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루갈다

세월호, 오페라 루갈다

작곡가 지성호 2017. 8. 21. 08:06





2014416 

난 군산대학에 강의가 있어 군산에 있었고 점심시간에 시내 식당에서 제자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여염집을 개조한 식당은 아는 사람만 찾는 아주 영세한 규모인지라 방에 몇 개인가의 식탁이 놓여 있었고 앉아 먹는 구조였다.

때문에 둘만이 상 하나를 차지한다는 게 좀 미안한 생각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해난사고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뉴스특보가 뜨고 있었다. 방의 규모로 보아 턱없이 크다싶은 화면에는 창문이 촘촘한 큰 배가 옆으로 누운 채 바닷물에 잠겨가고 있었고 구조선들이며 헬리콥터가 바쁘게 오가며 구조에 열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런, 저런!” 시선을 빼앗기다가 전원구조라는 자막이 반복되자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저마다 밥을 먹는 일에 집중했었다.

한쪽 벽이 온통 미닫이 유리창인 방안엔 봄날 화창한 양광이 가득 차 있었고 옆자리에서는 오육십 대로 보이는 일고여덟 명의 여성들이 적금 들어 곧 떠나는 유럽여행계획에 들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듣지 않을래야 듣지 않을 수 없는 거침없는 아줌마들의 왁자함 때문에 나와 제자는 묵묵히 밥 한 그릇을 빨리 먹어치우고 식당을 나섰었다.

이 사고가 육지 지척에서 일어난 해난사고 중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세계에 유례없는 비극적 사고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불가(佛家)죽음은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있다고 했다.

내가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고등어의 뼛속에서 기름진 살점을 탐하는 바로 그 시각에 가만히 있으라는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에 의지하여 죽음을 모르는 어린것들이 차가운 바닷물에 잠겨가고 있었던 것이다. 들숨과 날숨의 찰나에 생사를 가르는 간격은 천리만리보다 더 먼 법이던가, 뉴스를 보며 점심을 먹는 사람과 현장에서 죽어가는 사람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철벽으로 단절돼있었던 것이다.

 

1971, 내가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충무로 세종호텔 맞은편에 사시는 작은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승호니?”

작은 어머니는 내 법적 이름인 <성호>를 모르시니 집에서만 통용되는 <승호>로 부르셨고, 그 이름 두 자에는 오랜 서울생활에서도 여전히 묻어나는 고향땅 충청도 두메산골의 억양이 서려있어 아련한 감정을 자극하는 울림이 있었다. 갑자기 서울의 각박함이 사라지고 황토 빛 붉은 고향의 흙내음이 떠오르며 마음이 눅어지는 것이었다.

전화 내용은 예수님 생일이라 시루떡을 했으니 와서 먹고 가라는 말씀이셨다

당시 난 대학입시를 앞두고 북아현동의 피아노 선생님 댁에 기거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충무로 좁은 길로 들어설 때만해도 아무 일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 통행금지가 살벌하게 살아있어 시민들의 일상의 자유가 박탈당하던 때였다

일 년 중 딱 이틀, 성탄절과 1231일 만 통제가 해제돼 사람들은 모처럼의 해방감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흥청거렸던 때인지라 간밤의 축제를 즐긴 충무로의 오전은 한가함으로 느슨했다

