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사색

바그너의 꿈, 현실이 되다

작곡가 지성호 2019. 8. 21. 16:50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위대한 업적

 

2005년의 일이니 벌써 오래전 이야기가 되겠다.

그해 924() 에서 29()까지 나흘 동안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됨으로 우리사회에 여러 가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의 보도를 보면 <니벨룽의 반지> 우리나라에서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처음 공연된다는 점이 크게 부각됐다.  때문에 일본인들도 예매행렬에 뛰어들었던 모양이다. 저널리즘의 생리가 처음이니, 최고니, 하면서 본질보다 겉치레를 좋아하긴 하나 지금까지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무대에 올린 나라는 정말 몇 나라뿐인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바이로이트 축제기간 빼고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통으로 매일 볼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쉽지 않다

조선일보를 보면  “도전! 18시간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라는 제목으로 이 공연으로 야기되는 여러 기이한 현상들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국내  대장정 오페라로 ‘지그프리트’ ‘신들의 황혼 5시간이 넘게 이어진다때문에  공연을 보려는 사람들이 ‘체력 단련에서 ‘시간 안배’, ‘예습까지 하는 유례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공연은 오후 5시에 시작 11시가  되어서야 끝난다무대 장치를 바꾸느라 50분짜리휴식시간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세종문화회관 주변 식당들도 ‘김밥 특수 노리고 있다극장  삿뽀로우동집 주인 이명호씨는 “김밥과 초밥  즉시 가져갈  있는 음식을 평소보다 30% 이상 준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을 위해 한국에 오는 출연진과 스태프만 300명이 넘는다역대 ‘오페라 내한 공연’ 사상 최다 인력이다. 13 이르는 무대 장치는 대형 컨테이너 13개에 담아   걸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배로 수송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 34명에 이르는 데다 이들의 혈연·친족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관련 서적을 통해 ‘예습을 하거나, 어떤 음악 칼럼니스트는 이들의 혈연·친족관계를 계보도로 정리해 주변에 나눠주기도 한다는 대목도 눈에 띈다. 각 신문의 문화면만을 본다면 바그너가 바라던 대로 우리나라 국민들이 바그너 예술작품의 종이 되었거나 바그너 성전의 종교적 회중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이 공연이 있은 후 15년 만인 201811월 한국의 한 프로덕션이 <니벨룽의 반지> 1부인 라인의 황금으로 막을 올렸다. 1부를 시작으로 3년 동안 반지 4부작을 완료한다는 대단한 의욕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벌써 2부 조차 여러 가지 이유로 순항하지 못하고 연기되면서 완주 가능성에 짙은 먹구름이 낀 셈이다. 편당 제작비가 30억 원씩 모두 120억 원이 들어간다니 그 제작비 마련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와 같이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는 여느 오페라와 같이 의욕만 가지고는 안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선 하드웨어적 측면에서 우리나라에는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공연할 극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니벨룽의 반지> 관현악 편성을 보면 발퀴레의 경우


<발퀴레> 관현악 편성

현악기 : 5

12 바이올린 각 16, 비올라 12, 첼로 12, 더블베이스 8

목관 : 플루트 3, 피콜로 1

오보 3, 잉글리쉬 호른 1

클라리넷 3, 베이스 클라리넷 1

바순 3, 콘트라바순 1

금관 : 호른 8

트럼펫 3, 베이스 트럼펫 1

테너-베이스 트럼본 3, 더블베이스 트럼본 1테너 튜바 2, 베이스 튜바 2, 콘트라베이스 튜바(일명 바그너 튜바’)1

하프 6

팀파니 4

트라이앵글, 테너 드럼, 글로켄슈필, 심벌즈


현악기만 64명이고 목관16, 금관 21, 하프6, 팀파니 4에 기타 타악기 주자들을 더하면 무려 115명 정도의 연주자가 필요하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이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도 이러한 대 편성의 오케스트라가 들어갈 피트가 없다. 필자의 오페라를 공연할 때 보니까 50명도 들어갈 수 없는 면적이다. 10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2019)에서 국립오페라단이 바그너의 <발퀴레> 1막과 <파르지팔> 2막을 무대 장치와 연기 없이 오페라 콘체르탄테형식으로 공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다 이 때문이다. 설령 바그너가 원하는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들어갈 수 있는 피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나라의 극장 구조로는 이 엄청난 음장감의 오케스트라를 뚫고 가수의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가수에게 마이크와 같은 증폭장치를 쓰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뮤지컬과 다르게 오페라는 어떠한 기계적 증폭장치도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바그너의 악극을 올리기 위해서 굳이 이런 큰 면적의 오케스트라 피트를 만들 이유도 없어 보인다.

