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코르도바

작곡가 지성호 2016. 2. 27. 19:20

                                              작곡가 지성호의 스페인 떠돌기



2013년 117

 

여행의 즐거움 중에는 안락한 잠자리와 미각을 만족시키는 음식도 있겠지만 이보다 우선하는 것이 좋은 날씨를 만나는 것이 아닐까지중해에 면해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은 겨울에 온대성 저기압이 자주 통과하는 관계로 강수현상도 빈번하고 일기변화도 심하다고 들었지만 어제는 최악이었다. 하나님은 유독 나에게만 특별나게 우호적이어서 100% 적중하는 일기예보 속에서도 기적처럼 비를 다른 곳으로 몰고 가실 줄 알았더니 하루 종일 비를 주셨고 이 지역에서는 좀처럼 없는 추위도 주셨다. 천지불인(天地不仁), 천도무친(天道無親)이로다! 대저 하늘의 길이란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비도 주시고 햇빛도 주신다.

    



 

그라나다에서 코르도바 가는 길, 하늘은 어제의 기억을 품고 있는 구름이 흩어지며 찬란한 햇빛이 누리에 가득하다. 따사롭고 자애로운 양광이 들녘에 가득하다. 산천초목이 다 일어나 손뼉치고 환호하며 몰려오는 봄을 기뻐하는듯하다.




넓은 차창에 가득 펼쳐지는 안달루시아의 언덕과 흐르는 시냇물에 눈길을 두며 가이드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듣는데 꽂히듯 파고드는 우리 가이드님의 어록, <필요는 긍지에 우선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긍지고 체면이고 가릴 것 없다는 것인가? 이 시간 나의 필요는 무엇인가?

긍지와 필요사이에 갈등할 때 나는 어떤 길을 선택했던가, 앞으로 어떤 길로 갈 것이며 과연 나는 어떤 소를 쫒아왔는가?

 

도시에 진입하자 세월의 모진 풍상이 더깨더깨 얹힌 알카사바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알람브라의 알카사바와는 사뭇 다른 겉모습이나 누적된 시간의 지층 속에서 오래 견뎌 낸 것들만이 풍겨내는 편안함에선 같다하겠다. 마치 고향의 토담이나 이끼 앉은 돌담을 보는 듯....

시간을 분초단위로 쪼개 쓰는 현대인의 눈에 저 성곽이 나지막한 목청으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느니,

세월을 이기는 것 없으나
참고 견디는 것만이 다 이기느니라.

 

    


 

코르도바는 페니키아의 카르타고인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짐작되며 이들의 언어로 코르도바는 풍요롭고 귀한 도시라는 의미란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오렌지 꽃향기 바람에 날리는 아름다운 도시의 지리적 이점은 광물 자원이 있는 시에라 모레나(Sierra Morena) 산맥과 이 산맥을 에워싸고 흐르는 과달키비르 강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략적상업적 중요성을 알아차린 로마인이 기원전 206년에 이곳을 점령하고 바에티카(Baetica)라는 자치주의 수도로 삼는다. 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 설치한 3개 자치주 가운데 하나이다. 3세기에는 주교 좌가 있었다하니 초기 기독교의 영향력도 막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스토아철학자 세네카도 여기 출신이라니 왠지 반가운 마음도 든다. 이 따뜻한 과달키비르 강변을 사람들이 마다 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인다. 꿀이 고이면 벌들이 꾀듯 코르도바는 좋은 자연환경 때문에 욕심과 욕심이 부딪히고 문명과 문명이 부딪는 각축장이었나 보다. 412년 훈족으로부터 쫓겨 내려온 서고트족이 이곳을 장악하지만 이들도 711년에 이슬람교도들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다.

그 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756년 우마이야 왕조의 피를 이은 아브드 알 라흐만 1(Abd al Rahman I/ 재위 756788))가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여 후()우마이야 왕조를 창업한다.

그는 독립왕국을 건국한 후 다마스카스를 능가하는 모스크의 건축을 명령한다.

본래 다마스카스의 압바스 왕조 칼리프 상속 전쟁에서 패하여 아라비아 반도로 도망해 온 그로서는 보란 듯이 본토보다 더 크고 장엄한 모스크를 지어,  쫓겨 온 통한을 설욕하고자 하는 오기가 발동했었나보다.

왕의 준엄한 명령에 따라 본래 있던 서고트 족의 산 비센테 교회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785년부터 10년에 걸쳐 메스키타의 첫 부분을 완성했단다. 선왕의 유지는 후대에 이어져 이 대역사를 2세기에 걸쳐 계속된다. 드디어 25천 명의 신도가 함께 입장할 수 있는 종횡 175미터와 135미터의 대 모스크를 완성한다. 이게 메스키타가 지어진 내력이 되겠다.

