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사색

여행에의 초대

작곡가 지성호 2019. 9. 23. 16:17

뒤파르크

뒤파르크는 열 몇 곡이라는 책 한권 분량도 안 되는 가곡으로 음악사에 이름을 올린 진기한 기록의 보유자이다

필자가 정확히 몇 곡이라고 특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가 20세부터 15년 동안 작곡한 가곡이 13곡이고, 사전(辭典)에 따라선 22(1870)에 작곡한 5곡을 추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뒤파르크는 작곡에 한참 물이 오를 37살에 절필을 하고는 스위스 남서부의 인구 1만이 조금 넘는 라 뚜르--필즈(La Tour-de-Peilz)로 잠적해 버린다

그곳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48년 동안 단 하나의 작품도 쓰지 못하는 기나긴 불모의 생을 보내고야만다

말하고 보니 뒤파르크가 가곡 열 몇 곡 만 작곡한 것 같이 읽혀지나 실제로는 500여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한 사람이다

작곡생활 17년 동안에 500곡이라면 결코 적은 양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곡을 다 폐기시키고 현재 약 40여곡만 남아있다

그 폐기의 이유는 지나치게 엄격한 자기검열의 결과 때문이다

완벽해야한다는 강박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완벽의 기준이라는 것이 무슨 고정된 레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그 허들이 높아진다는 데 문제가 발생한다.

작곡을 할 당시에는 분명히 이만하면 됐다는 판단 때문에 최후의 종지와 함께 겹세로줄을 그은 것일 터인데, 나중에 들여다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어 가차 없이 찢어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갖은 정성으로 빚어낸 멀쩡하게만 보이는 도자기를 자기만이 아는 미세한 흠결 때문에 망치로 산산 조각내는 장인과 다를 바 없겠다

뒤파르크의 이러한 강박은 신경쇠약(Neurasthenia)으로 진단되는데 신경쇠약의 결과로 이런 강박이 왔다기보다 오히려 강박의 결과가 이런 병증으로 왔다는 생각이 든다

작곡이라는 게 고도의 정신활동이고 거기에 따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곡이 잘 풀려나갈 때는 쓰는 재미가 오지지만 반드시 나타나는 난관의 장벽 앞에서 망연자실, 무뎌진 상상력의 촉수를 한탄하며 맴돌이가 시작되면 편두통과 불면과 식욕부진에 눈은 충혈 되고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온 몸에 가시가 돋기 마련이다.

초야에 숨어 그림그리기로 병을 다스리던 뒤파르크는 결국 세기의 전환점인 1900년에 들어서서 실명을 하고야만다

그림조차 그릴 수 없는 맹인의 몸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을 견뎌내야 했던 참으로 비극적인 삶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완벽주의의 극단에서 가차 없는 폐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뒤파르크의 가곡들은 단박에 프랑스 가곡의 수준을 독일의 가곡과 비견되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즈 브 에트레 뮈! (Je veux être ému!).

우리말로 나는 감동받기를 원해!” 정도로 번역되는 모양이다

작곡하는 사람 뒤파르크의 창작이념이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뒤파르크의 노래에서 사막을 걷는 무미건조함이나 진부함은 상극일 수밖에 없다

프랑스 언어가 갖는 어감(語感)과 잘 조응하는 뒤파르크의 선율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 추구하는 궁극의 것처럼 직접적이지 않고 어슴푸레한 뉘앙스이다. 격정조차도 무작정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절제와 격조를 잃지 않는다

그러니 안개 속을 걷듯 몽환적이면서도 무한한 동경과 애수를 자아낸다. 프랑스적인 에스프리가 아닐 수 없다.

살아남은 곡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곡은 슬픈 노래(Chanson Triste, 1868)’여행에의 초대(L'Invitation au voyage, 1870)’이다.




앙리 뒤파르크(Henri Duparc, 1848~1933)


 여행에의 초대


어떤 사람들은 여행에의 초대란 말이 일본어투 이기 때문에 여행을 권유함으로 고쳐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니 당연히 고쳐야 하겠지만 여행을 권유함이 주는 시적 뉘앙스 없는 딱딱한 어감 때문에 이 또한 마땅치 않아 망설이다가 그냥 필자에게 길들여진 여행에의 초대란 말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다른 좋은 대안이 떠오를 때 까지.

필자가 대학 다닐 때 불문과 학과장님이 필자를 어찌 알고 찾아오셨다.

이미 고인이 되신 유제식 교수님이시다.

선생께서 대학축제기간에 불문학의 향연이라는 행사를 기획 중인데 음악전공자들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하셨다. 그분은 대학공동체와 지역사회에 천재학자로 유명세를 치르시는 분인데도 애송이 학생인 필자에게 깍듯이 존대를 하심으로 필자를 몸 둘 바 모르게 하셨고 못하겠다는 말씀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게 하셨다.


1970년대엔 우리나라 성악 계에 프랑스 예술가곡이 생소할 때였다.

그분의 고매한 인문학적 식견위에 똬리를 튼 음악적 지식은 그야말로 천의무봉의 신세계였다.

