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2월17일, 나는 꿈에 그리던 베네치아에 있었다.
막연하게 오래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책상을 뒤져 당시의 기록물을 살펴보니 벌써 19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황금이 풍부하지만 황금보다는 명예가 더 풍부한 곳, 훌륭한 업적이 많지만 그 보다 더 훌륭한 미덕이 넘치는 곳, 단단한 대리석 위에 세워졌지만 그 보다 더 단단한 시민들의 화합위에 설립된 곳, 바다에 둘러싸여 안전하지만 평의회 때문에 더 안전한 곳”
이러한 곳이 정말 세상에 있을까?
페트라르카 (Petrarca)는 이러한 긍지로 다져진 도시를 베네치아라고 말한다.
다툼과 분쟁으로 점철된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은 영원한 평화를 꿈꾼다. 베네치아야말로 불가능한 꿈을 현실화 시켜주는 실재의 샹그릴라이다.
다시 페트라르카는 말한다.
“인생의 온갖 풍파에 시달린 모든 사람들은 자유, 평화, 정의가 넘치는 위엄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위로와 안식을 찾는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공화국(La Serenissima republica)'이라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드리아만의 주먹만 한 섬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건국 이래 천백 년 동안 한 번도 외침을 받지 않는다. 인구 20만도 채 안 되는 베네치아는 공화국의 정체를 유지하면서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동방과의 교역 루트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오스만 튀르크와 같은 대제국과도 한 치의 꿀림도 없이 당당하게 맞서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사람들은 이 불가사의를 몹시 궁금해 왔다.
<로마인 이야기>로 우리에게 친숙한 시오노 나나미도 이걸 놓칠 수 없었나보다. 그녀는 <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상, 하권으로 나누어 깨알같이 베네치아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나에게도 베네치아, 특히 산마르코 성당은 꼭 가보지 않으면 안 되는 필생의 숙원이었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만약 여러분이 진지한 음악 도라면 일생에 한 번은 선택이 아니라 필히 베네치아를 가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만큼 베네치아는 서양음악사에서도 특별한 곳이다.
그레고리언 성가에서 발원한 서양음악은 그 속성상 성악음악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시기 부르고뉴악파, 플랑드르악파에 이르러 성악다성음악은 그 정점에 이른다.
꽃이 활짝 만개했으니 다음은 이울 수밖에.
서양음악의 변곡점은 베네치아악파에서 시작된다.
바로 기악음악의 대두이다.
산마르코성당
산마르코성당은 베네치아의 자존심이자 정체성이다.
산마르코 성당의 마르코는 신약의 마가복음을 쓴 마가(Mark)를 이름이다.
베니스 사람들이 마가를 수호성인으로 삼은데 는 다분히 로마를 의식한 오기의 산물이다.
본래 베니스의 수호성인은 성 데오도르이다.
데오드르는 유럽판 심청이다.
그 아름답고 희생적인 덕행으로 성자의 반열에 오른 데오도르의 수동성이 세속적 욕망에 가득한 베네치아사람들의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로마는 베드로를 모셨으니 베네치아도 베드로 못지않은 성인을 모셔야 된다는 경쟁 심리로 데오도르를 패하고 마가로 대체한 것이다.
그렇다면 베네치아인 들의 수호성인 심사에 당당히 통과한 마가는 누구인가?
그는 최초의 복음서를 기술하여 기독교의 대승화 작업에 전기를 마련한 사람이다. 마가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만찬을 행한 집,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가의 다락방’의 마가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집 주인의 아들이었다. 이 집은 오순절 전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한 집으로도 유명하다. 마가는 바울의 전도여행의 동역자이였으며 옥중에서도 그와 같이 있었다. 또 베드로가 “나의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베드로에게 아낌 받는 베드로의 통역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서기 68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했다.
베네치아인 들은 이 정도의 스펙이면 로마에 크게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유럽의 유서 깊은 성당들은 성인들의 유골을 묻은 터 위에 세워졌다. 이 때문에 어떤 성인의 유골을 묻어야 할지는 그 성당의 위상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도 다를 바 없다. 영험한 부처를 모셔야 절이 흥한다. 나약한 인간들의 종교심을 파고드는 종교영업의 행태는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베네치아인 들은 지중해 건너편 알렉산드리아에 안치된 유골을 빼내 오기위해 세계 제일가는 장사꾼의 수완을 여지없이 발휘한다.
