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기도
그 유명한 말로테를 비롯해서 기라성 같은 작곡가들의 <주기도문> 행렬에 보잘 것 없는 제가 감히 끼어든다는 자체가 정말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루갈다> 대본에 주의 기도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어 주기도 작곡은 피하려도 피할 수 없는 닥친 일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전문 합창단이 아니더라도 실제 예전(禮典)에서 누구나 부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대본작가 김정수 교수의 간곡한 부탁이 더해져 어찌할까 망설일 뿐 선뜻 첫 발이 내딛어 지지를 않았습니다. 생각다 못해 벌거벗은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자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려놓으니 의외로 쉽게 진척되더군요.
다행스럽게도 초연을 앞두고 연습하는 과정에서부터 모든 가수들이 이 곡을 좋아하고 욕심을 내더이다.
2014년 제 5회 대한민국오페라 페스티벌에 오페라<루갈다>가 선정되어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는데 이 주기도 부분이 전방의 무대가 아니라 어디선가 아득하고 높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만석을 이룬 청중들은 소리의 실체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이내 아스라이 높은 3층 객석에 입립한 흰옷 입은 합창단의 정체를 알아채게 되었고 이 의표를 찌르는 의외의 장면에 놀라워 하다가 이내 천상의 화현에 숨죽이며 몰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녕 저 높은 곳에서 수만 송이의 꽃잎이 천사의 하얀 날개 짓으로 흩뿌려지는 듯 전율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구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합창단을 승강기를 통해 3층으로 이동시키고 무대에 시선이 꽂힌 청중들 모르게 도둑처럼 어둠을 타고 객석으로 스며들어 부르게 하는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연출 김홍승 교수의 히든카드였습니다.
그날 공연이 끝난 후 저를 찾아 온 많은 분들이 이 순간의 감동을 전하더군요.
2014.5.9.~11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 연주 실황 사진.
무대에서의 모습이며 3층 객석은 유감스럽게도 사진이 없다.
<주의 기도>는 예배의 통상적 절차로 의식화돼 대개는 습관적으로 암송하기 마련입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이미 오래 전, 저에게 그야말로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난바다의 요동치는 격랑에 휘둘리는 저에게는 어떤 구원의 암시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잠도 잘 수 없었고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끝인가 싶었습니다. 이래서 스스로 자진하나 싶었습니다. 입이 버쩍버쩍 말라 입술은 부르트고 어떤 기도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주기도라도 외어보라 권하더군요. “무슨?” 버럭 화를 내다가 나도 모르게 암송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암송하다보니 구절구절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힘의 깊이가 감지됐습니다. 모악산을 오르면서 꾸역꾸역 치밀어오는 불길한 생각들을 억누르며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정상을 넘어 헬기장의 공터에 퍼질러 누워 가을하늘의 깊고 푸른 공활을 마주하며 읊조렸고 너럭바위에서 앞산을 건너보며 웅얼거렸습니다. 조금만 끈을 놓으면 고통이 가슴을 옥죄어 들어 숨쉬기도 힘들었거든요. 이때의 제 절박함은 아드 상크툼(ad sanctum) 즉, 성스러움에 다가가기 위한 간구가 아니라 도처에 지뢰가 매설된 죽음의 지대에서 삶의 출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주기도
지성호 작곡/김정수 대본 오페라 <루갈다> 중에서
지휘/이일구 베이스/이대범 합창/스칼라 오페라 합창단
2015.7.16.일 소리의 전당 연지홀/ 조장남교수 정년퇴임 기념음악회 실황
언젠가 TV에서 불교신자들이 백팔 배, 천 배, 밤을 꼴딱 새우는 삼천 배, 며칠을 계속하는 만 배- 겨울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절을 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단순반복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그들의 행동에는 나와 다른 종교라 해서 쉽게 속단 할 수 없는 결기와 비장함이 전해졌습니다. 그 모습은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보를 향해 죽을힘으로 도약하는 물고기들을 연상시켰습니다. 사사로운 기복을 구하고자함이 아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가망 없는 몸짓 말입니다.