접시에 내온 팥떡을 한 입 벼 물고 있는데 문밖을 내다보시던 작은 어머니께서 , 승호야! 대연각에서 뭔 연기가 많이 난다. 불이 났나? 한 번 가 봐라!” 궁금해 하셨다. 그날은 그다지 춥지 않은 날씨지만 하늘은 흐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가보니 20층이 넘는 대연각 호텔 아래 부분에서 하얀 수증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는데 겨울철 기름으로 난방 하는 빌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인지라 설마 불이라고 까지는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대연각에 가까이 다가가니 창문마다 시커먼 연기가 솟구치고 붉은 화염이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모습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디선가 비명처럼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다급하게 소방차들이 달려오고 있었고 아직 화마가 번지지 않은 창문에는 투숙객들이 결사적으로 구원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곧 몰려든 인파로 충무로는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이들은 구경꾼이 되어 대연각을 에워쌌다. 창문에 매달린 사람들은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뛰어 내리다 보도에 떨어져 튀어 올랐다. 어떤 사람들은 커튼을 찢어 로프를 만들어 타고 내려오다 떨어졌고 어떤 사람들은 매트레스와 함께 뛰어내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애석한건 천신만고 끝에 헬기에서 내려뜨린 밧줄에 매달렸지만 이동 중에 탈진해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간격이지만 호텔 속에 갇혀 죽어가는 사람과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절대로 넘나들 수 없는 생과 사의 철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꿈을 꾸는 듯, 영화를 보는 듯, 비현실적인 모습이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렇게 떨어져 죽은 사람만도 38, 실종자를 뺀 전체 사망자는 166! 부상자 66, 행방불명 25, 세계 최대, 최악의 화재재난이었다.

그날 아비규환의 지옥을 목격한 트라우마는 50년이 가까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불쑥 꿈자리에 찾아와 이불을 박차거나 가위에 눌려 식은땀을 흘리기도 한다.

 

히말라야 설산이나 티베트 고원지대 같은 세계의 변방을 떠돌다 한국에 돌아와 리무진을 타고 공항을 벗어날라치면 잘 닦인 검은 도로와 선명한 하얀 차선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오곤 했었다. 악착같이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는 노력의 결과가 일군 쾌적한 문명의 상징처럼 보여졌으니까. 우등리무진의 넓고 안락한 좌석을 기울여 깊숙이 몸을 묻으며 그래, 이게 대한민국이야! 이 질서, 이 편안함, 얼마나 좋은 것이냐!” 지구촌 일등국민이 된 듯한 자부심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수장되어가는 어린 것들을 국가의 모든 조직은 속수무책 구경만하고 있었다. 구조 활동은 그저 하는 척에 불과했고, 언론은 이들의 발표를 받아 적기에만 급급했다. 국가의 시스템은 구석구석 병들어 작동이 불능상태였고 거짓과 위선으로 상황을 호도하려 했으며 뻔한 억지로 억누르려만 들었다

대통령의 행적마저 오리무중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게 국가냐는 절규가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나중에 들어난 사실로는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승객의 안전과 구명을 도모하기보다 선사와 전화질로 손익계산을 따지느라 골든타임을 허비해버렸고 정작 침몰직전에는 승객들을 버리고 자기들만 쏙 빠져나와 버렸다.

이들에게 어린 생명들은 적재된 화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들은 겁에 질린 생명체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이것들이 지닌 삶의 고유한 이력과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의 존엄, 한 생명과 연결된 무수한 인트라망을 지각하지 못하는 기계적 유물론자들이었다. 스스로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되고만 것이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 것들의 죽음을 전 국민이 텔레비전으로 구경만 하게 한 꼴이었으니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비정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후에 권력은 세월호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세월호의 유족들과 그들의 슬픔에 다가가려는 사람들을 종북좌파 같은 불순한 자들, 나라 경제를 어렵게 하려드는 자들로 갈라치기하려 들었다. 여기에 고무된 극우단체들은 유족들을 보상금을 노리는 시체장사로 매도하기도 했으며 단식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 곁에 피자며 통닭을 배달시켜 웃고 먹으며 그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교회조차 세월호 참사의 공적이슈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처방할 영성을 잃어버리고 대형교회의 모모한 목사들은 황당하고 엉뚱한 설교로 세상의 공분을 일으켰다. 정치는 어떠했나? 국민적 트라우마를 단순한 교통사고로 치환하려 들었으며 한술 더 떠 죽은 사람을 위해 이 많은 세금을 낭비해도 되느냐고 역정을 냈다.

