가 없어 보인다.

클림트는 알마를 자신의 캔버스에 한 번도 담지 않았다. 짐작하건데 클림트는 알마를 모델로 하기에는 심적 부담이 컸던 것 같다클림트는 알마의 의붓아버지 몰과 절친 사이였다. 알마는 주변정리가 치밀하지 못했던지(그런 증거는 많다) 노출된 알마의 일기를 몰이 읽게 됨으로 둘의 관계를 알게 되고 몰은 대경실색 하게 된다

의붓딸이라도 딸은 딸이다

이 딸이 여자에게 진지하지도 않은 천하의 바람둥이와 그런 사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몰은 정색을 하고 이 불쾌함을 클림트에게 밝힌다

클림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숱한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다. 어느 정도냐면 그가 사망했을 당시 14명의 여인이 친자 확인 소송을 냈을 정도였다. 여자문제만큼은 낯짝이 두꺼운 클림트이지만 절친 으로부터 내 딸과 사귀지 말라는 통보는 굉장히 민망했던 모양으로 몰에게 장문의 사과 편지를 보낸다

잔인하게도 몰은 알마에게 이 편지를 보여주고 알마는 분노한다

이렇게 하여 알마와 클림트와의 관계는 정리가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클림트는 친구 몰을 의식하고 알마를 자기의 그림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한국 전 포스터


1910

1910년은 말러가 50세 되는 해였고 알마와의 결혼생활 8년째 되던 해였다.

둘 사이에 딸 둘을 두었으나 3년 전에는 장녀 마리아를 성홍열로 잃는다

알마는 말러가 <죽은 아이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작곡할 때부터 불행을 불러오는 전조가 아닌가 불안해했었는데 결국 현실이 됐다. 한참 예쁜 짓하던 5살 바기 마리아를 잃은 알마는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말러의 승승장구와 비례하여 알마의 존재는 갈수록 말러의 그림자에 불과해졌다. 사교계의 화려한 파티와 뭇 남성들의 찬사를 즐기던 알마에게 가정은 감옥과 다를 바 없었다.

19106, 말러는 토블라흐에서 새로운 교향곡 작곡에 몰두하고 있었다

알마는 딸과 함께 인근 토벨바드로 요양을 떠났다

요양원의 의사는 우울증에 빠진 알마에게 아주 위험한 처방을 한다

처방의 하나로 춤을 권하면서 한 청년을 댄스 파트너로 소개해 주었다. 이 청년이 다름 아닌 그로피우스(Walter Adolph Georg Gropius, 1883~1969) 이다

그는 나중에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이자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독일의 건축가로 유명해진다

그로피우스는 당시 27세의 청년으로 알마보다 4살 연하였고 휴가차 이곳에 와 있었다

뭔가 새로운 활력을 원했던 알마는  키가 훤칠한 그로피우스와 급속하게 사랑에 빠진다

항상 죽음의 강박에 쌓여 어둡고 칙칙한 아버지 같은 말러에 비해 이 청년은 너무나 젊었다

며칠 뒤 알마는 가정에 되돌아왔지만 그로피우스는 격렬한 사랑의 감정을 토로한 편지를 알마에게 보낸다

불행은 이 편지를 말러가 받아 본 것이었다

말러는 아내의 외도에 큰 충격을 받는다. 알마는 알마 대로 당황하여 편지를 보낸 그로피우스의 경솔함을 질책한다

견딜 수 없게 된 그로피우스는 말러의 집을 찾아와 알마와의 대면을 바라고 서성거리다 말러에게 발각되고 만다

한국 같으면 무슨 험악한 일이 벌어질 상황이지만 말러는 그로피우스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 삼자가 마주 않는다

이 대목에서 말러가 충격을 다스리며 인내로 사태를 수습하려는 모습이 눈물겹다

말러는 알마에게 묻는다. 나와 그로피우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생각해보라, 세계가 주목하는 거인 말러가 아니던가