828년, 베니스의 두 상인은 알렉산드리아의 한 성당에 보존돼 있던 마가의 유골을 매수하여 빵바구니에 담고 그 위에 돼지고기덩어리를 빈틈없이 채운다. 엄격한 통관절차가 있었겠지만 무슬림 관리들은 돼지고기를 혐오하기 때문에 코를 싸매고 빨리 갖고 꺼지라고 통과시켜 버린다. 셰익스피어가 괜히 <베니스의 상인>을 쓴 게 아니다.
이 극적인 장면이 산 마르코성당 전면의 팀파눔에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돼지고기를 보고 무슬림 관리들이 코를 싸매거나 손사래를 치고 있는 그림이다 (산마르코 성당의 정면 티파눔)
이렇게 하여 마가의 뼈위에 세운 건물이 산마르코 성당이 되겠다.
성당건축도 당연히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의식하고 그 못지않은 건물을 짓기 위해 재화와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
내 눈엔 우리나라 절집의 당간지주 같은 붉은 깃대봉과 돔 형태의 지붕이 인상적이었다.
마가의 영험함 때문인지 1천2백 살을 먹은 산마르코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위풍당당하고 찬란하다. 이를 보기위해 세계도처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언제나 긴 줄을 선다. 성당 내부까지는 무료이나 2층의 박물관, 보물관, 팔라도르는 다 입장료를 내야한다. 교회 옆의 대종 탑도 제법 큰돈을 내야 승강기를 타고 오를 수 있다.
이들의 골수에 박힌 상인정신은 돈 앞에서는 얄짤없다.
상인정신이란 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시오노 나나미의 말을 빌리자면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가 아니라 ‘태초에 장사가 계시느라’였다.
12세기 말에 공화국 사람들은 교황을 갖은 방법으로 꼬득여 ‘면죄’ 특권을 포고하게 한다. 그리스도 승천절 때 베네치아를 찾아 그곳에 안치된 성스러운 유물들을 참배하면 이승에서 지은 모든 죄는 ‘완전면죄’를 받는다는 특권이었다. 그러니 유럽 각국의 신자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었고 공화국 사람들은 이들을 상대로 장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뭐, 사실 우리나라 사찰도 베네치아에서 이 수법을 배웠는지 문화재 관람료라 해서 절집에 들어가지도 않는 등산객들에게 입장료를 받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뿐인가, 이들은 그 좋은 수완으로 당시 이교도들에 점령당한 예루살렘을 포함한 이스라엘 땅 순례 권을 독점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이 순례자들에게 부여한 면죄특권의 내용은 이렇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빵을 든 곳을 참배한 사람은 7년 하고도 40일간의 면죄.
예수가 연행되어 매질을 당하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지고 흰옷이 입혀졌던 빌라도의 저택 유적을 참배하면 7년 40일간의 면죄.
청년 예수가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쫓아냈던 장소를 참배하면 완전 면죄.
성모 마리아의 유체가 봉안되어 있다는 올리브 산기슭의 성모 마리아교회를 참배하면 완전 면죄 등등....
-시오노 나나미 바다의 도시 이야기 하편/ 성지순례 폐키지 투어/ 129-196쪽 에서 발췌-
베네치아 악파
공화국 사람들은 유럽각지에서 몰려든 패키지 순례 객들을 현혹하여 갖은 방법으로 돈을 우려먹을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신화 만들기에 이용했다.
순례 객들은 순례의 대장정에 오르기 전, 모두 산마르코 성당의 미사에 참석하여 험난한 여정의 안녕을 빈다. 이때 듣는 예전음악은 순례 객들이 그들의 고향에서는 결코 들어본 적 없는 천상의 음악 그 자체였다. 이 때문에 순례 객들은 베네치아의 모든 것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환상을 갖게 된다. 말하자면 베네치아 브랜드 가치의 창출이다. 나를 포함하여 세계인들이 베네치아를 동경하는 이면에는 이런 숨겨진 작용들이 축적된 결과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를 위해 공화국은 산마르코 성당에 아낌없는 지원을 한다.