 

 

https://youtu.be/nCLoN7rmFu0

 

세월호의 충격과 그 파장은 쓰나미처럼 대한민국의 모든 이슈를 쓸어 갔지만 그중에서도 공연예술계의 타격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의 한복판에 열릴 수밖에 없는 제5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은 개최여부를 두고 요동쳤다

 2014422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컨퍼런스홀에서 조직위원회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나도 이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오페라<루갈다>의 작곡가로 참석을 통보받고 현장을 지켜보았다. 당시 김귀자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은 모두 인사말을 통해 전 국민이 슬픔에 빠져있는 이 때, 과연 이 행사를 진척시키는 게 타당한 일인가를 가지고 며칠을 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이때야말로 오페라를 통해 세월호를 애도하고 국민을 위로해야한다는 결심을 세웠다고 밝혔다. 숙연한 분위기속에서 현장에 참석한 문화담당 기자들 누구하나 오페라페스티벌 개최를 문제 삼지 않았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살아있는 자들의 삶은 지속돼야한다는 무언의 교감이 있었던 것 같다.

http://blog.daum.net/kui337/191

 

장례식장은 당연히 죽음을 애도하는 문상객들로 채워진다

이 공간은 두 개의 공간으로 구별되는데 한군데는 죽은 자의 공간이고 다른 공간은 문상객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나누는 산자들의 공간이다.

죽은 자를 옆에 두고 산자들은 그렇게 음식을 나눈다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 곁에서 배고프다고 먹는 육개장 한 그릇이 묘한 여운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가장 가까운 혈육이 죽었을 때는 끔찍한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나도 형님을 교통사고로 앞세우고 3일을 장례식장에서 기거하며 밥을 앞에 두고 선뜻 수저를 들 수가 없었다. 예고 없이 삶에서 이탈한 형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이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으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먹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먹는 육개장 한 그릇이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 얼큰한 국물이 빈속을 타고 넘어 갈 때 뜻밖에도 어떤 문상객들의 위로보다 더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이 기억 때문인지 문상을 갈 때마다 내 온 육개장 한 그릇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떤 글이 떠오른다.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가 텅 빈 집으로 돌아오니 빵집 주인의 전화가 빗발친다. 맞춘 아들의 생일 케이크를 왜 찾으러 오지 않느냐고. 빵집 주인을 용서할 수 없는 부부는 절망감 속에서 빵집을 향해 돌진한다. 아무 것도 몰랐던 빵집 주인은 부부의 기막힌 사정을 듣다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진심을 다해 용서를 구하며 방금 구워 낸 따뜻한 롤빵을 권한다. 부부는 갑자기 허기를 느끼고 따뜻하고 달콤한 롤빵을 세 개나 먹어치우면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얻어 기운을 차린다는 이야기이다. 슬프지만 이게 인생이다. 이 부부는 롤빵을 씹으며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산사람은 또 살아야한다.

팽목항에서도 자원봉사자들이 그 긴 날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밥을 해서 유족들을 먹였다. 유족들은 눈물로 밥을 말아 먹으며 고통을 견딜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렇다! 따뜻한 밥과 같이 내가 심혈을 기울인 오페라<루갈다>는 귀 있는 자들에게 천상의 위로로 다가가야 하고, 세월호 영령들에게는 산자들이 바치는 <레퀴엠>이 되어야 한다. 삶이 대단한 것은 그렇게 삶을 지속시킴으로 견딜 수 없는 절망을, 고통을 건너 일상으로 복귀하는 복원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예정대로 세월호 침몰 후 보름이 지난 52일부터 61일까지 대한민국오페라 페스티벌이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렸다.

내가 작곡한 창작 오페라<루갈다>는 페스티벌의 두 번째 무대로 59일부터 11일 까지 3회의 공연으로 올려졌다.