두 번째로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한선율과 고음과 저음의 극단을 넘나드는 바그너 악극의 특성은 웬만한 기량의 성악가들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만큼, 가수들의 선택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바그너의 무대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오케스트라, 무엇보다 거대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금관악기군의 소리를 뚫고 나와야한다. 이 때문에 바그너 무대에서 노래하는 테너를 헬덴테너 (Heldentenor)라고 별칭 한다. 우리말로 '영웅적인 테너' 정도가 될 터인데 이들의 존재는 그만큼 특별하다. 바그너 테너들은 유난히 긴 프레이징과 무겁고 장엄한 음색으로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들이 지향하는 소리와 대비되는 게, 이탈리아 테너들은 밝고 고운 색감과 무엇보다 빛나는 하이c 에 유난히 집착한다. 니체티의 <연대의 딸>이나, 푸치니의 <라 보엠>의 아리아에서 좀 과장하자면 가수의 성패는 하이c에서 결정 난다. 비단 가수뿐만 아니라 청중도 시원스럽게 내뿜는 하이C를 가슴 두근거리며 기대한다. 로시니 오페라 <윌리엄텔>에서 아르놀트가 부르는 아리아는 하이C’22번 불러야 할 정도다. 그러나 헬덴테너가 바그너 악극에서 내는 최고음이라야 기껏 a음 정도이다. 그러니까 고음 잘나는 바리톤과 같이 중저음에서 충실하고 풍부한 소리를 낼 수 있는 테너가 헬덴테너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바그너는 왜 하이c를 배제했을까? 아리아 중심의 이탈리아 오페라와 같이 가수들의 고음 자랑 질을 배제하고 전체의 극을 살리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바그너 가수들이 갖춰야 할 자격요건은 격음이 많은 독일어와 고대 게르만 시문학의 특징인 두운(Stabreim)을 제대로 표현해야 하는 딕션의 문제도 있다. 귀 밝은 바그너리언들은 가수의 발음이 조금만 어긋나도 사정없이 야유를 보낸다. 또한 바그너의 악극에는 심오하고 난해한 이념들과 심리적 요소들로 바그너 전문 가수가 아니라면 그 접근과 몰입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까다로운 요구조건 때문에 헬덴테너의 숫자는 시대를 불문하고 극소수에 불과했다.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에서 동양인 최초로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던 사무엘 윤이 한 말이다. “바그너 오페라는 악보만 봐서는 안 된다. 근본적 테마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거의 한달 동안 수도원 수녀처럼 공부했다고 말하고 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Bayreuth Festspielhaus opera house)

 