베네치아인 들은 수호성인을 모실 때와 마찬가지로 당대 최고의 음악가를 모셔온다. 이 사람의 이름이 빌레르트(Adrian Willaert/1490-1562)이다. 이 작곡가로부터 베네치아 악파가 시작된다. 빌레르트는 제자도 잘 키워 이제 음악의 중심이 베네치아로 이동하게 된다.
산마르코 성당 내에는 특이하게도 서로 마주하고 있는 두 개의 성가대석이 있으며, 각 성가대석에는 각각 오르간이 놓여있는 구조이다. 이러한 배치의 공간적 특성 때문에 다양한 음향적 시도가 가능하게 된다. 산마르코 성당의 음악감독들은 악기연주자들과 가수들을 몇 그룹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공간에 배치시킨 후, 이들을 서로 교호하게 하거나 대응시키거나 함으로써 독특한 베네치아 양식을 만들어 냈다. 이를 cori spezzati 라 부른다. 생각해보라. 장엄한 성전의 높은 곳에서 다양한 방향으로부터 성가가 이중, 삼중, 사중으로 교차되면서 메아리치는 음향의 황홀경을!
산마르코 성당 내부의 모습. 1,2층 양편에 성가대와 악기 연주자들이 마주보는 형태로 연주하는 그림이다
이러한 대비양식을 콘체르타토 양식(Concertato Style)이라한다. 콘체르타토는 라틴어 Concertare에서 유래된 말로 논쟁하다, 투쟁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어원에서 내포되듯 콘체르타토 양식은 한 소리가 다른 한 소리와 이루는 대조,
한 악기가 다른 한 악기와 이루는 대조, 일군이 다른 일군과 이루는 대조,
일군이 한 솔로와 이루는 대조를 의식적으로 강조하는 양식이다.
콘체르타토 양식은 이후 광범한 음악상의 발전을 가져왔다. 협주곡이나 소나타, 교향곡도 다 긴장과 이완의 대비 즉 콘체르타토의 원리가 근간이 된다.
Adrian Willaert - 'O magnum mysterium'. Cappella Marciana
Camerata Nova - In ecclesiis - Giovanni Gabrieli
빌레르트로 시작되어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i (1533 – 1585), 그 조카인 조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i 1557-1612)로 이어지는 베네치아 양식은 폴리코랄의 대규모의 합창과 여기에 따르는 다양한 악기를 수용하여 미래시대, 그러니까 바로크시대가 가야할 방향을 예시해준다. 아직까지는 성악곡을 기반으로 하지만 기악곡이 서서히 독자적인 표현영역을 갖게 되고, 성악작품 그 자체도 기악적인 구성법을 많이 따르게 된다. 그동안 종교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억눌렸던 기악음악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며 음악사의 지평에 떠오르는 것이다.
조반니 가브리엘리
이런 맥락에서 특별히 조반니 가브리엘리의 <종교적 교향곡>은 주목해야하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40개의 모테트와 3개의 미사곡, 2개의 마니피캇, 이에 더해 악기만으로 구성된 14개의 칸초네와 2개의 소나타가 수록돼있으니 일종의 악보 곡 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조반니가 이 곡 집에 갖다 붙인 이름에는 미래의 기악음악이 사용해야 할 중요한 형식상의 중요한 용어들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한다.