그분은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드뷔시, 포레를 비롯한 많은 프랑스 작곡가들의 귀한 자료와 악보를 제공해 주심으로 필자가 프랑스 음악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입문할 수 있게 해 주셨고 그 때문에 결국은 석사논문도 드뷔시로 쓰게 되었다.

그때는 필자가 아직 공부가 짧아 3도 화성체계를 벗어나지 못한 때였으니 인상주의 음악어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관련된 곡을 실내악으로 편곡하는 만용을 부렸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독일고전음악에서 접할 수 없었던 인상주의의 신비로운 화성과 프랑스적 에스프리에 매료되는 시간이기도 했었다.

그때 필자에게 가장 감동을 준 음악이 바로 뒤파르크의 여행에의 초대였다.

행사는 불문과 남녀 학생이 한 스탠자씩 교대로 불어와 번역시 낭송을 마치면 음악과 학생이 노래를 부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보기 드문 격조 높은 행사였다고 학내의 반응이 뜨거웠었다.

그때 불문과 교수님들이나 학생들의 비음 섞인 렝비 따숑 오 부와야즤는 비전공자가 도저히 흉내 내기조차 버거운 발음이었지만 그 발음 안에 샤넬 NO. 5'의 향과 미라보 다리 아래로 흐르는 세느 강의 풍경이 어른거렸었다.

완벽주의자 뒤파르크는 작곡을 하기 위한 시를 고르는데도 무척 까다롭게 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시인들의 시 가운데서도 정수박이만 골라내 곡을 붙였다.

르콘드 드 리르(Leconte de Lisle),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 장 라오르(Jean Lahor),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괴테 등의 시가 그것이다.                                    


여행에의 초대는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Les Fleurs du Mal,1857)’ 에 수록된 같은 제목의 시에 곡을 붙인 곡이다.

또한 이 제목은 베버의 무도회의 권유(Carl Maria Von Weber Invitation à la Valse)’에서 차용된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Les Fleurs du Mal,1857)


시집 악의 꽃이 풍기는 데카당한 이미지처럼, 보들레르가 추구하는 미적 태도는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기괴하다(Le beau est toujours bizarre)’는 말에 함축돼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악마적 광기가 번뜩인다고 말하여진다.

이 때문에 대문호 빅톨 위고는 "보들레르는 '새로운 전율'을 만들어 냈다."라고 극찬한다.

그러나 이러한 극찬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그 외설성으로 인해 떠들썩한 필화사건을 일으켜 300 프랑의 벌금형과, 문제되는 시 여섯 편을 삭제당하는 판결을 받는다.

이러한 파란에도 불구하고 보들레르는 현대시의 비조로 자리매김 된다.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선생께서는 그의 악의 꽃평석에서 보들레르를 이렇게 정리해주셨다.


오늘의 세계는 일종의 문학적 시금석으로서, 보들레르에 대한 반응의 여하에 따라 그 나라의 시문학의 성격이 판단될 수도 있으리라는 견해마저 가능한 것이다. 각국의 문학은 이 시인을 공통 지대로 하여 그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를테면 신호를 교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마저도 가능해지는 것이며 그의 시세계는 이렇듯 오늘의 세계문학 속에서 세계성의 거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시를 쓸 즈음 보들레르는 일곱 살 아래의 연극배우 마리 도부렁(Marie Daubrun)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말하자면 이 시는 도부렁의 청록빛 아름다운 눈동자에 사로잡힌 보들레르가 시의 형식을 빌려 사랑을 구애하는 일종의 연애편지인 셈이다.

시의 도입은 사랑에 빠진 여인을 사랑하는 아무개여가 아닌 아가야, 누나야 (Mon enfant, ma sœur)” 로 호칭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상을 가족 구성원인 아가누나로 대치함으로 스스럼없이 상대에게 접근한다.

이를 선생께서는 정신적으로 숭고해진 사랑의 개념을 믿게 해주는데다가, 참 연인들을 가까워지게 하고, 결합시켜주는 영혼의 가족성, 본성의 동일성을 표시해 준다고 풀이해 주셨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는 교묘한 접근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선생께서 번역하신 여행에의 초대전문이다.

  

                 여행에의 초대

                                           보들레르


아가야, 누나야

꿈꾸어 보렴

거기 가 같이 사는 호젓함을!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으리

그대 닮은 그 나라에서!

그 흐린 하늘의 젖은 태양은

내 마음엔 그지없이 신비로운 매력

눈물 속에서 반짝거리는

믿지 못할 그대 눈 모양

거기엔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

호사와 고요 그리고 쾌락.

 

세월에 닦여

반들거리는 가구들이

우리네 방을 치장도 하리

은은한 호박의 향기에

제 향내 배어드는

진기한 꽃들이며 호사로운 천장.

그윽한 거울

동양의 현란한 영화 이 모두가

거기서 속삭이리

마음속에 은밀히

다정스러운 저희네 고향 말로.