돈키호테는 말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그런 면에서 바그너는 또 다른 돈키호테이다. 바그너는 이룰 수 없는 꿈을 현실화 한 사람이고 이루질 수 없는 사랑을 쟁취한 사람이며 숱한 적들의 비난과 방해를 극복하고서 저 하늘의 별을 딴 사람이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은 1848년부터 대본을 쓰기 시작해서 라인의 황금(Rheingold:1851~1854, 초연 18699), 발퀴레( Walküre:1851~1856, 초연 18706), 지그프리트(Siegfried:1851~1871, 초연 18768), 마지막으로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1869~1874, 초연 18768)에 이르기까지 바그너가 26년 동안 각고의 노력과 집념으로 완성한 대 역작이다. 바그너는 자신의 거대한 꿈을 오선지위에 설계하면서 이 작품을 실제화 하는 특별한 전용 극장을 구상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꿈으로만 그칠 일을, 바그너는 자신의 열렬한 신봉자인 바이에른 국왕 루드비히 2세를 만나면서 현실로 바꾸어 놓았다. 바이에른의 정치인들은 바그너를 위해 국가의 재정을 탕진하는 왕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바그너는 왕을 현혹시켜 국가적 재난을 불러오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언론도 앞장서서 떠들어댔다. 숱한 방해와 난관을 딛고서야 비로소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지을 수가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은 기어이 하고야 마는 바그너는 비난이 두려워 주저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바그너의 애정행각이 비난받는 이유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줬다는데 있다. 원래 불륜의 속성이 그런다 하더라도 바그너의 경우는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평생 빚에 허덕이는 바그너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베젠동크는 은인 중에 은인이었다. 그런 베젠동크에게 바그너는 그의 부인 마틸데의 마음을 빼앗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부인 민나와 멀어지는 계기도 이 일이 결정적이었다. 압권은 제자의 부인인 코지마와의 결혼이다. 코지마는 리스트의 딸이고 자신의 신봉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부인이었다. 지휘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한스를 말할 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치욕이 존경하는 스승에게 부인을 빼앗긴 지휘자라는 것이다. 바그너는 한스의 영웅이자 우상이었다. “바그너 음악의 가장 탁월한 해석으로 그의 충실한 지휘봉이라고 일컫는 바그너리언 1세대였다. 그런 제자에게 모욕과 고통을 주고 둘이는 끝내 결혼을 강행하고야만다. 바그너로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쟁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고통을 딛고 선 잔인한 일이었다.

스스로 비범하다고 자고(自高)했던 바그너는 자신의 강점이 문학과 음악을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판단했고, 그 판단은 옳았다. 음악가로만 한정한다면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능가할 수 없겠지만 음악을 문학화한다면 이것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의 독보적 영역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바그너는 언어적 기능이 결여된 음악을 라이트모티브를 도입하여 극복했으며, 두운이나 무한선율과 같은 수단으로 말하기와 노래의 통일, 극적인 부분과 음악의 통일을 통해 모든 예술이 분리되기 이전의 무지케, 즉 총체예술을 구현했고 이 예술을 올곧게 펼칠 수 있는 전용극장을 꿈꿨다. 이 꿈의 실현이 바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다.




                    리하르트 바그너 페스트슈필하우스 Richart Wagner Festspielhaus

 

매년 7월말부터 한 달 동안, 인구 7만 정도 되는 독일의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에서는 독일 최고의 문화 이벤트인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음악제가 개최된다. 바그너가 이 소도시에 축제극장을 짓기로 낙점한 이유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대도시의 번잡함을 떠나 오로지 음악에만 전념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도시에서는 한 바탕 교통전쟁을 치러야만 극장에 입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충동질하고 자극하는 온갖 현란한 엔터테인먼트들로 사유의 넉넉함이 실종된 곳이다. 그러나 바이로이트는 우리나라 군청소재지처럼 웬만하면 걸어 다닐 수 있는 한적하고 차분한 곳이다. 바그너는 이 때문에 바이로이트는 내 생애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니체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로 흡족해 했다. 나중에 바그너는 극장 파사드에 광기가 잠들다라는 뜻의 반프리트라는 글을 새기고, 왼쪽 창문 위에는 여기서 몽환과 평안을 찾다’(Hier wo meine wahnene freiden fand)라는 글을 새겨 넣어 어떤 의도로 이 터에 극장을 세웠는지를 밝히고 있다.