말러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황제와 같은 절대권을 행사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할 때는 폭군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누구도 말러의 권위를 침범하거나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런 말러가 23살이나 어린 자식 같은 그로피우스와 동급으로 낮아져 알마의 선택을 기다리는 광경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알마는 영악했고 교활했다

말러의 부인이라는 현실적 이익을 포기하지 않았다. 27세의 불안한 청년에게 미래를 의탁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가 저지른 일 때문이라도 말러에게 되돌아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


내 생각이지만 알마는 말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말러를 사랑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알마는 저질렀다

이번 외도 사건도 사건이지만 알마는 나중에 말러와의 사이에 있었던 편지나 기록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서슴없이 왜곡해서 책을 발간했다. 보통사람이라면 오히려 남편의 약점을 가리고 좋은 쪽으로 왜곡했을 터인데 알마는 그 반대였다

알마의 왜곡이 낱낱이 밝혀질 수 있었던 것은 전편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나탈리 바우어 레히너의 꼼꼼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말러 연구자들은 알마의 기록과 레히너의 기록을 대조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진실에 대한 가장 심각한 왜곡을 말러의 부인인 그가 저질렀다.” 앙리루이 드 라 그랑 (Henry-Louis de La Grange) /음악학자

 

그의 손을 거친 모든 것은 모조리 변질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휴 우드(Hugh Wood)/작곡가

 

알마는 그날도 일기에 나에게는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다고 썼다.

그러나 그로피우스는 알마의 선택을 존중하여 말러의 집을 떠났다

이 청년의 훌륭한 점은 말러에게 자신의 경솔함을 사과하는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후에 말러와 알마 사이의 관계를 김미라의 <서해문집><알마 말러> 편의 글에서 인용한다.

 

알마의 외도가 그럭저럭 봉합되기는 했지만 말러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육체적 충격으로 전이되었다. 초조해진 말러는 알마가 혼자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혹시 떨어져 있어야 할 경우에는 식사 전에 자신에게 꼭 전화하도록 당부했다. 그래도 말러의 불안은 점점 심해졌다. 알마는 그가 자주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말러는 밤에 침실 사이의 문이 열려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이따금 알마가 잠든 침대 앞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기도 했다. ‘내 결혼은 결혼이 아니었다고 알마는 썼다. 채워지지 않는 불안, 붕괴되기 직전의 결혼을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 모두에게 괴로운 시간이었다. 알마는 그 상황을 코미디라고 표현했다. 결혼이라는 이름의 코미디는 말러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얼이 빠진 말러는 분노와 비참함속에서도 여기까지 이른 자신의 결혼 생활을 점검해 보고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

말러는 교향곡 8번의 초연을 코앞에 두고 프로이트를 찾아간다.

19108, 두 거장은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만남을 가졌다.

둘은 같이 산책을 하며 4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다.

이를 이준석의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다/이담북스 >라는 책에서는 산책분석이라고 명명하며 이 부분을 심리학자적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다.

말러와 프로이트의 만남은 이들의 위상으로 보아 세간의 관심을 끌었는지 이 책뿐만 아니라 2010년에 독일 필름에서 Mahler auf der Couch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기도 한다.


나중에 프로이트는 그의 제자에게 말하길 알마는 아버지를 몹시 사랑해서 아버지를 닮은 사람을 갈구했기 때문에 말러의 나이가 오히려 알마에게 끌리는 요인이 되었고, 말러는 그의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타입의 여성을 갈구한 것이다. 말러의 어머니는 인고의 세월을 보냈고 고통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말러는 무의식적으로 알마에게서 그런 모습을 기대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진단을 가지고 말러에게 권고한다.

알마는 말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알마에게 복종을 강요하지 말고 예술 활동의 자유를 주라고.

 

                              프로이트


말러는 결혼식을 올리기 며칠 전에 알마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한다.

당신은 이제 모든 관습. 허위. 허영. 자만심을 버려야 하오,...또 당신은 나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며 당신의 하루하루 모든 일과는 내 욕망과 필요에 따라 결정되어야 해요.”

이 내용은 지배의 언어이지 소통의 언어는 결코 아니다.

