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홑 여덟 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산비탈 가난한 동네엔 언제나 애들로 들끓었었다.
이웃에 또래 아이가 있었다.
콧구멍이 약간 위로 들린 아이는 결코 영리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입학 즈음, 우린 가슴에 손수건을 차고 얼마간 교실보다는 운동장에서 선생님의 “하나! 둘!” 을 대신한 호루라기 소리에 “셋! 넷!”을 합창하며 병아리 떼처럼 열을 지어 선생님을 따르곤 했었다.
그 무리를 에워싸듯 엄마들이나 할머니들이 따라 붙다가 개나리 피고 진달래가 피기시작하자 점차 숫자가 쪼그라들었다.
당시에 똘똘한 아이란 코를 흘리지 않고 입성이 좀 깨끗하고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번쩍 들고 대답을 잘하는 아이 정도였으리라.
문제는 그 애 엄마가 나를 아주 영리하고 똘똘한 아이로 생각했던지, 언제나 내 곁에 그 아이를 서게 하는 것이었다.
어쩌다 선생님이 다른 애를 짝지어주면 기어이 그 애 엄마는 열로 들어와 그 애를 내 짝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 애 엄마의 그런 행동이 몹시 부조리(?)하다고 생각되어 아주 싫었던 기억이 있다.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나의 유년은 부모와 떨어져 내 태를 묻은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괸돌 마을에서 할머니와 고모 손에 한 동안 양육되었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를 입학시키기 위해 아버지께서 나를 데리고 버스타고, 기차타고, 배를 타고, 다시 기차타고 많은 길을 걷고 걸어 저녁 짓는 연기가 자욱이 깔리는 즈음에야 용머리고개 옹색한 초가집을 들어섰을 때, 내 눈엔 어둠속에 불땀이 시들어가는 작은 아궁이 하나가 먼저 눈에 띄었다.
할머니 집 부엌의 검게 빛나는 큰 가마솥과 여러 개의 아궁이와는 너무나 비교가 되어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의 가난이 짐작되었다.
어머니를 몇 년 만에 대했을 때, 어머니는 나를 와락 껴안고 울었지만 나는 어머니의 품이 낯설고 부끄러워 빨리 놓여나기만을 바랐던 기억이 있다.
위에 얘기한 기억이 심리학적으로 어떤 해석이 가능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세상 부모들의 맹목적인 자식사랑에 어떤 못마땅한 게 있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실패한 것도, 믿었던 김대중 대통령조차도, 다 자식들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제어하지 못한 후과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대통령도 아니면서, 더구나 전세살이를 전전하면서도, 자식사랑을 애써 억제하며 살아왔다.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새 학기가 되면 으레껏 학부모들이 촌지를 들고 담임선생님께 인사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내 집에서는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자식 앞길에 결 좋은 멍석을 깔아주는 것은 자식을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오활한 명분을 내세워 아내가 학교를 찾아가는 꿈도 못 꾸게 하였다.
정말 선생님께 감사를 표하려면 학년말 방학 때 찾아뵙는 것이 진짜라고 우겨 이 말을 옳다고 생각한 아내는 한 학년을 마칠 즈음에야 아들의 담임선생님을 찾아 갈 수 있었다.
아들은 으레 그런 줄 알고 중학교며 고등학교 졸업식도 우리를 오지 말라고 했고 우리도 아들의 독립심을 내심 뿌듯해했다.
그런 나도 머리를 박박 깍은 아들을 부대에 놓고 돌아설 때는 코끝이 찡했고 훈련소에서 보낸 편지를 읽을 때는 남몰래 눈물을 떨어뜨렸었다.
돈이 안 되는 작곡가의 길을 걸으면서 삶은 언제나 작두날 위에 놓여 있었다.
나희덕 시인이 말한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가 바로 나였다.
내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아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저 홀로 성가를 했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 아들의 아들을 처음 안았을 때, 무엇보다도 이 새털처럼 가볍고 약한 것이 부닥칠 험난한 세상 때문에 안쓰러웠다.
한편으로는 밤잠을 설치며 애를 써야 겨우 가능한, 그 고단하고 무거운 아비의 자리가 이렇게 또 이어지는구나 하는 아들에 대한 연민이었다.
앞집에 사시는 유화백님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두 분 내외와 둘째 산구완 차 내려와 있는 딸내미까지 길섶에 나와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어떤 대단한분이 오시 길래 저러나 싶어 먼발치서 지켜보는데 이윽고 노랑 스쿨버스 한 대가 서더니 아이 하나를 내려줬다.
온 식구가 기다리는 대단한 분은 외손녀였다.
그 날 첫 어린이 집 등원을 마치고 집에 오는 아이를 온 식구가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마치 나라를 구한 영웅처럼 온 식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땅에 발도 딛기도 전에 유화백님에게 덥석 안겨져서 집안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오후 세시반이 되면 어김없이 유화백님이 아이를 기다리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바라볼 때마다 내 입가에 실실 웃음이 베어 나왔다. 저 분에게 저런 면이 있었다니...