바이로이트는 리하르트 바그너’, ‘코지마 리스트’, ‘마이스터징어와 같은 도로 이름은 물론, 호텔이나 상점이름도 라인의 황금호텔, ‘파르지팔약국과 같이 다 바그너와 관련되어 있어 바그너시라고도 불린다. 예술이 고부가가치 산업이 된다는 예로 바이로이트 축제를 첫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바그너 브랜드가 주는 엄청난 혜택은 이 도시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바그너공원 언덕에 우뚝 자리 잡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전 세계 바그너리언들의 성소이다. 축제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린 세계 각국의 신심 깊은 바그너리언들은 몇 년씩 기다려 어렵사리 구한 티켓을 들고 바그너 순례행렬에 숙연한 마음으로 참여한다. 이들은 마치 무슬림들이 메카를 순례하듯, 바그너 악극의 진면목을 보려면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이외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 생각은 페스티벌이 1876년에 시작된 이래 1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앙처럼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티켓을 구하는 과정도 예전에는 은밀히 유통되는 비의에 쌓여있었다.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이 공연을 보기 위해 7년이나 10년도 넘게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티켓을 구하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바그너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해야했고 회비를 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이러한 배타적 폐쇄성 때문에 비난과 원성이 높아지자 총감독 카타리나 바그너는 자신이 연출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대형스크린을 통해 시내 공공장소에서 생중계함으로 바이로이트축제의 배타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런 때문인지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2012년 축제부터 각국의 바그너 협회에 표를 분배하는 방식은 중단되었고 개인이 직접 온라인을 통해서도 예매신청을 할 수 있게 제도가 바뀌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적어도 1년 전에는 예매신청을 해야 하고 말 그대로 신청이기 때문에 추첨절차에 의해 낙점 되어야 티켓구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참고로 바그너협회는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을 짓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아파트나 콘도처럼 회원권을 선 분양해 건축비를 조달하려는 바그너의 고육책으로 1873년 조직되었다. 현재는 국제바그너협회’(Der RWVI)산하에 147개의 협회가 결성되었고, 한국바그너협회는 19939월 창립되었다.



                                          국제 바그너협회 로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명성이 자자하여 세계도처에서 관광객들이 모여드니 극장의 건축물이 장려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로맹 롤랑은 문화시설이라기보다는 공장 같다고 말한바와 같이 그저 수수하고 평범하다. 스트라빈스키 같은 이는 음울한 시체 소각장같다고 신날하게 폄하기도 하였다.


  


외양으로만 보면 무슨 우체국이나 기차역사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극장을 짓는 과정에서 건축비 마련이 여의치 않자 바그너는 할 수 없이 값싼 건축 자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로 긴축했냐하면 같은 시기에 지어진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하우스와 비교할 때 건축비용이 7분에 1에 불과했을 정도다. 호화로운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의 계단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찬양한 히틀러는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보이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한다. 그러나 무대와 음향에 관련된 설비에는 경비를 아끼지 않았다. 바그너가 원하는 건 어떡하면 가수의 노래와 오케스트라가 잘 균형을 이루고 특히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잘 배합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음악평론가 자격으로 다섯 차례 바이로이트를 방문했던 버나드 쇼는 음향효과를 얻기 위한 바그너의 조치를 혁명적 발상이라하며 높이 평가했다. 우리가 버나드 쇼하면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촌철살인의 에피타프를 남긴 사람으로 기억하지만 그는 만능인이었다. 소설가나 극작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평론가로 <니벨룽의 반지>에 대한 해설서를 쓰기도 한 사람이다.

외화보다 내실을 추구했던 바이로이트 극장을 보면 바그너에 대한 생각이 좀 복잡해지는 게 사실이다. 바그너는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평생을 빚에 쫒긴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리가에서 빚에 몰려 야반도주를 했을 때도 사실은 사치스런 생활방식 때문이기보다는 공연에 욕심을 부려 그랬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바그너가 음악을 위해서는 물불 안 가리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짓는 과정도 루드비히2세나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권력자를 찾아다니며 읍소하는 것은 물론, 돈이 되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던 바그너이. 결국 반지 초연이 끝나고 막대한 빚을 지기도 했다. 목수가 나무 한 도막이 부족하면 자기 집의 대들보라도 허물어서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서 아주 사소한 것 까지도 오로지 예술만이 법과 잣대가 되어야 한다.” 는 바그너의 말이 오버랩 된다.

이와 같이 세계최고라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위상은 무슨 건물의 크기나 화려한 장식 때문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바그너 콘텐츠의 소프트파워 때문이다. 해마다 페스티벌 기간 동안에 바그너 캐는(Wagner canon)이라 부르는 바그너 10개의 작품이 순번을 정해 공연에 오른다. 바그너를 추종하는 바그너리언들의 한결같은 헌신도 이 극장의 위상을 올리는데 중요한 자산이 된다.