이런 면에서 말러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사랑을 감정으로만 해석하지만 사랑은 관계의 문제다.

말러는 어린 알마를 대등한 인격으로 만나지 못하고 나이와 남성성으로 억압했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말러는 자기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에게 폭력을 쓰는 것을 지켜보면서 성장했다

말러는 그런 아버지를 혐오하며 어머니를 무한한 동정심으로 애정 했다.

말러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유별난 것이어서 다리를 절룩거리는 어머니의 신체적 핸디캡에 깊이 연민하여 신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말러의 걸음걸이도 어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절룩거렸을 정도였다.

말러는 프로이트의 권고대로 그동안 금지 시켰던 알마의 작곡활동을 도와 다섯 곡의 가곡을 출판 할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비엔나와 뉴욕에서 이 노래들이 공연될수있게 주선해주었다

이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 봐서는 말러라는 거인의 영향력이 없었다면 여성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알마는 이후로 작곡활동에 열정적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 말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알마는 작곡가로서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알마는 단지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말러를 비난하는 수단으로 작곡활동의 보장을 요구한 셈이다.

말러는 이뿐만 아니라 알마를 달래기 위해 초연되는 교향곡 8번을 알마에게 헌정한다.

 

교향곡 제8(1906~1907)

 

1910912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예정대로 뮌헨에서 말러의 8번 교향곡이 초연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말러 스스로 이전의 내 교향곡은 이 작품을 위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8번 교향곡은 말러 음악세계의 모든 것이었다. 말러는 1906년부터 작곡을 시작해서 2년간의 산고 끝에 일궈낸 노작이었다. ‘그는 번개가 내려치듯 쏟아지는 악상을 받아 적기 위해 휴지 조각이든 어디든 가리지 않고 악보를 적곤 했다는 알마의 기록처럼 잠을 자나 길을 걸으나 이곡을 염두에 두고 노심초사했음을 짐작케한다.

보통의 교향곡이 4악장 체제인데 이 교향곡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절대음악의 장르에서 라틴어로 된 찬미가와 괴테의 파우스트를 각각의 악장으로 한 것이 매우 이례적이다.

1: 오소서 창조의 성령이여빠르고 맹렬하게(Hymnus: Veni, creator spiritus - Allegro impetuoso)

 

2파우스트의 마지막 장아주 느리게(Schluss-szene aus 'Faust' - Poco adagio)

 

따라서 이 곡을 꼭 교향곡의 범주에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내 개인적인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학자들은 전통적 교향곡의 확장정도로 의미부여를 하는 것 같다.

말러가 활동했던 세기의 전환기, 즉 낭만주의 전통에서 20세기로 이행하는 점이적 시대에 형식의 대규모화와 교향곡과 가곡, 교향악적 요소와 실내악적 요소들이 혼합하는 장르의 혼합화정도로 정리가 되는 것 같다.

특히 말러의 8번 교향곡은 규모의 대형화란 점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다.

초연 때 무대에 오른 인원은 모두 1029, 지휘자 말러까지 포함하면 모두 1030명이나 되었다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곡을 <천인교향곡>이라 즐겨 부른다

이를 세분하면 말러의 제자 브루노 발터가 선발하고 훈련시킨 합창단원만 858, 그리고 현악기 연주자 84명과 하프 연주자 6, 목관악기 연주자 22명과 금관악기 연주자 17명으로 구성된 171인의 대편성 오케스트라이다악기편성을 유심히 살펴보면 만돌린, 첼레스타, 하모니움, 오르간 등 통상의 오케스트라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악기편성도 말러답게 유별나다.



