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를 짓기 위해 뚝딱거리는데 앞집 유휴열 화백께서 지나가다 오래 바라보시더니 한 말씀 던진다.
“허, 참! 작곡가가 집을 짓다니...”
우선 기초를 다지고 가장 싼 각재로 뼈대를 형성한다
2002년 월드컵 개최로 나라 전체가 들썩일 때의 일이다. 나는 월드컵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대서사 음악극 혼불>을 전주 시로부터 위촉받아 장장 런닝 타임 3시간30분이 넘는 총체음악극을 단 70여 일 동안에 써야했다. 그때의 피 말리는 고통은 지금 생각해봐도 끔찍하다. 이러다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정말 심각하게 들기도 했었다. 내 하소연에 “군인이 전쟁터에서 죽듯 작곡가는 곡을 쓰다 죽을 뿐”이라는 아내의 얄미운 명언이 은근히 내 오기를 자극해 어금니를 질끈 깨물게 했다. 그 당시 면도할 시간도 없어 수염을 방치한 것이 지금껏 내가 턱수염을 달고 있는 내력이렷다. 그로부터 15년 동안 6편의 그랜드오페라를 더 작곡했다. 그러면서 터득한 게 있다. 쓰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오페라를 올리고 난 후의 고통도 쓸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악보를 위촉자에게 넘기고 나면 말할 수 없는 허탈과 진이 빠진 무기력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갑자기 정지된 시간 속에서 그렇게 소원하던 잠도 오지 않고 바람 빠진 튜브처럼 모든 의욕이 다 빠져나가 허깨비같이 흐느적거리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실제로 차를 세워 공간의 크기가 적절한지 따져봤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 및 정신적 힘이 고갈돼 극도의 피로감으로 무기력 증,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것으로, 식이장애, 우울증, 강박장애 등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함이다.
말하자면 번아웃 증후군을 심하게 앓았던 셈이다. 이 고약한 병을 피하는 방법으로 해외여행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국내에 있으면 끊임없이 작곡자에게 몰려오는 요구사항을 처리해줘야 하니 전화를 안 받아도 그럴듯한 알리바이가 성립되는 해외로 내빼는 것이다. 여행도 안락하고 우아한 여행이 아니라 문명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거칠고 험한 오지중의 오지를 찾아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한 걸음 한 걸음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걷고 또 걷는 고행 길을 떠난다. 이 길에서 자나 깨나 머릿속을 맴돌던 음표들을 땀과 함께 체외로 방출시키곤 했다. 이게 중요한 게, 곡 쓰느라 밤샘 끝에 지쳐 잠자리에 누워도 머릿속엔 컴퓨터의 모니터가 떠올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을 자는 게 아니라 누워 눈을 감고 허상의 화면 속에서 난마와 같이 얽힌 곡을 복기하다보면 가끔 막혔던 곡의 활로를 여는 아이디어도 얻게 되지만 리셋 되지 않는 머리 때문에 몸은 언제나 무겁고 피곤은 더깨더깨 쌓여만 가게 된다. 혹자는 쉬엄쉬엄 곡을 쓰면 되지 않느냐고 묻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은 게 정해진 기간 내에 악보를 넘겨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그런 여유가 생기질 않는다.
그러니까 나의 오지여행은 치열한 전장에서 일상으로 복귀하는 통과의례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티벳쪽 초모랑마(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도 같다 왔고 마차푸차레를 거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도 갔다 왔다.
샌드위치 판넬에 슁글을 입힌다
올해라고 예외일순 없었다. 전북대학교 개교70주년 기념연주회와 내 일곱 번째 오페라<달하비취시오라>가 겹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전북대학교70주년 기념연주회는 대학의 특성상 의견결집이 쉽질 않고 한없이 엎치락뒤치락하여 정신적 소모가 자심하였다.