이리하여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바그너리언 뿐만이 아니라 가수들에게도 성지가 되었다. 극장 측에서도 충분히 이를 의식하고 그만한 권위를 행사한다. 상종가를 자랑하는 콧대 높은 가수들의 위세도 바이로이트 극장에는 안 통한다. 제아무리 스타라 할지라도 출연료가 다른 가수들과 차별이 없다.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도밍고의 굴욕사건이었다. 1994년 도밍고가 LA의 그 유명한 월드컵콘서트 빅 쓰리 테너 공연 때문에 파르지팔 리허설에 며칠 늦겠다고 극장 측에 알려오자 총감독 볼프강이 단칼에 잘라버린 일이다. 이때도 도밍고의 개런티는 다른 가수와 차이가 없었다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다를 바 없다. 이 극장은 전속 단원을 따로 두지 않는다. 페스티벌 기간 동안 유럽 각 지역에서 활동 중인 단원들을 선발해서 한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김민 교수도 여기에 30년 넘게 단원으로 출연하고 있다. 출연료는 당연히 모든 단원이 차등 없이 동일하다. 그 내용을 보면 왕복 차비와 숙박비, 식대 등 필요 경비이지 개런티라고 할 만한 액수는 아니란다. 제작자나 출연자 모두 바이로이트축제 공연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 일생일대의 명예로 여기고 이 고된 연주활동에 기꺼이 헌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이 말하는 바이로이트 정신이다.

 

극장의 구조

 

바그너는 최적의 음향효과를 얻기 위해 건물 전체를 목재를 사용했다. 극장의 공간자체를 악기처럼 생각했다는 말이다. 목재는 탄성계수나 밀도가 금속과 콘크리트보다 크기 때문에 그 소리의 결이 아름다워 오케스트라에서 사용하는 악기는 대부분 나무로 되어있다. 물론 1974석의 의자와 바닥도 다 목재이다. 특이한 것이 이 극장의 객석은 가로나 세로나 어느 쪽으로도 통로가 없다. 의자의 경우는 팔걸이도 없는 딱딱한 의자가 옆으로 50석이나 죽 연결되어있어 한 사람이 나가기 위해서는 그 줄에 앉은 모든 사람이 일어서야 하는 구조다. 그러니 공연 중간에 나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한다. 그런가하면 악기 상태에 영향을 주고 소음을 야기하는 냉방시스템이 없어 아무리 더워도 참고 견뎌야한다. 문제는 삼복지절에 열리는 페스티벌에 여자들은 모두 드레스를 입고 남자들도 턱시도나 연미복 같은 정장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입장과 동시에 땀을 흘리며 더위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바지만 입는 것으로 유명한 메르켈 독일 총리조차도 이 극장에서는 이브닝드레스를 입는다 한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4-6시간을 앉아 있다 보면 가끔 실신하는 사람도 나오는 모양이다. 언젠가는 71세 노인이 신들의 황혼을 관람하던 도중, 더위에 지쳐 사망하는 일도 발생했다한다. 이런 황망한 사건은 오히려 바이로이트 축제에 새로운 신화를 덧입혀주는, 그러니까 요즘말로 한다면 일종의 노이즈마케팅으로 작용한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객석 좌석

 