                                         다양한 타악기를 사용하는 말러를 풍자하는 그림


이 많은 연주자를 섭외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멀리 비엔나와 라이프치히의 합창단까지 불러와야 했고, 초연에 참가한 8명의 독창자들도 뮌헨과 비엔나,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베를린, 바스바덴 등 다양한 지역에서 섭외하였다한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과연 이만한 연주자를 전개시킬 무대가 있었을까 에 대한 의문이 들어 조사해보니 콘서트 홀은 아니고 뮌헨 국제 박람회장의 부속 시설이었던 신음악 축전홀(Neue Musik-Festhalle)이라는공연장이라기보다는 실내체육관에 가까운 대형 시설에서 초연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이 축전홀의 음향상태는 어땠을까? 대편성의 연주자가 들어 갈 무대만을 찾다보니 이곳으로 낙점된 것 같은데, 우리나라 실내체육관 같으면 에코가 많아 이런 연주회는 불가능하다

청중속에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모여들었었고 무엇보다 말러같이 꼬장꼬장한 지휘자가 심혈을 기울인 자작 곡의 초연에서 음향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냥 넘기지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별이상은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것같다.

이 날 연주회에는 왕족을 비롯한 유명인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카미유 생상스,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오스카 프리트, 아르놀트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과 알반 베르크와 같은 음악가들도 대거 참석하였다.

연주가 끝난 후 폭풍 같은 커튼콜이 30분 넘게 이어졌으며 사람들은 모두 층계를 내려와 위대한 예술가에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연주회가 완전히 끝난 후에도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러를 기다리고 있어서 말러는 이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야만 했다니 그 열기를 짐작할수 있겠디.

말러의 교향곡 8번은 말러 음악의 정점이었다.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말러의 이름은 영원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말러의 몰골은 몹시 마르고 창백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내면은 고통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신음악 축전홀(Neue Musik-Festhalle)

 

교향곡 9번의 저주 


1908년에서 1909년 사이에 작곡된 대지의 노래는 말러가 끝내 그 연주를 보지 못하고 사망한 교향곡이다.

전편에서 잠간 언급한 바와 같이 유달리 염세적이고 무거운 이 작품이 교향곡 9번이 아닌 대지의 노래라는 타이틀을 갖게된 이유는 말러가 이른바 ‘9번 교향곡의 저주를 피해가기 위해 고심한 결과이겠다

참으로 불가사의 한 일이, 많은 작곡가들이 교향곡 9번의 저주를 피해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베토벤도 슈베르트도 부르크너도 다 제10번 교향곡을 작곡하다가 사망하고 만다. 이 저주는 드보르작에게도 이어졌다.

말러는 평생을 죽음을 의식하고 그 두려움 속에 살았던 작곡가 였던 만큼 교향곡 9번의 저주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신경을 썼을 것이다.

말러는 10번 교향곡을 쓰면서 알마에게 말했다 한다. 원래 대지의 노래가 9번째 교향곡이었으니 이번에 새로 작곡한 이 작품은 제10번 교향곡이 되는 셈이야. 이제 제9번 교향곡의 저주는 풀렸어.”

하지만 교향곡 9번의 저주 이런 편법으로 극복할수 없었나보다. 이후로도 영국의 본 윌리엄스가 9개의 교향곡을 남기고 죽는다. 그러다가 러시아의 쇼스타코비치에 의해 드디어 교향곡 9번의 저주는 해제된다

그는 15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도 9번의 문턱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스탈린 체제에서 발표한 제9번 교향곡이 소련연방공산당 당국으로부터 '고전적 전통의 파괴자, 반민중적·형식주의적 작곡가, 타락한 서구 부르조아 문화의 추종자'라는 심한 규탄을 받으며 모스크바 음악원과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의 교편 활동을 금지당하는 등 숙청의 위협속에 전전긍긍하면서 가까스로 저주의 문턱을 통과했다.

말러 생전에 연주되지 못했던 제 9교향곡은 그가 사망한 6개월후인 19111120, 말러의 제자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말러를 사랑했던 수많은 음악가들이 감동과 회한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미완의 교향곡 10

 

교향곡 10번은 아내 알마의 외도로 극심한 절망감에 쌓여 있을 때 작곡되었으나 끝내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삼자대면 이후에 말러가 알마를 지키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에도 알마의 마음은 그로피우스에게 가 있었다

그녀는 그로피우스에게 편지를 썼다

여전히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당신의 아내가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다.

말러가 이 사실을 몰랐을까?

