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더한 슬픔
일 년 중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때다.
그러고 보니 동지 즈음의 겨울은 낮에도 밤의 기운이 서려있다.
더구나 우리 동네는 산자락이라 오후 4시가 넘어서면 싸한 산그늘이 동네로 내려와 어둠의 전조를 불러들인다. 이때쯤이면 새조차 날지 않고 인적이 끊긴 마을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든다.
저녁을 먹고 밖에서부터 차례로 문을 잠그면 변방의 바다처럼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된다.
전화가 울렸다. 한 번, 두 번.....이때쯤 오는 전화는 십중팔구가 시골 노인들을 겨냥한 속이 빤한 사기성 전화나 아니면 지붕개량이나 태양광을 설치하라는 판촉전화다. 요즘은 여론조사 기관의 전화도 많다. 사람들이 돌아와 집에 있을 시간을 겨냥한 것이다.
대게는 이 사람들이 날 시골노인 취급하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무시해 버린다.
그런데 오늘 전화는 왠지 받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지 선생님이세요?”
“네, 누구시지요?”
“저, 저....”
망설여 하는 목소리에 바짝 경계심이 일었다.
알고 보니 얼마 전 남편을 사별한 이웃이었다.
확인이 된 순간 제어가 안 되는 흐느낌이 전화선을 타고 전달됐다.
“죄송합니다.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
안간힘으로 울음을 머금는 목소리에 진한 슬픔과 고통이 묻어나 나 또한 울컥 목이 메었다.
흐느낌을 다스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뭐라고 응수할 말을 찾지 못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어떤 위로의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분이 전화를 한 이유는 남편 없는 시골집이 사무치게 횡하고 무서워 가까운 시내에 아파트를 얻어 이사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가끔은 빈 집을 들르겠다는 말씀과 함께 전화를 끊었지만 오랫동안 미동도 할 수 없어 한참을 멍 때리고 앉아있었다.
잠자리에 들려고 침실에 들어가니 초저녁잠이 많은 아내는 곤하게 잠들어 있다. 아내의 얼굴이 애잔하게 느껴져 한참을 바라보다 불을 끄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40년 가까이 동거 동락했지만 미구에 닥칠 죽음의 길은 손잡고 같이 갈 수 없는 나누어지는 길이다. 두고 가도 안타깝고 남겨져도 슬픔이다. 죽음의 아포리아이다.
갑자기 저기 먼 효자동 공원묘지에나 있어야 할 죽음이 나를 찾아와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었다. 돌아가신 분은 고등학교 5,6년 선배셨고 은퇴 후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요즘 나이로는 너무나 애석하게 일찍 세상을 뜨셨다.
항암치료를 마치고 집에 계실 때 문병을 갔더니 예후는 아주 좋다 했지만 머리는 다 빠지고 피골이 상접한 체 거동조차도 힘들어 했다. 그분이 난데없이 뜬금없는 질문을 아주 진지하게 하셨다. “지교수! 나 딱 소주 한 잔만 하고 싶은디 괜찮을까?” 사모님이 평소 술도 안하시는 분이 왜 저런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 하셨다. 그 후 병원생활을 하시던 선배는 그렇게 가고 싶다고 소원하던 집을 차창을 통해 먼발치에서만 바라보고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미당 선생의 시에 나이 사십이면 문 밖에 귀신이 서있는 것을 아는 나이라 했지만 육십을 넘어도 죽음을 긍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죽음의 강 저편의 세계는 살아있는 자에게 영원한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 단정은 모순이다.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공포가 묻어나는 말이다. 어떤 재담꾼은 자동차 백미러의 문구를 패러디하여 “죽음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고 웃음을 자아내게 하지만 그 뒷맛은 씁쓰름한 앙금이 가라앉는다. 성경의 위인 다윗 같은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다를 바 없다. “주님 알려주십시오. 내 인생의 끝이 언제입니까?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습니까? 나의 일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시편 39편) 유한한 것들의 숙명에 대한 처절한 절규로 들린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제이냐 일뿐이지 너나없이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거역할 자 아무도 없다.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이다. 문제는 죽음은 영원한 부재이기 때문에 남겨진 자에게 견디기 힘든 상실의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이고 슬픔일 것이다. 생떼 같은 아이들을 바닷속에 묻어둔 세월호 부모들의 고통을 ‘이제는 그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이 고통의 심연을 통해 사람들은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진다. 죽음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각자의 몫이다. 영원히 살 것 같이 행동하는 사람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사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죽음의 긍정적 측면이다. 이 길에서 신과의 진지한 해후가 이뤄진다. 기독론적으로 보자면 죽음은 영원한 종말이 아니다. 없어짐도 아니다. 오히려 궁극에는 죽음을 심판하고 죽음을 죽이므로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소망을 제시해 준다. 기독인이 이 힘든 세상을 절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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