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과의 마찰로 나라가 뒤숭숭하다.
우리 아버지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셨다.
열네 살이라니, 상상이 가는가!
뼈도 아직 굳지 않은 어린 것을 일본놈들은 부모의 동의조차 없이, 아니 통보조차 없이 낚아채듯 강제로 끌고 간 것이다.
어떤 친일 모리배가 자발적 취업이라는 개소리를 하더라만, 지 애비가 우리 아버지처럼 끌려갔어도 그런 소리를 하려나?
아버지는 일본 최 북방 홋카이도 키타미 산지 백석광산에서 3년여를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구사일생으로 광복 이듬해 귀국하신 분이다. 우리 할머니 살아 생전에 그 때는 눈이 짓무를 정도로 눈물 속에 살았노라고 말씀하시면서 여전히 옷고름에 눈물을 찍어내곤 하셨다. 철없는 나는 할머니 눈물의 의미를 잘 몰랐었다.
내가 군에 있을 때 휴가를 나와 모처럼 늦잠을 즐기고 눈을 떠보니 모두들 다 나가시고 집안이 조용했다.
한 켠에 차려진 밥상을 물리고, 무엇인가를 찾다가 장롱 깊숙이 두툼한 원고뭉치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 하는 마음으로 원고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다가 그 자리에서 전편을 다 읽어버렸다.
아버지는 자꾸만 일본의 경계심이 옅어지는 세태를 염려하다 못해 육필 수기를 소설형식을 빌어 원고지에 남기신 것이었다.
나중에 이 원고가 어떤 경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을지 출판사에 넘겨져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었다.
모두 4권으로 된 장편소설이다.
그 중에서 아버지께서 끌려가시던 부분만 발췌해 올려보겠다.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소설 속에 나오는 지명과 이름은 다 가공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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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형은 김매기 품앗이 하러 두레꾼과 들에 나갔고 나는 집에서 잔일을 거들고 있었다.
그때 면내에서 악명 높은 총독부의 사냥개 요시타(吉田)가 불쑥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눈에 띄는 순간 소름이 쫘왁 끼쳤다.
요시타는 같은 동족이었지만 그의 본래 성이 무엇이었는지 또는 고향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타처에서 전근되어 온 노무계원인데 키가 작달막하고 통통하며 둥근 얼굴을 한 다혈질 형이었다.
활기찬 일본군을 흉내 내는 그는 항상 국방색 전투모에 전투복 비슷한 국민복을 입었고 다리에는 언제나 군대게톨(각반 : 일본군이 전투시 간편하도록 발목에서 무릎 밑까지 감아 올리는 천)을 두르고, 엄지발가락이 갈라진 지카타비를 신고 다니면서 대 일본황국신민으로써 천황 폐하께 층성을 바치는 전형적인 충견이었다.
우리 면민은 누구나 요시타와 마주치면 병아리가 솔개를 본 듯 사지가 오그라지고 떨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젊은 남자나 처녀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면내 청 . 장년의 거의 모두를 그의 손으로 끌어 간 것이다.
하야시 징코오(林鎭鎬) !"
요시타는 형의 이름을 부르며 토방에 올라섰다.
형이 결혼한 지 이제 한 달 남짓한데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인간 백정 요시타가 아닌가!
“진호 없는데요.”
안방에서 어머니가 마루로 나오시며 말했다.
“어딜 갔소?”
요시타는 이 방, 저 방을 둘러보며 반문했다.
“산에 풀 나무 베려고 갔는데……. 왜 그러십니까?”
그의 용건을 너무 잘 아시는 어머니는 들에 나간 형을 산에 갔다고 말하면서 되물었다.
“고레 고맛다나……(이것 참 곤란하구나.……)”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골방 문도 다 열어 봐요."
요시타는 신경질적으로 명령했다.
어머니가 열어 보이는 곳마다 기웃기웃 들여다보고 돌아서 토방을 내려가다가 부엌까지 한번 기웃하고 대문으로 걸어 나갔다.
부엌에는 형수가 일하다가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나는 바깥 대청의 책상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오금이 펴지질 않아 화석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형수가 있는 부엌으로 들어가시더니 잠시 후 나를 부르셨다.
나는 그때서야 멈춰있던 숨을 내쉬면서 일어설 수가 있었다.
선생님처럼 항상 단정하고 명쾌하던 형수의 모습이 축 처져 있어 손가락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고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 건민아! 너, 형한테 가서 조심하라고 이르고 오너라. 너도 조심해야 한다. 난 형 대신 널 데려갈까 봐 가슴 죄었었다."
어머니는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면 으레히 더 침착해 지셨다.
집을 나와 집훈골 학달이네 논을 향해 가는데 형수의 그 파랗게 질려 있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형은 절대로 잡혀가서는 안 된다.’ 나는 가슴으로 외쳤다.