말러는 찢어지는 고통속에서도 무너져 가는 마음을 애써 추스리며 10번 교향곡을 작곡해 나갔다

이 교향곡 초고에 씌어있는 글에는 비장한 절망감이 묻어난다.

너만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는다. 알므쉬

알므쉬는 말러가 알마를 부를때의 애칭이다.

말러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말한다. 알마가 말러의 피를 말려죽였다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오페라나 교향악같이 큰 규모의 곡을 쓰는 작곡가는 음표라는 기호를 가지고 화성, 음고, 장단, 악기의 음색, 셈 여림등을 오선지라는 설계도에 정교하게 배치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 이 전체가 통합하여 음향으로 현실화 될 때 발현되는 가장 비물질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를 예측하고 그것을 구현해 내는 어찌보면 비범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초인적 존재이다

문제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전체를 통합하는 작업을 일상적으로 실행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현실 생활에서는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능력한 경우가 많다

현실과 동떨어진 저만의 세계에서 고립되어 작업하기 때문이다

동굴에 스스로 갇힌 웅녀처럼, 아니면 알을 품는 암탉처럼 길고 긴 고립과 밀폐의 절연된 감옥에 웅크린 채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오선지의 칸을 메워나가는 초췌한 인생이다

오죽하면 업()을 만드는 일(), 그러니까 작업(作業) 이라 할까

우화한 나비처럼 잠깐 세상에 나와 연주와 박수와 꽃다발 속에 파묻히다 그 꽃이 다 시들기도 전에 다시 감옥으로 스스로 갇히는 그런 나날을 사는 사람이다.

그럼 그런 힘든 일은 왜 하느냐고

누가 등떠밀어서가 아니라 쓰지 않으면 안되니까 쓰는 것이다

병중에서도 스스로 고칠려고 하지 않는 대책없는 병, 그것이 바로 천형(天刑)병이다.

말러도 예외가 아니다

시즌에는 정신없이 이 도시 저 도시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야 했고 비 시즌에는 곡을 써야 했다

이런 예술가의 부인은 자기 삶은 없다

한참 곡을 쓸때는 극도로 예민해 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라도 잘못 건넸을 때에는 상처받기 십상이다

남편의 작업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사람은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이고 이사람의 일이 곧 나의 일이라는 강한 동지적 연대가 없으면 감당할수 없는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만약에 이 형극의 길을 혹 걷고 싶은 자가 있다면 내가 선배로서 충고하건데 이런 의지가 있는 배우자를 만나기전에는 절대로 결혼하지 말고 독신으로 살라고 말하고 싶다

저는 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그 배우자는 무슨 잘못이 있어서 진창길로 끌고 가려는가?

말러의 불행은 알마에게 이런 희생을 강제한데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말러는 작곡가로서 감내해야 할 짐위에 알마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했다

알마는 어렸을 때부터 예술가의 가풍에서 자라 그 분위기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은 좋아했지만 정작 작업하는 고통에는 참여하길 싫어하는 한갓 딜레탕트 (Dilettante)였다.

시대를 초월한 탁월한 성취를 자기것으로 한 사람은 극히 소수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람을 존경한다

그가 탁월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그 힘든 것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알마의 외도사건 이후 말러는 늦게나마 알마와 소통하려고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알마는 이미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1910, 역사적인 8번 교향곡 초연을 마치고 말러는 뉴욕 필을 지휘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알마는 말러와 동행하지 않고 파리로 가 그로피우스를 만난 다음에 미국으로 가 말러와 합류한다.

뉴욕에 도착한 뒤에도, 말러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에도 알마는 그로피우스에게 편지를 썼다한다.

 

미국에 간 말러는 뉴욕 필을 전면적으로 재조직하고 조련하여 지휘에 전념한다.

하지만 일단의 비평가들의 조직적인 공격에 시달리고 뉴욕 필의 감독위원회와도 격렬하게 대립하고야만다.

