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코스타 델 솔

작곡가 지성호 2016. 5. 16. 07:28

                                             

                                                                                           2013년 1월17일 오후의 일정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태양의 해변) 


스페인의 제일 큰 축복은 유럽국가 중 가장 기후조건이 좋다는 점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지중해의 동북해안인 코스타 델 솔의 기후는 연평균 기온이 19도로 온화하며 연간 300일 이상 태양이 담뿍 내려 쪼이는 천혜의 휴양지이다. 그러니 태양의 해변(Costa del Sol)이라 불릴 만 하다. 음울한 북구의 하늘을 이고 사는 사람들에게 태양의 해변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되겠다.

본래 코스타 델 솔은 호리병 같은 지중해의 입구인 지브롤터 소또그란떼 (Sotogrande)에서부터 시작하여 스페인의 남동부를 끼고 네르하 (Nerja) 에 이르는 150 km의 긴 해변을 지칭하였으나 지금은 꼭 그만큼의 거리를 북쪽으로 확장하여 알메리아 (Almeria)까지 장장 300 km의 해변을 범주에 둔단다. 하얀 백사장에  언제나  태양 볕이 작열하는 매혹적인 이곳에서 북쪽 사람들은 월급을 모으고 적금을 들고 대출을 받아 확보한 돈으로 한 달 이상의 긴 휴가를 보낸단다. 그렇게 모여드는 사람들이 연간 약 1,730만 명이나 된다니....


지난번 코르도바 편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후 우마이야 왕조가 붕괴되자 아미르들은 각자의 형편과 능력에 따라 소왕국으로 분봉한다. 대저 열국의 영고성쇠는 힘의 향배에 따라 이합하고 집산하는 변증의 양상을 보여준다면 이시기는 원심력이 작용하는 분화의 시기이며 이를 따이파스 시대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이때 세워진 소왕국이 무려 스물세 개에 달해 그 분열의 양상을 짐작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규모와 세를 형성한 소왕국으로는 말라가, 그라나다, 세비야, 사라고사, 발렌시아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들 왕국 중 말라가는 그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민적 자유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아미르가 다스리지만 아랍인과 유대인, 이슬람과 기독교가 차별 없이 함께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 통치 시스템이 작동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천부지지(天府之地)의 축복과 함께 주민 스스로 지상의 낙원이라 자랑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이곳 유대인 지구에 살았던 철학자이자 시인인 솔로몬 아이븐 가비롤(1026~1070)은 자신의 고향을 낙원의 도시라고 칭송하더니 900년 후인 197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비센테 알레이산드레는 낙원의 도시여, 너는 하늘 아래와 물위와 또 하늘 사이에서 지배하는 자와 같아라,”라고 자기 고향을 서슴없이 낙원의 도시라고 찬양해 마지않는다.

 

이런 자부심은 나중에 레콩키스타 운동의 최후 결전에서 외부의 적에 대한 유래 없는 저항으로 표출된다. 1487, 기독교 세력의 봉쇄작전에 맞서 완전히 고립된 말라가는 물과 식량조차 끊긴 채 3개월 간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이슬람 쪽에서는 말라가가 최후의 보루였고 기독교인들에게는 반드시 넘어야할 장애물이었기에 피차가 양보할 수 없는 숙명적 결전의 장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그들 길항의 집요함이 다 설명 되지는 않는다.

파시스트로 낙인 찍혀 서방국가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던 프랑코의 오랜 독재시절에도 햇빛이 그리운 유럽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말라가로 몰려와 돈을 쓸 수밖에 없었으므로 경제적 고립을 모면할 수 있었다하니 말라가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자긍심과 애착은 남다를수 밖에 없겠다. 

일 년 열두 달 온화한 기후와 찬란한 햇빛, 아름다운 자연풍광에, 세계인의 건강식으로 자리 잡은 지중해식 풍성한 식탁은 과거 공산권 국가의 허풍스런 구호에 불과했던 지상낙원이 아니라 누구나 <, 솔레미오>를 부르며 동경하는- 지도상에 실재하는 진정한 지상의 낙원이었다. 그러니 꿈을 쫒는 예술가들이 기꺼이 낙원의 시민으로 자유를 만끽하고자 찾아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고 자신의 작품에 투영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천재화가 피카소이다. 피카소는  말라가에서 태어났고 9살까지 살았던 도시다. 그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떠돌았지만 그의 영원한 고향이고 그리움이자 넘치는 영감을 준 곳은 말라가라고 늘 얘기하곤 했다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이드는 우리를 말라가로부터 제법 떨어진 푸엔히롤라 비치의 Las Palmeras  호텔에다 풀어놓았다.

정확하게 말라가로부터 34.4km나 더 남쪽으로 내려온 곳이다. 서천의 해는 아직도 동동한데....


              


미하스에서 바라보였던 해변이 바로 푸헨히롤라 였던 것이다. 미하스에서 버스로는 15분 정도가 소요됐다.

어쩌랴, 패키지여행인 것을!



가뜩이나 철 이른 해변의 버려진 텅 빈 공간에 스멀스멀  잦아드는 일몰의  쓸쓸함이 허허롭다.

모래사장에 웬 포도(鋪道)가 있나 했더니 장애인 휠체어가 접근하는 통로란다. 이럴 때 한국을 생각하면 주눅이 든다.







먹구름 길게 드리운 해변에 나란히 누운 썬 배드들.  

등받이를 완전히 뉘인 모습은 우린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완강한 철시의 몸짓으로 읽혀진다.




어지럽게 하늘을 가른 비행운의 빛나는 항적을 따라 갈매기 한 마리 높이 나는 연습을 한다. 죠나단 리빙스턴 시걸 처럼...



저 외로운 배 한 척, 하루 동안의 고단한 노동을 부리기 위해 모항을 찾아든다.

숱한 갈매기들이 꼬리를 무는 것으로 보아 어선인 듯 보인다.

인상파 화가의 그림 한폭을 보는 것 같다.



하나님도 천재화가 피카소를 의식하는 가보다.

피카소도 울고 갈 하나님의 솜씨가 놀랍지 않은가!

막 함부로 붓질을 한 듯  노을로  붉게 빛나는  채운이 예사롭지 않다.






땅거미가 지자 기다렸다는 듯 가로등이 명멸한다.

내 돌아가 떠도는 육신 누울 잠자리조차 없다면 이 해변의 불빛, 차마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김광균의 와사등이 저절로 읖조려졌다.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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