유럽의 오페라 극장은 물론, 우리나라 극장의 객석은 무대와 가까울수록 고개를 들어야 무대를 볼 수 있는 구조다. 또한 객석과 무대사이에 오케스트라가 배치되어 있어서 관객의 시선이 무대에 집중되지 않을 뿐더러 가수들의 노래 소리가 객석에 잘 전달되지 않는 폐단이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고려하여 바그너는 무대에서 볼 때 관람석을 부채모양으로 펼치고, 경사를 두어 뒤로 갈수록 좌석이 높아지는 구조로 만들어 앞사람 뒤통수 때문에 시선이 방해받을 일도 없을뿐더러 좌석 어디서나 무대를 바라보는데 지장이 없도록 했다. 더불어 오페라극장에 있기 마련인 박스석과 발코니석을 없애 신분이나 빈부차이에 따라 좌석으로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 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공연실황 삽화. 객석에 중간 통로가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조치는 오케스트라 피트를 무대아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게 하여 마치 스피커의 인클로저와 같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관객은 오케스트라나 지휘자를 전혀 볼 수 없고 오로지 무대에만 집중하게 된다. 독안에 든 형태인 오케스트라 공간은 계단식으로 아래를 향해 경사가 있으므로 맨 아래에 위치하는 관악기와 타악기 주자들은 지휘자를 볼 수 있으나 지휘자는 이들을 볼 수 없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라 지휘자는 무대상황을 전혀 알 수 없다. 오로지 음악만을 연주할 뿐이고 이 음악을 통해 모든 상황이 통제되는 구조다. 그러니 경험 없는 지휘자는 이러한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잠수 헬멧을 쓰지 않고 수심 150피트의 물속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한다. 이것은 가수나 연주자도 다 마찬가지이다. 요즘 같으면 모니터를 통해 무대의 가수와 지휘자간에 어떤 소통장치가 있을 법도 한데, 단편적으로 흘러나오는 소식을 보면 여전히 이런 시스템을 고집하는 것 같기도 해서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가지 이런 구조 안에서 좋은 점이 있다면 청중의 시선이 완전히 차단되기 때문에 연주 중 단원들 간의 연주활동과 소통이 자유로워지고 조명과 더위로 찜통 같은 오케스트라 피트 안에서 티셔츠와 청바지 같은 가벼운 평상복으로 연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각난 김에 하나를 더하자면 바그너 생전에 지휘자 헤르만 레비가 공연도중 너무 아파서 바그너에게 그야말로 바통 터치하고 물러났지만 시야가 가려진 청중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한다.

바그너가 이런 설계로 통해 얻고자하는 궁극의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일컬어 바그너 사운드라는 음향이다. 바그너가 원하는 음향은 각각의 악기 음색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르간 소리처럼 하나의 클러스터로 만들어내려고 했다. 악기 하나하나가 전체로 수렴되어 깊은 동굴처럼 풍부하고도 무게감 있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피트에 천장을 덮으면 직진성의 높은 피치는 날카로움이 억제되고 부드럽고 약한 소리가 나오는 반면에 저음악기군은 회절효과로 풍부한 음향을 얻게 된다.

바그너의 음향에 관한 구상은 아주 치밀하다.

특히 금관파트를 보면 음향에 관한 바그너의 집착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바그너는 각각 다른 음색을 갖는 금관부분이 4개의 완전한 군으로 구성되도록 시도했다. 호른군, 트럼펫군, 트럼본 군, 튜바군이다. 호른군은 8대로 운용되고 트럼펫은 베이스 트럼펫이, 트럼본에도 베이스 트럼본이, 튜바에도 마찬가지로 베이스 튜바가 부가됨으로 베이스 음역을 두텁게 하여 많은 배음효과를 얻도록 하고 있다. 바그너는 아예 바그너 튜바라는 악기를 고안하기도 한다. 바그너 튜바는 바이로이트 튜바(Bayreuth Tuba) 라고도 불리는데, 악기의 음색은 튜바보다 호른에 가까운 악기이다. 8대의 호른 중에서 제 5,6,7,8 호른은 악보의 지시에 따라 바그너 튜바로 바꾸어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 마우스피스가 같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중에 바그너 튜바는 안톤 브루크너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전수된다.

 

  

                                 위:튜바 아래: 바그너 튜바

 

바이로이트 음향설계의 놀라운 점은 이러한 대편성의 오케스트라가 포르티시모로 연주하더라도 피아니시모로 노래하는 가수의 노래를 압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나오는 음향은 지휘자 뒤편의 반사판에 반사되어 무대 쪽으로 들어간 후, 성악가들의 노래 소리와 섞이어 그 소리가 객석으로 전달된다. 당구의 쓰리쿠션을 연상하면 되겠다. 이렇게 되면 직접적인 소리가 아니라 반사를 통하여 한번 여과된 간접 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소리들이 잘 뒤섞인 결 좋은 음향을 얻을 수 있게 되고, 거대 오케스트라가 발산하는 두터운 음향이 가수의 노래를 압도하지 않고 객석으로 전달 될 수 있게 된다.