우선 교향곡이 있다. 그러나 교향곡이라 해서 고전주의의 교향곡을 염두에 두어선 안 된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다양하고 큰 규모의 곡들이 수록되었고 여기에 더해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여러 악기와 새로운 연주법들이 시도되고 있기 때문에 조반니는 여기에 맞는 뭔가 새로운 용어로 명명해야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 <종교적 교향곡>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에는 소나타라는 용어가 나온다. 소나타도 이름은 같으나 고전주의의 소나타와는 다른 내용이다. 이 곡 집에서 소나타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래 오늘날까지 여러 시대를 통하여 소나타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으나 그 형식 내용은 천차만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악곡이라는 점에서 그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원래 Sonata는 ‘울리다, 연주하다’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sonare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기악음악을 말함이다. 기악음악이 언어로부터 독립하려면 그 자체적으로 생성하고 확장되는 동력이나 기제(機制)가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시도를 소나타라고 했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용어로 수록된 곡들 중 '피아노와 포르테 소나타'는 역사상 최초로 피아노와 포르테의 강약 표시가 사용된 곡이기도 하다. 조반니는 “1개의 앙상블이 연주할 때는 여리게, 2개의 앙상블이 함께 연주할 때는 크게”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지시하였다. 또한 정확한 악기편성을 명시해놓았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악기의 음색을 염두에 두고 곡을 쓰는 일은 없었다. 음역만 맞는다면 어떤 악기로 연주해도 무방했던 시대였다. 그런 연주관습이 통용되던 시대에 작곡가가 악기를 정확히 명기한다는 것은 이제 음색개념이 음악에 뺄 수 없는 요소로 자리잡아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와 같이 새로운 시대의 방향을 제시한 베네치아 양식은 이제 시대의 대세가 되어 유럽 음악계는 향후 100년 이상을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주도하는 현상이 이어지게 된다.
조반니 가브리엘리
Giovanni Gabrieli -Sonata pian e forte
Giovanni Gabrieli Sacrae Symphoniae canzon septimi toni a 8
처음에 소나타는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어떤 구체적인 양식이라든가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으나 고전파에 이르러 치밀하게 그 형식 논리를 구축하게 된다. 이제 기악음악은 자립을 넘어 성악음악을 압도한다. 베토벤은 이러한 소나타를 완결된 형태로 끌어올린다. 고전주의 시대 교향곡이나 콘체르토, 실내악, 솔로악기를 위한 제1악장은 대부분이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되어있다.
Beethoven_ Symphony No. 5 _ Karajan Berliner Philharmoniker
헤르만 헤세, 그 문학의 비밀
아이돌(idol)의 사전적 의미는 우상이다. 본래 철학적 용어로 우상을 뜻했던 말이 사전에서 수용하지 않았나 추측한다.
요즘 청소년들의 아이돌이 연예인이라면 나의 고교시절 아이돌은 당연 헤르만 헤세였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을 통해서나 아니면 내가 직접 구입하거나 나는 헤세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읽었다.
사실 나에게 학교공부는 마지못해 해야 하는 억압의 족쇄로 작용했을 뿐이다.
낡은 배낭을 메고 머리카락을 날리며 세상의 변방을 떠도는 방랑자를 꿈꾸면서 그 시절을 보냈었다.
내가 헤세의 작품에 탐닉했다는 것, 그중에서도 <데미안>을 애독했다는 것은 나의 사춘기가 그만큼 요란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나의 겉모습은 얌전했으나 내면은 늘 부유했고 요동쳤다.
되어있는 세상을 다소곳 수용하지 못하고 독한 회의로 늘 격랑이 일었다.
자기만의 주체적인 공간을 세우는 성장 통 치고는 참으로 까칠하고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난해한 <데미안>을 내가 속속들이 이해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모호한 가운데서도 성장소설 <데미안>이 갖는 방황, 사랑, 고뇌 회의 등이 가슴에 스몄을 것이다.
그때는 머리가 영민하던 때였으니까 몇 번 읽으면 암기됐던 <데미안>의 구절들이 지금껏 녹슨 머리에서도 술술 풀어져 나온다.
첫 페이지를 넘기면 “나는 나 자신 속에서 스스로 생성되어지는 모든 것에 충실히 살아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웠던가” 에서부터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바둥거렸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한 세계를 위해서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위해 날개를 펼친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에 이르기 까지.
요즘 발행된 책과 번역상 문장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나에겐 그때 암기한 글귀가 진리다.
그러다 대학에 출강을 하던 어느 날, 독문학자 이신구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분은 딱 봐도 독일의 철학자 같은 외모를 갖고 계신 분이셨고 클래식 마니아 이셨다.
저술하는 논문에 관해서 자문을 구할 일이 있으니 만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분의 논문 주제가 헤르만 헤세와 음악에 관한 내용이라는 말에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귀히 여기는 것을 같이 귀히 여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진한 동지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분과의 대화를 통해 놀랐던 것이 헤세문학의 비밀이 음악의 형식과 관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나타 형식과 푸가 형식에 관해 궁금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 논문이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헤세와 음악>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헤세문학의 원천이 음악이었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헤세의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는 환희심이 컸다.