왜 메스키타인가? 스페인어 메스키타(Mezquita)를 영어로 하면 모스크(mosque)”이다. 본래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아랍어 마스지드(Masjid)’가 스페인어의 메스키타가 되고 이것이 프랑스어 모스케, 다시 영어모스크로 정착된 것이다.



                                                                       아브드 알 라흐만 1


코르도바 최전성기였던 아브드 알 라흐만 3(Abd al Rahman III)의 치세 (912~961 재위)때는 다마스카스와 바그다드의 장관에 필적하는 300채 이상의 모스크와 수많은 궁전, 그리고 공공건물로 번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모스크들은 지금은 대부분 없어져버려 오늘날 메스키타라고 하면 이곳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를 일컫는 것이 돼버렸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화 되버린 것이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코르도바의 세습 아미르(통치자)91210월에 즉위했으며 929년 칼리프(Caliph)를 선언한다.

칼리프가 무엇인가? 사전을 뒤적여보면 이슬람 제국 주권자의 칭호로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이슬람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종교를 수호하며,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모든 일을 관장한다. 세속 권력의 정점인 술탄에 더하여 종교적 최고권위자 즉, 신정일치의 최고권위자가 된다는 의미다. 스스로를 칼리프라고 선언한 후 코르도바는 인구 100만에 가까운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되었으며, 유럽에서 가장 앞선 문화를 꽃피웠다한다. 참고로 이 100만의 인구를 오늘날 100만과 견주면 안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한양의 인구변동추이를 보면 조선 초기 10만명이던 인구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난 이후 4만 명까지 떨어졌다가 17세기 후반 현종 때 18만 명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이후 구한말까지 200년 이상 18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를 오갔다고 한다. 단순비교가 어렵겠지만 그 당시 100만이면 지금의 수천만 명과 맞먹는 규모임을 짐작하게 한다.

아무튼 당시 코르도바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이베리아 반도뿐 아니라 북아프리카까지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콘스탄티노플과 똑같은 지위를 누렸다한다.

인터넷상에 떠도는 기록을 보면 코르도바는 300개의 공중목욕탕을 비롯하여 평민들과 귀족들의 집과 별장만도 200,077, 63,000채에 달하고 8만군데 이상의 가게가 경제활동을 하였고 10세기에는 대학도 설립되어 의학과 문학을 배우기 위해 유럽에서 유학생들이 몰려왔으며, 음악 수준도 높았다한다. 도서관에는 필사본으로만 100만 여권의 책을 소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도 있다. 중세 최초의 대학이라는 파리 대학이나 볼로냐 대학도 12세기에나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파리 대학의 설립연도를 1150년과 1170년 사이로 보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융성도 영고성쇠의 고리를 피할 수 없었나보다. ()우마이야 왕조는 북으로부터 강력한 세를 형성해 밀고 내려오는 기독교 레콩키스타 운동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북아프리카로 철수해버리고 만다. 우마이야 왕조가 맥없이 무너지자 이 왕조에서 귀족으로 지냈던 이븐 알 아마르가 세력을 규합하여 1238, 나자리 왕조를 세워 무함하마드 1세가 된다. 이들은 기독교도들에게 코르도바를 고스란히 넘겨주고 그라나다로 천도하여 알람브라 궁전을 지으며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거점을 확보한다.

 

  메스키타

  


이번 스페인 여행의 강력한 동인은 사실 메스키타였다.

TV의 여행 다큐물에 메스키타를 소개하는 화면을 보는 순간 세상에 저런 상상을 초월한 건축물도 있구나

세헤라자드가 밤마다 들려주는 신비한 나라의 실상이 저런 것이었구나!

내 반드시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날아가 알라딘의 램프에 불 밝히고 저곳을 둘러보리라는 염원을 가졌었다.


메스키타의 공식명칭은 코르도바 메스키타 카테드랄(Mezquita-catedral de Cordoba)이다. 모스크 안에 가톨릭 성당이 자리하고 있어 그렇게 부르나 보다.

참 묘한 일이지! 이베리아반도에서 죽고 죽이는 싸움을 거듭하며 원한을 중첩시켜온 불구대천의 두 종교가 한 지붕아래 다른 예배처를 차리다니!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메스키타는 2세기에 걸쳐 차례로 증축이 이루어지며 그 크기를 키워가다가 당시기준으로 세상에서 두 번째로 큰 모스크를 지었다 한다. 그러다가 1523년 카를로스 5세가 코르도바 대주교의 청을 받아들여 이 모스크의 일부를 헐고 가톨릭 대성당을 만들도록 허락했단다.