오페라<달하비취시오라>공연을 코앞에 두고 더구나 학기중간인지라 여행도 떠날 수 없고 대신 그동안 미뤘던 집안일을 찾아 노동의 땀을 흘리기로 했다. 작곡가가 웬 노동? 갑자기 목표를 잃어 어찌할 바 몰라 표류하는 정신적 방황을 고단한 육체적 노동으로 몸을 고달프게 하여 상쇄시키려는 것이다. 별난 발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도 그동안 곡 쓴다는 핑계로 방치한 집안 일이 산적해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었다. 시골집은 조금만 관리를 소홀히 해도 티가 나는 법이다. 우선 급한 게 이층으로 올라가는 목재계단이 썩어 일부를 교체해야 했고 양수기와 물 저장탱크가 노출되어 눈에 거슬렸기 때문에 집을 지어 줘야하고 (언젠가는 해야지 하고 미뤘던 일) 내친 김에 차고도 짓기로 했다. 또 한곳, 화목창고가 새니 이곳 역시 단단한 지붕을 만들어 줘야했다. 간단한 도면을 그려 소요재료를 파악해보니 경비도 경비려니와 일 자체가 커져 좀 겁도 났다. 망설임이 왜 없겠느냐만 일은 저질러야 어쨌든 끝이 난다.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궁리 끝에 자리 잡은 차고(車庫)자리에 기초를 하는데만 모래 한 차와 시멘트 16포가 들어갔다. 노동으로 단련된 몸뚱어리가 아닌 책상물림이 혼자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작업량이었다. 땀범벅으로 옷은 다 젖고 난데없는 중노동에 온몸의 근육이 놀라 아우성이었다.
모든 일은 다 힘이 든다. 참고 견뎌야 한다. 그 긴 시간, 죽을 똥 살 똥 오페라도 썼는데 이깟 일쯤이야 마음을 추슬러 보지만 혼자 하는 일이 여간 고된 일이 아니다.
하루일이 끝나 펴지지 않는 허리를 겨우 다스려 기다시피 집안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 짐승에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럴 때마다 아내에게 외치는 소리가 있다. “나, 지금 하늘로 붕 떠 날아가고 있소! 과부 안되려면 빨리 붙잡으소!” 저녁을 먹고 마당에 나가 하루 분량의 작업결과를 바라보며 다음 공정을 구상하면서 서성이다보면 나 혼자 이걸 해냈구나 하는 뿌듯함이 몰려온다. 뿐만 아니라 내 머릿속의 궁리가 점점 가시화되는 기쁨도 몰려온다. 호머 파베르(homo faber)란 말처럼 몸은 힘들어도 만드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도 다를 바 없다.
내가 일하기를 주저하고 두려워했다면 이런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 생각은 게을러도 손은 부지런한 것이, 재 너머 이랑 긴 밭을 이불에 누워 뭉그적거리며 언제 다 멜까 아무리 궁리해도 일은 한 뼘도 줄지 않는다. 이불을 박차고 당장 호미를 쥐고 밭에 나가 계급용인(戒急用認)이라는 격언을 머리띠로 두르고 긴 호흡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성취를 향해 걸어간다면 일은 반드시 끝나게 되어있다.
돈 버는 재주 없는 가난한 작곡가 인지라 몸으로 때우는 측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게 있다. 노동은 그것이 정신적이던 육체적이던 서로 상통하는 것이, 둘 다 인내와 끈기를 필요로 한다. 나는 작곡자로서 육체적 연단을 통해 내 정신력의 근기를 키워 곡을 쓰는 밑거름을 만들고자 한다. 스포츠 선수가 기초체력을 다지듯 나는 이런 명백한 자의식을 가지고 힘든 노동을 한다.
모든 구체적인 삶에는 ‘고통의 절대성’이 있다는 말처럼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지 않은 인생이 어데 있으랴. 대다수 인생이 먹고 살기 위해 힘쓰고 애쓰다 생을 마감한다. 허무하지 않은가! 이조차도 버겁지만 이일에 더해 뭔가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려 한다면 험한 길, 진창을 걸어야 족적이 남겨지는 법이다. 그래서 맹자가 이런 말씀을 하신 모양이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장차 큰 임무를 내리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게 하며, 그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 몸을 부족하게 하여, 행동을 함에 있어서 그 하는 바를 혼란시키니, 이것은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자신의 능하지 못한 바를 더 보태주고자 해서이다"
세월 앞에서 모든 것이 다 지나간다. 지금 하는 일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준다 해도 다 지나간다. 그러니 참고 견뎌야 얻어지는 것에 너무 두려워 말일이다.
공사중 첫 눈이 내려 잠시 중단하기도 했다
완성된 화목 저장 창고
기존의 어설픈 창고위에 지붕만 샌드위치 판넬로 덧 씌우고 싱글을 입히는 바람에 칫수의 간격이 많이 차이가 난다.
집에 들어가면서 바라보는 양수기 집과 차고
거실에서 바라본 차고
이렇게 끝나는 날이 있구나!
비는 시간 짬짬이 일을 하다보니 한 달 하고도 보름이나 소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