헤세는 9살 때 부모에게서 갈색 바이올린을 선물 받았으며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이 도시 저 도시, 이 나라 저 나라를 외로이 여행하며, 연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대중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며, 재능과 세계적 명성의 높은 밧줄 위에 서 있는 천재적이고 우아한 곡예사가 되는”삶을 꿈꾸기도 했다.1)
헤세의 청춘시절, 그의 우상은 니체와 쇼팽이었다.
쇼팽의 음악은 헤세 미학의 토대이고 서정의 소재이며 출발점이었다.
헤세는 탄복한다. “쇼팽! 이 음악은 향수와 동경과 회상으로 가득 차 있다”고. 2)
헤세는 쇼팽과 슈만을 좋아했던 것과는 반대로 베토벤이나 바그너, 브람스는 몰락의 음악이라고 싫어했다.
이런 면에서 헤세는 논리적이고 영웅적이고 압도적인 음악보다는 섬세하고 멜랑콜리하고 동경을 자아내는 여성적인 음악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이신구 교수의 저서 <헤세와 음악>을 높이 평가하는 점은 헤세문학의 형식이 음악의 형식에서 비롯됐다는 가설을 세워 이를 논증하려했다는 점이다.
나는 이를 통해 <데미안>을 좀 더 확연하게 이해하게 됐다.
또한 기존의 내 형식론 강의록도 음악적 전문용어가 아닌 문학과 융합하는 풍성한 내용으로 수정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 일부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3)
Sonata 형식
음악형식적 관점 | <헤세와 음악>에 수록된 관점 |
제 시 부 (Exposition) | |
통상 제1주제와 제2주제가 제시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주제는 그 성격이 대조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개의 책에는 제1주제가 극적, 남성적, 도약 진행적, 리듬적이라면 제2주제는 서정적, 여성적, 순차 진행적, 선율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두 주제 사이에는 조성 적으로도 대비된다.
| 신의 세계에서 이탈되어 내향성의 정신과 외향성의 자연이라는 거대한 원초적 두 힘이 출현한다 |
발 전 부 (Development) | |
주제적 요소를 낱낱이 분해하여 전위, 역행, 확대, 축소, 전조등의 작곡기법으로 잠재된 요소들을 발전시켜 나간다
| 이 두 힘이 대립과 조화 속에서 발전해 나간다 |
재 현 부 (Recapitulation) | |
두 상이한 주제가 통합되며 코다를 통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데 그 통합의 구현은 통상 같은 조성으로 귀결된다
|
이 두 힘이 드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조화되어 신의 세계로 다시 귀향하는 것을 비유한다
|
따라서 Sonata형식은 음양(陰陽)의 변증법적인 순환운동이며 이것은 노자의 도(道)의 운동과 일치한다.
노자는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실체인 하나의 도에서 음기(陰氣)와 양기(陽氣)의 둘이 생기며, 이 상대적인 둘이 조화됨으로써 세 번째인 화합체가 생기고 세 번째인 화합 체에서 만물이 생긴다고 했다.
(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萬物負陰而抱陽,沖氣以爲和)
- 道德經42장-
그러므로 만물은 자체 속에 음과 양이 혼연일체가 된 화합체이다.
그러나 반대로 순환하여 복귀하는 것이 도의 활동이라고 했듯이(反者,道之動)
현상계의 만물은 다시 근원인 도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의 틀을 갖는 Sonata형식은 헤세가 <한 토막의 신학>에서 언급한 인간형성3단계와도 일치한다.
첫 번째 단계 : 선과 악이 분리되지 않은 낙원의 상태인 순수단계
두 번째 단계 : 선과 악이 투쟁하는 죄의 단계
세 번째 단계 : 선과 악을 넘어선 보다 드높은 순수단계. 즉, 정신의 영역인 신앙의 단계
여기서 신앙의 단계는 “우리가 우리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
우리의 인식너머 신, 혹은 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거나, 혹은 그 상태에 도달한 단계를 말한다.