하나의 지붕아래 두 종교가 동거하게 된 내력이다


나중에 이곳에 들른 카를로스5세는이렇게 고칠 줄 알았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을...당신들은 어디에도 없는 것을 부수고 어디에나 있는 것을 지었다고 한탄했단다. 결과적으로 카를로스5세는 알람브라궁전뿐만 아니라 메스키타도 망가트려서 후세에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된다.

다 부수지 않고 일부만 훼손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하나?




메스키타에 들어가기전,  ATM기에서 현찰을 찾느라 일행과 떨어진 나를 저 아름다운 문에서 가이드 분이 기다리고 있네.

자, 빨리 들어가자구!





주랑 벽에 매달아 논 저 목재들의 정체는

추측 건데 성당을 들어앉히기 위해 뜯어낸 목재는 문화재의 파편이니까 내다버릴 수는 없고 별도의 공간에 전시하기도 뭐해 저리 처리했나보다.




짙게 윤기 나는 녹색그늘에 알알이 돋보이는 황금빛 오렌지가 바라만 봐도 신맛이 괸다. 내 눈에는 익숙지 않은 이국적 정취가 물씬 나는 이 정원을 오렌지 중정(Patio de los Naranjos)이라 한단다.    

주랑에 면한 이 사각형의 넓은 오렌지정원이 사흔(Sahn)’으로서 예배에 앞서 무슬림들이 손과 발 그리고 얼굴 등을 깨끗이 씻는 청정의식의 공간인 것이다.

이 정원이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무슬림 식 정원으로 본래는 사이프러스, 월계수, 올리브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맑은 연못물로 우두(Wudu:청정의식))를 행한 후 19개의 아치문을 지나 메스키타로 들어갔다지만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적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오렌지 나무를 심었다한다.

 



돌들이 촘촘히 박힌 통로에 이끼가 올랐다. 가만 보니 돌이 냇돌인지라 이끼가 오르지 않고 돌과 돌 사이의 틈에 이끼를 비롯한 여린 생명들이 살아있음을 녹색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오렌지나무와 종려나무사이에 우뚝 솟은 미나렛(Minaret)




본래의 미나렛은 1763년 지진으로 무너졌고 현재보이는 미나렛은  복원된 것이라 하나 아무리 봐도 이슬람식이 아닌 가톨릭 식으로 보여 복원이라 말하기 뭐하다는 생각이 든다. 복원 년대가 1763년이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이글을 쓰는 과정에서 조사해보니 개축과정에서 르네상스 양식으로 형태가 바뀌게 되고,  54m 높이의 3층탑에 모두 12개의 종을 걸어 종탑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니 종탑이라 해야하나

모스크의 외관에서 가장 큰 특징이기도한 미라넷은 무슬림들의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시간을 알리기 위해 무아진(mu'adhdhin)이라 부르는 사람이 아잔(adhan) 을 부르는 장소이다. 미나렛이 첨탑으로 높은 이유는 높은 데에 올라가 소리칠수록 멀리까지 잘 들리기 때문이고, 길 모르는 외지인에게도 모스크를 멀리서도 잘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란다.

지금도 코르도바 시에서 메스키타 주변의 고도를 제한한 때문인지 시내 어디서든 이 미나렛은 랜드 마크로서 등대처럼 이정표역할을 해주고 있다

나중에 모로코의 탕헤르에서 아잔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확성기를 타고 길게 낭송되는 아잔은 폐부를 찌르듯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와 여기가 이슬람국가임을 환기시켜주었다

미나렛의 수는 일정치 않아 1개부터 많게는 6, 메카의 카바 모스크는 9개나 가지고 있단다. 미나렛이 많을수록 모스크의 위상이 올라가는가보다. 그렇다면 여기 세계에서 세 번째 크기라는 메스키타가 미나렛이 하나임은 이해불가이나 알 길이 없다.


                                                     

                                                          위의 도면은 메스키타의 평면도이다   


메스키타의 실내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종려의 문(Door of The Palms)'이다.

위의 평면도가 색깔을 달리하며 면이 구분된 이유는 색깔별로 메스키타가 건축된 년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처음 지어진 공간이 번 영역이고 , 뒤를 이어 , 번의 순서로 증축되어 왔단다. 중간에 ,,⑱ 번 영역이 가톨릭 성당이다.

 

종려의 문을 통해 드디어 메스키타 내부로 들어선다.

실내가 어두워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눈은 보이는 대로의 모습을 뇌의 중추로 전달했겠지만 뇌가 판단이 잘되지 않아서 잠시 시간이 필요한 어리둥절한 장관이었다.