 

거기엔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

호사와 고요, 그리고 쾌락.

 

보라! 저 운하 위 잠든 배들을

떠돌이의 기분 풍기누나

하찮은 그대 소망 채워주고자

세계의 끝에서 모여드누나

저무는 해는

들판과 운하와 온 도시를

보라와 금빛으로 물들이고

누리는 고이

훈훈한 빛 속에서 잠드누나

 

거기엔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

호사와 고요, 그리고 쾌락.

                                    (유제식 역)

 

보들레르는 도브렁과 함께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고 호사와 고요, 그리고 쾌락이 있는 유토피아로 떠나고 싶다는 유혹이 시 전편을 출렁이고 있다.

이 유토피아는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는 유럽 사람들에게 동방의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치와 행복의 나라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도브렁과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고 싶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백 앞에서 누군들 거절할 수 있으리!

상징주의 시인답게 시에는 어떤 직접적인 유혹도 욕망도 고양이의 발톱처럼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사랑하는 여인과 여행을 떠나 더불어 누리고자하는 호사로운 쾌락과 관능이 저릿저릿 감각의 세포를 감전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보들레르는 잡다한 변설을 웅변으로 고함치는 것이 아니라 뽈 베를레느가 그의 작시법에서 말한 불명함과 명확함이 뒤섞인 어렴풋한 노래로 은연중 심중을 드러낸다.


                                          마리 도부렁(Marie Daubrun)



사실 보들레르의 영원한 사랑이자 고통은 갈색의 혼혈 여인 잔느 뒤발(Jeanne Duval, 1820~1862)이었다.

보들레르는 뒤발 앞에 어쩔 수없이 되돌아오는 유령으로 평생을 낚시에 낚인 물고기마냥 달아나려고 퍼덕이지만 그럴수록 미늘은 몸속 깊숙이 파고든다.

아름답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뒤발이지만 보들레르가 말했듯 차갑게 꿰뚫는 눈빛으로 도발하는 나날이 신선한 교태는 시인에게 도저히 끊을 수 없는 마력일 뿐 속수무책이었다.

뒤발은 밀당이라는 사랑의 싸움터에서 능수능란한 수완으로 보들레르를 애태우며 조종하는 진정한 사랑의 고수였다.

시인은 낮이면 뒤발의 흉심을 낱낱이 간파하면서도 밤이면 무기력하게 무너지고야 말았다.

그러한 나날이 이어져 평생이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거액의 유산을 탕진하게 했지만 대신 뒤발은 보들레르에게 끝없는 몽상의 모티브를 공급해 주었다.

시를 준 것이다. ‘악의 꽃은 바로 뒤발이었다.

 

 잔느 뒤발(Jeanne Duval, 1820~1862)


보들레르가 도브렁에게 여행에의 초대를 한 것은 바로 애증이 교차하는 뒤발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원심력의 작용 이였으리라.

그런가하면 도브렁 역시 보들레르와 절친인 시인 방빌(Thedore Banville)과 동거 중이었다.

그렇다면 도브렁은 방빌을 내치고 보들레르의 여행에의 초대에응했을까? 겹으로 얽히고 얽힌 정사(情事)에서 고통스러울 때 여행이야말로 모든 것을 훌훌 떨쳐버리는 홀가분한 도피처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도브렁은 창녀출신 뒤발과는 근본부터 다른 여인이었다.

건강하고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 그녀로서는 보들레르를 사랑하면서도 방빌과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주저하면서 더 이상의 사랑으로 진척시키질 못하고 만다.

그런 가운데 보들레르는 도브렁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통해 가을의 노래(Chant d'Automne,1857)’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시를 얻게 된다

 가을이면 누구나 한번쯤 애송해보았을 그 유명한 시구는

 잘 가라, 이제 곧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

 너무 짧은 우리 여름의 찬란한 빛이여!”로 시작한다.

가브레엘 포레(Gabriel Fauré.1845-1924)는 이 시편에 곡을 붙이기도 한다.(Op. 5 No. 1)

보들레르는 여행에의 초대를 쓰고서 이 시에 마땅한 곡을 붙여주는 천재 작곡가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 역할을 자처한 작곡가가 뒤파르크이다.

뒤파르크는 원 시의 중간부분을 생략하고 2 절로 된 곡을 완성한 다음 자신의 아내가 될 맥스위니(Ellen MacSwinney)에게 헌정한다.

행복의 나라에서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고 싶다는 여행에의 초대는 보들레르에게는 실패로 귀결됐지만 뒤파르크에게는 성공을 가져다준다.

일 년 뒤인 1871119일 스코틀랜드에서 그녀와 결혼한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의 일이다

그러나 정작 이곡을 보들레르는 듣지 못한다

그가 사망한지 3년이 지나 작곡됐기 때문이다

만약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음악듣기)

https://youtu.be/Vwjzp1tNuKI


*이 글은 <클래식 음악과 사람의 무늬>라는 제목으로 집필중인 내용 중 일부를 맛보기로 올린 글입니다.

따라서 일체의 무단 복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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