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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삶은 왜 날로 각박해지는 걸까?
나름 다 진단이 있겠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의 유대, 그 중에서도 사랑의 유대가 살얼음처럼 불안하고 위태롭기 때문은 아닐는지…….
디지털 시대의 사랑은 단 한 번의 다툼만으로도 헤어질 충분한 이유가 된다. 딜리트 키 누른 것처럼 눈 깜짝할 새 포맷된다.
당신 나이에 웬 사랑타령? 전주시립합창단과 뮤직 씨어터 슈바빙이 함께 하는 기획공연 <사랑의 묘약>은 사랑이 가져오는 온갖 것들-밀당은 기본이고 질투, 고통, 상실, 연민, 기쁨이 얽히고설킨 오페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어수룩하고 착하기만 한 촌놈 네모리노는 언감생심 동네의 퀸카 아디나를 짝사랑한다. 아디나가 누구인가. 지주의 딸에다가 미모에다가 죄 까막눈인 동네 여자들에게 책 읽어주는 지성까지 겸비했다. 네모리노에겐 아스라한 넘사벽이다. 가뜩이나 그의 가망 없는 사랑에 치명적인 재앙이 덤벼든다. 정말 멋진 놈 벨코레 하사가 나타나 아디나의 마음을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어쩔거나, 네모리노! 절박한 네모리노는 떠돌이 약장사 둘카마라에게 수중의 모든 돈을 탈탈 털어 사랑의 묘약을 사서 마신다. 한갓 포도주일 뿐인 짝퉁 약에 취해 자신만만해진 네모리노는 간덩이가 부어 아디나 앞에서 만용을 부린다. 이런! 언제나 내 주위를 맴돌며 비렁뱅이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네놈이 나를 감히! 그래 너 한번 당해봐! 아디나는 너무도 쉽게 벨코레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네모리노는 사랑의 묘약의 신묘함이 나타난다는 하루 후까지만 어떡하든 결혼을 연기시키려 혼신의 힘을 다한다. “아디나 날 믿어줘(Adina credimi). 하루만 기다려줘!” 울부짖지만 꼴값 떠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때쯤 처음에는 좀 답답하게 들리던 네모리노 역 하만택의 노래가 그의 노련한 연기와 더불어 궤도에 오르더니 무르익는다. 아디나역 권수빈, 풀섶에 반짝이는 보석을 발견한 기쁨을 준다. 목소리의 결이 참으로 아름답고 곱다. 신인답지 않게 끝까지 힘을 안배하는 노련함도 돋보인다. 벨꼬레 김동식,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잘 연마되고 군더더기 없는 균질의 벨칸토를 들려준다. 둘까마라 김일동, 목이 하나 더 솟은 거구와 그 몸뚱어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량이 가히 압도적이다. 그래서 여느 베이스역과는 다르게 민첩성을 요구하는 둘까마라역에는 어떨는지 염려가 내심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란한 수다를 쏟아내는 바소 부포(코믹 베이스)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었다. 연출 조승철은 이들의 모이고 흩어지는 동선이 음악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극적인 표현을 잘 드러내도록 고려한 원숙함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가 사랑은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했던가. 화인(火印)처럼 네모리노의 영혼에 각인된 눈먼 사랑은 오직 사랑을 얻기 위해서만 질주한다. 돈이 없는 네모리노는 약발이 떨어졌다고 믿는 사랑의 묘약을 더 구하고자 군대에 지원한다. 그러나 자유를 저당 잡힌 대가로 구입한 짝퉁 묘약은 병나발 불어도 약효가 날 리 만무하다. 이때쯤 반전이 일어난다. 웬일인지 너무도 쉽게 벨코레의 청혼을 받아들였던 아디나는 마지막 절차인 결혼서약서에 서명을 망설인다.
약장수 둘까마라를 통해 전후사정을 전해들은 아디나는 네모리노의 진실한 사랑에 감동한다. 무기력하게만 보였던 네모리노의 사랑이 구원을 받는 순간이다. 그 묘약은 진실의 힘이다. 진실과 진실이 만났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내 앞쪽 나이 지긋한 여자분, 네모리노와 아디나가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에서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른다. 사랑의 묘약에 취한 모양이다. 그래! 사랑은 국적도 불문이라지만 나이도 시대도 불문이다.
오늘 공연은 전주시립합창단의 안정된 하모니가 받쳐준 단단한 저력에 힘입은 바 크다 하겠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지휘자 김철의 활약이다. 분명한 끊고 맺음의 지휘테크닉과 열정에서 추동된 폭발적인 카리스마로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아우르는 지휘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사실 전주시립합창단과 뮤직 씨어터 슈바빙은 언제나 부족한 재정에 독자적으로 이런 오페라를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단체의 인적, 물적 자산과 노하우가 연대해 땀 흘려 얻어낸 값진 결과물이 아닐 수 없겠다. 이은희 총감독의 헌신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 터이고.
오페라 작곡가 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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