가끔 내가 묻곤 한다.
“형님, 손녀가 그리도 예쁘요?”
“말도 마! 얼마나 예쁜가 몰라! 자네도 나중에 경험해보소!”
나는 아들을 키웠지만 단편적인 몇 가지를 빼곤 아무 기억도 없다.
며늘애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이니의 사진이며 동영상을 보내주었다.
잔정을 표시하지 않는 아내와 나는 몇 번이고 이니를 바라보며 이니의 사소한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동영상에 이니가 씩 웃는 모습이라도 볼라치면 얼마나 예쁜지 가슴이 다 환해졌다.
어리디 어린 것이 입안에 넣어주는 음식을 오물오물 하나도 흘리지 않고 먹는 모습이라니!
“이니 하는 짓이 할머니 닮았나 봐!” “뭔 소리! 할아비 똑 닮았구먼!”
웃을 일이라곤 이 것 말고는 없었다.
어쩌다 사진이 올라오지 않으면 그렇게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남의 집 아이는 빨리도 자라 더만 우리 이니는 하루하루가 더디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이니를 안게 되면 오래도록 그 체취며 행동거지가 눈앞에 아른 거렸다.
그러다가 오늘 이니의 돌날이다.
아들내외는 돌잔치를 양가 부모와 이니 외삼촌으로만 한정해서 아주 단출하게 마련하였다.
이 삼복지절에 번거롭게 남에게 부담지우는 게 싫은 아내와 내 입장에선 고맙기 이를 데 없는 결정이었다.
우리 이니는 일 년 동안 무엇보다 잘 먹고 잔병치레 없이 튼실하게 잘 커주었다.
방실방실 웃기를 잘하고 사람을 좋아해 낯가림도 없었다.
하도 울지를 않아 며늘애가 일부러 울려 동영상을 찍어 보내줄 정도였다.
어쩌다 울더라도 “으앙!”하면 끝이었다.
기특하게도 아기 때부터 아기 방에서 저 혼자 재우고 저 혼자 일어나게 해도 한 밤중에 깨어 칭얼거리거나 보채지도 않고 아침까지 잘도 잤다.
잠자리에서 깨어나면 옹알이로 “나 깨어났어요!” 신호를 보내주는 것이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돌날인 오늘은 한 낮의 기온이 31도를 넘어서는 무더위였지만 이니는 돌 복으로 성장을 하고 한 번도 울지 않고 떼쓰지 않으며 돌 행사를 잘 마치게 했다.
집에서는 두건을 씌워주면 부리나케 벗어던져 돌 사진을 어떻게 찍나 걱정을 많이 했다는데 이니는 이 행사의 의미를 눈치 챘는지 잘도 견뎌주었다.
내가 보기엔 이 녀석이 분명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으로 보였다.
표정이 굳었고 그렇게도 잘 웃는 해보가 잘 웃지도 않았다.
그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참고 견디는 표정이 역력했다.
행사를 마치고 더운 돌 복을 벗기고 옷을 갈아입은 이니를 유모차에 태워 호텔 경내를 둘러보았다.
한낮의 햇볕이 뜨거워 유모차의 덮개를 내리자 시야가 막힌 녀석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씩 웃더니, 손을 들어 덮개를 뒤로 제키는 것이었다.
녀석의 표정은 “할아버지가 날 위해 햇볕을 가려주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전 둘레를 봐야 하거든요. 할아버지 죄송해요!” 뭐, 이런 표정이라고 읽혀졌다.
이니는 호기심이 너무 많아 뭐든지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녀석이었다. 어쩌다 보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들네 집에 돌아와 쉬는 참에 며늘애가 이니를 어찌나 예뻐라 하는지, 나도 모르게 물었다.
“이니가 있는 게 좋니, 없는 게 좋니?”
이 뜬금없는 물음에 며늘애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 당연 이니가 있는 게 좋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내 물음의 배후는 이랬다.
요즘 일이 밀려 한 참 바쁜 아들내외가 잠 못 자며 돌잔치 준비를 한 것을 알고 있는 내가 보기에,
집에 와서도 이니를 먹이고 놀아주랴 쉴 짬이 없는 며늘애가 딱해 보여 한 말이었다.
이니는 그러잖아도 활달해서 태능인(태능선수촌 국가대표선수)이라 부르는 아이인지라 요즘 맘대로 기어 다니고 일어서며 말 짓이 부쩍 늘어 잠시라도 한 눈을 팔수가 없는 시기였다.
그러니 애 보랴, 일하랴, 살림하랴, 정신없는 며늘애가 딱하게 보일 수밖에.
우리 이니를 이만큼 훌륭하게 키워 낸 아들내외에게 한 편의 시를 선물하는 것으로 내 마음을 대신하고자 한다.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이 호텔이 제법 알려진 명소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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