벌서 이십년도 지났나 봅니다.
오십도 못돼 불의의 교통사고로 다시는 못 올 길로 떠난 형을 땅에 묻고 허방을 딛듯 허둥지둥 선산을 내려오다가 꼭 쉬어가기 마침한 너른 바위가 있는지라 약속이나 한 듯 모여앉아 망연자실 먼 곳을 바라보며 말들을 잃고 있는데 침묵을 깨고 형의 고등학교 동창 한 분이 이끼 핀 바위 한 지점을 가리키며 이 구멍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더군요. 누구를 특별히 지칭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들 말없이 그분의 손가락 끝을 바라보니 바위 등에 한 뼘 정도 둥글게 움푹 파인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이다. 그쪽방면의 전문가인지 자세한 설명이 뒤따르는데 일종의 성혈(性穴)로 세상의 어머니들이 집 떠난 자식의 안녕과 무사귀향을 염원하면서 마을을 바라보며 돌확을 갈 듯 바위를 갈고 갈아 저렇게 구멍이 파인 것이랍니다. 그 황망한 와중에도 되게 인상 깊었던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간밤에 꿈자리가 사나운 폭폭한 어미가 새벽걸음으로 종종 치며 달려 나와 무거운 마음보다 더 묵직한 둥근 돌을 집어 너른 바위의 한 점을 갈고 갈면서 눈물로 비나리를 한 짠하고 뭉클한 상흔이지요.
황지우 시인은 말했습니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살기 위해 같잖은 힘과 돈 앞에 고개를 숙이는 굴욕을 감내해야 하는 게 인생입니다. 이 고단한 길에 때로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어쩌겠습니까. 힘없는 미생들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빌고 또 빌 뿐이지요, 저마다의 가슴에는 성혈이 깊게 패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으로 드리는 기도를 주문 기도라고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신묘하고 깊은 뜻도 모른 체 무슨 주문을 외듯 중얼거린다고 이단시하기도합니다. 신학자들, 특히 조직신학자들은 성경문구 한 자 한 자에 현란한 교리적 잣대를 들이댑니다. 처음에는 알 것도 같았는데 나중에는 뭐가 뭔지 복잡하게 엉키고 맙니다. 그리고는 네가 그르니 내가 옳으니 하며 다투는 가운데 본질은 어디로 가고 분별만 남습니다. 저는 주기도를 작곡하면서 어떤 주석서나 신학적 견해도 참고하지 않았습니다. 그 힘들었던 때, 외우고 외우면서 숙성시켰던 기억들의 결정(結晶)을 한 칸 한 칸 오선지에 기록한 결과물입니다.
서브텍스트란 말이 있습니다.
언어나 문자에는 함축된, 잠재된 뉘앙스가 있습니다. 작곡자는 문자 이면에서 나를 꺼내달라는 소리를 듣고 이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마치 조각가가 버려진 돌덩이에서 생명을 포착하여 정교한 조탁으로 형상화 하듯이 말입니다.
우루과이의 어느 작은 성당 벽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합니다. 깊은 반향이 메아리치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너희는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마라. <늘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말하지 마라. <늘 혼자만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라고 말하지 마라. <한 번도 아들딸로 산 적이 없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지 마라. <늘 자기 이름을 빛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지 마라. <늘 내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말하지 마라. <먹고살 재산을 다 축적해 놓았으면서>
‘저희가 용서하듯이’라고 말하지 마라. <늘 미움과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지 마라. <늘 죄지을 기회를 찾으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응답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친 적도 없으면서>
추기경과 서울 대교구장이 참석한 2015년5월29일 명동성당 순교자 기념음악회 실황
Orchestra & Chrous/트리니타스
지휘/김지환
Solo/Bariton/김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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