깊고 청정한 숲속에 들어온 듯, 빼곡히 들어선 무수한 기둥과 기둥들 사이에 얼룩무늬 편자모양의 겹 아치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모습이었다. “엽상아치 구조라더니 바로 이것이구나! 천장의 어디선가 스며드는 빛이 기둥과 아치를  비추는데 그 모습이 과연 비현실적인 판타지였다. “엽상아치 구조란 더 우아하고, 더 높은 건축물을 짓기 위해 사용한 이슬람 양식으로 말편자를 겹으로 쌓아올린 형태를 말함이다. 기둥은 대리석, 벽옥, 화강암 등으로 만들었으며, 아치의 붉은 부분은 채색을 한 것이 아니라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무늬를 낸 것이라 한다.








가만 살펴보면 벽돌의 색감이랄지 기둥이나 아치의 모양이 조금씩 차이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각각 다른 증축과정에서 발생한 차이인가보다.






죽기전에 꼭 가봐야 할 버킷리스트의 현장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인증 샷!


  

유대교의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디일까? 당연 지성소 (至聖所) 이다. 제사장 아니면 출입이 금지된, 아니 제사장조차도 정해진 날이 아니면 출입이 불가능했던 성전의 가장 깊숙하고 가장 거룩한 장소, 그렇다면 모스코에서 이 지성소만큼 중요한 곳은? 바로 키블라(Qibla)’ 이다.

모스크 내부에서 한쪽 벽면은 메카를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벽이 예배자의 방향을 결정한다 하여 키블라 벽이라고 한단다. 예배 때 무슬림들은 이 벽을 향하여 횡으로 길게 대열을 만든다. 이네들은 사막의 한가운데에서도, 바다나 산에서도 정해진 시간에 이 방향을 향하여 엎드려 경배한다. 나라가 다르고 처지가 달라도 이들은 이 의식을 통하여 이슬람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키블라 벽의 한가운데에는 아치형으로 움푹 파인 미흐랍(Mihrap)을 둔다.



미흐랍을 들어서는 현란한 아치. 이중아치로되 편자의 모양과 색조를 바꿔 더 공력을 들인 모양새이다.



                                     한 켜 한 켜 미흐랍에 다가갈수록 접입가경이다.

말굽편자모양의 아치에 인간이 궁리할 수 있는 최후의 상상력을 다 쏟아부은 모양새이다.




드디어 미흐랍앞에 서다.  미흐랍이 눈부신 황금빛 서기를 풍기며 나타난다.





강력한 에너지의 자장 앞에 감전된 듯 주박 들린다.

티베트 불교의 만다라를 보는 것같이 이해불가의 도상 앞에서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이런 종교적 고도의 상징체계를 시각화한 장인은 과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지극한 종교적 수행의 정점에서 획득한 계시의 산물일까?





                                            미흐랍 천장 부분. 사각 위의 팔각천장 벽면에서 자연광이 눈부시다.



이제 메스키타의 중심부를 허물고 ,,영역에 들어선 가톨릭 성당으로 옮겨본다. 천장부터가 확연하게 달라진다.






천장뿐만 아니라 벽면도 이슬람식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중앙의 어둡게 보이는 공간이 메스키타이다.

                             이 그림으로  모스크와 성당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겠다


 

                                     모스코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성상이며 벽화가 생뚱맞다.


 

원래 메스키타가 자리한 이곳은 로마시대 때 야누스 신전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기독교화한 서고트가 이곳을 점령해서는 이교도들의 신전을 헐고 산 비센테 교회를 세웠다 한다. 다시 이 자리에 무슬림들이 들어와선 이 교회의 기둥을 다듬어 메스키타를 세우고, 또다시 기독교인들이 재탈환해서는 메스키타의 중심을 헐고 그들의 성당을 세웠다. 이 헐고 세우는 연쇄 고리 속에서 이 땅이 차지하는 위치적 불가사의를 생각한다.


                                                                  산 비산테 교회의  흔적


앞서 얘기 한 바 있는 카를로스5세가 이렇게 고칠 줄 알았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을...당신들은 어디에도 없는 것을 부수고 어디에나 있는 것을 지었다고 한탄했다는 말이 다시금 상기된다.

나중에 코르도바에 지진이 엄습했을 때 메스키타는 훌륭한 내진설계로 끄떡없이 견뎌냈지만 가톨릭 성당의 일부는 무너져 내렸단다. 카를로스5세의 한탄은 한번만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나의 이슬람에 대한 무지를 깨닫는 여정이었던 것 같다. 위험하고 적대적이며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의 근본주의적 폭력성을 매도하면서 정작 그들 행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서구의 변방에서 열심히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 또 노오력하는 우리의 시각은 서구의 시선으로 이슬람을 재단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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