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물렁 그이

작곡가 지성호 2020. 1. 29. 11:05

내 유년의 공간은 충청도 부여군 충화면 괸돌 마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괸돌이라 했으니 마을 입구에 고인돌이 떡하니 놓여있어 이 마을의 내력이 선사시대에까지 거슬러 닿아있는, 돌에 핀 이끼만큼이나 오래된 마을이기도 하다.


                      고향마을 입구의 괸돌


그렇다고 큰 강이 있다거나 큰 산도 없는, 무엇보다 넓은 들이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올망졸망한 산들이 첩첩한 산골마을이라서

부여 읍내나 장항과 같은 대처로 나가는 버스를 타려면 시오리를 걸어 홍산까지 걸어가야만 하는 궁박한 벽촌이었다.

내가 장담하거니와 이런 산골짜기 비탈의 천수답에 의지해서 근근이 부지하는 목숨은 아마도 고인돌이 들어 선 석기시대부터 이 땅이 점지한 숙명의 대물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가난과 결핍 속에서도 우리 삼촌들은 이 길을 매일 걸어 홍산의 중 고등학교를 다니셨다.

일찍이 선교사로부터 기독교의 틀 안에서 교육을 받으시고 기미년 만세운동을 하셨던 우리 신식 할머니의 남다른 교육열 때문일 것이다.


면소재지까지는 홍산서부터 신작로(新作路)가 놓여있지만 정기노선버스는 다니지 않고 어쩌다 제무시 도라꾸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갈라치면 코흘리개 우리들은 고무신을 두 손에 쥐고 미친 듯이 내달려 그 먼지 속에 뛰어들곤 했었다.

그럼에도 내 세계의 전부인 고향은 나에게 특별한 곳이었다.

계백장군이 어렸을 적 이 골짜기에서 무예를 연마했다는 해발 229미터의 노고산은 그 모양이 정상부근에서 꼬부라진 모양새라 마을사람들이 꼬부랑산이라 불렀고 부여 읍내에서도 이 산이 보이는 엄청 높은 산(?)이라서 마을 사람들이 뿌듯한 자부심으로 우러러보는 산이기도 했다.

어린 내 눈에는 스위스의 마터호른보다 더 위용 있고 엄연한 산이었다.

계백장군 신화는 신화로만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실로 그 근거가 고향땅에 팔충사로 남아있다.

 


괸돌 부근에 자리한 팔충사.

내 어릴 적에는 없었지만 장성하여 가보니 위의 모습으로 세워져 좀 뜬금없는 모습에 한 참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팔충사(八忠祠)는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 소재하며 향토유적 제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층사는 백제시대 삼충신인 계백, 흥수, 성충과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킨 복신, 도침 그리고 해오화상, 곡나진수, 억래복유의 백제 팔충신과 서기 6607월 황산벌에서 나라를 구하려 결사 항전한 백제 오천결사대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추석이나 설 때면 홍산농림고등학교에 다니는 삼촌이 내 발의 길이만큼 지푸라기를 잘라 거기에 맞는 때때 고무신을 사다주셨지만 굴곡진 발인지라 치수가 맞을 리 없어 번번이 크거나 작아도 나는 빨리 신고 싶은 욕심에 맞는다고 고집을 부려 식구들의 애를 먹이곤 했었다.

설에 사면 추석까지, 추석에 사면 설까지 신어야 했기 때문에 조금은 넉넉한 치수를 사야하는데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했다.

오일 장날이 홍산에 서는 오후가 되면 잿정지 고개에서 바라보이는 아득한 길에는 저마다 장짐을 이거나 지고 오는 행렬이 줄을 이었고 이때쯤이면 동네 아이들은 마음이 달떠 멀리까지 장 마중을 나서곤 했다.

나도 새 고무신을 신고 이 무리에 합류해 걷다보면 그만 발뒤꿈치가 까져 할 수 없이 신발을 두 손에 들고 어린 살을 파고드는 자갈길을 맨발로 조심스럽게 걸어야만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석양빛을 안고 걸어오시는 할머니의 보퉁이에 들어있는 눈깔사탕이나 박하사탕의 그 뿌리칠 수 없는 달달한 유혹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옛날이야기를 들추어내는 것은 림수진 교수의 페북 글 때문에 도발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꼰대가 되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므햐아~~"

 

"그지져~~"

 

더불어,, 어려서 사시던 고향 부여에서

당신 별명이 "물렁그이"셨다하는 교수님 생각이 납니다.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렷다!

이쯤 되니 내어렸을 적 별명이 왜 물렁 그이라 불리게 됐는지 꼼짝없이 그 내력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림교수의 나머지 글은 우러나오는 글맛이 푹 삶은 시래기 된장국 보다 더 구수하여 다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테레비를 보자허니,,

충청남도 부여에서

70년을 서로가 아껴가며 살아오신

야든 일곱살 할머니와 아흔 두 살 할아버지가 나오시는데,,

화면에

할머니가 부엌에서 꽃게탕을 끓이셨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부엌으로 오시면서 물으셨다.

"므햐아~~"

그러니 할머니가 답하셨다.

"그지져어~~"

,,

꽃게탕을 끓이다,, 라는,, 그 말이,,

충청도 부여에선,,

"그지져어~~"

느른허니 그렇게 부드럽게 늘어지니 ,,

오늘 딱히 할 일도 없는 토요일 하루 왼종일

내 입에도

"그지져어~~" 그 말이 착착 앵기며 달라 붙는다.

이건,, 예술이다.

     

고향마을에는 신작로를 따라 내가 흘렀고 흐르다 고인 웅덩이는 여름날 철없는 것들의 물놀이 장소였다.

천방지축 빨가벗은 어린 것들은 쑥을 비벼 귀를 막고 물에 뛰어들었으며 가끔 물뱀에 쫓겨 아우성과 함께 허겁지겁 도망치기도 했다. 정신없이 놀다가도 간간이 물가로 나와 엉덩이를 서로에게 까 보이며 혹시나 거머리가 붙었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내가 물장구치며 개헤엄을 배운 이 개천이 완만히 흐르며 넓어지는 곳에는 대나무나 싸리나무로 엮은 게 발이 가로질러 놓여 있었고 밤이 되면 관솔불을 밝혀 참게들을 통발로 유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잡힌 참게의 집게다리는 울퉁불퉁 털로 뒤덮여 억세게 생겼고, 만약 물리기라도 한다면 손가락이라도 잘려나갈 것 같은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게는 포획된 분노를 입에서 거품을 방울방울 내뱉으며 품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한 참게만 잡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 흐물흐물 물렁물렁한 참게가 그 빈약하고 허깨비같이 가벼운 모습으로 통발 주변에 버려지거나 떠내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연체동물과 같이 물렁거리는 게를 물렁 그이라 불렀다.

(그이는 게의 충청도 식 사투리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적엔 뼈가 가늘고 물렁 살이었다.

그런 나를 고모님이 물렁 그이라 불렀고 그것이 그대로 내 별명이 되고 말았다.

물렁 그이... 어쩌면 나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어 보인다.

근육질로 단단하게 알차거나 다져지지 못하고 흐물흐물 한없이 물렁물렁한 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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