동네를 벗어나 잔디밭 비탈을 지나고 오솔길로 들어선 다음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거기 요시타가 서 있었다.
누구든 걸리는 대로 나꿔채 가려고 망을 보고 있다가 나와 마주친 것이다.
토끼가 호랑이를 만난 것처럼 아찔해진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너 어딜 가는 거냐?”
마치 개구리를 채 먹으려는 뱀 눈처럼 반짝이는 교활한 눈매로 나를 노려보면서 물었으나 바싹 굳어버린 나의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졸지에 궁지로 몰리자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형한테 가고 있다는 말은 더욱 할 수 없었다.
토끼가 호랑이를 만났다면 잡아 먹히는 순간까지는 뛰었을 것이며, 개구리가 뱀을 만났다 해도 물릴 때까지는 달아났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요시타가 경멸하듯 비아냥스런 입술을 실룩이며 말하자 뒷걸음마저 멈춰져 다리가 굳어 버렸다.
“이리 오라.”
내 발이 움직이지 않자 그가 다가와 나의 왼손을 덥석 잡아끄는 순간 나보다 훨씬 큰 구렁이한테 물리는 것 같아 전신의 힘이 쭉 빠져 버렸다.
검은 대륙의 흑인 소년은 피부색깔이 다르고 언어가 틀리는 노예 상인에게 끌려서 팔려갔다지만, 이 땅에서는 피부와 언어와 핏줄마저 같은 동족끼리 잡고 잡혀서 이 민족의 원수에게 노예로 팔려 넘어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가 잡은 손을 놓았으나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묶인 나는 면사무소를 향해 내 발로 걷고 있었고 요시타는 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 ― 진즉 만주로 뛰쳐나가서 독립군이 되지못하고 결국은 이렇게 일본 노예로 끌려간단 말인가! 궁성요배를 거부하였고, 신사참배를 피하여 왔는데 하나님은 그 일본의 신 아마테라스의 편을 드신단 말인가!
내가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이래, 단 1주일도 빼먹은 일 없이 주일학교를 꼬박 다녔는데 하나님은 나를 우상의 나라요, 온 세계 인종들을 도살하고 있는 살인마의 노예로 넘겨주신다는 말인가!
면의 숙직실에는 이미 5. 6명이 잡혀와 있었고 그 중에는 동네의 승국이도 끼어 있었다. 유승국은 나보다 네 살이 위였으나 입학을 늦게 하였기에 학교는 2년 선배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왼 그는 계모 밀에서 자랐으며. 아직 소학교에 다니고 있는 배다른 동생이 둘이나 있다.
아버지는 한학을 조금했다고 하나 농촌에 살면서 농사일을 하지 않는 반건달이라서 승국이가 그 집 머슴처럼 혼자서 모든 가사 일을 꾸려나가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이복동생들의 편을 들어 승국이 에게 자주 매질을 하곤 했다.
나는 그 승국이하고 눈 마주치자 고개를 힘없이 끄덕여 인사했다.
‘이제 너희 집 논은 묵어 나자빠지고 식구들은 굶어 죽게 되겠구나!…………'
마음속으로 가련한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요시타는 어디 가서 또 1명을 잡아끌고 왔다.
면의 젊은이를 거의 다 공출해버린 요시타는 요즈음 낚을 고기가 바닥이 난 상태라서 매우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또 2명이 잡혀 와서 9명으로 늘었다.
그때 어머니가 문밖에서 기웃거리시기에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다가갔다. 얼마나 우셨는지 눈언저리가 벌게지셨다. 문밖 의 쪽마루 양편으로 면서기 2명이 신을 신은 채 걸터앉아 우리를 지키고 있는데, 어머니의 안중에는 그들이 보이지도 않는 듯 쪽마루로 바짝 다가서셨다. 붉게 충혈된 눈 밑으로 눈물이 빗물 흐르듯 하염없이...... 가슴이 메이고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하시다가 겨우 말문을 여시었다.
“건민아! 이것 ......”
가늘고 떨리는 어머니의 목소리!
터져 나오려는 흐느낌을 목안으로 삼키는 음성이었다. 어머니의 손이 내 손에 쥐어 주신 것은 접고 접힌 10원짜리 2장이었다.
“어떻게든 도망쳐 오너라! 돌아오면 꼭 경성으로 보내, 공부 시켜줄께……”
수비꾼들은 어머니의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담담한 표정으로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주신 20원!
이 돈은 우리 집 형편으로는 큰 돈이다. 월급이 높다는 학교 선생이 조선인은 20원에서 25원이고 일본인은 25원에서 30원이라고 한다.
이 돈을 그새 어떻게 마련해 오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감격과 설움이 밀물처럼 차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어머니... 너무 걱정하시지 마셔요. 꼭 돌아올게요...”