노자의 도와 기독교에서의 은총은 바로 이러한 궁극적인 단계에서 비롯되는 종교적 체험이라고 헤세는 말하고 있다.
헤세는 이러한 3단계 과정에 있는 인간을 두 상반되는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발전 지향적 인간형(Der Vernünftige): 이성을 통래 세계정신과 끊임없이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형을 말한다.
경건형(Der Fromme): 초이성적인 세계질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신과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갖는 형을 말한다.
이성 형은 세계를 이성화 시키고 체계에 몰두하지만 경건 형은 세계를 신화화시키고 신화에 몰두한다.
이성 형이 교양과 지식을 사랑한다면 경건 형은 자연과 예술을 사랑한다.
헤세는“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정신적 체험은 이성과 경외심의 끊임없는 화해, 즉 그 위대한 대립을 서로 동등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고 말한다.
이것이 헤세의 근본사상인 단일사상(單一思想), 혹은 합일사상(合一思想)이다.
헤세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인간형성3단계 과정에서 양극을 자신 속에서 한 협주곡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정신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헤세의 작품은 두 주제 간의 변증법적 발전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Sonata형식과 일치한다.
이와 같이 도의 운동은 물론 인간형성3단계와도 일치하는 Sonata형식은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삶을 미학적 형식으로 표현한 가장 모범적인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완결된 형식에 대해 페리(H.Parry)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Sonata의 역사는 인간의 마음에서 생성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에 하나를 극복하려는 시도의 역사이며, 그 해결은 인간의 예술적 본능이 이룬 가장 성공적인 업적중의 하나다”
데미안
이신구교수가 그의 책 <헤세와 음악>에서 풀어가는 <데미안>을 다음과 같이 개략한다.
<에밀 싱클레어의 청춘 시절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왕래하면서 죄와 고뇌를 통해 두 세계를 드높은 차원에서 종합한 새로운 순수함, 즉 종교의 단계로 도달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내적 성숙 과정을 노래했다. 그러므로 <데미안>은 인간형성의 3박자 리듬은 물론 소나타 형식의 전개과정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진정한 자아의 표상’ 으로 싱클레어가 닮아가려고 노력한 인간 데미안은 누굴까?
그는 데미안은 바로 니체가 그 모델이고 융의 분석심리학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헤세가 니체와 융을 통해 얻은 것은 인간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삶의 원천인 원초적 고향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그 영원한 고향은 죽음과 재탄생의 근원인 ‘원초의 어머니’이다.
소설 <데미안>은 이러한 어머니의 위력에 대한 예찬의 노래이며, 인간 본질의 뿌리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우러난 노래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인간 근원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 상(像)의 마력(魔力)은 음악의 힘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마성이 바로 에바 부인이고 <데미안>은 어머니의 안내자이며 메시아라는 것이다.
<헤세와 음악> 68쪽에서부터 81쪽에 이르는 <귀향 소나타>는 데미안을 Sonata형식과 견줘 분석을 시도한 부분이다.
내가 대학원과정에서 가르치는 <음악분석>은 음악을 음계와 선법, 조성, 선율, 형식, 화성, 리듬과 박자 등으로 완전히 분해한 것을 모든 미사여구적 형용사를 다 제거하고 오로지 과학적 용어로 정리 할 것을 요구한다.
이때의 분석도구는 셍커의 구층 분석법(layer analysis )같은 것들이다.
시계 공들이 시계를 완전히 분해하고 다시 조립할 수 있어야 시계를 다룰 수 있는 이치와 같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헤세와 음악>에서의 분석은 어디까지나 문자로 구성된 문학 안에 머무른다.
한 예를 들자면
“싱클레어는 데미안, 즉 무의식 속에 깊이 숨어 있는 마성의 음에 의해 인류의 원초적 어머니와 일치하여 자기완성을 이루게 된다. 원조에서 이탈된 소나타의 상반된 두 주제의 조성은 많은 전조를 거쳐 다시 원조로 귀환해 최상의 신적인 화음을 이루었다.