또한 오케스트라가 항아리 안에 갇혀있는 형국이기 때문에 어떤 불빛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극장의 객석도 완전한 소등을 하기 때문에 절대적 어둠속에서 청중의 시선은 오로지 무대로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

 

 

이러한 구조는 음악도 살리고 무대도 살리는, 진정한 종합예술을 펼칠 수 있는 바그너의 치밀한 궁리의 결과임에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이상과 같이 긴 설명 끝에 우리나라 공연장형편으로는 바그너의 악극이 왜 올리기가 어려운지 이해가 갔을 것으로 믿는다.

 

<니벨룽의 반지>4부는 줄거리가 연결된 장편 대하드라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작품은 그 안에서 저마다의 완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눠서 공연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세계도처의 공연현장은 그 어려움 때문에 4부 연작을 통으로 하기보다 나눠서 하는 게 실상이다.

<니벨룽의 반지> 줄거리의 출발은 라인 강의 처녀들이 지키던 황금 반지를 난쟁이 족이 훔쳐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이 황금반지는 절대 권력과 황금이라는 인간들의 욕망이 투사된 상징물이다. 반지를 갖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34명이나 되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반지를 놓고 각축을 벌이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자꾸만 바뀌는 반지 주인의 향방을 쫓아가는 게 <니벨룽의 반지>라는 대하 음악드라마를 보는 재미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온갖 주의와 사상과 종교와 근친상간, 모성집착과 같은 심리적 요인들까지, 인간군상의 만화경을 펼치는 까닭에 때로는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위에서 잠작이 가겠지만 내용이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난마와 같이 얽히고설킨 줄거리를 일목요연하게 압축해서 설명할 재간이 필자에겐 도무지 없다. 오로지 모르는 것에 대한 탐구심으로 기어이 알고자하는 독자들의 몫일뿐이다. 결론만 말하면, 이들이 결국 저주를 받아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이 다루기 힘든 거대 서사들을 가능한 모든 예술, 즉 시와 음악, 무용, 연극 등의 재료를 가지고 잘 버무려 총체예술로 승화시킨 바그너의 역량은 위대하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26년 동안의 긴 세월동안 바그너가 심혈을 기울인 필생의 집념은 그 스스로 이를 감당할 비범한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그너는 이 콘셉에 오페라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내키지 않아했다. 오페라라는 형식의 그릇으로는 담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그너가 원한 이름은 무대축제극이었다. 이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바그너는 갖은 비난을 무릅쓰고 돈을 끌어들였고 극장을 만들었으며 결국은 무대에 올렸다. 그의 인간적 결점들 앞에 너그러워지는 부분이다. 1876, 우여곡절 끝에 극장이 바이로이트에 실체를 드러내면서 그해 6월부터 <니벨룽의 반지>도 착착 연습이 진행됐다. 86일부터 9일 까지 열린 드레스리허설에는 루트비히 2세도 참석한다. 그는 주위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극장을 짓는데 결정적인 재정을 후원했었다. 그러나 바그너가 코지마와 불륜관계임을 알게 된 후 8년 동안 소원했던 그가 이 세기적 역작에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던지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와 리허설 전 과정을 보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고는 편지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적어 바그너에게 보냈다. “그대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실패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루드비히 2세의 말처럼 이 엄청난 일을 바그너는 해낸 것이다. 바그너는 자기 예술의 승리자가 됨으로 그가 그렇게도 원하던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의 전범(典範)이 된 것이다.

드디어 1876813일 바그너의, 바그너에 의한, 바그너를 위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극장의 역사적 개막공연이 열린다.

이래서 1876년은 바이로이트 축제의 원년이 된다. 이 역사적 현장에 빌헬름 1세 황제와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니체 등, 당내 내로라하는 저명인사들이 모두 참석했다.

바그너는 이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황제와 모든 왕들이 처음으로 예술가에게 찾아온 역사적 순간이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측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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