이런 와중에 221일 말러가 지휘하는 뉴욕 필은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곡으로만 프로그램을 짜 무대에 올렸다

일명 이탈리아 콘서트였다. 공연 전날부터 말러는 심한 편도선염으로 고열에 시달렸다

주치의가 지휘를 말렸지만 말러는 듣지 않았다. 결국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연주회장에 도착하여 가까스로 공연을 끝마친다.

말러 생애의 마지막 무대였다.

말러는 어렸을 적 “크면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순교자요” 라고 대답했다 한다.

진실은 고통을 통해 확인된다사랑하지 않으면 고통에 합류하지 않는다.

말러에게 음향으로 구현되는 세계는 이 세계가 아니라  저 세계배반없는 ‘진실한 세계였다.

말러는 신명을 다해 몸을 던졌다. 순교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다음날부터 말러의 병세는 열이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는 등 상태가 악화됐다

투병생활은 2개월이나 이어졌으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의사들의 권고로 말러는 그 해 48일 뉴욕을 떠나 파리로 향한다

파리에서는 파스퇴르 연구소에 있던 샹트메스 교수가 치료를 담당한다

그러나 당시의 의술로는 어찌해볼 방도가 없었다.

말러의 병은 잦은 호흡기 질환으로 인해 박테리아가 심장판막으로 옮아가 패혈증세를 보였다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파리에서도 가망이 없자 사람들은 말러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말러도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다. 정신적인 고향 비엔나에서 임종하길 원해 512일 비엔나로 이동한다. 

알마는 이를 죽어가는 제왕의 마지막 행차라고 기록했다.

518일 천둥이 치는 날, 51세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끝내 말러는 영옥의 세상과 영별하고야 만다.

알마를 연속하여 부르다가 마지막으로 모차르트를 두 번 외치며...

말러의 시신은 비엔나의 북서쪽 외곽에 있는 그린칭 지역의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장녀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유언대로 마이어니히에 있던 장녀의 유골도 그린칭으로 옮겨졌다.

끝내 비를 쏟는 가운데 장례는 유언에 따라 추도문도 읽지 않고 음악도 없이 진행됐다.

말러의 관을 나르자 갑자기 비가 그치고 나이팅게일이 지저귀고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는 증언이 있다.

 

말러의 묘비는 생몰년도도 없이 오직 구스타프 말러라고만 적혀있다.

나를 찾아오는 이는 내가 누군지 알 것이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러의 유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러의 묘비


말러의 10번 미완성은 5악장 구조의 대곡이다

이렇게 말할수 있는 것은 총보만 완성되지 않았다 뿐이지 부분 부분으로 짜 맞추면 거의 완결단계까지 작곡되었기 때문이다

이 악보를 폐기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관한 여러 논의들이 있어왔다.

1960. 말러 탄생 100주년을 맞아 10번 미완의 교향곡은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영국의 음악학자 데릭 쿠크(Deryck Cooke)는 필사본을 연구하여 해독하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복원에 성공한다

이런 시도에 알마는 저작권자로서 격분하여 이 복원된 작품의 연주를 금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연주녹음을 듣고 그녀는 생각을 완전히 고쳐 쿠크의 성과에 호의를 나타내면서무조건적인 승인을 해주었다

여기에 힘입어 쿠크는 이 교향곡의 "연주용 판(performing version)"을 완성하여 1964813Berthold Goldschmidt의 지휘로 초연을 했고 곧 음반으로도 나왔다

이 음반을 듣고 알마는 눈물을 흘렸다한다

데릭 쿠크에 의한 노력으로 말러의 미완성 10번 교향곡은 말러의 유산일뿐만 아니라 인류의 유산으로 남겨질수 있었던 것이다.

 


                                      10번 교향곡 육필 원고의 일부 

 


*이후의 알마 행적은 계속할수도 있고 중단 될수도 있습니다.  제 일정과 형편이 빠득해서리...

 

 

그래도 정 궁금하다면 알마의 요란한 행적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사 이기 때문에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정보는 차고 넘칠 것이다. 특히 김미라의 <서해문집>중에서 <알마 말러>편은 추천하고 싶은 귀한 사이트이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3XX6180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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