즉, 어머니 신, 그 신의 아들 데미안, 성령이라는 삼위일체의 성스러운 화성이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는 외적으로 기독교적인 음조를 띠고 있지만 그 속에는 기존의 기독교적 전통을 파괴하고 새로운 탄생을 바라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배음이 강하게 흐르고 있다....”6)
기호로만 머무는 악보가 연주라는 실천 행위를 통해 음향으로 환원되면 죽음 음표는 살아서 노래가 된다. 그 노래는 아우라를 풍겨 공간의 성분을 바꿔 놓으며 듣는 사람의 심성을 뒤흔든다.
이신구 교수의 <데미안>분석은 이 음향으로 실현된 아우라를 예리한 메스로서가 아니라 문학적 용어로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묘한 흥미를 끈다.
같은 음악을 놓고 접근하는 시각의 다름에 대한 흥미일 것이다.
아무튼 헤세와 데미안에 대해서 깊이 천착하고 싶다면 필히 읽어야 할 책으로 천거한다.
싯다르타6)
헤세는 어렸을 때부터 동양을 제2의 고향이라고 할 만큼 동양에 깊은 관심을 갖고 성장했다. 그는 <동방순례>에서 삶의 신비로운 원천이 깃들어 있는 옛 동방을 “빛의 고향”이며 “영혼의 고향과 청춘”이고 칭송 할 정도였다.
헤세는 동양사상에 대한 첫 자극을 인도의 종교에서 받았다. 그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은 힌두교의 경전인 <우파니샤드>, 인도 신의 노래인<바가바드 기타>, 그리고 <부처의 설법>이다. 특히 <부처의 설법>은 “ 수년간 나의 신앙이자 유일한 위안이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한때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헤세가 <싯다르타>를 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싯다르타>는 ‘인도의 시’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산문으로 된 시“이고, 헤세의 소설 중에 가장 깊은 서정성을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제1계급에 속하는 바라문 계급의 아들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근원적인 샘물을 찾아내고자, 사문이 되기로 결심하고 길을 떠난다. 이후의 전개 과정은 소나타 형식과 잘 맞아 떨어진다.
싯 다 르 타 | 소 나 타 형 식 | |
제1부 | 싯다르타가 강을 건너기 전 브라만의 성신세계와 관능의 세계에 대한 인식 | 제시부 |
제2부 | 강을 건넌 후 관능의 세계에 도취 | 발전부 |
제3부 | 다시 강으로 돌아와 강물에 의한 각성으로 양극의 대립이 극복되어 성인(聖人)이 되는 과정 | 재현부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7)
우리나라에 <지와 사랑>이라고도 알져진 헤세의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사랑의 갈등을 담은 대표적 문학 작품이다. 나르치스는 이성과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이에 대해 골드문트는 감정과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로 설정된다. 이 대비되는 두 주인공의 삶과 생각을 통해 이성과 욕망이라는, 인간 본질의 양극성을 극명하게 탐구한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인간형성 단계 | 소나타 형식 | 도(음양) |
의존과 이탈 | 순수단계 | 제시부 | 정(正) |
자유와 방랑 | 죄의 단계 | 발전부 | 분(分) |
귀로와 정착 | 종교의 단계 | 재현부 | 합(合)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헤세 소설의 대개가 음악의 소나타형식을 그의 문학에 수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악음악이 타 예술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한다 했을 때 사실상 시와 같은 문학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러던 기악음악이 독립하여 제 스스로의 형식을 구축한 것을 다시 문학에서 그 형식을 빌려 작품화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만큼 소나타형식은 그 추상성을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성으로 구축한 형식상의 완결성을 갖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쯤에서 디크가 기악음악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데 한 번 쯤 음미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기악에 있어서 예술은, 자립적이고 자유로우며 자기 법칙을 스스로 만들어 가며, 놀이의 목적이 아니라 더욱 충실한 상태의 상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 충동에 따르고, 그 즐거움을 가장 심오하게 해주는 가장 경탄할 만한 것을 표현 한다”
1) 이신구/헤세와 음악/24쪽
2) 같은 책 26쪽
3) Sonata형식에 관한 내용은 같은 책 63-65쪽의 내용을 근간으로 첨삭한 것이다
4) 같은 책 66쪽
5) 같은 책 68쪽
6) 같은 책 81쪽 이하
7) 같은 책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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