문제는, 세월호의 슬픔으로 전 국민적 애도국면에서 티켓팅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한 것이었다. 오페라 단장은 매표를 약속한 대기업이나 단체에서 줄줄이 취소의 비보가 날라들고 있다고 낙심에 빠져 상황을 전했다.

머리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오페라단에서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공들인 모든 계획이 다 무너지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여기까지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었나. 2013년 국립오페라단 창작산실 지원사업 우수작품 제작지원 공모에서 최우수작으로 뽑히기 까지 3번의 관문을 통과하는 길고도 힘든 과정도 있었다.

http://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93420

정말 피가 마르는 순간도 있었지만 피땀으로 쓴 내 작품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20131018일부터 사흘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에서 초연을 시작으로 121415일 서울상명아트센터, 20145월 예술의전당의 오페라페스티벌 참가 이후에는 이탈리아 로마 공연을 필두로 해외로의 대장정을 펼칠 예정이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10/17/0200000000AKR20131017131300055.HTML?input=1179m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한편 그것을 이겨내는 일로도 가득차 있다." 고 헬렌 켈러는 말했다

그러나 오페라단의 입장에서는 조직위원회가 분배한 턱없이 부족한 지원금만 가지고서는 이겨낼 일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예상치 않은 난관에서 앞으로 나아가던지, 아니면 무릎을 꺾던지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을 것이지만 이번의 경우, 퇴로는 없었다. 조직위원회가 결정한 이상 무조건 고의 상황이었다.

누구보다 재정을 마련해야하는 단장의 말 못할 고뇌가 깊어지는 나날이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무대는 예정대로 올려졌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 무대 위, 고개를 들어야 읽을 수 있는 높은 자막에 세월호를 애도하는 문구가 흘러갔다. 그리그의 페르퀸트 중 오제의 죽음(Aase's Death)이 장중하고 비감하게 객석을 뒤 흔들었다. 전날 난 숙소에서 이 문구를 몇 번이나 쓰고 지우며 심혈을 기울였다. 짧은 문구지만 애도의 진심을 담아낼 수 있는 문장을 찾느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모았었다.

 

2017729. 세월호가 육상에 거치된 목포 신항을 찾아갔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항구엔 시원한 바닷바람 대신 후텁지근한 열풍이 불고 있었다. 세월호는 긴 철책 안에 갇혀 있었고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먼데서 예까지 찾아왔지만 들어 갈 수 없는 사람들은 먼발치에서나마 세월호를 바라보고는 저마다의 슬픔을 꺼내 철책에 노란 리본을 매달았다. 빼곡하게  묶여진 리본이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깃발처럼 나부꼈다

선명한 노랑은 슬픔의 기억이었다.

내가 여길 찾아 온 것은 마음속에 똬리 튼 부채의식이었다. 어린 것들을 지켜주지 못한 못난 어른으로서...

희생자 304,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 5명의 영정 앞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세월호의 슬픔은 우리 사회가 공동정범이다

야스퍼스는 악을 저지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같이 나눠지게 된다고 말했다

몇 해 전 우리나라를 방문한 교황은 한국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도덕적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정곡을 찌르는 아픈 충고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며칠 전 816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 세월호 유족 및 생존자 가족을 초청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더불어 미수습자 수색 작업과 2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을 위한 특별법 통과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날, 이재명 성남시장이 34개월 동안 시청사 정문에 걸려있던 하얗게 빛바랜 '세월호기'를 내리고 시청 마당에 설치한 상징 조형물도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가 잘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통령 하나 잘 뽑으니 모든 게 제자리를 찾는다. 촛불혁명의 결과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사회의 트라우마이자 아포리아였던 세월호가 해결국면으로 들어선 것이다.

내가 이렇게 긴 글을 쓰는 이유도 이런 보도를 접하고 마음의 응어리가 걷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세월호로 인해 제대로 날개를 펼치지 못한 오페라 <루갈다>의 꿈이 로마로. 세계로 다시 한 번 부활하는 계기가 마련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