집안일에 대해 더 말을 하려고 하였지만 울음이 터져 나오려 해서 그만 두었다.
이 땅에서 노무공출로 끌려간 사람은 많아도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3년이 되고 4년이 넘었어도 오늘날까지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그저 살아있다는 편지만 있어도 가족들은 한숨 돌리며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기한 없는 강제노동과 영양실조. 질병, 위험한 현장사고 등으로 무수히 죽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리고 나약한 자식이 그 생지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마음!
그 마음은 심장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아픔일 것이다 드디어 군청에서 보내온 낡은 도락코(트럭)가 도착하였다. 앞대가리가 뾰족이 뻗어 나온 이 차는 각 시장 바닥을 누비며 잡아먹을 짐승을 모아 도살장으로 실어 나르듯, 잡아들인 노예들을 실어 나르는 짐차였다.
잠시 후 요시타의 지시에 따라 우리 일행은 도락코에 올라탔고 스타칭을 돌려 발동이 걸리자 마후라에서 검은 연기를 내 뿜으며 저질유 타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내가 태어난 고향을, 아니 이날까지 단 하루도 어머니의 곁을 떠나 본 일이 없는 어린 내가 다시 돌아 올 기약 없는 길을 떠난다 생각하니 뜨거운 눈물이 봇물 터진 듯 쏟아졌다.
어머니 역시 평평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려 하지도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 계셨고, 어느 어머니는 아예 땅에 풀썩 주저앉아 두 다리를 뻗고 땅바닥을 치면서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우리를 먼저 승차시키고 사무실에 들려나온 요시타가 뛰어 오르면서 출발하라고 외쳤다.
그때 동생 철호와 경희가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채 학교에 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를 발견하고는 두리번거리다 자동차 위의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뛰어와 울부짖었다.
“혀엉....”
“오빠아...”
도락코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지르며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혀엉....”
“오빠아...”
동생들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울부짖었고 어머니는 허리 굽혀 동생들을 와락 부둥켜안으며 끊임없는 눈물을 흘리셨다.
낡은 차는 먼지를 일으키며 점점 속력이 빨라지고, 동생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자꾸만 멀어져 가고 있었다.
차라리 먼지를 많이 일으켜 잡혀가는 내 모습이 안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동구에서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멀리 서 있는 여인 한사람이 보였다.
‘형하고 형수다!’
형이 마구 달려 나오면서 나팔 손을 대고 무어라 고함을 지른다. 그러나 요란스런 엔진소리 때문에 아무소리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혀엉! 혀-ㅇ.....!
나는 미친 사람처럼 목이 터져라 형을 불렀다.
“조용해 !"
요시타가 호통 쳤다. 넘어질 듯 달려오던 형은 말뚝처럼 우뚝 서 버렸고, 훨씬 뒤에서 행주치마를 걷어 올려 눈물 닦고 있는 형수의 모습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모습도, 형과 형수의 모습도 모두 자동차의 먼지구름으로 가리어지고 말았다.
형은 달리는 자동차를 향해 뭐라고 그토록 고함을 쳤을까?
서 달라는 말이었을까?……… 들에서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형이, 내 대신으로 자신이 가겠다는 것이었을까?…… 그 것은 안 될 말. 형은 이제 신혼인데……'
넋을 잃고 그 생각에 빠져 있다가 눈을 들어보니 벌써 차는 상안리의 산모퉁이를 돌아 뿌연 먼지 연막을 일으키며 봉화산 기슭인 돌팍재를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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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은 분들은 일본의 만행을 아마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 육사출신으로 일본 천황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했던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켜 권력을 틀어쥐자 일본 극우주의자들은 무릎을 치고 쾌재를 불렀다한다.
그리고는 덜컥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근거로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재산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해버리고 만다.
무상 3억 달러와 차관 2억 달러라는 헐값도 아닌 똥값으로 말이다.
일본놈들은 이것으로 모든 책임은 다 했다고 손을 털어버릴 뿐만 아니라 지들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라고 생색까지 내고 있다.
거기다 뉴라이튼가 뭔가 하는 모리배들은 맞장구를 치고 있고!
나는 이번 대법원의 판결을 사필귀정이라 생각한다.
국가가 정신대 할머니들이나 강제징용자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지들 이해관계 때문에 졸속으로 협정을 조인해놓고 그걸 따르라고 힘으로 누른다면 그 분들은 피눈물 날 일이 아니겠는가!
정부차원에서 그랬다 하더라도 민간부분에서 그 분들의 피해에 대한 합당한 보상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만행에 대한 잘못을 인정 하라는 것이다.
요즘 가만히 보면 친일무리들이 속속들이 커밍아웃하고 있다. 다음 선거에서 확실하게 표로 응징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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